빌립보서 강해2021. 12. 12. 16:51
반응형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기독교의 고전 가운데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었다고 알려진 책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지요.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해석자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해석자가 한 번은 크리스천을 매이 넓은 객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나도 지저분하고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는 방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 그 객실에 들어서자 옆에 있던 해석자가 하인을 불러 청소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방을 쓸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이 깨끗해지기는커녕 바닥에 가득했던 먼지가 일어나 크리스천은 거의 질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해석자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크리스천이 들어가 보았던 넓은 객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마음이지요. 객실에 먼지가 가득하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온갖 죄악과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마음이라는 넓은 방에 가득한 먼지와 더러운 것을 청소하기 위해 빗자루로 쓸어냈던 하인의 이름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빗자루질을 했습니다. 율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율법으로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금지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있던 죄악과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가득히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존 번연을 『천로역정』에서 묘사했던 것입니다. 


먼지가 가득한 마음

빌립보서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이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부르는 하나의 별칭이 ‘기쁨의 서신’입니다. 기쁨의 서신답게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바는 단지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의 삶에는 기쁜 일도 일어나지만 슬프고 짜증 나고 괴로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누군가를 향해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항상 기뻐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더 화를 내고 더 짜증을 내고 더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거든요. 마치 분노라는 먼저, 짜증이라는 먼저, 증오라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방을 깨끗이 하겠다고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는 율법이라는 여종의 행동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옆에서 권면한다고, 혹은 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조절해보겠다고 하여 생각처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계속 이어지는 본문 5절은 관용을 권면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본문 5절도 자세히 보시면 ‘모든’이라는 단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처럼, 본문 6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네요. 우리 주변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요. 작은 것 하나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보아도 지나치게 자신의 것만 챙기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도 우리의 마음이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요? 성경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명령하셨으니, 저 사람에게도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면 우리의 불편한 마음이 변하여 관용의 마음으로 바뀔까요?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천로역정』을 썼던 존 번연의 비유로 돌아가 보죠. 우리 마음에 이기심이라는 먼지가 가득하고 욕심이라는 먼지가 가득한데 그 마음을 깨끗이 치워보겠다고 아무리 비질을 하여도 욕심과 이기심의 마음이 먼지처럼 가득 일어날 뿐 나의 마음은 관용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기쁨과 관용의 비결

그러면 성도들에게 기쁨을 명령하고, 관용을 명령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다시 4절과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너무도 중요한 표현이 4절과 5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이 구절의 가장 처음 나오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면, 주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좋은 음식을 먹고 즐거운 활동을 할 때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 마음이 즐겁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재산이 들어나고 내가 소유한 것이 풍부해지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그러한 기쁨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반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으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재산이 허무하게 사라져 궁핍해지면 마음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그러한 모든 조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만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었는데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 안에서, 그도 그러한 주님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관용에 대해 권면하는 본문 5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고요?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뒤에 무엇이라고 덧붙입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근거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때, 내가 지금 아웅다웅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보일까요? 본문 5절에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말씀은 또 한편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시는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나의 삶에 펼치실 놀라운 역사가 찾아오게 될 것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조그마한 유익에 뭐 그리 집착할 이유가 있겠냐고요. 그러므로 본문 5절이 말씀하는 관용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펼치실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관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관용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보다는 짜증, 불평, 분노의 먼지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관용보다는 이기심, 탐욕, 욕심이라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기뻐하라, 관용을 알게하라는 명령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관용이 가득 차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힘을 써서 내 마음에 비질을 하게 되면 오히려 짜증, 불평, 분노의 먼지가 일어나게 돼요. 오히려 이기심, 탐욕, 욕심이라는 먼지가 내 마음을 더욱 채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의 마음을 기쁨과 관용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 평강

바울은 성도들이 그 마음에 품어야 하는 덕목을 두 가지 제시하였지요. 곧 기쁨과 관용입니다. 이제 본문 6절로 넘어오면 성도들이 그 마음에서 경계해야 하는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염려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절) 

여기에 기도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네요.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가 등장해요. “다만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다음,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구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먼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기 바라는 것, 곧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 6절이 기도에 대해 권면했다면, 바로 다음 절인 7절에는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 등장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겠지요. 실제로 본문 7절에는 기도의 응답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내가 원하는 바,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 

