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0. 7. 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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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의 증가는 이미 사회적 트렌드가 되었다. <혼자 살아도 괜찮아>는 이것이 지엽적인 변화가 아닌 전 지구적인 현장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의 저자 엘리야킴 키슬레브는 결혼 문화가 변하는 근본 메커니즘을 10개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독신 증가 추세가 더 뚜렷해지고, 어쩌면 막을 수 없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34쪽)


싱글은 출입 금지

이 책은 싱글의 증가가 뚜렸한 사회 현상이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선입관과 차별이 일어나는 장소 가운데 교회가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고 말하지만 싱글들이 느끼는 교회는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싱글이기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어려워하는 사라(가명)의 블로그 글이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가족이 함께 예배에 출석하는 모습을 바라보기 힘들어하며 남편이나 아이가 없이 혼자 교회를 출석해도 되는지 늘 고민한다고 하소연한다.

"차에 올라탈 때 잠시 고민했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정신적 에너지가 남아 있는지가 일요일마다 하는 고민이다. 집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내내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아. 내 곁에는 하나님이 계시잖아. 난 혼자가 아니야. 울지 말자. 하나님, 도와주세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갈지 말지를 두고 고민한다. 혼자 가서 혼자 있다가 혼자 돌아와 혼자 밥을 먹어야 하니까. 일요일은 정말 별로다." (150쪽)

이 책의 저자는 독신들이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특정 사회 활동에 참여할 때면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낀다고 분석한다. 교회는 그들이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누구도 싱글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문화와 분위기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기독교 가정사역자들은 '부부'가 모든 관계의 중심이며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매년 5월이 되면 교회의 중요한 절기를 맞은 것처럼 모든 예배가 부부 중심의 가정에 초점을 맞춘다. 교회 안에 미혼을 위한 모임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별자 모임이나 이혼자 모임처럼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이들을 돕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교회는 침묵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싱글은 출입 금지!


싱글을 위한 목회

교회는 더 많은 싱글이 예배에 참여하기를 바라지만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미혼은 완전한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 이혼자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는 선입견, 그 무엇보다 부부 중심의 가정만이 올바르고 경건한 가정의 형태라는 신학적 전제. 이러한 태도를 유지한 채 새로운 모임과 프로그램을 신설하더라도 싱글을 위한 목회가 될 수는 없다.

성경은 부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안에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곧, 덴마크의 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한 '하나님 앞의 단독자' 개념도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이지 배우자, 부모, 자녀 등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삶을 결산하는 때를 맞이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막 12:25)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서 있어야 한다. 기혼자도, 독신도, 이혼자도, 사별자도 예외는 없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고독하지만 자신의 삶을 신앙으로 일구어갈 수만 있다면, 이처럼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교회가 불어넣어준다면 어떨까? 그리하여 기혼자든 미혼이든 상관 없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단독자이며 동시에 모든 성도가 한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정의 형태가 등장하는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성도라는 개인과 교회라는 공동체를 함께 강조하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믿음의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살아도 괜찮아>는 싱글이 기혼자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방법을 탐색한다. 저자의 말대로 행복한 싱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보듬으며 주변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싱글로 살아가는 개인의 생각과 태도가 삶의 만족도를 크게 좌우한다는 의미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가족 형태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길을 하나님 앞에서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기혼자에게도 필요한 교회의 역할이요, 독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의미가 있는 교회의 사명이다.

혼자 살아도 괜찮아
국내도서
저자 : 엘리야킴 키슬레브(Elyakim Kislev) / 박선영역
출판 : 비잉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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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6. 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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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성경의 첫 번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는 이와 같은 믿음을 천명한다. 창조주와 주권자에 대한 신앙고백은 세상을 향한 신앙인의 야심 찬 비전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시는 대상은 온 우주 만물이기에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삶이나 종교계라는 좁은 경계선에 갇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세 유럽과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의 비전이 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지성의 제자도>(Mere Discipleship, 한글 번역서의 제목에 '지성'이라는 단어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지성은 흔히 인격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에서 주장하는 제자도의 모습이다. 

