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9. 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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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율법을 듣다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들 가운데 요시야 왕은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유명합니다. 요시야 왕은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여러 우상 신상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등 남유다에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약 10년의 세월이 흘러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지 18년 되던 해, 그의 종교개혁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던 중 제사장 힐기야가 하나의 책을 발견하였고, 그는 이 책이 모세의 율법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힐기야 제사장은 그 책을 궁궐의 높은 관료였던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하였는데 서기관 사반은 또 다시 그 책을 요시야 왕에게 가져가 그 책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율법책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 왕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왕하 22:11) 

여기에서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찢었다는 의미요, 곧 회개의 표현입니다. 요시야 왕은 그의 마음을 찢듯 그의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13) 

이때로부터 요시야 왕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종교개혁을 더욱 힘있게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야김, 예언을 듣다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남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직접 붓을 들고 기록한 것은 아니고, 선지자가 불러주는 예언의 말씀을 바룩이라는 분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습니다. 

바룩은 그 예언의 말씀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 백성에게 낭독하였습니다. 그 소식이 유대 나라의 고관들에게 들리자, 여러 고관들은 바룩을 불러 다시 한번 그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게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을 여호야김 왕에게 보고하였고, 여호야김 왕 앞에서 바룩이 기록한 예레미야의 말씀이 낭독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전해들인 여호야김의 반응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렘 36:22-23) 

성경은 계속해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여호야김 왕과 그 신하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렘 36:24)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께서 전하신 예언의 말씀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예언의 말씀, 곧 심판의 말씀은 모두 남유다의 현실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두 장면을 통해 너무도 분명한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그의 옷을 찢었다면 우리도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의 말씀을 따라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겼듯이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악을 내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들었다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을 지켜 행 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김 왕도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모세의 율법책이 있었고, 여호야김 왕에게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 적은 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낭독자입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서기관 사반이 율법의 말씀을 읽어 주었고, 여호야김 왕에게는 여후디라는 사람이 예언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이나 여호야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방법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문자로 기록된 말씀을 보았고, 그 말씀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기록된 신구약성경이 있으며, 그 말씀을 낭독하고 풀어주는 설교가 있습니다. 비록 꿈이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성경과 성경을 낭독하고 풀어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호야김과 같이 나의 귀에 들려오는 말씀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마십시오. 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나의 귀에 들려온다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으로 받으시고 순종으로 반응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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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9. 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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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12장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경주는 주로 육상 경기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귀한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것이요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자이기 때문이지요. 

신앙생활을 달리기 시합에 비유하는 것은 오늘 본문 외에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세월 믿음의 경주에 참여하며 힘써 달려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였든지 아니면 오랜 세월 믿음의 경주를 해오셨든지 상관없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신앙의 마지막 목표점에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바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그 다음 구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다짐은 오늘 우리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허다한 증인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 우리가 여전히 믿음의 경주에 힘쓸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허다한 증인’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기에 등장하는 허다한 증인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들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참으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몇 구절만 인용해볼까요? 

먼저 노아에 대한 서술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7) 

이제 아브라함에 대한 구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을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 11:8) 

이번에는 모세에 대한 구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을 지라도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경주를 계속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헌신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 전쟁의 위협, 재난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들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역경이 찾아와도 무릎 꿇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 성경은 이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을 믿음의 경주를 쉬게 만들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주변 환경에 두지 마시고, 여러분의 시선을 성경에 두어 성경이 기록한 성도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물로 주셨으니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새로운 힘을 얻으시고 새로운 용기를 얻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십시오. 성경의 말씀과 그곳에 기록된 믿음의 행적이 여러분의 삶도 믿음의 경주를 아름답게 완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믿음의 주님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두 번째는 ‘믿음의 주님’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주님이 계십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서 11장에는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 성경과 함께 신약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이 소개하는 신앙의 영웅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값진 보물이 담겨있으니 곧 우리 믿음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2절은 우리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수치,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의 아픔을 친히 받으셨지만 그 모든 것을 또한 친히 참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엇때문에 그 모든 아픔을 참으셨다고 말씀합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기쁨,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기쁨,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기쁨을 위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처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우리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지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가장 중요한 세번째는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은혜가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본문 3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곳이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현장이요, 십자가는 인간이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현장이니, 바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이 자신을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난 우리에게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용서가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와도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진 복음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다시금 우리 주님께서 참고 인내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십자가에 담겨 있는 복음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복음의 은혜가 가득히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떠한 인생의 장애물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

