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7.05.08 사도행전 25장 6-12절 "잠시 멈춤"
  2. 2017.02.25 사도행전 21장 1-14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사도행전 강해2017. 5. 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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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때로는 원치 않게 잠시 멈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지만 그 과정에는 피할 수 없는 잠시 멈춤의 과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Scene One #1. 성전 재건에서의 잠시 멈춤

 

유대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 유대 백성은 자유롭게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명령을 내립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싸인으로 알고 이미 정착하고 있었던 바벨론 땅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물론, 바벨론에서 그들은 포로의 신분이요 이방인의 자리였지만 나름대로 당대 최고의 문화를 누렸던 바벨론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정착을 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시 한 번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리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꿈과 비전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박차고 일어나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명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결코 쉽고 안전한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70년 전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모든 성읍과 성전과 성벽이 초토화된 이후, 그 누구도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나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폐허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하나님의 꿈과 비전, 곧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어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꼭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준비를 시작하자 그것을 방해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참으로 치밀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독립된 국가가 이룬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 건축을 방해하려는 이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지요.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성벽을 건축하려고 준비한다는 거짓 조서를 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하수에로 황제는 그들의 편지를 사실로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대인들의 모든 건축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시작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방해가 없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원치 않게 잠시 멈추는 사건, 잠시 멈춤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Scene One. #2. 다시 시작되는 성전 재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크게 낙심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명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가 그들입니다.

 

학개와 스그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올 때 가슴에 품었던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던 사람들이 베르시아의 황제에게 거짓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잖아요?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들이 건축하려는 것은 군사적 목적을 가진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이며, 이것은 이미 오래전 고레스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황제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죠. 드디어 답변이 도착했어요. 황제가 모든 일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전 건축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이 거짓이고, 유대인들의 설명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성전 건축은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고, 곧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잠시 멈추어야 할 상황, 잠시 방해를 받는 상황, 억울하게 누명을 써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Scene Two #1. 바울에게 닥친 잠시 멈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 사명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지요. 바울은 이와 같은 사명을 가슴에 품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서 큰 환란과 고난을 받을 것은 예상하였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고난을 당하고 매를 맞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위한 발걸음이 가로막혀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로마까지 가야 하는 바울의 발목을 붙잡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이지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규합해서 바울을 해치려고,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바울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바울을 보호하려고 하고. 예루살렘에 일대 소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예루살렘의 통치권이 유대인들에게 있지 않았지요. 그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예루살렘의 소동에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이 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잖아요. 그러므로 로마 시민이 공정한 재판도 없이 유대인 무리에 의해 피살당하도록 놓아 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재판을 합니다. 그는 바울을 한 편에 세우고 다른 한 편에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재판을 위해 양쪽의 의견을 듣지요. 그 결과 유대인들은 대단히 소리를 높여서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리 그들의 논리를 들어봐도 바울을 죽일 만한 구체적인 범죄 사실이 없는 거에요. 그저 시기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고발하지만, 증거도 없고 범죄 사실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을 그대로 석방하고 풀어줄 수도 없습니다. 만일 바울을 풀어준다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 결정에 불복하고 로마 제국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로마 군대의 천부장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에서 바울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로마 시민인 바울을 증거나 명확한 죄도 없이 처형할 수도 없으니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결국 로마 군대의 천부장은 바울에 대한 어떠한 판결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 곧 당시 유대 지역 전체를 통치하고 있었던 벨릭스 총독에게 이 사건을 넘깁니다.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들은 가이사랴라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천부장은 군대의 호위 속에서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냅니다. 물론, 바울을 죽이려고 그를 고소하고 고발했던 유대인들도 함께 가이사랴로 올가 갔지요. 그런데 유대 총독 벨릭스 역시 무엇이라고 딱히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이 처해있던 상황과 동일하지요. 유대인의 손을 들어주자니 로마 시민인 바울을 죄도 없이 처형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바울의 손을 들어주자니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을 향해 불만이 고조되면서 자신의 유대 지역 통치가 어려워 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벨릭스 총독 역시 이 재판의 판결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성경은 그 기간이 2년 이었다고 기록합니다. 2년 동안 바울은 재판을 받는 죄인의 신분, 그러나 유죄도 무죄도 판결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신분으로 그저 가이사랴에게 재판의 결과만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의 공백이 흐른 뒤 유대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뀝니다. 이제 새롭게 유대 땅을 다스리게 된 총독 베스도가 드디어 바울을 다시 한번 신문하고 재판을 하는 장면을 오늘 본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있는 25장과 바로 앞의 24장 사이에는 2년 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존재하고 있어요. , 바울의 마지막 사명을 위한 로마로 가는 길에 원치 않게 멈출 수 밖에 없었던 잠시 멈춤의 시간이었습니다.