맥그래스는 지식인 혹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독교 정신이 어떻게 자신들의 전문 영역에 빛을 비추는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신학적 지식과 전문적 실력으로 이 두 영역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p. 34)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자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기독교 정신'(Christian Mind)은 핸리 블레마이어즈(Harry Blamires)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다. <지성의 제자도>를 번역한 노진준은 이 책의 제목도 <기독교 지성>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Mind라는 단어는 '이성'보다는 이성적 측면을 포함한 단어인 '정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블레마이어즈가 제시한 기독교 정신은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바라보며 다양한 이슈에 대해 기독교적 대답을 제시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정신은 단순한 이성적인 작용이 아니라 전 인격을 통한 기독교적 헌신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 정신'이 제자도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오늘날의 기독교는 신무신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사명이 있다고 강조한다. 

'렌즈'(glasses) 17세기의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이렇게 노래했다. "유리를 보고 있는 한 남자 / 그의 눈은 그저 유리만 보네 / 하지만 유리 너머를 보고자 한다면 / 하늘을 찾게 되리라"(p. 53)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위의 시를 인용하며 기독교 진리 혹은 신조를 '유리'에 비유한다. 신조나 신앙고백서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는 하나의 렌즈이기에 세상을 보다 가까이, 그리고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16세기 종교개혁가 존 칼뱅은 성경을 안경(glasses)에 비유했는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만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르게 볼 수 없기 때문이요,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면 우주 만물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칼뱅의 설명을 왜 인용하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발코니'와 '길'은 존 맥케이(John Mackay)가 <기독교 신학 서론>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발코니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길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다. 위에서 설명한 렌즈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발코니라는 이미지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곧, 집 안이라는 안전함이다. 발코니는 안전한 장소에 머무르며 발아래 펼쳐지는 세상을 응시하는 이미지다. 그러나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존 맥케이의 논거에 따라 참된 제자도의 위치는 발코니가 아닌 길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제자도는 세상을 전망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길 위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도들과 함께 걸어가는 도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중 귀 기울임'(double listening)은 존 스토트(John Stott)의 선교학을 형성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기독교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고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존 스토트는 '이중 귀 기울임'을 선교학뿐 아니라 설교학에도 적용하는데, 그의 설교학 저서 <두 세계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의 제목이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존 스토트를 자신이 주장하는 제자도를 실천했던 한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문화적 번역이라는 예술의 달인'이라고 존 스토토를 극찬한다.(p. 152)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여러 사상가와 그들의 개념을 차용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인물은 C. S. 루이스인 듯하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독자라면 맥그래스가 C. S. 루이스의 한 글귀를 수차례 반복하여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글귀는 이것이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도,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도 태양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 자체로 영광스럽지만 온 세상에 빛과 열을 내뿜는 기독교의 확장성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위축되면서 점차 기독교만의 세계로 게토화 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비추며 냉랭한 이 세상에 복음의 온기를 발하기를 열망한다. 이 열망은 C. S. 루이스나 알리스터 맥그래스만이 아니라, 이 시대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의 열망이다. 

"자신을 신학자로 여기는 사람들은 책과 강의, 설교를 통해 어떻게 이 진리들을 표현할지를 오랫동안 힘들게 숙고해야 한다. 그렇다. 나는 '설교'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설명할 수 없는 풍성함을 설교하고 싶은 열망 없이 어떻게 기독교 신학을 공부할 수 있단 말인가!" (p. 167) 

지성의 제자도
국내도서
저자 : 앨리스터 E.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 노진준역
출판 : 죠이북스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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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6. 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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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에서 후보자들의 경제정책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지 오래다. 마치 대통령을 잘 뽑으면 그 행정부가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믿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 유능한 정부는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은 그러한 대중적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논증한다. 그렇다면 왜 대중은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그처럼 오해하고 있는가? 이러한 오해는 '대학 교수'로서의 경제학자와는 구별되는 '정책 기획가'로서의 경제학자들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폴 크루그만은 설명한다. 