설교를 시작하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믿음의 경주로 묘사하는 장면을 소개하여 드렸습니다. 빌립보서의 한 구절이었지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처럼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힘써 달렸던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유언과도 같은 서신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제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이 달려왔던 경주의 마지막 골인지점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우리도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작한 믿음의 경주를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비록 처지와 환경이 어려울 지라도,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이 어려울수록 더욱 힘을 내어 믿음의 경주에 매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이 있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주님이 계시며, 우리의 마음에는 복음의 은혜가 흘러넘치니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장애물들을 넉넉히 이겨내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이 행하는 믿음의 경주를 응원하고 계시며, 여러분이 모든 경주를 완주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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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9. 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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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드기야 왕에게 전하는 장면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남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당시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남 유다를 여러 차례 침략하였고, 여호야김 왕과 여호야긴 왕을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두 명의 왕을 끌고 갈 때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귀한 보물도 빼앗아갔지요. 그런데 민족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1절)

벌써 두 명의 왕이 바벨론에 끌려갔고, 그때 예루살렘 성전의 귀한 기구들도 빼앗겼지만 여전히 성전에 남아있는 기구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남아 있는 기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22a절)

두 명의 왕이 끌려갔고 성전의 기구들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아픔과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견뎌 내야할 재난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예레미야 27장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2020년 9월을 맞이한 우리의 모습을 참 많이도 닮아 있습니다.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코로나19의 위협은 너무도 강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여름은 유독 장마와 홍수와 태풍의 소식들로 가득했지요.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모든 재앙이 이제는 지나갔다고 말할 수 없으니 본문 예레미야 27장의 모습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만은 않습니다. 


멍에를 메라

민족의 재앙, 민족의 고통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와 행동을 권면합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주는 권면은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멍에를 메라'입니다.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12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두 명의 왕을 끌고 간 느부갓네살, 남 유다의 지배자가 되어 백성과 그 땅을 유린하는 느부갓네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귀한 기구들을 모두 빼앗아간 바로 그 느부갓네살을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세상의 권세를 주셨고 그를 세상의 통치자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의 백성도 그를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에게는 무거운 멍에이지만 하나님께서 지우신 것이라면 불평하지 말고 달게 받으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도 멍에를 메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멍에를 벗으라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멍에를 벗어버려야 너희가 참된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멍에를 메라고, 특별히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의 시간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오랜 기간 지속되는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멍에를 달게 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멍에를 회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거부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멍에이니 낮은 자세로 그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 어깨를 짓누르는 멍에를 벗어버리고 싶지만 참고 인내하며 그 멍에를 나의 양 어깨에 얹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 나의 어깨에 있는 멍에를 예수님께서 함께 메고 계시고, 지금 나의 어깨에 있는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이며, 마침내 그 멍에를 메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참된 쉼과 안식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구하라 

시드기야 시대, 남 유다는 고통과 재난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더 많은 재난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드기야 왕과 그 백성들에게 전하는 두번째 권면은 '여호와께 구하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레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 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18절)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야김 왕도 잡혀갔고, 여호야긴 왕도 끌려갔으니 지금까지의 고난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회복의 시간만 남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바램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재앙이 모두 끝나고 새로운 회복의 날이 찾아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라면 마땅히 인간의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소망과 기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과 계획만으로 재앙이 끝나고 회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추지 않는 재앙이 오랜 시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선지자를 비롯한 하나님 백성이 마땅히 만군의 여호와께 기도해야 한다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재앙이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새로운 회복의 시간이 도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큰 재앙이 멈추지 않을 때, 자신의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을 선포하는 대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간구해야 합니다.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우울한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재난이 언제 멈출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멍에이니 피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그저 잠잠히 참고 인내하며 그 멍에를 메십시오. 나아가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이요,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쉼과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b절)

우리의 멍에를 달게 메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그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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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2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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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먼저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의 역할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일부분으로 율법을 삶의 표준으로 살아가는 유대인이나 율법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 

율법을 들었든 듣지 못하였든 상관없이, 마음과 행위로 죄를 범하면 멸망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곧이어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한 문장을 서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3절)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의 율법을 포함하여 신구약 성경이 꼭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율법을 듣는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 이를 신구약 성경에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성경의 말씀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실천할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 역사합니다. 


