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2. 7. 1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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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전도서의 주제는 전도서 1장부터 명백히 드러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허무주의자의 외침처럼 들리는 이 구절은 계속되는 예증을 통해 전도서의 분명한 주제로 자리 잡는다. 그러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전도서의 말씀을 거북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서를 읽으며 애써 “은혜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기에, 해 아래의 현세적인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강조하는 전도서의 전체 주제를 ‘영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전도서를 어떠한 관점으로 읽어야 할지 어려워하는 성도들에게 데이비드 깁슨은 그의 책 <인생, 전도서를 읽다>에서 명쾌한 대답을 내어 놓는다.

전도서의 간결한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곧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성취(gain)가 아니라 선물(gift)이다.(p. 51) [각주:1]

먼저, 삶은 성취가 아니다. 연약한 인간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내일의 성공을 위하여 오늘 수고해보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모든 것이 헛되다’(히브리어. 헤벨)고 반복하며 강조하는 전도서의 의도다. 삶은 성취가 아니기에, 곧 우리 인간은 그 무엇도 스스로 성취할 수 없기에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삶을 멈추라는 권면이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전도서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나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요소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것이 지혜요,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의 선물을 포기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데이비드 깁슨이 전도서의 주제로 제시한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라는 명제는 기독교의 복음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께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에게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성취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면 인간의 소망은 어디로부터 임하는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로부터 희망적인 전망이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다.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죄악으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기독교의 복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지만, 공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오늘의 수고만이 내일의 성취를 보장한다는 오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은 구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여 성취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 역시 성취가 아니라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전도서가 ‘헛되다’를 연발하며 성취의 가능성을 그토록 부정하였던 이유도 성취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선물이라는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삶이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야 비로소 선물로 주어진 오늘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밤낮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목적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성취’가 된다. 그러나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마치 헛된 바람을 잡기 위해 이미 나에게 주어진 선물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전도서는,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수고를 통해 성취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선물을 그대로 누리려고 애써보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상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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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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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하면 이렇다. 이 책의 역자인 이철민은 ‘gain’이라는 단어를 이 책 전반에서 ‘유익’ 혹은 ‘수익’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나는 ‘성취’라는 단어로 통일성 있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깁슨은 ‘gain’과 ‘gift’를 대조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단어를 하나의 쌍으로 묶어 주제 문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알파벳 ‘g’로 시작하는 두 개의 단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한글 번역에서도 ‘ㅅ’이라는 동일한 자음으로 시작하는 ‘성취’와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또한 ‘성취’라는 단어는 현대인들의 삶을 요약할 수 있는 개념으로 유익이나 수익보다는 삶의 방향과 태도를 나타내기에 적합한데, 이것이 데이비드 깁슨의 의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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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7. 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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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제럴드 싯처는 순간의 사고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을 동시에 잃어버렸다. 비극적인 상실을 경험한 그는 자신의 경험 위에 신학적 성찰을 더하여 ‘상실’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가 다루는 상실의 종류는 다양하며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실을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상실은 그것을 겪는 각자에게 고유한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며, 그 결과가 누적되고, 상실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하여 상실에 대한 제럴드 싯처의 서술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지혜를 선사한다. 

고통과 상실이 찾아올 때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회피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상실을 경험하면 많은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데 이 역시 회피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상실과 그로 인한 고통은 회피한다고 사라질 수 없다. 상실 앞에서 회피라는 전략은 성공하지 못하며 마침내 상실로 인한 고통은 불쑥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니 제럴드 싯처는 전략을 수정하여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 구약 전도서는 ‘헛되다’는 말을 반복하며 강조한다. 우리말로 ‘헛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헤벨’은 헛되다는 의미와 함께 부조리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헤벨’을 외치는 전도서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이 사라지는 상실의 경험, 나아가 왜 나에게 이러한 상실이 찾아왔는지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제럴드 싯처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러한 전도서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상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 그것은 우리가 디뎌야 하는 첫 번째 걸음이다.”(53쪽)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내 삶의 아픔과 고통을 인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의 현실을 인정한다고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이미 사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죽음의 강을 넘어간 가족이 돌아올 수 있는가? 이미 실직하거나 큰 재산을 잃어버렸는데 그 현실을 인정한다고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는가?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잃어버렸는데, 그 현실을 인정한다고 다시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가? 그러면 고통을 인정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전도서의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여기에 답하는 최선의 방법은 복음의 원리다. 고통과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뜻한다. 과거에 누렸던, 혹은 미래에 성취하리라 기대하였던 이상과 꿈이 헛된 신기루였음을 깨달으며 자신의 유한성을 통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촉구한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은혜가 아니라, 주어진 한계적 상황에서 신기루를 쫓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이미 주어졌으며 여전히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며 누리는 은혜다. 

