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2. 9. 1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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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청각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 교육자요 또한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였던 헬렌 켈러(Hellen Keller)가 진정한 행복의 조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온다.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던 “가치 있는 목적에 대한 헌신”을 기독교에서는 사명이라고 부르지요. 곧, 사명을 위하 살아가는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소명>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 가운데 
현대 서구 문명은 인생의 목적에 관해 합의된 대답이 없는 최초의 문명이다. 
현대인의 고민은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와 오스 기니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되지요. 진정한 행복은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자연스러운 결과로,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참된 목적은 너무도 빈약하니 그 어떠한 소유나 그 어떠한 성취로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의 은혜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는 바울의 후기서신으로 구분합니다. 바울이 많은 서신서를 기록하였는데 디모데전서는 그 저술 시기가 다른 서신서들보다 늦게 쓰였기 때문이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바울은 이미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목양했던 바울이 이제 자신을 이어 교회를 목양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어떠한 자세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편지로 기록해준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생애에 있어 디모데전서는 그의 노년 시기, 그것도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시기에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노년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상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노년이 되어 지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사역을 되돌아보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b절)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라는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직분이나 사명은 성도들이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힘들 때도 많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지만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니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의 결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직분이나 사명은 감사한 마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직분이나 사명 자체가 감사의 중요한 이유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헬렌 켈러가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치 있는 목적,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과 사명에 헌신할 때 찾아옵니다. 그러니 인생의 참된 목적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직분과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는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합니다. 곧,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귀한 사명이 주어질 이유나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충성되이 여긴다는 것은 충성스럽다는 것과 다른 말이지요. 바울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겨주시니 은혜입니다. 마치,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인으로, 곧 성인들의 모임인 성도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시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3절)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바울에게 사도의 직분과 사명이 주어질 만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13절에서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에 주목하지요. 무지할 때에는 비방자와 박해자로 살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뒤로는 충성스럽게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구절은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가 아니라 “긍휼은 입은 것은”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는 이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요. 바울은 복음에 대한 비방자로 살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로 살았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폭행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 모든 죄악도 그저 모르고 한 것이 아니냐고 애써 덮어주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불러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4절)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감사 제목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큼 풍족하지는 않아도 근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가족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 안에서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하지요. 우리에게 출석할 수 있는 교회를 허락하여 주시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리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에 못지않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로 집사로 권사로 혹은 장로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분과 그에 따르는 사명을 주신 것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직분과 사명을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충성스럽게 여겨 직분과 사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원의 은혜

노년의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사도라는 귀한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생에 변함없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다보니, 당시 교회 안에 회자되던 하나의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그 격언이 오늘 본문 15절에 등장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5절) 

15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당시 초대 교회 안에 성도들이 자주 인용하였던 격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격언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었다는 의미지요. 그러면 당시 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격언이 무엇입니까? 15절 중간에 등장하네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지금 인용하는 격언은 바로 위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감사의 이유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무엇에 대해 감사했습니까? 자신에게 직분을 주신 것, 자신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일에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 인용하는 격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말씀이잖아요. 계속되는 16절도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절) 