보수주의 정책 기획자들의 오류 

통화주의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시장의 능력을 믿고 정부의 통제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당국이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반케인주의), 정작 정책적으로 채택된 그들의 주장은 과세와 규제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세금이 노동 의욕을 위축할 것이고, 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의 확대는 투자 심리를 위축시켜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통화주의자들에 이어 공급중시론자들은 공급이 충분하다면 수요는 뒤따라 올 것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공급을 확대하는데 경제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었고 조세 및 규제를 축소하여 공급을 확대하려 했다. 

이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은 오류 투성이라는 것이 폴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생산성 둔화의 원인을 확신하는 듯하지만, 그 어떠한 경제학자도 1973년까지 가파른 성장을 이룩했던 미국 경제가 왜 급격히 둔화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이 통화주의자들과 공급중시론자들이 주장하는 세금과 규제의 축소가 경제성장에 거의 효과가 없거나 혹 있더라도 매우 미미한 정도라는 것이 드러났다. 오히려 조세를 낮추는 정책은 1973년 이후 심화된 소득 격차의 문제를 더욱 악화할 뿐이었다. 

폴 크루그먼은 지금까지 증명된 경제부양책이 유통되는 통화의 양을 늘리는 양적 완화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통화 정책은 행정부의 역할이 아닌 연방준비이사회와 같은 중앙은행의 몫이다. 그러니 '성장'을 약속했던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약속을 조금도 지킬 수 없었다. 

"요약해 보면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가장 나쁜 죄는 위선죄이다. 그들은 성장을 목표로 내걸고 성장이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떠벌렸지만, 사실상 그에 따른 모든 정책은 최소한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집권 말기에 즈음하여 확인된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그들의 집권하에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미국의 장기 성장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p. 173) 


전략적 무역론자들의 오류 

로너드 레이건에 이어 조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12년 동안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정책적으로 실현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한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민주당은 그 틈에 새로운 경제정책을 들고 나와 정권을 차지하는데 그들의 경제사상을 폴 크루그먼은 '전략적 무역론'이라 부른다. 

전략적 무역론자들은 미국 경제의 성장성 둔화의 원인을 다른 국가와의 생산성 경쟁에서 찾는다. 그들은 미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는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산업을 전략적으로 선별하여 정부가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역시 오류다. 이들의 선동으로 "대중들 - 그리고 그들의 선량들 - 은 국제 무역을 일종의 스포츠 시합으로 본다."(p. 312) 

전략적 무역론자들의 가장 큰 위험성은 보호무역주의로 이어져 세계적인 무역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에게 큰 손해만을 안기는데 말이다. 폴 크루그먼이 이 책을 저술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으로 확대된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경제 정책을 평가하는 기본자세 

일반독자가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정치가들, 혹은 정책 기획가들의 경제 정책을 평가하는 기본자세를 학습하는 데 있다. 폴 크루그먼은 이들에 대해 단언한다. 

"보수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정치가들은 모두 미국의 경제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려고 하기보다는 손쉬운 길을 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국가의 정책을 만병통치약을 팔고 다니는 약장수들의 손에 계속해서 넘겨주었다." (p. 365) 

안타깝지만, 미국의 정치인들과 정책기획자들의 모습은 한국의 정치인들과 정책 기획자들의 모습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 내어놓은 경제 성장에 대한 청사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비록 경제학자라는 이들이 방송에 나와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대학 교수' 그룹보다는 '정책 기획자'에 속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경제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하다. 

"정부가 국가의 문제 해결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줄일 수는 얼마든지 있다." (P. 366) 

그러므로 정치인과 정책기획자의 손에 국가의 경제 문제를 모두 내어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개인과 가계는 경제의 한 주체다. 국민 개인들이 경여하는 기업도 경제의 중요한 주체로서 역할한다. 각자가 책임져야 할 영역은 각자가 해결하고, 정치인들에게는 그들이 정책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요구해야 실망도 적고 역효과도 줄일 수 있다. 

