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4. 2. 2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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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팰럼시스트”(Palimpses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복기지”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양피지에 글씨를 써서 그 내용을 후대에 남겨주곤 했습니다. 글을 쓸 수 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후대에 정보와 지혜를 남겨주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 양피지가 그 시대에 얼마나 귀하였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그 양피지를 재활용하곤 했습니다. 한번 글씨를 쓰고 난 뒤에 사람들은 그 글씨를 최대한 깨끗하게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방식이지요. 여러분 중에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종이가 귀했던 시절에 노트를 재활용하였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노트에 연필로 글씨를 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노트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기존의 글씨를 깨끗하게 지우고 그 위에 또 다시 글씨를 쓰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글씨를 지워도 글씨의 자국은 남게 되거든요. 그 옛날 양피지에 쓴 글씨를 아무리 열심히 지워도 자국이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피지를 몇차례 재활용하고 나면, 또렷한 글씨 아래에 글씨를 수차례 쓰고 지웠던 연한 자국이 남아 있게 되는 데, 그것을 팰럼시스트 곧 복기지라고 부릅니다. 

“팰럼시스트”라는 개념은 여러 분야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건축학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이 현대적 건물로 모두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간과 배치 안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흐릿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국가나 문화의 흔적을 현대 도시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에도 팰럼시스트는 존재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은 과거의 생각이나 과거의 관습을 버리고 현대적 문화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자세히 관찰하면 말끔하게 지워낼 수 없는 오랜 역사와 관습이 팰럼시스트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생각에서 벗어나고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가봇에서 미스바로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팰럼시스트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에게 깊이 새겨진 팰럼시스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팰럼시스트 가운데 마지막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20)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죄성이라는 팰럼시스트가 깊이 새겨져 있어서 그것을 씻어내고 그것을 지워내기 너무도 힘겹고 버거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민족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다 보니,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노예근성이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팰럼시스트가 새겨졌습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현재]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직업 언약을 맺었고, [미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비전인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은 포기하고 애굽 사람을 섬기는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노예근성의 팰럼시스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보다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들, 곧 바알이나 아세라 등을 섬기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주변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민족의 고난을 허락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마음은 그때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잠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시면, 그들은 언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느냐는 듯이 우상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사는 동안 이번에는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숭배라는 뿌리깊은 죄성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침내 언약궤는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루에 죽고, 이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로 이가봇이라고 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마음에 우상숭배의 습성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으니, 그러한 사사시대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마음에 우상숭배의 팰럼시스트가 제 아무리 뿌리 깊게 박혀 있더라도, 그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두운 이가봇의 시대가 지속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으로부터 우상숭배의 뿌리깊은 죄성을 제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무엘을 마치 사사의 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 의해 크게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사무엘이라는 사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쳐 주시고 그들에게 다시 평화를 주십니다. 이 동일한 사건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구약성경 사사기의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사사기에서 지루하게 반복되었던 이야기들과 전혀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미스바의 회개를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사무엘이 다스리던 시대는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의 시대를 지나, 다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악습을 철저하게 끊어냅니다.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과 함께 그들의 우상을 데려오기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상 숭배라는 깊은 죄성에 빠진 시대를 이가봇의 시대라 부른다면, 오늘 본문은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이 최소한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은 더 이상 섬기지 않는 미스바의 시대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참으로 위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우리의 모든 죄악 된 습관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마침내 모두 제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죄악이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모든 죄악을 깨끗이 제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죄악이 가득 넘치고 있는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가봇의 시대를 종결하시고 미스바의 시대를 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펼치실 것을 믿기에,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소망 가운데 기도해야 할 수 있습니다. 


미스바의 시대를 위한 조건

오늘 본문은 이가봇의 시대가 미스바의 시대로 전환하는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미스바에서 일어난 회개의 사건이 그 이전의 사건과 다른 결과를 맺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미스바에서의 회개 사건은 사사시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펼치게 되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중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2절)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이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언약궤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늘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성도 여러분, 20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 빼앗겼던 언약궤는 분명히 이스라엘 영토 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택하셔서 선지자로 세워주셨고, 사무엘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라는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가봇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도,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어도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떻게 이가봇의 시대가 끝나고 미스바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까? 비로소 온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자,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 그 두번째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자,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3절)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모든 이방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는 우상숭배라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바른 길로 그들의 삶을 돌이키라는 요구입니다. 곧 회개에 대한 촉구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한 백성들이 사무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4절)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고 다시 한번 철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리하여 미스바의 대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6절)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어서 하나님 앞에 쏟아 부었지요. 지금 그들의 마음이 꼭 그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자신들의 깨어진 마음 상한 마음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 쏟는 행동에는 그들 자신의 마음도 이처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으로 깊이 통회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한 마음을 내어드리는 철저한 회개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게 하였습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에 들어왔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위에 우상숭배를 비롯한 뿌리깊은 죄악을 진심으로 회개하니 비로소 이가봇의 시대는 끝나는 것이요 미스바의 시대는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가봇의 시간을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들이 어떻게 이가봇의 시간을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는 이가봇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는 새로운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요, 또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철저히 통회하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 그리고 나 안에 깊이 뿌리 박힌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순절이 마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 이가봇의 시대가 끝나고 미스바의 시대를 맞이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새로운 미스바의 시대를 활짝 펼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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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12. 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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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여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요.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은 낙관과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는 낙관을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0”에 가까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그 누구도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바로 이 소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낙관적 전망이 어려운 환경 (1-8절)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한 현실을 묘사합니다. 구약성경에 조금만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사무엘상 앞에 사사기와 룻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와 룻기가 그려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두운 사사시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던 혼돈의 시대였지요.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본문에서도 여전히 시대의 깊은 어두움이 계속되는 사사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이 그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3절) 