이미 노년이 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사명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의 은혜를 깊이 헤아려보니 또 하나의 은혜가 떠오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이었던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속해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노년이 된 바울이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며 자신의 한평생을 온전히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두 가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곧 구원의 은혜 그리고 사명의 은혜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이 두 가지 은혜가 바울 자신의 삶에 가득하였기에 그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초대교회에는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하나의 격언이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울이 처음으로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회자되고 있던 말씀이었고,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마태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당시 세리는 죄인들의 대명사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고 그 과정에서 징수한 세금의 많은 몫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던 세리는 모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만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자리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당시 유대인들은 당연히 남자들 중에는 세리요 여자들 중에는 창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서 세리의 일을 하고 있는 마태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러자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기 시작했지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따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이 장면을 마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마태는 세리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부터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줄곧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시고 자신의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고 계세요. 마태의 입장에서 그 장면이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죄송했을까요? 그렇게 가시방석에 앉아 어찌할지를 몰랐던 마태의 귀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거든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는 자신의 귓가에 들렸던 예수님의 이 말씀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어요. 비록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태의 마음에는 이 말씀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너는 죄인인데, 너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세리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겠느냐고 비난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되새기지 않았을까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후 바울이 사도가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마다 그의 발목을 붙잡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라고, 너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는 비난이었지요. 그때마다 바울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는 말씀이 있었으니,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과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림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사명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혜도, 그리고 사명의 은혜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사명을 맡겨 주시니,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달려가십시오. 그렇게 주변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달려갈 때,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던 그 진정한 행복, 곧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목적인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그 풍성한 행복이 사도 마태나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도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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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9. 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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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가정에는 식솔도 많았고, 아브라함이 부리는 종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일솜씨도 똑 부러지는 종을 고르고 골랐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맡기려는 일은 어그러지거나 실패하였을 때 조금 손해를 보고 마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형제들이 여전히 살고 있었던 하란에 가서, 이삭의 아내감을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아 데려오는 사명을 받고, 하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번 여행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낙타를 열 마리나 끌고 갔는데, 낙타의 등에는 아브라함이 내어준 온갖 좋은 보물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쉬지 않았고 드디어 하란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란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의 종은 계획을 세우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물 곁에서 기다리다가 소녀들이 오면 그들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만일, 어느 소녀가 우물을 길어 이방 나그네인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대접한다면 그 소녀를 낙점하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은 여기에 하나의 조건을 덧붙입니다. 자신이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할 때, 그 요청을 받은 소녀가 자신에게 물을 줄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려온 낙타에게도 우물물을 길어 목을 축이도록 해준다면 그 소녀야 말로 이삭의 아내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계획을 세운 것이죠.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는 여성이라면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물 곁에 있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한 소녀, 리브가라는 이름의 그 소녀에게 계획대로 말합니다. '나에게 물을 좀 주시오.' 그랬더니, 그 소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대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말하며 우물물을 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의 종이 취했던 모습을 묘사해주는 것이 창세기 24장 21절의 말씀이지요.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철저히 준비하였고, 준비를 마치자 곧 출발하여 하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하란에 이르러서도 쉼을 몰랐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위해 기도하였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순간 - 과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인이 이삭의 아내로 하나님께서 점찍어 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 그 순간입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자,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멈춥니다. 그리고 묵묵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과연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이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 점쳐두신 사람인지, 자신의 모든 노력이나 자신의 모든 계획이나 자신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 장면을 묵묵히 바라봤던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요? 리브가가 우물을 길어 아브라함의 종이 데려온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종이 몇 마리의 낙타를 데려왔는지 기억하십니까? 설교의 초반부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모두 열마리입니다. 한 소녀가 열 마리나 되는 낙타에게 우물을 길어 한 마리씩 물을 먹이는 시간.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의 종은 그 장면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준비함 모든 일이 결정되는 시점, 그래서 너무도 중요한 바로 그 시점에,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행위와 자신의 모든 언어를 멈추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잠잠히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노인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지혜요, 그 노인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절정[하이라이트]은 달려가는 것도, 힘껏 소리치는 것도 아니라 
결정적인 그 순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십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때로는 아브라함의 종과 같이 모든 것을 멈추고 묵묵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시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그 시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르렀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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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4. 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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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게 되지요. 우리 시대 젊은 청년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를 원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수저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지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많은 청년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때 오늘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내일을 바라보며 참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희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때, 미래가 낙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여러분의 삶은 낙관적이신가요? 여전히 9개월이 남아있는 올해의 남은 시간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미래는 낙관적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희망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점에서 낙관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낙관이 과거나 현재에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망은 현재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로는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좋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희망을 주십니다. 애굽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희망입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상 적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곧 출애굽의 이야기였지요. 그 옛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다는 이야기는 유대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이야기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던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출애굽의 이야기는 너무도 먼 옛날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던 때를 기준으로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은 천 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거든요. 너무도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 그래서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열 지파에게 일어난 일이었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이스라엘의 열 지파, 곧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앗수르의 민족혼합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거든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너무도 멀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정책은 너무도 명백하게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제국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형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이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15절) 