 

2년 동안 사도, 바울의 전도하고 선교하는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멈출 수 밖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습니까? 사도 바울은 1, 2, 3차 전도여행으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조금 더 넓게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성령께서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신다는 그 말씀을 따라 복음의 역사가 쉼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에서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유대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주장으로 복음 전도의 길이 멈추어 버렸어요. ‘잠시 멈춤이지요.

 

 

Scene Two #2. 로마를 향한 발걸음

 

드디어 2년의 공백이 끝나 갈 때 쯤, 벨릭스의 뒤를 이어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베스도 총독이 사도 바울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이지요.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6)

 

재판은 재개하였지만 2년 전의 모습이 여전히 동일하게 전개됩니다. 먼저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이 이야기를 꺼내지요.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7)

 

그들의 주장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또 한가지 그들의 주장에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것 역시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바울 역시 계속해서 자신을 변호합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8)

 

어쩌면 2년 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치러지던 재판과 지금 베스도 총독이 주최하는 재판이 이와 같이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원고측인 유대인들의 주장과 자세도, 피고측인 바울의 주장과 자세도 모두가 2년 전과 동일합니다.

 

이제 베스도 총독이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2년 전과 동일하게 쉽게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 줄 수가 없어요. 더욱이 베스도는 이제 막 총독으로 부임을 했기에 유대인들의 입장을 더욱 무시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을 처벌하려니 증거도 없이 로마 시민을 사형시킬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베스도는 제 3의 길을 선택합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9)

 

베스도 총독은 지금 바울이 유죄 혹은 무죄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재판의 장소를 지금 이곳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재판을 하자는 것은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제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에 분명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바울은 죽여야 되겠어요. 그래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마 군대의 호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무력으로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요. 베스도 총독은 그와 같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통치 기반이 되어줄 유대인의 청을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이 지난 2년 동안 자신의 마음에 있었던 중대한 결심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 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0-11)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가이사 곧 로마의 황제 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로마 시민에게는 지역의 재판이 불공정하다고 생각될 때 황제가 있는 로마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로마를 향한 자신의 발걸음이 묶여 있을 때 마음에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비록 죄인의 신분이고, 비록 피고인의 신분이라도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로마로 가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그 다음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주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가이사께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노라

 

지난 2년 동안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었습니다.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지금 진행되는 재판이 하루 빨리 해결되기를 원했겠지요. 억울한 재판이니, 상대방의 공격이나 주장이 거짓이니, 유대인들이 자신을 모함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여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대로 안돼요. 자신을 재판하던 천부장은 재판을 미루고 미루다 유대 총독에게 미루어버렸어요. 당시 유대 총독으로 있던 벨릭스는 재판의 마지막 판결을 또다시 미루고 미루면서 자신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할 때까지도 2년 동안 판결을 안내려요. 그 모든 과정에서 바울은 결심을 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이 재판을 통해 풀리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죠. 자신의 죄인의 신분, 피고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여전히 피고인, 죄인의 신분으로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장에 품고 로마로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원치 않는 잠시 멈춤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경우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던 유대인들과 같이 용기를 내어 다시금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바울의 경우와 같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내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더욱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바울은 자신을 무고하게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공격을 그저 참아냅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자신의 억울함을 재판을 통해 풀어내는 일보다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명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잠시 멈춤의 상황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2)