오늘 본문이 약속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화평이 기도 응답의 내용입니다. 7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응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베풀어 주시는 평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평강이야말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기도의 응답, 혹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평강”이 등장하는 장면을 복음서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거의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이제 유월절 식사를 마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시지만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신 것과 그들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어려운 질문으로 공격을 해와도 제자들은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 풍랑이 이는 바다를 항해해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 그들을 따라왔던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도 주님께서 다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제자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고통의 무게는 그만큼 크고 무거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남겨둔 채 그들을 떠나야 하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없이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약속을 한 가지 해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a)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율법이 우리의 마음을 강제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에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충만한 평강이 흘러넘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은 매울 넓은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도 지저분하고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율법이라는 하인이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방을 쓸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방은 깨끗해지기는커녕 바닥에 가득했던 먼지가 일어날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서 그 방에 물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 안에 가득했던 먼지가 가라앉았고 그 소녀는 방을 말끔히 청소할 수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방에 물을 뿌려 온갖 더러운 먼지를 말끔히 치워버린 소녀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변 사람에게 기쁨이나 관용과 같은 마음의 덕목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마음에 먼지만 일으킬 뿐이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쥐어짜서 기쁨이나 관용의 감정을 일으키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먼지만 일어납니다. 그 대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베풀어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은혜가 뿌려질 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은혜가 뿌려질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흘러 넘칠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11026125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0 “존 번연”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blog.naver.com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21. 12. 5. 17:37
반응형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지요.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서신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편지를 보낸 바울과 편지를 받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애틋하고 정서적으로 깊은 교류가 있었던 교회를 꼽으라면 빌립보 교회가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그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가 되었으니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소중한 교회이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많은 교회 가운데 빌립보 교회가 그의 마음에 특별하게 각인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다녔지요. 그때마다 바울을 물질로 도움을 주었던 교회는 오직 한 곳 빌립보교회였거든요. 바울은 기본적으로 자비량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 자신이 스스로 일하여 수업을 얻었고, 그것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진행하였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한 곳,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다른 선교지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에 빌립보 교회에 대한 더욱 깊은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서는 바울의 다른 어떤 서신들보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감정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 1장을 통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정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 두 가지는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곧 감사와 확신입니다.

 

 

바울의 감사

 

자, 첫번째로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은 감사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절)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그의 처지와 상황은 마냥 감사하고 마냥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얼마나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지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빌립보서에 따라다니는 별명이 있지요? 그것은 옥중서신이라는 명칭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가 있었던 곳은 감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이제 교회 안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바울이 참으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라면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화위복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왜 바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고통을 당하며 더 괴로운 현실에 빠지느냐고. 아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니 바울이 이처럼 감옥에 갇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 아니겠느냐고. 어쩐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던데 바울에게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바울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빌립보서를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이 편지 안에는 바울의 기쁨도 들어 있지만 바울의 슬픔, 곧 바울의 눈물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의 대목이 빌립보서 3장에 등장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기서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닙니다. 철저한 슬픔의 눈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8) 그러니 지금 바울의 처지는 마냥 기뻐하고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그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가득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감사, 그 실체가 본문 5절에 등장합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5절)

 

바울이 크게 기뻐하고 감사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복음에 참여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기쁨과 감사의 이유는 복음에 참여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표현하는 기쁨의 참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넘어 이제는 복음을 위한 일, 곧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참여하는 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도 큰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풍성한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있다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7절)

 

오늘도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 옛날 바울의 마음에 가득 찼던 그 기쁨과 그 감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상황을 보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할 때도 많지요. ‘내가 지금도 눈물로 말한다’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 우리도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놀라운 은혜만큼은 날마다 누리십시오. 나아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 감사와 그 은혜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기쁨과 감사의 샘물이 날마다 풍성히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확신

 

빌립보서 1장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울의 감정, 그 첫번째는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의 마음은 두 번째 감정인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절)

 