이 사람, 곧 엘가나가 매년 절기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던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엘가나의 믿음은 순수하고 아름답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올라가는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매우 악한 제사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장 12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실로에 올라가면 무엇합니까? 그곳에서 버젓이 제사장으로 있는 사람들은 행실이 나쁘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홉니와 비느하스였으니 무슨 내일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가능하겠어요? 

홉니와 비느하스만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감각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지요.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3절) 

민족의 최고 지도자라는 엘리는 그가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4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4장 18b절) 행실이 매우 나쁜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비대하여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실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시대이니, 여러분 과연 어디에서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묘사하는 한나 개인의 처지를 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불가능합니다. 한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불임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으셨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살았던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있고 없고는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 하나가 장수라면 또 하나는 바로 많은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유무는 당시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요소였지요. 그래서 본문은 한나의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지만 그것이 한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지요. 그러니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여인 한나에게는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합니다. 한나에게 내일에 대한 낙관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6a절)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본문 6절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막으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지금 현재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도 그리고 한나라는 한 여인의 인생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 곧 낙관이 불가능합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우리 주변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참 많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분들의 걱정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을 자세히 관찰해 볼 때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참 많이 들려옵니다. 코로나 이후에 급격히 감소한 예배 출석인원이나 교회의 재정이나, 고령화에 따른 교회학교의 붕괴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과연 지금의 한국 교회 안에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낙관의 이유가 조금이라도 내재되어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개인과 가정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지만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모든 긍정적인 낙관을 차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긍정적인 전망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소망과 기쁨 (9-18절) 

모든 낙관이 사라지고 절망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선물로 주시는 소망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본문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무엇하지요?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여인과 같이 자녀를 출산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옆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해 줍니다.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하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술에 취한 것으로 알았잖아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과 한나가 대화를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대화를 아무리 많이 읽어보아도 한나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엘리 제사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힌트가 하나도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한나의 기도는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혼자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 엘리는 한나가 어떠한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하는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그다음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한나의 대답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한나의 대답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볼까요? 한나가 “아멘”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축복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아멘”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마다 평강이 임하시고, 여러분이 어떠한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든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가 사실 여러분이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기도제목을 알려주신 분들의 기도 제목은 알지만, 더 많은 성도님들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제목은 제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엘리의 축복에 대해 한나가 “아멘”으로 반응했어요. 그러자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8절 말씀을 우리 함께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대해 “아멘”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근심빛이 사라졌어요. 아직 아이를 잉태한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를 낳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믿고 “아멘”으로 반응하자 그 마음에 소망이 생긴거에요.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잘 먹습니다. 평안히 잠듭니다. 다시는 얼굴에 근심 빛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한나의 삶은 그 이전 같았을까요? 브닌나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한나를 괴롭혔겠지요.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일어나기 전에는 브닌나의 괴롭힘에 마음이 요동하고 분노가 치밀어 일어나곤 했지요. 그런데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고 나니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더 이상 한나의 마음이 요동치 않게 되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한나의 품에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사무엘이라는 아들이 아닙니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소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다시 말씀드려 볼까요?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주어지는 재물도 성공도 기도의 응답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삶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없을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허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을 품으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손 안에 움켜잡은 것이 적을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은 천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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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6. 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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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경제력을 평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지표는 GDP, 곧 국내총생산이지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의 역사도 국내총생산, 특별히 1인당 GDP가 얼마나 급성장하였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1953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6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이 되었어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254달러에 머물렀지요. 그런데 70년대부터 급격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1977년 드디어 1인당 GDP 1000달러가 넘어서더니, 불과 6년 뒤인 1983년에 2000달러를 넘어서고, 1990년에 들어서는 6000달러를 달성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지요. 1995년에는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하고, IMF 금융위기를 맞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에 2만 달러를 넘어, 현재는 1인당 GDP 3만 달러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GDP가 얼마나 급격히 성장했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재와 국민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현격하게 나아졌는지를 한눈에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지요. 어느 나라의 GDP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내총생산, 곧 GDP의 한계를 지적하는 주장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GDP 안에는 여가활동의 중요성이 외면된다거나,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봉사 활동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등의 한계점입니다. 그리고 GDP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행복지수’입니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부탄은 국내총생산이 매우 작지만 서구유럽의 부유한 국가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라는 사실에 세계인들이 주목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GDP로 나타낼 수 있는 국민총생산, 곧 한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얼마나 많이 소득을 올리는지가 HPI, 곧 국민총행복지수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어느 국가의 삶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GDP는 매우 중요한 지표이고, 국민총행복지수인 HPI 등의 여러 지수에 대해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GDP로 대표되는 생산능력, 곧 국민들의 소득이 반드시 국민들의 행복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전도서 6장도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소유, 곧 나의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것이 반드시 나의 삶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전 6:2)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전도서 6장 2절은 구체적인 목록이 제시되어 있지요. 곧, 재물과 부요와 존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그 사람은 모두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요? 그리고 전도자는 그 모든 축복의 출처가 어디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재물도 주시고, 부요도 주시고 존귀도 주신 인생, 곧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네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소유를 허락해 주셨지만, 한 가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여기에 두 가지 개념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첫번째 개념은 소유입니다. 그리고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두 번째 개념은 누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소유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네요. 우리의 삶 속에도 소유는 했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 있고 우리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그와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지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모두 소유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큰 질병을 맞이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로 단명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형편도 있잖아요.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나님께서 소유는 허락하셨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계속해서 전도자는 또 다른 예를 제시합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전 6:3) 