 

지난 2년 동안 아무런 판결도 없었던 재판이 드디어 한 가지 판결을 내립니다. 재판의 장소를 로마로 옮겨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는다는 결정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분명한 사명과 꿈과 비전이 있는데, 원치 않는 일로 억울한 일로 계속해서 나의 발목이 붙잡혀 있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억울함을 푸는 일도 중요하지요. 내 앞에 놓인 과제를 하루 빨리 해결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러나 하루 이틀 사이에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가 달려왔던 전도의 일, 교회를 섬기는 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속상하지만, 억울하지만, 지금 당장 내 앞에 놓여 있는 과제를 잠시 뒤로 미루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위한 선택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로마로 가는 길, 곧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명을 성취하는 그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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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17. 2. 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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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단의 많은 목사님들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진학을 했기에 장신대에서 공부한 기간이 다른 목사님들에 조금 더 길어서 총 9년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 재학생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 있어서 20대 전체를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 동안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제 마음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장로회신학대학교도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해 지원을 받고 정해진 입시 절차를 밟게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신학교입니다. 목회자 후보생이 되기 위해 매년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하고 신학생에 되기 위해 정해진 입시 시험을 봅니다. 특별히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 과정을 지원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지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실은 매년 어김없이 학교 정원보다 적게는 두 세배, 많게는 네다섯배까지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압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에 지원한 학생들 가운데 오직 1/2 혹은 1/3, 아니 적게는 4/1 혹은 1/5 정도만 신학교에 합격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외의 학생들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것일까요? 신학교에 지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단 한 사람도 제외 없이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지원을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신다는 분명한 확신과 간증을 가지고 신학대학원 입시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였지만 그들이 다 합격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그들이 다 합격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원자의 숫자가 학교 정원의 몇배 이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저에게는 이 현상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모두가 기도하는 분들이었고, 모두가 주님의 일에 충성스러운 분들이었는데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이곳 저곳 헤매셨던 적은 없으신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왔다고 확신했는데, 그곳에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으신가요?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저지하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였던 에베소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의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발걸음은 사도 바울 개인의 인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여정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2022절에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0 22절은 바울이 에베소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고별설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20:2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행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이라고 분명한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렇게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잠시 두로라는 지역에 약 일주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약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바울은 두로라는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만나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합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 21:4)

 

두로라는 지역에 있었던 제자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말씀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어 볼까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도 바울에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성령의 뜻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두로 지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아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동일한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예루살렘을 가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성령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이곳 저곳 갈팡지팡하게 되지 않겠냐고요.

 

성령의 복합적인 마음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장면을 가만히 묵상을 해봤어요. 그러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떠오르더라고요.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두로 지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어떻게 해서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는 사도 바울도 모두 동일하신 성령 하나님의 그 넓은 마음을 일부분씩 대변하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볼까요? 여러분의 자녀가 이제 군대에 입대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곳에 가면 고생하는 것을 다 알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군대에 입대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래도 군대에 입대하라고, 군대를 다녀와야 더 성숙해진다고 격려하면서 아들의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자녀가 목표하는 바가 있어서 고시원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머니는 말리는 겁니다. 자녀가 큰 뜻을 품은 것은 알겠지만 홀로 외로움 속에서 밤낮 공부해야 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단한 지를 생각하면서 가급적이면 사랑하는 자녀가 그 고난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시원에 들어가려는 자녀를 말립니다. 그런데 한편에서 아버지는 격려는 합니다. 잘 생각했다고.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뜻을 이루어보라고. 아빠가 늘 기도하면서 힘이 되어 줄 테니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 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인가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서로 상충되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져 보다 넓고 보다 큰 부모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사도 바울을 바라보며 성령 하나님께서 동일한 마음을 품고 계셨다는 겁니다. 한편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가면 고생할텐데 고난이 있을 텐데 가급적 그 길을 피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성령 하나님의 그 마음을 두로에 살고 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도 있으신 거에요. 고난이 있지만, 아픔이 있지만 그래도 그 길이 복된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영광스로운 길이니 힘을 내어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격려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사도 바울이 품은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누가 뭐라 해도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살아 숨쉰다면 우리 가운데 의견의 불일치가 다 사라지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십시오.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성령의 충만을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 할지라도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무한하신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확신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내가 성령 하나님의 그 크신 생각과 마음을 모두 이해했다고 교만을 부릴 수 없습니다. 나아가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두로 지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첨예한 의견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의견만 들어보면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이 행한 행동을 보십시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21:5)