바로 앞의 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로 넘어오면 갑자기 주어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 6절에서 주어는 누구입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라고 되어 있네요. 이분이 누구이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장면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의 시간을 들여 봉사하였습니다. 내가 나의 물질을 들여 봉사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고, 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의 주체는 실상 누구라는 말씀일까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바울은 그 마음에 큰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의 이 확신은 사실 빌립보교회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통한 확신이었습니다. 자,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바울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라는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충돌이 일어나더니 결국에는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또한, 1차전도여행의 중심지였던 아시아 지역을 2차전도여행에서도 다시 방문하는 것이 바울의 처음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해서 바울이 가려고 하는 길이 계속 막히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고 묘사합니다(16:6-7). 그러니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처음에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빌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치며 주인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바라보며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오히려 선한 일을 한 바울을 고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빌립보 도시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하게 매질을 하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어디 그 뿐인지 아세요? 바울에게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었던 관리들이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한 행동으로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바울에게 제발 이 성 빌립보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쫓겨나듯 빌립보를 나와야 했어요. 여기까지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2차전도여행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 놀랍지요. 바울이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바로 그날 밤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쫓겨나듯 빌립보 성을 떠나왔지만 간수장과 그의 가족, 그리고 강가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었던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을 시작으로 빌립보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할 때 오직 그 빌립보 교회만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지원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은 분명히 깨달았지요. 빌립보에서 자신의 사역은 완벽한 실패였지만, 빌립보에서 자신의 사역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교회들 안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펼치고 계십니다. 코로나의 상황으로 한국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무엇보다 교회학교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의 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과 같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가 맞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확신만큼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우리는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확신이지요. 그리고 본문이 말씀하는 감사와 확신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거나, 바울과 같이 위대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본문이 이야기하는 감사와 확신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 가운데 그러한 감사와 확신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노래하는 바울의 감사와 확신은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인 바울 자신을 향한 감사와 확신이 아닙니다. 본문이 이야기하는 감사와 확신은 바울이 아닌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감사와 확신이었어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울을 따라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함께 김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행한 일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한 것뿐이에요.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자신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겠지요. 그들은 저 멀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리자, 있는 자리에서 바울을 위해 기도했겠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선교헌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통해 행하실 일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울과 같이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처럼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가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등의 고난을 감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로 동참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가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와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는 업을지라도 오늘 나의 삶을 통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확신이 가득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18. 11. 13. 07:30
반응형

오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선교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천국에서의 잔치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14:b) 그 사람의 발언은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표현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하늘의 식탁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시죠.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잔치 시간이 되어 종들이 사람들을 찾아가 시간이 되었다고 이제 잔치에 참여하자고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절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기에 그곳을 보러 가야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에 소를 시험해보러 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인간들은 말로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좋겠냐고, 하늘의 식탁을 사모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의 식탁과 이 땅의 일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가는 일 등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하늘의 식탁이 아니라 이 땅의 것들 것 선택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자신을 따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6-27)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식탁을 사모합니다. 하늘의 식탁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통과한 뒤에 펼쳐지는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서 조그마한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기독교고전의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성도들이 십자가의 길로 나오라고 이렇게 권면합니다.

 

어찌하여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첩경이 될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으며,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십자가 안에 하늘 나라의 축복과 기쁨이 숨겨져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 안에서 우리 마음의 힘을 얻을 수 있고, 영혼의 환희를 찾을 수 있으며, 십자가 안에서 높고 훌륭한 미덕과 거룩함의 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그 어느 곳에도 영혼의 구원과 영생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십시오.”[1]

 

십자가는 고난과 다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겪는 역경과 아픔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십자가는 아닙니다. 아니, 고난 가운데 극히 작은 경우만 십자가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겪는 수많은 고난 가운데 주님을 위한 고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은 당하신 것이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선교사님들의 고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선교지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요,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선교사님들이 당하는 고난은 곧 그분들이 지고가는 십자가입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그리고 선교지를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까? 나 자신을 위한 고난이나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고난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긴급하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지만 이 시간만큼이라도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나 자신의 기도제목을 잠시 뒤로하고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2, 3-5.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18. 11. 12. 07:30
반응형