 

경제학의 향연
국내도서
저자 : 폴 크루그먼(Paul Robin Krugman) / 김이수,오승훈역
출판 : 부키 199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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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6. 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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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산문은 한글이라는 모국어의 맛을 느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 시대의 크고 작은 실체를 모국어로 그 촉감까지 전달하는 것이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장점이다. 

"별을 별이라고 부를 때, 
별은 내 가슴에 박히고 
나는 모국어의 자식임을 스스로 안다."(p. 240)

유학 시절, 나의 설교 언어는 대한민국의 표준어라는 점을 깨달았다. 영어로 설교문을 작성하고, 그것으로 설교할 수는 있지만 선포하는 나도, 듣는 청중도 말하고자 하는 실체와 언어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울에서 초, 중, 고를 졸업했으니 이 언어를 사용하고 이 언어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공유하는 이들이 내 목회의 대상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지구의 반대편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기독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달한다.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정해졌고 이미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성경의 메시지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회중에게 전달해야 하기에 언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설교 언어를 가다듬고 연마해야 하는 이유다. 설교자도, 회중도 모두 모국어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김훈은 '말의 더러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정치인들이 행하는 이른바 정치공세를 말의 물타기로 표현하는데 언어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는 목회자에게 흥미로운 글이었다. 

"이 연금술은 .... 오염된 물의 수량이 풍부해야만 시술을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 국회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p. 334)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웃어넘길 위의 문장은 설교자들에게는 성찰의 문장이다. 

 

70을 넘어선 작가의 글에는 인생의 경륜이 배어나온다.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 글은 단연코 "늙기와 죽기"다. 이제는 조부나 부친을 떠나보낸 지인을 조문하던 때가 지나 이제는 친구의 장례를 조문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작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차례가 다가옴을 느끼며 죽음을 생각한다.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p. 71) 

목회자들은 수없이 장례식을 다닌다. 그만큼 죽음을 생각할 기회가 많다. 그러나 늘어가는 지식은 장례 절차와 시설에 대한 것일뿐, 죽음이라는 주제가 아닐 수 있다.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는 사후 세계가 있고 기독교 신앙은 고인을 천국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목사는 그 믿음으로 성도를 교훈하고, 유가족을 위로한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죽음 이후를 설파하고 목회자로서 장례식에 집례하며 유가족을 위로하지만, '죽음'이라는 명백한 실체는 미지의 세계로 남는다면, 장례식 설교만큼 공허한 언어도 없으리라. 

목회자는 설교의 언어로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며, 책망도 한다. 그러니 설교 언어가 기독교가 믿는 영적인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면 목회자의 역할은 사상누각이 되지만, 설교 언어가 영적 실체를 향해 성도들을 조금이라도 이끈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영광이 된다. 지워지기 쉬운 연필이지만 심혈을 담아 한 글자씩 써내려간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 시대의 목회자로 살아가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야 할 설교 언어를 생각한다. 

[프리미엄북] 연필로 쓰기 - 육필에디션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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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2020. 5. 1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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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악역의 모티브를 제공한 프랑켄슈타인, 그는 이 책의 주인공으로 훌륭한 인품과 지성 그리고 인류애를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절망과 괴로움의 나락으로 추락한 데는 단 하나의 사건, 곧 과학적 호기심과 성취욕에 사로잡혀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생명의 창조주로 믿는 기독교 정신에서는 생명 창조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바벨탑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의 주인공은 생명 창조의 그날부터 죄책감과 불안, 극심한 공포에 치를 떤다. 자신의 창조물이 저지른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나기 전부터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살인을 저지르며 이야기는 극한의 두려움과 비극을 향해 나아간다. 어린 소년 윌리엄의 죽음,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철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유스틴.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얼마나 악독한 존재인지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행동이 악독하면 악독할 수록 그것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의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 결과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절망, 이것이 프랑켄슈타인의 실존이다. 