 

그들은 의견이 달랐습니다. 서로 상충하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헤어지기 전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합니다. 각자의 의견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지 않았을까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교회, 성령으로 살아 숨쉬는 교회는 의견의 충돌이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의견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만, 내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다른 성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간절히 구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교회. 바로 그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가보의 예언과 바울의 고집

 

사도 바울이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도 사도 바울은 두로에서 겪었던 일과 비슷한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빌립 집사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사도 바울을 향해 예언을 합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 21:10-11)

 

이렇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예언하니 그곳에 있던 모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 21:12)

 

빌립 집사님의 집에 함께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일하신 성령께서 주시는 분명한 마음을 선언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 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 21:13)

 

빌립 집사님의 가정에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주시는 분명한 확신과 소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뒤에 일어난 사건과 결과를 다 알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쉽게 답을 내리지만, 지금 21장에 등장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다시금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21:14)

 

가이사랴에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빌립 집사님을 비롯한 주님의 일꾼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그들이 기도 제목을 보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기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며 기도의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빌립 집사님의 가정에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견과 사도 바울의 의견이 충돌할 때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내가 알고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행하는 그 놀라운 역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충돌할 때가 많이 있어요. 아무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 나의 의견, 나의 뜻을 다 내려놓고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

 

제가 거의 10년 동안, 20대 전체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매년 입시철마다 학교가 정한 정원보다 훨씬더 많은 숫자의 지원자가 몰리는 현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경험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장신대를 졸업하고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저에게는 그 시절의 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머물면서 유학을 하는 동안 참으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저와 박사 과정을 입학도 같이 하고 졸업도 같이 하신 분이 계십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수업도 같이 참여하고 서로 좋은 교제를 나누었던 분이지요. 그분은 저보다 연배도 높았고, 사회 경험도 훨씬 많은 분이셨어요. 그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참 잘 준비된 목회자라는 생각을 그분과 교제하는 동안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참 귀한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는 분이었지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저와 그 목사님은 동일한 학위를 받았습니다. 같이 사진도 찍고 우리 가족과 그 목사님의 가족이 함께 기뻐하며 서로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미 한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식에 참여하고는 곧 한국으로 돌아와 교회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몇달 여유를 가지고 가족들과 한국으로 돌아와 목회지를 알아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앰블런스에 실려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뇌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계속해서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목사님은 별세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사건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보아도 그 사건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준비되고, 그렇게 균형 잡히고, 그렇게 기대할만한 목회자를 이처럼 기독교가 위기에 처해 있는 시대에 하나님은 왜 데려가셨을까요? 함께 공부했고, 함께 졸업했던 저와 비교해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저보다는 그 목사님이 더욱 잘 준비되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목사님을 치시고 저는 여전히 교회의 목회 현장에 놓아두시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어느 날 그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한 가지 깨달음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데려가신 장면을 통해 저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 부족한 저를 넘겨두시고 잘 준비된 그 목사님을 데려가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여전히 사역자로 세워주시고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는 것이 저의 자격이나 저의 노력이나 저의 자질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제가 기억하기를 원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그 목사님의 별세 소식은 제 마음을 한 동안 큰 아픔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하나님, 왜 저를 남겨두시고 그 분을 데려가셨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하십니까? 모든 것이 해석이 되십니까? 우리가 제 아무리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으로 살아 숨쉰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의견의 충돌도 일어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이곳 저곳을 해메이고 다닐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뜻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이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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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