이번에는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풍성하게 받은 사람이 등장하네요.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매우 크고 귀한 축복으로 노래하거든요. 십계명에서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장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는 시편 127편은 자녀들을 ‘장사의 수중의 화살’로 비유하잖아요. 이렇듯 성경은 장수의 축복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3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백 명의 자녀를 낳고” - 물론 과장법입지요. 그러나 그만큼 많은 자녀를 낳고 -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반전이 있네요.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이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2절에서는 소유와 누림이라는 개념이 서로 대조적으로 등장했지요?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행복과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을지라도, 성도 여러분, 행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 결론입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여러분, 천년을 살면 뭐합니까?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면 뭐 합니까? 그렇게 장수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풍성한 축복을 받으면 무엇합니까?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전도자의 표현 그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아 소유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유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큰 축복과 큰 소유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만일 큰 축복을 받아 많은 것을 소유했더라도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 조금 작아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소유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부족해 보여도, 지금 나에게 주신 축복과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면서 지금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진정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유를 넘어 행복으로 

전도자는 소유와 그것을 누리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행복한 삶은 다를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지요. 그러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크든지 혹은 작든지 지금 내가 소유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반대로,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는 크든 작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펴본 전도서 6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우리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입니다. 전도서 6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지 못하도록 막으시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쩔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니 우리 인간은 거기에 대해 항의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나에게 있는 그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만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자가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비록 천년을 살아도, 심지어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헛된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소유를 늘리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동분서주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비결 하나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감사하는 인생이지요.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보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다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이들은 조금 풍족하게 살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조금 궁핍하게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떨치며 살아가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아가고 또 어떤 분들은 늘 병약한 육신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더 많은 축복을 소유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여러분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더 많은 축복,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살아가시겠습니까? 그 끝은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자가 분명히 가르쳐 주잖아요. 