여기에서 특징적인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상은 무엇입니까? 온 우주 만물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만물의 창조자라고 말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주셨지요.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흔히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 혹은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창조자’라고 묘사하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묘사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주시고 구속하여 주신 사건은 마치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드는 일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가 되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와의 연속성이나 어떠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오래 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출애굽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출애굽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지요. 그런데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계속해서 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을 뒤쫓아오던 애굽의 군대를 바닷물로 물리쳐주신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이 흐르게 하셔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셨지요. 그 장면은 20절에 등장합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처럼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나오게 되는 출바벨론을 예언하는 오늘 본문은 예전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내일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일까요? 과거에 출애굽을 경험했던 민족이니 이후에도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내일을 낙관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사건은 약 천년도 더 넘게 지난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18-19a절)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새로운 역사이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시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약 이천 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사순절, 고난 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는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의 멸망은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기에 지금의 현실을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내일을 낙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매년 반복되는 식상한 이야기요 지금 나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그 어떠한 낙관적인 전망도 불가능하여 소망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한 우리의 심령에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의 자세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내일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지요. 그런데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명령형으로 시작하네요.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명령은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참된 소망을 품은 신앙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십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시지요. 동일한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동안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고 믿으시나요? 앞으로 남은 2022년의 9개월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여러분에게 보이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전 일을 기억하지도 말고 옛날 일은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복잡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지나치게 신뢰하지도 마시고, 여러분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또 하나의 자세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찬송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1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을 때,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많은 노래들이 등장합니다.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과 미리암이 불렀던 찬양이 그렇지요. 모든 대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져주셨을 때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불렀던 찬양도 그 예가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오늘 본문의 약속처럼 자유인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시편 126편을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직접 체험한 뒤에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터져 나온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이 이야기하는 찬송은 조금 다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내일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자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21절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체험하였기에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소망하면서 부르는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기에 그 마음에 희망을 품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부르시는 찬양은 어느 쪽에 가까우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현장을 체험하였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때는 옆에서 누가 찬양을 부르라고 권면하지 않아도 모두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이 나의 삶에 나타나지 않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참된 희망을 부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낙관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라도, “보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쳐나고 여러분의 입술에는 찬송이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그 하신 말씀,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라’는 이 말씀을 
반드시 실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cf. 민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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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12. 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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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라는 분은 『마음을 이끌다』(Leading Minds)라는 책에서 리더십과 리더가 전하는 이야기의 관계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리더들을 3가지로 구분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일반적인 리더’(ordinary leader)로 그들의 특징은 전통적인 이야기,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리더와 구별되는 두 번째 리더는 ‘혁신적인 리더’(innovative leader)입니다. 혁신적인 리더의 특징은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사람입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마지막 세 번째로 구분한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visionary leader)로 기존의 전통적인 이야기와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리더를 말합니다. 당연히 하워드 가드너는 마지막 비전적인 리더가 가장 높게 평가하였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호세아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호세아서와 이후 살펴보게 될 아모서스를 읽어보면 이들은 참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워드 가드너의 구분을 굳이 적용하자면,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이야기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의 사건이요, 또한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곧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고 죄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호세아를 비롯하여 북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가장 높이 평가했던 비전적인 리더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통적 이야기와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곧 내일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지요. 호세아를 비롯한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 위에 현재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는 죄악의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곧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미래를 일구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문장으로 농축되어 있는 구절을 찾는다면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 이야기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전통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네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주셨던 장면, 나아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약속을 체결하는 장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구원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시지요.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10a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두 가지 비유로 표현되어 있네요. 먼저는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연상해보십시오. 그곳에서는 목을 축일 수 있는 한방울의 물만 만나도 너무 귀하죠. 하물며 메마른 광야에서 달콤한 포도송이를 만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삶은 비천했습니다.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셨어요. 그러니 열방에 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바로 다른 어떤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의 하나님 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야기도 이와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와 상관없이 살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친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셨을 때의 감정을 두 가지 비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광야에서 포도”라면 두 번째는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를 경작하는 농부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화과나무에 처음으로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열매는 마치 광야에서 만난 포도처럼 탐스럽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무화과나무에서 귀한 첫 번째 열매를 만난 농부는 그 첫 번째 열매로 만족할까요? 그것이 아니면 농부가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계속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겠지요.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을 만났던 하나님의 마음이요 소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바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서 생각이 멈추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어제보다 더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던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한 문장으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는 전통적인 이야기 외에도 북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죠.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0b절) 