이 책이 고전으로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존재가 인간 내면의 다양한 군상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윌리엄, 저스틴, 클레르발,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까지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악인의 원형이 된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에서 만나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에게도 연민과 사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죄책감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마음에 느꼈던 다양한 감정에 다가설수록 악의 실체는 그의 존재가 아니라 그를 창조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기 어렵다. 외모가 추악하다는 이유로 그를 외면했던 인간의 증오와 배제가 그를 악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젊고 유능하며 미래가 총망되던 프랑켄슈타인이 절망과 고통의 세계에 빠져드는 이야기보다 그의 창조물이 겪었던 거절감이 더욱 큰 공감을 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추앙하며 이를 따라가고자 했지만, 결국은 거절감에 몸부림치며 살인으로 이어지는 그의 고백적인 이야기는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내가 저지른 끔찍한 짓들을 하나씩 돌아켜보면, 한때 숭고하고 투명한 미와 위풍당당한 선의 비전으로 사고가 충만했던 존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다."(3권 7장) 

이 책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창조물이다. 그런데 책의 시작과 끝은 월튼이라는 인물이 주도한다. 월튼이 자매 마거릿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편지로 전해주는 형식이다. 월튼은 하나의 사명을 위해 북극 항해를 시작하는데 지구의 자기장이 시작되는 북극을 여행하며 궁극의 진리를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프랑켄슈타인(과 그 창조물)의 죽음을 목격하며 항해를 마무리한다. 이로써 북극 여행을 통해 그가 발견한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순수한 영혼은 악의 권형인 프랑켄슈타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이러한 두 얼굴의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다는 진실이다. 

"신은 연민을 갖고 자신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더러운 투영이고, 닮았기 때문에 더욱 끔찍스럽다." (2권 7장) 

프랑켄슈타인
국내도서
저자 :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 김선형역
출판 : 문학동네 201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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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2020. 5. 1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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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방법을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으로 구분해보자. 미시적 관점이 성경의 각 장, 혹은 각 구절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는 방식이라면 거시적 관점은 최소한 성경의 각 권, 혹은 성경 전체의 흐름이나 내러티브를 탐구한다. 설교자는 성경은 연구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가 예배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짧은 구절(대부분 20절 이내)을 본문으로 삼기에, 설교자의 성경연구는 거시적 관점보다는 미시적 관점에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해석의 목적(거시적 관점 혹은 설교자의 신학)이 해석의 방법(미시적 관점 혹은 본문 주해)을 좌우한다. 이것이 설교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신학훈련을 먼저 받아야 하는 이유요, 설교자가 미시적 성경 연구를 지속하듯 거시적 연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월터 브루그만의 <하나님, 이웃, 제국>은 구약성경에 대한 거시적 관점을 확장하기 원하는 설교자,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 리더에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구약 성경이 담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먼저는 제국의 내러티브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다. 제국의 내러티브 -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저자는 솔로몬 제국도 여기에 위치시킨다 - 는 약자를 착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이 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 - 출애굽, 광야, 시내산 이야기등 - 는 이에 대한 저항이요 전복으로서 공의와 정의, 은혜와 성실, 그리고 긍휼이 그 특징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제국의 내러티브를 전복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를 그리며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멀리 신약성경의 예수님과 바울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니 구약 성경이 거대하게 그려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전망하며 성경에 대한 관점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거시적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기독교의 몇몇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개념 정립은 책을 읽는 동안 큰 흥미를 자아냈는데, 설교자로서 회중들과 나누고 싶은 것들이다. 