물론,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풍족한 분들도 계시고 또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궁핍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신 분이 계시고 다른 사람들보다 허약하신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비록 소유가 적어도, 비록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적어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은 고사하고 앞으로 백 년도 살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오늘 하루 지금 나에게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며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이제 시작된 한 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 그것이 크고 풍성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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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5. 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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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상한 가치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을 더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정의, 사랑, 자유와 같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치보다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재물, 권세, 특권 등에 우리의 마음이 쉽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신앙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바라볼 때도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중요하게 고려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얼마나 화려한지 혹은 교인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등에 더 집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저 천국에 우리의 시민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손해를 감내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오늘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의 자세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절)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내리는 믿음의 정의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나의 삶에 성취된 것처럼 그 말씀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우리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어디 그뿐인가요?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근거로 여러분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들이 아무리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는 때로 질병으로 아파하고, 삶의 여러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나에게 지금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차이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무시해 버리기 일쑤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이 말씀하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바로 지금 하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바로 이곳에서 왕 같은 제사장답게 우리의 사명을 위해 묵묵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현실이 절망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능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 믿음은 마침내 보이지 않던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눈에 보이는 현실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 3절에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절)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본문 3절 하반절의 의미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어떻게 말씀하시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금 우리가 눈으로 분명히 보고 있는 것들이 과거에는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심지어 믿음이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다 보면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강조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구약성경의 수많은 예를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먼저 아브라함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을 주십니다. 너를 통해 큰 자손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땅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통해 바다의 모래와 같은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지금 아들 한 명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 좋은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한평생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믿음이 있기에, 그는 과거의 이름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갑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때가 이르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 주어지잖아요.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믿음의 역사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한 사람은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모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애굽, 이집트의 그 막강한 군사력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민족이었지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리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불가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애굽의 화려한 궁궐을 다 뒤로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자신의 삶을 바치잖아요. 마침내 세월이 흘러 모세의 마음에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가 되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은 내일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면, 오늘과 동일한 내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득한 새로운 내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기 때문이지요.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지금 나의 눈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귀에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약속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절망과 고통과 아픔뿐이라고 가슴 답답해하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의 비전으로 삼아 한 걸음씩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위해 나아가십시오. 바로 그것이 믿음이요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기에, 마침내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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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10. 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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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어번 컨페셔널(Urban Confessional)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어번 컨페셔널’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도시의 고해성사실’ 정도가 됩니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벤 매시스라는 남성은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여러 방송과 영화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활동했습니다. 26살에는 결혼도 하고 하던 일도 잘 풀리면서 모든 것이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벤 매시스에게도 인생의 큰 위기는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결국 이혼으로 끝났지요. 그렇게 인생의 한 부분이 크게 무너진 채 자신의 일터인 스튜디오로 가던 2012년 5월의 어느 날, 벤 매시스에게 어느 노숙인이 찾아와서 돈을 구걸했다고 합니다. 벤 매시스는 그 노숙인에게 당장 나눠줄 수 있는 돈은 없었다고 그래요. 그 대신 그의 마음에 한 가지 마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안했습니다. “저와 함께 기도하시겠습니까?” 매시스는 그 노숙인과 함께 기도했고 매시스는 두 사람이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벤 매시스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생각 끝에 떠올린 것이 “프리 리스닝”(Free Listening)이었습니다. 아래의 이미지는 어번 컨페셔널의 홈페이지 첫 화면입니다. 왼쪽의 한 남성이 허름한 판지에 프리 리스닝이라는 글씨를 쓰고 들고 있지요. 벤 매시스가 거리에서 저런 판지를 들고 서 있었던 것이지요. 예전에 “프리 허그”(Free Hug)라는 운동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곤 했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조건 없이 안아준다는 운동이었지요. 벤 매시스는 “프리 리스닝”이라고 해서 누구든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벤 매시스가 “프리 리스닝”이라는 글씨를 들고 거리에 서 있기 시작한 첫 번째 날,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벤 매시스는 일 년 동안 매일 네 시간씩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놀랍지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했는데, 이혼으로 망가진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Urban Cofessional Home Page (https://urbanconfessional.org)

이후 벤 매시스는 프리 리스닝을 함께 할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매우 단순한 다섯가지 지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프리 리스닝은 봉사자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할 것. 둘째, 80대 20의 불균형 대화를 준수할 것. 봉사자는 전체 대화의 20% 이하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셋째, 공감하고 동의할 것. 상대의 이야기에 반박을 하거나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비언어의 요소를 사용할 것. 예를 들어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 꽤 어려운 지침입니다. 침묵을 존중하기입니다. 상대방이 말을 잇지 못할 때에도 그 중간의 침묵을 나의 말로 채우려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번 컨페셔널의 다섯 가지 지침에 대해, 임상심리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칼 로저스는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감하며 경청하는 것은 개인을 치유하고, 사회문제를 완화하며,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 나의 이야기를 대화의 20% 이내로 한정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사회적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다툼을 하지 말라

디모데전후서의 중요한 주제는 경건입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게 섬기는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언어생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곧,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언어는 주로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언어생활은 일차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경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수직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우리의 언어생활이 중요한 역할을 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확고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을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생활이 반드시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언어 생활에 대해 권면하는 장면을 묵상하면, 좋은 말, 바른말, 진리의 언어를 말하라고 권면하기에 앞서 언제나 먼저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해 반드시 조심하고 피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4절) 

경건한 언어 생활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말다툼입니다. 말다툼이 우리의 경건을 얼마나 크게 해치는지, 사도 바울은 매우 강한 어조로 말다툼을 경고하지요.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그러므로 말다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안 할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게 섬기는 경건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말다툼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회피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서로에게 엄히 경고할 정도로 말다툼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성도님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킬 때, 반드시 강조하는 교육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논쟁에서 이기고 영혼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보면 서로 의견이 다른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신앙의 열정이 지나치면 불신자들과 논쟁에서 이기려고 달려드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그 어떠한 전도 현장에서도 상대방을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논쟁에서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때,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만 잘한다고 핀잔을 주면서 그냥 떠나가버리지요. 그래서 전도 훈련을 시킬 때 이 점을 꼭 강조합니다. “논쟁에서 이기고 영혼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전도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경건 생활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의 갈등 혹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이 말다툼으로 이어졌을 때, 치밀한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을 말다툼에서 이기면 그 갈등이 종결되나요? 아닙니다. 말다툼에서 내가 이기려 들면 이기려 들수록 갈등은 더 깊어만 집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은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말씀한 뒤에, 말다툼이 낳는 패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네, 그렇습니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한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오늘 본문에는 경건한 언어 생활을 위해 성도들이 피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고 말씀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6절) 