바알브올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의 사건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언약을 맺은 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지요. 그러므로 바알브올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야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바알브올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바로 이것이 지금 북 이스라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현실이라고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무엇입니까? 우상을 좋아하고 우상을 사랑하더니, 결국 우상처럼 가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드러내는 북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죠. 그러나 오늘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기대와 바램과 역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님들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사랑하여 우상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변하는 분들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도사리는 유혹은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기대하시지만, 오늘 내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과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였고 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어느덧 이 세상을 본받아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전통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 북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이야기로 끝이 나지요. 그러면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하였던 비전적인 리더들의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와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모든 이야기를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갈 비전을 노래하는 새로운 이야기는 본문에 없는 것일까요? 물론, 문자적으로는 하나의 문장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절에는 내일에 대한 비전의 이야기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호세아 선지자의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문자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한 문장으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는 충분히 내일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스라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동시에 이제는 그들이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써내려 온 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어요. 그리하여 여로보함2세 때에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영의 시대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그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외부에서는 앗수르와 아람의 위협을 당하며 내부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어요. 이 모든 이야기를 오늘 본문은 단 한 문장으로 농축하여 서술해주었지요. 그러면 여러분, 이제 북 이스라엘이 내일의 참된 비전을 위해 써 내려가야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지요. 지금까지 써왔던 바알브올의 이야기, 지금까지 써왔던 우상숭배의 이야기, 지금까지 써 왔던 죄악의 이야기를 모두 그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야기, 곧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의 이야기를 나의 삶을 써 내려가는 것, 바로 그것이 내일에 대한 참된 비전이라 호세아는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은 어떠한 이야기를 써 내려온 삶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야기는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닮아 우리도 추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이야기, 곧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의 삶을 써 내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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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10. 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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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21년에 출판된 책 가운데 <공간의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코로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나아가 전염병이 앞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어놓고 있지요.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주의 형태와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간의 미래>라는 책에서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생활하는 집의 공간이 좁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집은 코로나 이전이나 코로나 이후나 평수가 똑같은데 왜 집의 공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까? 저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 평일 낮시간에는 식구들이 학교나 직장을 나갔습니다. 주말에만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이 확대되었고 평일 낮에도 가족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이제 집은 가족들이 학교와 직장을 다녀온 후 쉬는 장소만이 아니라, 직장인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업무의 장소가 되고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듣는 학습의 장소도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가족들이 집에서 해야 할 활동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동일한 크기의 집이지만 가족들이 실제로 느끼는 공간은 더 좁아졌다는 설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혹은 과거보다 더 넓어졌는데 실제로 느끼는 공간은 좁아지는 이러한 현상이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방에 요를 깔면 침실이 되었습니다. 그 방에 요를 치우고 밥상을 놓으면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밥상에 음식을 치우면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되었습니다. 방 하나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가정에는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다양한 물건과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8시간만 사용하는 침대가 넓은 공간을 하루 24시간 차지하고 있지요. 거실에 TV를 놓으니, 가족들이 함께 앉아서 TV를 볼 수 있는 소파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을 놓을 별도의 공간이 필요해졌습니다.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을 구비해 놓을 별도의 공부방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냉장고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언제부턴가 김치냉장고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세탁기에 이어 건조기도 생활필수품이 되어 한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만큼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고, 부족한 공간을 늘리기 위해 편법이지만 발코니를 확장하여 실내공간을 넓혔습니다. 그렇게 공간이 확보되니 우리는 다시금 물건을 사들이고 우리 집의 공간은 그만큼 더 좁아지게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더 넓은 집을 소유했지만 역설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호세아서는 1장부터 3장까지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장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호세아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4장에 접어들어,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첫 일성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한마디로 묘사하는데, 그들의 영적 상태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는 “없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1) 

호세아 4장 1절에 “없다”라는 단어가 세번이나 등장하지요.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첫째로, 진실이 없습니다. 둘째로, 인애가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덕목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보존하여야 할 가장 귀한 가치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지요. 