오늘의 주제는 성육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지요. 세상의 많은 철학과 종교가 있지만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는 매우 독특한 사상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극단까지 몰아갈지라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은 생각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바로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많은 선교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선교 원리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주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언급합니다. 성육신의 특징은 오는 것가는 것의 차이입니다. 많은 전도와 많은 선교가 오는 것을 그 목표로 합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출석하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를 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옮겨올 수 있을까를 질문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마케팅의 방법론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많은 기업이 상품을 홍보하는 것처럼 교회도 광고를 만들고 전단지를 뿌리면서 교회를 알리고 홍보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이벤트를 기획합니다. 대형집회를 준비하고 유명한 강사를 섭외합니다. 참여하는 분들을 위해 많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을 데려오는 일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의 원리는 성육신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찾아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저 하늘에 계시면서 인간에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육신의 원리는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을 찾아 나서셨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에게도 성육신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이곳에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선교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선교사님으로부터 선교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마음이 선교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언급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예수원을 창설하셨던 대천덕 신부님께서 <나와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성육신에 대해 서술한 대목이 있습니다.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자기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많은데,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을 생각하여 그분을 본받기 원한다면 나도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미국 사람이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되면 교만한 태도를 드러내지 말고 한국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그를 통하여 예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과 사귈 때도 자기를 낮추고 비워서 공부 못 한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도 자비가 있는데 이 단어의 헬라어 본뜻은남의 입장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로 우리 인간의 입장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은 친히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공동체생활을 하든지 일반 교회생활을 하든지 자비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상대방의 입장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성육신의 마음이 자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형편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이끌리는 것. 그리하여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의 위로를 건네고, 그의 손을 잡아주고, 나의 주머니를 열어 한끼의 식사라도 대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한다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이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선교사님 한 분 한 분의 사정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입장에 들어가는 것. 선교지의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그들이 나에게 올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내가 마음으로부터 선교지를 찾아가는 것.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웃는 자비의 마음.

 

오늘도 선교사님들과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할 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18. 3. 27. 07:30
반응형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관계는 여러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바울과 빌립보교회와 관계는 교회의 개척자였지요. 빌립보라는 지역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시작하였고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나아가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양육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목회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라는 지역을 방문하거나 일정한 기간 그곳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가 빌립보교회의 개척자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바울은 빌립보에서 멀러 떠나 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죠. 빌립보교회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바울을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선교비를 보내주는 등 후방에서 바울의 선교를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있을 때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관계는 선교사와 후원교회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바울이 빌립보에 머물 때는 교회의 개척자요 목회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있을 때는 선교사와 후원 교회의 관계입니다.

 

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두 가지의 경우를 모두 이야기하고 있지요.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향해 개척자나 목회자로 있든 아니면 선교사로 있든 상관없이 빌립보교회를 향해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죠.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27b-28a)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한마음을 품고 복음의 신앙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 비록 대적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믿음을 시험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나아간다는 소식을 바울은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좋은 사람은 만나고 싶고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했던 교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멀리 떠나게 된다면 우리 마음에는 아쉬움이 찾아옵니다. 언젠가 제가 교육전도사로 있던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을 때 어느 장로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 정들었던 사람을 떠나 보내는 훈련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믿음의 공동체에 정들었던 교우를 떠나 보내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님들 중에는 선교지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정을 쌓았다가 선교지로 떠나신 분들도 계시지요. 때로는 선교사님이 한국을 방문하거나 교회 성도들이 단기선교로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님들과 교제를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모이는 것이 큰 기쁨과 행복이 되지만 더 많은 기간 서로 떨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중보기도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달에 한번, 함께 모여 선교지에 대한 정보도 교환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그러나 모임이 마치면 모두 흩어져서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일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있을 때에나 떠나 있을 때에나 상관 없이 우리 모두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사님들을 파송한 교회,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교회는 선교사님으로부터 복음의 신앙을 위한 선한 싸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선교지에서부터 들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선교사였던 바울은 후원 교회인 빌립보교회로부터 동일한 승리의 소식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28a). 복음의 신앙을 위한 선한 싸움은 선교지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열심히 복음의 신앙을 위해 힘쓰는 소식이 들려오고, 후원교회에서는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힘쓴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함께 있으나 떠나 있으나 함께 동역하는 우리의 선한 싸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번 달도 함께 모인 이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해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의 신앙을 위한 싸움입니다.

이 자리에서 흩어져 있을 때에도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자리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한 선한 싸움입니다.