그날의 비극은 나를 하나님께로 밀어냈다. (중략) 독신자 부모로서 나는 심한 좌절과 피로감을 경험했고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완벽한 아버지가 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시도록 초대했다. 나는 이제 거의 날마다 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을 나의 연약함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길 기도한다. (중략) 나는 상실을 겪으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배웠고, 내가 가진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건을 기회로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특권이며, 부모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섬기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기회인지도 깨달았다(122-123쪽). 

물론, 상실 이후의 삶이 상실 이전의 삶보다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비록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안에 있다. 

지금 내 삶의 무대는 산에서 사막으로 옮긴 것처럼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황혼에 물든 사막도 아름다울 수 있듯이

그런 내 삶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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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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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2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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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골 4:12)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시대의 중요한 특징은 기도에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들은 기도에 전심전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시간을 빼앗기는 봉사의 일을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위임하기도 하였다(행 6:4). 바울의 서신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간절히, 그리고 밤낮없이 기도하였는지 알게 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달함으로써 그 고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설교가 끈질긴 기도의 향기로 뒷받침되도록 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만 기도에 집중했던 것이 아니다. 평신도 지도자들도 기도를 그들의 중요한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하나의 예가 에바브라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기도를 소개한다(골 4:12). 에바브라가 드리는 기도의 특징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펼쳐지기를 위한 기도, 곧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였다. 사도들도,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는 평신도 지도자들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에 헌신하였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요, 성령 하나님은 초대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셨다.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그들의 본문과 생각과 말과 설교를 그들의 골방에서 얻는다면,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죄로 물들고 어두워진 옛 하늘과 옛 땅은 기도하는 사역자의 능력 아래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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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1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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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찰스 스펄전은 설교에 있어 기도의 유익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개인 기도가 사역에 가져다 주는 빛나는 축복 하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글로 기록할 수도 없는 무엇 -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 기름 부으심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그리고 쉼 없이 뜨거운 간구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양털이 하늘의 이슬로 젖을 때까지 간구의 타작마당에 깔아 두어야 한다." 