"의인은 거룩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이웃과 이웃 사이에 두는 사람이다."(p. 148) 

"신실이란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단념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끝내 충성하겠다는 결단을 뜻한다."(p. 67) 

"타자를 품는 일(othering)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소명이며,
그들의 삶이 왜 세상 한 가운데 자리하는지를 말해 준다."(p. 78)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장 "율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책의 전반부가 조금 지루하게 여겨지는 독자라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해 보시라.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율법의 특징을 '끊임없이 들으라, 지키라'로 요약한다. 무엇보다 신명기를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졌는데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를 반복한다. 그런데 신명기는 단순한 복사하기-붙여넣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의 규정은 창조주 하나님이 신학적 근거다. 모세는 동일한 안식일 규정을 신명기에서는 구원자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신학으로 설명한다. 이제 토라에 대한 브루그만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라.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는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중략) 따라서 토라의 본질은 규율을 늘어놓는 데 있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와 환경, 새로운 시대정신을 고려하는 지속적인 대화에 있다."(pp. 265-266) 

이제 토라를 끊임없이 듣고 말하고 지키는 대화가 가져오는 결과를 보라.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으니,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긴다. 

"신명기는 시내산의 율법을 가나안 땅으로 운반한다. 오늘날의 비평 방식을 신뢰한다면, 신명기는 시내산 율법을 페르시아 제국으로, 오늘 이 법의 재현을 갈망하는 수많은 장소로 운반하고 있는 셈이다."(p. 282) 

하나님, 이웃, 제국
국내도서
저자 :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 윤상필역
출판 : 성서유니온선교회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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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5. 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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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사건은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사건이 된다. 
이것이 이야기, 곧 내러티브가 부리는 마법이다. 

 

직지 1
국내도서
저자 : 김진명
출판 : 쌤앤파커스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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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2
국내도서
저자 : 김진명
출판 : 쌤앤파커스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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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느 노 은퇴교수의 살해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 이야기는 고려에서 시작된 금속활자 기술이 조선 시대 주자공의 딸로 태어난 한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독일의 구텐베르크에게까지 전달되는 여정이다. 노 교수의 살해 사건과 이를 추적하는 여기자의 이야기는 직지와 훈민정음,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 이야기를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직지와 훈민정음, 그리고 금속활자의 전파라는 과거의 이야기만으로도 작가 김진명이 우리 시대에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될 터, 그러나 작가는 현대적 인물인 김기연 기자의 입을 통해 그 의미를 보다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싶은 듯하다. 

"직지는 인간 지능의 승리입니다. 맹수에게 이빨과 발톱이 무기이듯 인간에게는 지식과 정보가 무기입니다. 그 지식과 정보를 가장 정확하고 깔끔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장치가 바로 금속활자입니다. (중략) 직지와 한글은 그 존재 자체가 소수의 독점으로부터 지식을 해방시켜 온 인류가 손잡고 동행하자는 지식혁명입니다.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심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위대한 메시지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2권 263쪽) 

인간이 역사를 서술하고 읽는 이유,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읽고 자신의 묵상과 기도로 바꾸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사건과 과거의 서술이 오늘날의 독자에게 이야기로 되살아 날 때 과거의 이야기는 오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석의 권위를 가진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이라는 굴레와 소수의 독점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김진명, <직지:아모르 마네트>

기독교인으로, 그리고 목회자로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천국에만 보내주십시오. 하는 건 얼마나 천박한가" (2권 89쪽) 