주일이 지나고 평일이 되어 여러분이 가정으로 돌아가고 직장으로 돌아가서는 그곳에서 복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의하여 최선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교지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쓰는 선교사님들의 소식으로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 후원교회의 성도들 역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한 마음으로 협력한다는 소식으로 선교사님들도 함께 기뻐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18. 2. 20. 07:30
반응형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신을 물질적으로 후원한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디도라는 분을 통해 바울에게 선교 헌금을 전달하였고, 바울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성도들의 진심 어린 기도와 성도들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며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는 빌립보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사와 기쁨을 전달하는 것 외에도 자신의 편지를 통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신앙적인 권면도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권면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오늘 본문 7절에 등장하는 구절이 될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7a)

 

사도요, 전도자요, 선교사로서 세계 구석구석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던 바울의 마음에는 자신을 후원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선교 사역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교회로부터 좋은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것은 선교사로서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힘이 되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기도하는 선교사님들도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 같습니다.

 

선교사로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경비를 파송 교회가 지원하는 것도 큰 기쁨일 것입니다. 선교사로서 짧은 시간이라도 동역할 수 있는 협력자를 후원 교회가 파송하는 것도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파송 교회, 혹은 후원 교회가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조금씩 잃어버린다면 그것만큼 선교사로서 큰 상실감도 없겠지요.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 간절히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우리말 성경은 생활하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조금 독특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굳이 이 단어를 소개한다면 폴리튜오마이입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시민으로 살아가다인데 당시 문화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작은 도시가 곧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도시 국가라고 부르지요. 그러므로 시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였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 역시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고 빌립보는 로마를 어찌나 빼어 닮았던지 제 2의 로마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특권이 무엇인지, 동시에 로마의 시민에게는 어떠한 의무가 주어지는지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로마 시민권자였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생활하다는 단어가 아니라 시민으로 살아가다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죠.[1]

 

폴리튜오마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권면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으로 당당하게 생활하라입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 중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자들은 매사에 당당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복음이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라입니다. 당시 시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특권이었습니다. 동시에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습니다.[2]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복음이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도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함께 모여 선교사님들과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값진 사명입니다. 그러나 선교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 ,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을 실천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아름답고 선교사님들에게도 든든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정훈택, “ 1:19~30: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믿음”, <빌립보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123.

[2] Gerald F. Hawthorne, <빌립보서>, trans. 채천석, vol 43 of WBC, (서울: 솔로몬, 1999), 150.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18. 1. 15. 07:30
반응형

오늘 본문은 선교사 바울이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삶과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삶과 일반적인 의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삶과 사도 바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21절에 사는 것그리고 죽는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죠. 계속해서 22절에 육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23절에서 세상을 떠나서라는 표현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24절에서 육신으로 있는 것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번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 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지요.[1] 어떤 분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고 빌립보서가 사도바울이 죽음을 앞둔 어느 시점에 기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오히려 빌립보서는 바울의 초기 서신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오늘 본문에서 이토록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까요?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의 형편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22)

 

육신으로 사는 것, 사도 바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여기에서 내 일의 열매라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의 열매를 말합니다. ‘내가 육신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선교 사역에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달려가는 바울은 자신이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유혹에 대해서도 말하지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3)

 

선교의 열매는 감사하지만, 선교사로서 그 과정에서 겪는 아픔이 너무도 커서 사도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 세상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하루 빨리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진솔한 고백입니다.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너무도 좋지만, 동시에 그 과정이 너무도 힘들기에 죽음을 통해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두 가지 마음. 이것이 선교사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이렇게 묘사하지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23a)

 

세계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의 마음이 꼭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선교사 바울의 마음과 같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떠났지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열매가 있기에 다시금 힘이 나지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너무도 힘들고, 너무도 힘에 겹기에 때로는 삶보다도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파송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선교사님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못하지만, 자신들을 지원하고 기도하는 파송교회에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선교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처절하게 고뇌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러할 때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후원은 기도입니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선교사 바울과 같이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괴로워하면서도 선교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 계실 선교사님들을 위해 올해에도 동일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는 결코 무기력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금 삶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4)

 

선교사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고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선교 사역이 가져다 주는 교회의 유익을 생각하며 다시금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입니다.[2] 그래서 다시 한번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이죠.

 

열방의 선교사님들은 얼마나 선교사 바울과 같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동일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선교사님들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아 주셔서 복음을 위한 선교 사역을 위해 다시금 달려갈 수 있도록 선교사님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1] 삶과 죽음의 주제를 번갈아 언급하는 수사법에 대해서는 김연태, <빌립보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121-122를 참고하라.

[2] 바울이 최종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Gerald F. Hawthorne, Philippians, trans. 채천석, vol 43 of WBC, (서울: 솔로몬, 1999), 121 참고하라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