여러분, 호세아가 활동하였던 시대 북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지난 세 번에 걸쳐 호세아서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미 호세아가 활동했던 시대가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였고 그때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부강했던 시대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왕하 14:25) – 이것은 마치 백두에서 한라까지 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소유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가 늘어나니 정작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리할 자리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루는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는 돈을 구걸하는 걸인이 있었지요. 그때 추기경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초대교회의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걸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은과 금이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외치셨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이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은으로 촛대를 만들고, 금으로 교회의 기둥을 세우며, 대리석으로 교회의 바닥을 깔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말미암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 역시 과거와 비교한다면 큰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의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고, 우리 교회는 재정을 사용하여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이요, 감사한 일이지요. 그리나 우리의 소유가 늘어날수록, 우리에게 가진 것이 더 풍성해질수록 중세가톨릭교회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이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그로 말미암은 재물과 권세는 소유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사라지고 없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없고 없고 없다”라고 평가받지는 않겠습니까?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린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와 같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우리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셨어요. 그런데 소유가 늘어나자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가 텅 비어지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눈에 보이는 소유물까지도 모두 사라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호 3:4)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 왕도 없어집니다. 지도자도 없어집니다. 제사도 없어지고, 주상도 없어지며,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였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예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 뒤에 베풀실 새로운 구원의 역사도 말씀하시네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점에서 호세아 4장 5절의 뒷부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참된 회복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회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도, 지도자도, 제사장도, 눈에 보이는 모든 자랑거리를 사라지게 하신다는 예언 하셨습니다. 이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나라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나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회복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이 온전히 성취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옛날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로보암 시대,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바로 그것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향한 진실, 우리의 이웃을 향한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물건들이 가득 쌓일수록 우리의 가정에 가족들이 함께할 공간은 줄어들기 마련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가정에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공간의 미래>라는 책의 저자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리의 관심을 옮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여 나의 사적 공간이 집에 가득 쌓아놓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 가정의 공간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가치 있는 가정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공급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움쳐지려 노력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실과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미 받은 은혜에 자족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손에 금과 은은 부족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능력이 우리 모두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19943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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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6. 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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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교회입니다. 루터는 그 교회에서 3천 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는 이른바 ‘종교개혁 제단화’라 불리는 네 점의 성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대중적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지요.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루카스 크라나흐라는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왼편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맞은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저녁, 제자들과 나누셨던 유월절 식탁을 묘사하는 이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림의 오른쪽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식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식탁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잔을 잡고 있는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잔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크라나흐가 이 그림을 드렸던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총은 사도들이나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성만찬의 떡과 잔도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하였고, 그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금기 사항을 깨고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잔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개신교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잔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리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성만찬의 잔을 일반 성도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성만찬의 잔을 자신의 뒤에 있는 어느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사람의 얼굴은 당시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곧 마틴 루터입니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마틴 루터 외에도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6세기 비텐베르크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열 두 제자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 얼굴과 제자들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마틴 루터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루프트인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던 출판업자입니다. 한스 루프트는 당연히 사도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사업가였습니다. 크라나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며, 출판업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던 한스 루프트를 사도들만 참여했던 예수님과의 최후 만찬 자리에 당당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라나흐 역시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치가 무엇입니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가르침, 곧 마틴 루터가 생명을 다해 전파하였던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 놓았던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온 성전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을 곁에서 섬기는 스랍의 천사들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장 3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의 질문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고 맙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장 5절) 

그런데 여러분, 이사야 선지지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찾아옵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장 6-7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특별히 자신의 입술이 가장 부정하게 느껴졌어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부정하고, 그의 언어생활이 죄로 가득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입술, 곧 자신의 언어생활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입술이 그렇게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손이 부정하고 자신의 손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분도 계십니다. 손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해요.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이사야 59장 6b절)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분들은 자신의 손이 그렇게 더럽고 부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느 부분을 정결하게 하실까요? 그의 손을 정결하게 하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너의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발이 너무도 부끄럽게 여겨지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발이 부정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죄악의 길을 걷고 마땅히 피해야 할 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도 등장해요.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이사야 59장 7a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의 발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발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계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가리고 싶은 부분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세요? 어제도 실패하여 오늘만큼은 또다시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은데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는 지점이 있지는 않으세요? 이사야에게는 그것이 입술이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발이나 또 다른 곳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그 모든 악을 제하시며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명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속죄의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 6장 8a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선지자로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문을 던지며 이사야를 사명의 자리로 초대하시네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라 명령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의향을 질문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답을 합니다.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장 8b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와 사명의 관계인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속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소명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유사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속죄의 은혜가 가득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유익만을 쫓으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속죄의 은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속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이사야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선지자의 사명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장 9절)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세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라니, 이것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한 평생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십니까?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도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장 10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겨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둔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요. 백성들에게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싶었겠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이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보내소서’ 헌신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열려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이 사명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나에게는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저것입니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저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것을 맡기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혜, 대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바로 지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여러분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그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온갖 죄악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징벌과 심판을 선언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동일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회복과 치유의 때도 선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식탁