E.M. 바운즈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설교의 기술이라고 기술한다. 그러나 기름 부으심은 설교에 필요한 많은 기술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여타의 기술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기술이다. 설교를 위해서는 진지함, 성실, 신중, 열정, 끈기 등의 덕목이 필요하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이러한 덕목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한다. 선한 목적을 위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들, 예컨대 설교, 기도, 예배, 전도, 목양 등은 기름 부으심을 통해 인간의 활동을 넘어 하나님의 역사가 된다. 설교자가 한평생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교자의 모든 노력이 열매를 맺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E.M. 바운즈는 분명히 선언한다. "기름 부으심은 서재가 아니라 골방에서 온다." 인간의 기도가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유도할 수는 없다. 기름 부으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절히 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신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 할 항목이 있다. 한번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고 영원히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름부음은 한 번 받으면 영원히 있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부 선물이다. 그것은 처음에 받을 때와 같은 과정에 의하여 계속되고 증가된다. 끊임없는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 그리고 그것을 귀하게 여겨서 지칠 줄 모르는 열심으로 추구하고, 그것이 없는 다른 모든 것은 실패와 배설물로 여기는 자세가 이 기름 부으심을 계속 유지하는 길이다." 설교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늘 사모하고 간구하는 것은 설교자가 한평생 견지해야 할 마땅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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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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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이른 아침이면 나는 마음보다는 머리를 준비하는 데 몰입했다. 이는 내가 흔히 범하는 실수였다. 나는 항상 이것이 잘못임을, 특히 기도할 때 절실하게 느꼈다. 이런 저를 고쳐주시고 마음 문을 열어주소서. 그러면 제가 선포하겠습니다." 로버트 맥세인의 말이다. 설교자는 이성을 동원하여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연구가 설교에 능력을 주는 것은 아니다. E.M. 바운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설교의 통로는 머리이지만, 그 원천은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통로를 깊고 넓게 했을지라도 원천의 깊이와 청결함을 잘 살피지 않으면 메마르고 오염된 통로가 되어 버린다." 설교자만이 아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에게 입 맞추며, 비참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아픈 자를 쓰다듬어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의 마음을 성결하게 만들 수 있는가? 바로 기도다. "자기 마음과 씨름하여 그것을 정복한 사람, 그 마음에 겸손, 믿음, 사랑, 진리, 자비, 동정, 용기를 가르친 사람, 그렇게 풍성한 보석 같은 마음을 복음의 능력과 함께 당당한 지성을 통하여 듣는 사람의 양심에 부어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진실하고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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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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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그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9)

리처드 세실의 글을 인용하며 이번 장은 시작된다. "오늘날 목회에서는 영적 영향력이 눈에 띄게 부족하다. ... 우리는 지나치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취향과 편견에 맞추려 애쓴다. 사역은 중대하며 성스러운 일이다." 목회자들이 영적인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현실을 꼬집은 내용이다. 거룩한 목회의 직분이 이렇게 전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E.M. 바운즈는 '헌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여기서 헌신이란 "교회에 대한 헌신, 의견이나 특정한 기관에 대한 헌신, 정통 교리에 대한 헌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헌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 그리고 그분의 뜻의 실현"만을 위한 전적인 헌신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기로 헌신한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이때 그의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가 된다. "기도는 헌신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헌신의 제조자이다. 헌신의 영은 기도의 영이다." "헌신 없이 참된 기도가 있을 수 없고 기도 없이 참된 헌신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기도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기도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헌신하지 않으니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역행하는 나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기도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헌신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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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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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신형섭 교수의 주장은 한결같다.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은 교회학교만으론 불가능하고 부모의 주도적인 역할이 필수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교회학교와 부모가 협력하여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교육목회의 생태계가 필요한데 이는 전교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먼저, 다음 세대 신앙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살펴보자. 현재 한국교회의 구성비율은 성인 세대와 자녀 세대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성인의 21%가 기독교인인데 반하여, 대한민국 청소년의 3.8%만이 기독교인이다. 선교학의 개념을 빌려 묘사한다면, 미전도종족은 북위 4도에서 40도에 위치한 4/40창이 아닌 4세부터 40세에 해당하는 4/40창에 존재한다. 저자는 이러한 세대 간의 불균형에 대해 자녀 세대의 신앙이 아니라 부모 세대의 신앙이 무너진 증거라고 분석한다. "수치적으로는 다음 세대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부모 세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정상적인 믿음의 부모라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우리 자녀들이 미전도종족이 된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p. 66)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메마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메마른 것은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부모 세대입니다."(p. 71) 최근 교육부서에서 사역하는 신학생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교회학교 결석의 첫 번째 원인이 가족여행이라니, 이러한 분석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의 신앙 교육이 메마른 가장 중요한 원인이 부모세대의 신앙 붕괴라면,  이에 대한 해법 역시 부모 세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 양육자로 준비되어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주도해야 한다. 저자는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핵심이 가정예배와 성경공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생활과 분리된 가정예배와 성경공부는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부모가 먼저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자녀들에게 가정예배의 시간과 자세를 강요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주입하려는 시도가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부모 세대가 자녀의 신앙 교육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가정예배와 성경공부를 위한 자료가 아니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역량이 요구된다. 여기에 교회의 역할이 있는데, 곧 부모를 신앙 교육의 사명자로 세우는 일이다. 