여기에 “망령되고 헛된 말”이 등장하지요. 이 구절은 표준새번역에서 “속된 잡담”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언어생활을 위해 우리가 피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속된 잡담입니다. 사도 바울은 속된 잡담이 낳는 결과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다음을 주목해 보세요.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여기에서 ‘점점’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속된 말들,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을 한 두 번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큰 잘못을 범하는 것도 아니고 큰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의 입술에서 속된 잡담이 나오기 시작하면 나의 마음과 나의 행동이 ‘점점’, 지금 당장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해지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하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은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를 말하고 듣는 나의 마음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일 악한 말이나 상대를 공격하는 언어를 사용하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리 없지요.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악한 말이나 상대를 공격하는 언어를 말할 때 그것을 말하고 동시에 그 말을 듣는 나의 마음이 사실은 가장 크게 상처를 입어요.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언어에 담겨있는 능력과 힘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에서 바울은 언어가 발휘하는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7절) 

사람들의 언어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말과 더불어 악한 말도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속된 잡담이 쌓이다 보면, 결국 진리를 거스르게 됩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8절) 

처음에는 그저 우스개 소리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저 속된 잡담이었어요. 그런데 한두 마디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경건으로부터 멀어지더니 마침내 진리에 대하여 그릇되고, 믿음이 무너지더라는 사실입니다. 


경청으로부터 배우는 대화법

설교를 시작하면서 벤 매시스라는 남성이 시작한 프리 리스닝 운동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요. 프리 리스닝이 점차 확대되면서, 애리조나주립대학의 세라 트레이시 교수가 프리 리스닝을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학의 학생들에게 과제로 내주었다고 합니다. 세라 트레이시 교수가 프리 리스닝을 과제로 내준 중요한 이유는 점점 미국의 대학생들이 스마트폰과 SNS에서의 소통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사람과의 대면 접촉이 줄어들고 소외감이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과제를 수해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캠퍼스 안에서 더 많은 학생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라 트레이시 교수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프리 리스닝을 할 때 준수해야 할 지침들이 있었지요. 이 모든 지침은 경청, 곧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훈련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프리 리스닝 과제를 수행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경청, 곧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이 훈련을 시행하면서 비로소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는 대화법을 터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제를 수행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경청하면서 비로소 대화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저는 동일한 원리가 경건한 언어 생활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나의 신앙생활을 넘어 나의 경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의 언어를 경건한 언어로 바꾸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나의 주장과 나의 목소리를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말다툼을 피하고 망령되고 헛된 말 곧 속된 잡담을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나의 목소리를 줄이고 나의 주장을 죽이면 비로소 우리의 언어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가득하게 되는 경건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19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말씀합니다. 여기서 ‘터’라는 단어는 건물의 기초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성전과 같이 중요한 건물에는 기초석을 세울 때 그 돌에 유명한 글귀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도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라고 말씀하면서, “인침이 있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며 구약의 두 구절이 마치 성전의 기초석에 새겨진 듯 묘사하고 있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진리의 기초는 언제나 든든히 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의 말다툼이나 헛되고 망령된 말에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무수한 거짓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진리의 터는 언제나 든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망령되고 헛된 잡담이 계속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교회의 터가 되는 진리의 말씀이 점점 사람들의 눈과 마음에서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금 인간의 헛된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든든한 기초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찾는답시고 우리의 언어를 계속해서 더해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요. 그 대신 말다툼을 멀리하고,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나의 목소리를 줄이고 나의 주장을 죽이다 보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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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9. 2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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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행복의 조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 가운데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먹고사는 욕망의 수준에 약간 미달하는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의 자만에 비하여 절반 정도밖에 남이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힘을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마지막 다섯째, 자신의 연설에 청중의 절반 정도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만한 언변.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은 그 주제만 나열하면 재물, 용모, 명예, 체력, 언변으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행복의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야기가 오늘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유는 각각의 항목이 독특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 항목을 어느 정도 소유했을 때 행복한지에 대한 플라톤의 의견이 독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물과 용모와 명예와 체력과 언변이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을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갖추었지만 동시에 조금은 부족한 듯 느껴질 때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적합한 조건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행복을 위한 비슷한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지혜의 책이라 불리는 잠언에는 아굴의 기도가 소개되어 있지요.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8-9) 

성경은 분명히 아굴의 기도가 행복한 삶을 위한 가정 적절한 조건이라고 말씀합니다. 일찍이 플라톤이 깨달은 것처럼, 재물과 용모와 명예와 체력과 언변에 있어서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갖추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족한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라는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을 위한 조건을 갖추고 계신가요?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차고 넘치는 재물을 소유하고 계시지는 않으시죠? 여러분의 용모는 보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만큼은 안되시지요? 여러분들이 소유한 명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칭찬할 정도가 아니시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지난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의 크신 은혜라” 노래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부족함 없이 베풀어 주셨잖아요. 그러니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조건, 아굴의 기도가 가르치는 행복에 대한 지혜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위한 최고의 조건을 이미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 이미 갖추어진 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장애물: 다른 교훈