설교를 시작하며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함께 보았지요? 이 그림에는 오늘 설교의 두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탁을 나누고 계시네요. 그래서 식탁의 한 중앙에는 유월절 어린양이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 그림에 담긴 또 하나의 주제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은 사도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그림에는 마틴 루터와 같은 성직자도 있지만 한스 루프트와 같은 사업가도 있어요.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를 누리는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속죄의 은혜 그리고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오늘 설교의 주제가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보니, 속죄의 은혜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 함께 담겨 있는 장소는 다름이 아닌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며 초대하시는 은혜의 식탁이네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 싶으시나요? 지금도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과거에 실패하셨더라도 괜찮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셨더라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참으로 원하시나요?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쓰임 받을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일이 서로 달라 어리둥절하여도 괜찮아요. 주님과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며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그 소명에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요, 
여러분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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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5. 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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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장 1절)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높이 머리를 들어야 했을까요? 저 높은 하늘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도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분의 옷자락을 통해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는 의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의복을 통해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청색에 가까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청색으로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청색이 높은 신분을 나타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푸른빛을 내는 염료가 당시로서는 너무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짙은 청색의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한눈에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색깔과 함께 의복을 통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이 또 하나 있었는데, 옷의 길이입니다. 옷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신분이 높다는 뜻이었지요. 그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옷감이 귀했던 시대잖아요. 그런데 많은 옷감을 들여 옷을 길게 지어 입을 수 있다면 당연히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하나님의 모습은 저 높은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의 성전까지 그 옷자락이 이어졌고,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높으시며, 가장 거룩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 6장 2절) 

여기에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가 등장하네요. 우리는 스랍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중요하게 묘사하는 장면은 그들의 날개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6개의 날개가 있었습니다. 두개의 날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렸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랍이라 불리는 천서까지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본문 2절은 스랍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의 의도는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존재를 자세히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랍들조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 위해 분주할 만큼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면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장 3절) 

본문이 묘사하는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곧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땅에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장을 읽으며 우리가 배우게 되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살핌 등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이해가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분문에 등장하는 스랍들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급급하겠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에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으로 우리를 세밀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뚝발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모습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로마서 11장 22절)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은혜만을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면 이후로 그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자세와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6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1절 처음입니다. 본문 1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오늘 우리에게는 이 표현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웃시야 왕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52년이 남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앉아 있을 때 국방은 튼튼했습니다. 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은 융성했습니다. 에시온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여 국제무역을 통해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한 번성과 융성의 시기를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제 나라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에게 찾아온 첫번째 변화는 그의 관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죽음이 초래하는 정치적인 변화도 중요하지요. 그가 이루었던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요. 웃시야의 죽음을 틈타 남유다를 노리는 주변 나라들의 동태도 잘 살펴야겠지요.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도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에 집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삶에 대해 탄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관심사가 바뀌고 나니, 이제는 그의 행동이 하나씩 바뀝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신중하게 내뱉었을까요? 선지자로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거룩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8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이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장 17절)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이 경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도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도 거룩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장면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여러분, 제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영광 중에 이 성전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니 우리 인간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예단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그 장면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보여주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경에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읽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지만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그 장면을 묵상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이라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 _ 거룩하신 씨앗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며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들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 6장 11-12절) 

본문 11절과 12절은 분명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갖 죄악에 빠져있는 유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구절 안에 유대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나요?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죠?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가 묻는 ‘때’는 회복의 때, 치유의 때,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은 죄악이 횡횡한 시대입니다. 지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게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시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어둠과 죄악의 지나가고 새로운 회복의 때가 언제 도래하겠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랍게 하나님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답해 주십니다. 12절의 마지막입니다.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때도 심판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때에 일어날 일을 마지막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6장 13절)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밑동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큰 죄악에 빠져있었던 남 유다를 심판 하셨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지요.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본문 13절이 말씀하는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루터기라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본문 13절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 칼뱅은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한 겨울 살이 베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에서 녹음으로 푸르러지듯,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유대 나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는 그루터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 놓으신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이후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동을 거룩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의 마지막 문장은 드디어 거룩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네요.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거룩한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하였던 사람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도 최선을 다하여 거룩으로 바꾸어 가려는 사람들, 그 몇 명 되지 않는 거룩한 씨가 곧 그루터기가 되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하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외면하고, 그저 나에게 복을 주시고 그저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만을 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도 조금씩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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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1. 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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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성경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봄철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맙니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의 육신에 힘이 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고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풀이 마르듯 젊음은 사라지고 건강했던 육신은 질병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더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의 육신도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성경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간이 더 흐르면 마침내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으니 주님의 말씀이요, 곧 세세토록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복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복음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날 다시 오시어 고인은 물론이요 유가족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유가족 여러분, 비록 고인의 육신이 마르고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지금의 장면으로 말미암아 큰 아픔과 괴로움이 엄습할지라도 세세토록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고인에게 영생을 선물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시어 고인과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비록 고인의 육신,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시간이 지나 한줌의 재로 돌아가겠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영원한 복음의 말씀과 같이 고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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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1. 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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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13절)