이 책은 부모를 신앙 교육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교구를 자녀의 연령에 따라 개편하여 교구 사역과 교회학교가 협력하며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수련회나 신앙 캠프 등의 교회학교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부모를 동참시킬 수도 있다. 부모와 자녀가 비전트립이나 전도여행에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녀가 세례를 받거나 특별히 입교를 할 때 부모가 함께 교육에 참여하여 부모에게 주어진 신앙교육의 사명을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다음 세대의 신앙 전수를 위해서는 부모 세대를 가정에 파송된 사명자로 세워야 한다는 목회적 절박함이 공유된다면, 부모가 자녀의 신앙 교육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방향성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공유되었다면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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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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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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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 46:5) 

E.M. 바운즈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다." "우리 시대는 아침의 신선함과 이슬을 주님께 드리고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선함과 충만함을 받아 분주한 하루 생활 중에도 기쁨과 힘이 충만한 설교자를 필요로 한다." 

물론, 기도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른 이침에 기도하는 것을 선호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녁 늦은 시간에 깊이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 특별히 이른 아침에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린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다. 곧,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찾는 강한 열망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아침 일찍 하나님을 찾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영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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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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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하나의 일화를 전해 들었다. 목사님이 병원에 임원한 환우를 심방하였다. 이분은 스스로의 종교를 개신교라고 밝힌 분이다. 그런데 이분은 최근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으니, 불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듯하여 좋다고 대답하였다. 목사님은 잠시 그분의 이야기에 긍정을 해주고, 이렇게 답변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도 평화를 참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지, 평화라는 의미의 '샬롬'이라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다. "아~ 그렇네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이미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은 기독교 안에 가득 담겨 있다는 점을 잊은 채,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해 눈을 돌리는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처럼 들렸다.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중세 시대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옥죈 암흑의 시대요,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 이성이 암흑의 시대를 뚫고 나온 승리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고대역사에 대한 서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인간성과 이성을 중시 여기는 문화였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신앙이 이성을 말살시킨 암흑시대가 중세 천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이러한 근대적 성공 스토리가 역사의 왜곡이요, 무신론자들의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문명이 중세 시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이 로마제국을 굴복시켰던 기독교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마제국이 이방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고대의 문명이 손실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 문명이 그나마 후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대의 유산을 간직하고 보존했기 때문이다. "4세기 그리고 5세기 초에, 고전 문학의 문화가 마지막으로 꽃 피어난 것은 대체로 교회 교부들의 업적이었다. 즉 당시의 가장 위대한 수사학자들, 가장 정교한 형이상학자들, 가장 혁신적인 문장가들이 교부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p. 104)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적 과학이 태동하였던 모판 역시 중세 시대의 대학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피조세계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여겼던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근대의 과학적 사고를 탄생시킨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하트는 근대가 계몽주의 시대였다는 신화가 고대 기독교의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리고 제 3부 "혁명: 그리스도교가 발명한 인간"에 이르면 기독교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기독교는 세례 의식을 통해 기존의 사고나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완전히 바꾸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러한 혁명의 결과로 고대의 영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환희'와 '해방'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교도들의 삶과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로마 제국을 다시금 다신교 사회로 바꾸려 노력했던 율리아누스 황제조차 자신의 눈으로 관찰한 사실을 이렇게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무신론을 확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낯선 사람들에게도 베푼 그들의 자선, 죽은 자들의 무덤을 돌보는 일, 그리고 그들의 삶을 이어가는 감동적인 거룩함 등이었다." (p. 263) 이는 2세기 후반의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목격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말하기를 "옛날 신들의 신전들에게 바친 돈은 순간적 쾌락을 위해 축제와 술 마시기에 낭비되었지만, 교회에 헌금한 돈은 가난한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에게 사용되어,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온전히 장사 지내주고, 늙은이들에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었다"(p. 279-80) 