바티칸에 막 도착한 은수는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당당했던 한 죄인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았다. 질문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그저 맹종을 요구했던 중세 가톨릭 교회의 천박함을 당당히 지적한 음성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그리고 중세 유럽에서는 가톨릭이 책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독점하고 이를 이용하여 종교권력을 행사했지만, 그러한 시대에도 지식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의 세종이 그러했다면, 중세 유럽에서는 쿠자누스가 그와 같은 인물로 이 책에서는 그려진다. 작가 김진명은 과거의 은수와 현대의 김기연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었지만, 기독교 목회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는 쿠자누스에게 관심이 가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코리의 임금이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고, 금속활자로 인쇄하려 한다는 먼 나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쿠자누스가 그 자리에서 올린 기도는 나의 마음에 큰 울림이 되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신 건 어리석은 우리에게 희생을 가르치려 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의 권력자들은 약하고 가난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희생할 줄 모릅니다. 도리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적을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섬기게 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대열의 맨 앞에 서 왔음을 고백하오니 저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멀리 코리의 왕이 자신들의 백성을 위하여 글자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통해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게 일깨워 주신 뜻을 깊이 깨닫고자 합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저를 섬기게 하지 말고 저로 하여금 백성을 섬기게 하라는 소명임을 직관하였는 바, 저는 당신께서 카레나를 통하여 제게 계시하신 대로 금속활자를 퍼뜨리는 데 소임을 다하고자 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2권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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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5. 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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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문제는 과학적 근거나 통계적 수치로 설명할 단계를 넘어섰다. 이제는 논리적 설명으로 설득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문제의 심각성은 충분히 증명되었고, 지금이라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런데도 인류가 환경문제에 여전히 소극적인 이유는 나에게 당장 손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성,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체의 과제보다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문제를 우선순위에 놓으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쓰레기책
국내도서
저자 : 이동학
출판 : 오도스 202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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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책>은 환경문제를 부각하는 데 상당히 성공적이다. 먼저, 쓰레기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다. 그것도 플라스틱 쓰레기를 주로 언급한다. 음식물 쓰레기, 우주 쓰레기, 동물의 사체도 언급하지만 책의 주제는 단연 플라스틱 쓰레기다. 이 책은 우리 곁에 있는 플라스틱 제품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나아가 생산되어 소비되고 더 이상의 필요가 사라져 쓰레기가 된 플라스틱에 독자의 시선을 묶어 놓는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플라스틱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분해되지 않기에 생산되고 소비된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딘가로 이동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 결과, 태평양 한가운데 프랑스 영토의 세 배에 이르는 플라스틱 쓰레기장이 존재한다. 세계의 쓰레기통 역할을 하던 중국이 이제는 쓰레기를 수입하지 않자, 세계는 쓰레기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2019년 필리핀에 불법으로 수출한 쓰레기 문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모든 사례는 폭증하는 쓰레기 생산량보다 쓰레기 처리량 - 매립, 소각, 재활용 등 - 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쓰레기책>은 플라스틱 쓰레기라는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독자들에게 환경문제를 효과적으로 호소한다. 여기에 한 가지 장점이 이 책에 더해진다. 지구촌장 이동학이 직접 세계를 여행하며 촬영한 생생한 사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여느 여행 사진과 다르다. 지저분한 곳,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곳은 피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곳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인 여행 사진이다. 그러나 이동학의 사진은 쓰레기가 주인공이다.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 그래서 사람들이 외면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다. 이러한 장점으로 무장하였기에 이 책은 논리적으로는 반박하지 못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거부하고 싶은 환경문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지구촌장 이동학의 <쓰레기책>은 환경문제를 고발하여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매우 성공적이다. 그러나 환경 문제는 인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선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두자. 어머니에게 지구촌장이라는 직함의 임명장을 받아 2년 동안 61개국, 157개 도시를 여행한 이동학의 독특하면서도 의미있는 모험이 이후 지구촌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크게 기여하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환경 문제는 결코 개인의 과제일 수 없기에 이 책을 읽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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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18. 4.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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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도훈련을 하던 중, 한 집사님이 이렇게 질문했다. “전도를 하다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교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았거나 교회의 어두운 측면을 관찰하였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명이다. 혹은 교회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담고 있는 복음만큼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니, 교회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까지 거부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이 그 집사님에게 충분한 해법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교회가 지역 사회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면 한 두 마디의 말로 교회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변호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교회가 처한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세상은 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뚜렷해진다. 교회의 도덕성, 혹은 교회가 가진 정보력과 행정력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시절이 혹 있었을지라도 지금은 교회가 비기독교인들에게 그 어떠한 매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 못되며 오히려 숨기고 싶은 사실이 되어 버렸다. 멀지않아 기독교는 이 사회에서 소수자(minority)로 전락할 것이 자명하다.