여기에 등장하는 ‘자는 자들’은 곧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진리란 한번 태어난 인생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죽음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죽음을  경험하셨지만, 돌아가신 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넘어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당시에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의 내용, 곧  죽음의 원인과 죽음을 극복하는 복음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cf 살전  1:9-10).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우리처럼 복음의 내용을 알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마음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던  교회의 형제자매가 원치 않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그의 인생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큰 슬픔 속에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마치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cf. 살전 4:13b)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저 영원한 천국에 있다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같이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아픔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만 같은 큰 아픔이 찾아오면 우리의 신앙도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 오늘 나의 눈 앞에 펼쳐지는 희로애락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 곧 성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소망의 근거 – 예수님의 부활

죽음의 문제, 곧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인 죽음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이라는  뜻이지요. 네, 이것이 죽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떠한 대답도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존에 대해 성경이 내어놓는 모든 대답은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켜 주셔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도 믿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사도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삼켜진 성도들이라도 그 마음에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잠자는 성도들을 먼저 일으켜 주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당한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 공중에 올려진다는 이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이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나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b)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살아남은 성도들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과 마지막 죽음까지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과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 앞에  당한 고통과 아픔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인 죽음을 당한  성도들까지도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고 일으키신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먼저 앞세워 일으켜주시고 그들을 먼저  만나주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형통과 번영을 누리는 성도들만  보호하여 주시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는 여러분들은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과 같은 아픔을 겪는 순간이라도 소망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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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0. 1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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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레미야 46장부터 시작된 이방민족에 대한 예언의 일부입니다. 46장 1절은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시작합니다. 이에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에 이르기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예레미야 49장은 유대 민족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은 다메섹, 게달, 하솔 그리고 엘람에 대한 예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 46장부터 이어지는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과 큰 흐름이 동일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대 민족과 그 주변 나라들을 모두 심판하고 멸망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 

 

태초부터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바로 그와 같은 때였습니다. 과거에 애굽이라는 거대한 제국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앗수르라는 거대한 침략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새롭게 조성하시면서 바벨론이라는 신흥 강대국을 통해 가나안 땅을 포함한 모든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느냐고요? 무엇을 위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느냐고요? 무엇이 다른 나라가 아닌 바벨론을 선택하게 하셨느냐고요? 인간이 이와 같은 질문을 제 아무리 하나님께 던진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 답변을 하나님께 받아낼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역사는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도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여러 민족이 왜 멸망해야 하는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 우상을 숭배했다거나, 사회적으로 불의를 행했다거나, 개인적으로 음란의 죄를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가 본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본문에 등장하는 민족이 죄가 없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유무보다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그렇게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020년는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코로나 바이러스를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전 세계가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태를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역사의 큰 물줄기를 역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새로운 소망의 근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오리엔트 전체를 점령하도록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민족은 물론이요,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운명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23절에는 재앙의 소식을 듣고 그 마음이 평안이 사라지고 낙심이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메섹에 대한 말씀이라

하맛과 아르밧이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흉한 소문을 듣고 낙담함이니라

바닷가에서 비틀거리며 평안이 없도다 

 

바벨론 군대가 몰려오자 마음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나라마다 자신들의 강점으로 여기던 것들이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맙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을 꺾을 것이요 

 

엘람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았던 민족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위기의 시대가 찾아오자 그들의 활은 엘람이라는 나라를 그 위기로부터 구해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대로 바벨론 군대가 몰려오는데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니 궁수부대를 이용해서 바벨론 군대를 막아보겠노라 달려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창이나 활은 잘 쏘지 못하니 과거에 위세를 떨치던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 군대를 막아보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물줄기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으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이든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이든 상관없이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저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기만 해야 할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섭리에 대한 교훈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력한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포기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9절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힌트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말일에 이르러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 당장은 엘람이든, 다메섹이든, 게달이든, 하솔이든 모두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민족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엘람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020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으니, 그 모든 아픔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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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