오늘 본문의 핵심 주제는 경건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경건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설명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경건으로 번역하는 헬라어 단어는 ‘유세베이아’인데, ‘좋은’ 혹은 ‘옳은’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유”와 ‘경배한다’ 혹은 ‘섬긴다’는 의미의 어근 “세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 경건이라는 뜻의 헬라어 ‘유세베이아’ 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노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교회를 목양할 디모데에게 사역의 목표와 자세를 권면하는 편지입니다. 당연히 디모데전서는 어떻게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목양할 것인지, 곧 그들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이끌 것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경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그 일에 장애물이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꼭 집어 알려주지요.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데 장애물로 작용하는 요소로 가장 먼저 오늘 본문은 “다른 교훈”을 말씀합니다. 우리 함께 본문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3절) 

3절에 “다른 교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다른 교훈을 따라간다는 것을 3절은 계속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 한마디로 바른 복음의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하지만, 애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박하고 복음의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모든 노력들이 “다른 교훈”이지요. 한마디로 이단의 사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면 다른 교훈, 곧 복음의 바른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단의 사설을 따라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4절부터 나옵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4-5절) 

이 모든 해악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3절에 등장하는 “다른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진리에서 벗어난 거짓 진리요 이단의 사설이지요. 

복음의 진리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출석하다가 다른 교훈, 곧 이단의 사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열심히 예배를 출석하셨던 분들이 이단 사설에 빠지는 경우는 너무도 많지요.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분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크게 보아 두 가지 특징을 갖춘 분들이 이단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신앙생활에 열심이신 분들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론입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는 사람들, 종교적인 열정이 없는 분들, 그래서 교회를 출석할 때도 주변에서 열심히 권면해야 한번 예배에 참석해주시는 분들은 교회 활동도 열심히 안 하지만 이단에 대해서도 별과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질문을 아무리 던져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분들의 첫번째 특징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시는 분들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두 번째 특징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종교에 대한 열정은 있는데, 그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의 감격이 없다는 것이 그 두 번째 특징입니다. 나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있고 나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가득 넘치면 본문 3절의 표현 그대로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라가게 되어 있지요. 당연히 다른 교훈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열심은 있고 신앙에 대해 관심도 많지만 그리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그 마음에 복음에 대한 확신도 없고 구원의 감격도 없으니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거기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가운데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고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바로 지금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찾아가셔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도 다시 살아나고 나의 인생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구원의 확신과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충만히 흘러넘쳐 이단의 사설이 조금도 발 붙이지 못하고 바른 경건의 말씀만 따라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경건의 장애물: 욕심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바른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요소를 지적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다른 교훈이지요. 그러면 다른 교훈을 따라가지 않고 나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있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만 따라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경건의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물이 있으니,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욕심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9절) 

바울이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과연 얼마나 욕심을 부리면 바울이 지적하는 탐심의 올무에 걸려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기준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바울은 부유한 사람이 시험과 올무와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지 않고 부유해지기 위해 온통 마음과 정신을 재물이 쏟는 사람, 곧 부하려는 사람이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하기 때문이지요. 본문 10절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0절)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돈을 좋아해야, 그것이 악의 뿌리가 되어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까요? 이 역시 사람들마다 그 기준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곧 욕심과 탐심은 경건을 방해하는 매우 무서운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중략)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혹 여러분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거부하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아니,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투자하고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그렇게 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싶으신 분이 계신가요? 성도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오만한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처음부터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재물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돈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참된 경건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따라가며 참된 경건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참된 경건을 위해 욕심을 포기할 것인가?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6절) 

경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기본 바탕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욕심과는 정반대의 마음이지요.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족하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7-8절)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태어났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매일 양식을 먹었고 의복을 입었고 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필요한 모든 것을 사용하며 살아왔잖아요.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져 주신 결과가 아닌가요? 그러므로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나의 노력이나 나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강조하는 자족이요, 그러한 자족을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경건과 행복의 길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을 위한 조건을 이야기했지요. 재물, 용모, 명예, 체력, 그리고 언변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행복의 조건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재물이나 용모나 명예가 아니기에, 실상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갖추고 있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행복의 조건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마음에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지는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하나의 대답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나에게 이미 주어진 조건에 자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지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지금도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뿐 하나님께서 이미 선물로 주신 것들을 누리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주신 선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족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경건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베풀어 주신 행복의 조건을 실제로 나의 삶 속에서 행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성도들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기가 막힌 조건을 하나님께서 주셨네요. 그것 역시 우리들의 노력이나 성취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복음의 은혜죠. 시편 34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복음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하나님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추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교훈은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도 내버리십시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더 많이 성취하기보다 아미 선물로 주신 것에 감사하며 즐거워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도 바른 경건의 길을 걸어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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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9. 2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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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란에서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명의 아내를 얻은 야곱에게 하나님은 열두 명의 아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열두 명의 아들은 이후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아들을 낳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은 여인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1절) 