 

오픈 시크릿
국내도서
저자 :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 홍병룡역
출판 : 복있는사람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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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신학이 요약되어 있는 <오픈 시크릿>(Open Secret)은 초대교회의 선교가 20세기 서구교회의 선교와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위대한 선교의 시대로 구분하는 18-19세기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팽창과 때를 같이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교회의 선교에는 문화적 선진지역에서 낙후된 지역으로의 전도라는 개념은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약자의 입장에서’(from a position of weakness) 복음을 증언하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대사회적 리더십의 추락과 그로 말미암은 전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재력이나 조직력 등을 통한 대사회적 리더십은 교회의 본모습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점차 소수자로 전락하는 교회는 대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보다 약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핵심은 바로 대화다.

 

뉴비긴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대화란 회심이나 종교간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한 ‘고백적 대화’(confessional dialogue)도 아니요,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전제한 ‘진리 탐구형 대화’(truth-seeking dialogue)도 아니다. 마치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서 율법과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처럼, 진지한 대화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고를 뒤흔들기 마련이다. 곧, 대화는 위기를 초래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위기를 무릅쓰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토대를 무너트릴 때 비로서 예수님을 모든 세계 위에, 나아가 자신의 믿음 위에 뛰어난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전도의 현장에서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뉴비긴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아마도 경청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라는 든든한 토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그들과의 대화는 유익하다. 아울러, 그들의 주장이 전제하고 있는 토대도 십자가의 관점에서 의심할 수 있다면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완전히 비우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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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17. 1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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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득 저, 부흥과개혁사 출판)라는 제목의 도서가 한국 교회 안에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켰다. 기독교가 복음의 정신을 따르기보다는 현대 경영학 이론에 따라 성장과 부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작금의 한국 교회가 경영학적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이러한 현상의 근원을 레슬리 뉴비긴이 근대 서구 문화를 분석하며 지적한 계몽주의적 특징 곧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으로부터 설명할 수도 있다.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복음과 서구문화
국내도서
저자 :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 홍병룡역
출판 : IVP 200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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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구 문화를 특징 짓는 계몽주의적 관점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한다. “서구 문화의 결정적인 특징, 곧 인간의 삶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누고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두 가지 특징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라는 점이다.”(p. 48) 공적 영역은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가치의 영역은 배제한 채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혹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 ‘사실의 영역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목적과 가치를 이야기하기에 공적 영역에 자리를 잡을 수 없으며, 개인의 선택이 보장되는 사적 영역에 위치한다. 근대 서구 문화에서 사적 영역에 내몰린 기독교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인정받을 수 없기에, 개인으로부터 선택받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토머스 루크먼(Thomas Luckman)은 이렇게 표현한다. “일단 종교가 사적인 문제로 규정되면 각 개인은 궁극적인 의미들로 즐비한 진열장에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p. 185 재인용) 종교는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안전한 터전을 찾았지만, 결국에는 상품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북미에서 교파주의가 크게 일어나게 된 하나의 사회학적 배경 역시 개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상품명(label)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근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군사정권시대를 경험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에 더욱 주눅이 들었다. 군사정권시절, 복음주의 기독교가 내세운 정교분리원칙은 레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계몽주의 정신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한국 기독교가 진열대에 전시된 상품이 되고, 개개의 교회는 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마케팅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회학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만일, 한국 교회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지적을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근대 서구 문화 속에서 사적 영역의 상품으로 전락한 기독교를 다시금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내려 했던 레슬리 뉴비긴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모든 나라를 향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통치와 주권을 선포하는 복음의 담지


자와 같다
.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권세를 추종하는 잘못된 충성을 회개하고 유일하게 참된 주권자를 믿음으로써, 다 함께 모든 자연과 모든 나라와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단 한 분, 곧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키는 표지요 도구요 맛보기가 되자고 요청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나와 안전한 종교적 거류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왕권을 전하는 일꾼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기 위해 부르는 것이다.”(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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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