기독교는 이처럼 기쁨과 해방을 선포하며 이는 성도들의 거룩과 자선의 삶으로 이어졌지만, 데이비드 하트는 그보다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혁명이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곧, 사람의 인격을 발견하고 모든 인간이 신적인 인격을 소유하였음을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세상의 질서가 하나의 피라미드로 조직되어 최상위의 존재인 신은 하위의 존재인 물질세계나 인간과 접촉할 수 없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기독교는 성육신의 교리와 기독론으로 인간이 신적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존재라고 선포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선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인격을 발견하게 하였고, 나아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그리스도교의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승리는 인간의 양심적 행위들 속에 씨를 뿌리는데 성공한 도덕적 직관의 이상스럽고도 비실제적이며 전적으로 이 세상적이 아닌 애타심(unworldly tenderness)이다."(p. 366)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의 이 책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데이비드 하트는 기독교가 초래한 위대한 혁명을 서술하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사라진 근대 사회에 무엇이 남을 것인지를 끊임 없이 질문한다. 기독교라는 든든한 사상적 토대가 사라진 후, 과연 인격과 애타심이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중요한 가치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또 다른 혁명의 필요성이 드러나게 된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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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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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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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E.M. 바운즈는 계속해서 기도에 있어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언제나 기도를 길게 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짧은 기도가 능력이 없거나 연약한 기도라는 뜻도 아니다. 성도의 삶에는 짧은 기도가 필요한 때가 있고, 짧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과정은 생략할 수 없는 필수 요소다. "우리의 짧은 기도는 그것에 앞서 드려진 긴 기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짧고 능력 있는 기도는 이에 앞서 오랫동안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E.M. 바운즈는 제6장에서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하였는지 많은 예를 제시한다. 

기도에 대한 명언 

  • 대감독 테이트, "나는 보다 위대하고 보다 깊고 보다 진실한 기도 생활을 원한다."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나는 나의 오두막집에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거기서는 오랜 시간을 기도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존 플레처, "나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그의 친구에 대한 인사는 항상 이것이었다. "내가 기도하면서 당신을 만나는가?"
  • 캐논 리돈(Cannon Liddon), "끈질김은 성공적인 기도의 진수입니다. 끈질김이란 몽롱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 해밀턴 감독, "기도를 가장 흥미있고 동시에 가장 필요한 과제로 생각하여 진지하게 준비하고, 또한 꾸준히 지속할 일로 여기고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에서 별로 많은 효험을 이룰 수 없다."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했던 사람들의 예

  •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 - 새벽 4시부터 8시까지 기도하는 시간에 드렸다. 
  • 켄(Ken) 감독 - 매일 새벽 3시 종이 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 애즈배리(Asbury) 감독 - "나는 할 수 있는 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보낼 작정이다."
  • 사무엘 러더포드 -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
  • 조셉 얼라인 - 새벽 4시에 일어나 8시까지 기도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다른 상인들이 일을 하려고 왕래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아, 이 얼마나 수치인가, 나의 주님이 저들의 주인보다 못하단 말인가!"
  • 옛날 감리교도의 기도 - 아침 4시(혹은 5시)부터 개인기도, 저녁 5시(혹은 6시)부터 개인기도 


하루 기도시간 

  • 마틴 루터, "만약 내가 매일 새벽 두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는다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 나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매일 3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가 없다."
  • 앤드류(Andrews) 감독 - 매일 5시간을 기도와 말씀 묵상에 드렸다.
  • 존 웰취(John Welch, 스코틀랜드 설교자) - 하루 8시간 내지 10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잘못 보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할 영혼이 3천 명이나 되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른단 말이요."
  • 저드슨 박사 - 매일 9시, 12시, 3시, 6시, 9시에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주님을 위해 단호히 임하십시오. 이를 지속할 수 있도록 모든 실제적인 희생을 치르십시오. 그대의 시간은 극히 짧다는 것을 명심하여, 그대의 사업과 친구들이 그대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E.M. 바운즈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소개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기도의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기도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새벽부터 3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불가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을 쉽게 포기하기에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참된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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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