레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마음은 신뢰를 원하고 여성들의 마음은 사랑을 갈구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은 그의 남편 야곱입니다. 결혼을 하여 야곱을 남편으로 받아들였지만 정작 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레아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녀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헤아리셨고 그에게 태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레아가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레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녀를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여 주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괴로워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신을 돌봐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첫번째 아들을 낳은 뒤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하지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32절) 그뿐이 아닙니다. 레아가 둘째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부르며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33절) 

때로는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그토록 원하였지만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본다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 외에 많은 선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치 레아에게 남편의 사랑은 없었지만 그만큼 여러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따스한 손길로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실망만 남깁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레아였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그녀의 형편을 보살펴주셨지요.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남편의 사랑만을 갈구합니다. 첫 번째 아들 르우벤이 태어났을 때 레아가 했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2절) 

레아는 아들을 낳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기대하지요. 그러나 첫 번째 아들을 낳아도 그녀의 기대는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두 번째 아들 시므온을 낳게 하시고 이어서 셋째 아들 레위를 낳게 하셨습니다. 이때까지도 레아의 관심은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가에 고착되어 있었어요.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4절) 

여기에 조금도 변하지 않는 레아의 마음이 드러나지요. 결혼을 하였고 그 사이에서 자녀도 낳았지만 레아는 남편 야곱과 마음으로부터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죠.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잖아요. 이제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레아 자신과 연합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창세기를 계속 읽어보면, 레아의 이러한 기대와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야곱은 레아가 아닌 그녀의 동생 라헬을 한평생 변함없이 사랑했거든요. 라헬이 베냐민을 낳는 과정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라헬이 그에게 남겨놓은 두 아들 곧 야곱과 베냐민을 끝까지 사랑하거든요. 레아는 아들을 낳으면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아들을 세 명이나 낳았으니 남편과 마음으로 연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그녀의 기대는 실망감만 남겼어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기대는 그 대상이 비록 나와 가장 가까운 남편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실망만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참 다행히 오늘 본문을 보면 레아는 네번째 아들을 낳으며 비로소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시선을 남편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옮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35절) 

남편의 사랑은 이제 포기했습니다. 그대신 자신의 형편을 불쌍히 여겨 네 명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즐거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레아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기대를 걸고 소망을 찾고 계시나요? 사람에게 기대하고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우리는 실망하고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나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그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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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9. 2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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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야곱에게 하나님이란 아버지 이삭이 섬기는 하나님이었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할아버지를 이어 아버지의 집을 부유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부유한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유산으로 받고 싶은 마음에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장자에게 다른 아들보다 두배의 유산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처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멀리 도망쳐야 했지요. 얼마나 달렸을까요?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그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 GPS도 없고 지도 한 장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밤이 되니 앞뒤 좌우를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던 야곱은 노상에서 잠을 청합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1절)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13a절)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야곱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이 지금 야곱 자신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야곱 자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3b-15절) 

바로 이 장면에서 야곱은 할아버지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들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이렇게 소리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6-17절) 

야곱은 날이 밝자 그곳에 기름을 붓고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붙였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삭의 집에만 계신 분으로 알았지요. 그런데 정처 없이 달려온 자신을 찾아와 바로 그 자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곧 아버지의 집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벧엘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버지의 하나님이 자녀의 하나님으로 변화되는 장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의 하나님이 되는 결정적인 장면은 언제였을까요? 아마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품 안의 자식으로 양육하던 단계를 넘어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내어 드릴 때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들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그의 아들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다툼으로 이삭은 어쩔 수 없이 야곱을 하란으로 내보내었지요. 더 이상 자신의 집에서 양육하지 못하고 저 멀리 떠나보내며 하나님의 손에 아들을 맡겨 놓을 때 하나님은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에서 그의 아들 야곱의 하나님, 곧 벧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후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이 그의 아들 요셉의 하나님이 되는 과정도 동일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였던 아들 요셉을 그의 집에서 양육할 때까지 요셉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이었겠지요. 그러나 형들의 미움과 폭행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애굽으로 팔려가면서 비로소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요셉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모든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바로 그때, 그리하여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그때 하나님께서 벧엘의 하나님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하나님이 이제 아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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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9. 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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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의 다툼은 결국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멀리 하란으로 도망하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본문은 야곱이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다시 한번 축복하고 또 권면하는 장면입니다. 


결혼에 대한 권면

창세기를 계속해서 묵상하는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친정이 있는 하란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만 떼어놓고 읽어보면, 이러한 긴박한 사건의 흐름과는 달리 이삭이 마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아들 야곱을 하란 땅으로 보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특별한 목적이란 야곱의 결혼이지요.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1-2절)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나이 많은 종을 하란으로 보내었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던 종을 하란으로 보내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3-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향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가나안에서 대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혼은 그 지역에 동화되는 종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가나안 백성들 사이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믿을만한 종을 멀리 하란까지 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동족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게 합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이삭도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신의 아들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야 했을 때,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자신의 동족과 결혼할 것을 권면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은 가나안이지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 민족의 정체성도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천국 시민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유혹이 끝없이 찾아오지요. 바로 이때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멀리 하란으로 믿음직한 종을 보내어 그곳에서 며느릿감을 찾아오게 했던 것처럼, 마치 이삭이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며 그곳에 아내를 만나 결혼하라고 권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언약의 계승자가 아니더라도

이삭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어 가나안 여인이 아닌 자신의 동족과 결혼할 것을 권면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행동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가운데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4절)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이 구절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은 곧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인데, 그 언약이 이제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로 계승되리라는 선포나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계승자는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여 하란으로 보내는 이 장면이 그의 형 에서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8-9절) 

에서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민족의 정체성을 철저히 지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이어졌지만, 에서 역시 이삭의 아들로 자신의 민족적 순수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결혼과 같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도의 순서성과 정체성을 온전히 지켜온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미 가나안의 여인과 결혼한 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의 중심 주인공이 되었든 혹은 에서와 같이 주변 인물이 되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마치 야곱만 아니라 에서도 이삭의 아들로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이삭의 아들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듯, 우리도 성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주셨으니,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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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9. 1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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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란 놀라운 특권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부르며 그 하나님께 기도로 나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과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선고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자신의 소원을 아뢸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는 존재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그저 어딘가에 있을 능력 많은 신적 존재를 향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류를 누리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정확히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정확히 우리의 모든 초점을 고정하는 성도들의 이러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사하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강조하면 은연중에 기도라는 특권은 내가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가르치면도 동시에 기도는 모든 성도들의 사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맡겨주신 역할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셨기에 다시 한번 힘을 내어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명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기도는 특권이면서 동시에 사명입니다. 기도는 특권이면서 동시에 사명이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기도를 잠시 쉬고 싶을 때에도 다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목양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를 권면한 편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디모데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집중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첫째로 권한다는 뜻은 권면의 순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1절) 

디모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목양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의 사명이지요. 바울이 강조하는 기도의 사명은 교회를 목양하는 디모데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일을 맞이하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봉사하는 손길이 필요하지요. 어떤 분들은 예배를 위한 시설을 관리하고 또 어떤 분들은 주방 봉사나 주차 관리로 수고해주시고 또 어떤 분들은 안내위원이나 봉헌위원으로 봉사해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봉사하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집중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의 사명입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가 아니라 직정이나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일을 처리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받으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과 자녀들을 돌보는 귀한 사명을 맡은 분들도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장소나 내용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요? 역시 기도의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명의 은혜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장소가 다르고 사명의 종류가 다르죠. 그러나 그 모든 사명을 충성스럽게 담당하기 위해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의 사명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우리 모두가 최우선순위에 두고 감당해야 하는 기도의 사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도이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곧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기도의 사명은 첫째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기도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는 본문 1절을 묵상하면, 모든 성도들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간구의 기도를 넘어 보다 다채롭고 보다 폭넓은 기도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시면, 기도의 종류가 네 가지나 등장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간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여 감사하는 기도까지 기도의 다양한 형태와 내용이 이 짧은 구절에 등장하지요. 어떤 분들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으니 우리는 바울이 어떠한 의미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대목을 묵상하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단지 하나님께 나의 소원을 아뢰는 간구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는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첫 번째 기도의 유형은 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기도의 사명은 간구의 기도에 머무른 것이 아닙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는 다채로운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또 한 가지, 본문 1절에서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만을 위한 기도도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인 예가 등장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하라 (2a절) 

이 말씀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하지요. 그런데 바울이 기록한 이 글을 초대교회 성도들이 읽었을 때에는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기독교가 로마 제국 안에서 큰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 중에도 종교적 편향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이지요. 그런데 당시 로마의 고위 관료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여 기독교를 비방하고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을 때, 그 권면은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을 가장 크게 괴롭히는 사람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그 대상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성도들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그들이 교회의 미움을 받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기독교를 박해하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고 도고하고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3절)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위한 기도의 사명을 받았을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물론 나 자신을 위한 기도 포함됩니다.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가 포함됩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도 포함되고, 내가 자주 마주치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도 포함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 그리하여 내 마음에 가장 미움이 생기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선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곧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기도의 사명은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기도의 사명을 말씀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요. 바울은 이제 그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원하시느니라 (4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구절에도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온갖 박해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들만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곧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교회를 박해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들도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구원을 받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바울의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모든 사람,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바울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6절) 

본문 6절에도 “모든 사람”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네요. “모든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만 더 반복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본문 6절의 “모든 사람”은 기독교인들,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신실한 성도들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이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 기독교를 박해하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포괄하는 표현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시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저 이방인들 심지어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역경에 빠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죄인이었을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십자가 위에 내어주셔서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기 대문이지요. 똑같습니다. 지금 누군가 나를 괴롭힙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가 아직 죄인으로 살아가는 그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증명하고도 남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다면 우리 성도들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사명, 그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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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