양심의 역할 

사도 바울은 율법이 있어도 범죄한 유대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율법이 없지만 역시 범죄 하는 이방인은 율법 없이 망하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지요?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통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지만, 이방인에는 율법을 주신적이 없는데 동일하게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인간의 '양심'입니다. 15절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냅니다. 율법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있으니 인간의 양심입니다. 양심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의 것이죠. 사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양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두신 양심은 매 순간 우리를 때로 책망하고 때로 격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 곧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양심의 역할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묵상하면서 양심의 역할을 굳이 이방인과 불신자를 위한 것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지요. 그때 바울을 대적했던 유대인들의 고소로 예루살렘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마침내 바울에게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바울의 첫 일성은 이러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행 23:1) 

우리도 언젠가 "오늘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기대로 오늘 하루 각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을 주셔서 오늘도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심판하시는 그 날

사도 바울은 율법의 역할 그리고 양심의 역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양심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 앞에 심판받게 되는 바로 그 날을 선언합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6절) 

사도는 분명히 "나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한 평생 전했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 날 하나님은 모든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어 하나님께만 눈물로 아뢰었던 우리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렸던 수고의 땀방울. 이 모든 것이 마침내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과 양심을 따라 오늘도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말씀과 양심을 따라 오늘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말씀과 양심을 따라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이 올려드리는 눈물의 기도와 수고의 땀방울을 모두 헤아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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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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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던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로마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있고, 그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마음에 하나의 소원이 생겼죠. 곧, 로마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 그리고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연도 아니고, 한두 사람의 계획이나 생각도 아닙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의 선택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의 계획이나 노력도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 특별히 교회 안에서 만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내 앞에 있는 이웃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바울은 로마교회를 생각하며 그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11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했던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적인 선물을 말하는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성령의 은사일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 특별히 그가 로마서에서 정성을 다하여 기록하는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 파송을 받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바울은 사도라는 직분에 따라 로마로 파송을 받아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면 바울이 꿈꾸는 바울과 성도들의 만남은 한 사람이 전하고 다른 사람은 전해받는 일방통행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 '너희와 나의 믿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로마에는 사도 바울이 방문하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도 믿음이 있지만 동시에 성도들에게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한 사람의 믿음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일방통행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믿음과 바울의 믿음이 서로를 안위하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기를 바울은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교제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비록 사도와 성도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비록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성도의 교제는 피차 안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약해보이고 미숙해 보이더라도 그의 믿음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피차 안위할 수 있습니다. 


길이 막혔도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서로의 믿음을 안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특별히 복음으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만남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지요. 16절과 17절에서 선언하는 것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나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중심으로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서로를 안위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본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지요.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는 로마로 가는 길이 바울에게 막혀있었지만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의 마지막 걸음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로마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은 서로의 믿음을 안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행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올해는 성도의 교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습니다. 비대면을 통한 온라인 기술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한계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표현과 같이 '지금까지 그 길이 막혔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길이 막혀 있지만 로마로 가는 그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였던 사도 바울과 같이,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함께 모여 복음으로 교제하는 그 길이 막혀있는 지금 하루속히 모든 바이러스가 물러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믿음을 안위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마침내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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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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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중순을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을 보낸 것인데, 돌이켜보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바이러스를 피해 다니다 6개월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낸 듯하여 아쉬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한두 주, 길어야 한두 달이면 종식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어서, 한해의 절반을 떠나보낸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론에서는 제2차 유행이나 가을 대유행과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또 한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매우 빨리 변이를 일으켜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오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한 초기부터 인간의 생명과 일상을 크게 위협하는 이 바이러스가 하루속히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주 두 주가 이니라,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반년이 넘어서까지 확산세가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탄식하게 부르짖게 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국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었던 지난 2월, 바이러스의 확산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신천지라는 이단의 실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셨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교회와 성도들을 통한 집단 감염이 발생하였고,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쉽게 답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급기야 이달 초 광주광역시에서는 50인 이상의 실내 모임이 금지되었고, 지난주 전국의 교회는 정규 예배 외의 각종 대면 모임과 활동을 금지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었습니다. 수련회, 기도회, 부흥회, 구역예배, 성경공부 모임, 성가대 연습 모임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니 교회로서는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성경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동일한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이사야 선지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극심한 고통,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아픔,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기나긴 인생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리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탄식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본문이 가르쳐주는 믿음,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시작합니다. 남 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은 전환의 시기를 말합니다. 웃시야는 남 유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왕인데, 그의 치세를 평가하는 역대기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하 26:4-5)

실제로 웃시야가 다스리던 52년의 통치 기간, 남 유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던 웃시야가 죽고 이제는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 번영의 시기와 쇠락의 시가가 서로 교차하는 그 지점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는 시기, 그 전환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눈을 열어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죠. 그곳에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하늘 보좌 앞으로 스랍, 곧 천사들이 시립하여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이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신하들이 시립하여 있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이 위대한 장면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시립하고 있었던 천사들의 찬양은 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주는데요. 오늘 본문 3절에 그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평화의 상징, 번영의 상징이었던 웃시야 왕의 치세 때에도 남 유다에게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허락하셨던 분은 인간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웃시야의 시대가 지나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은 그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바로 그날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도대체 언제 이 사태가 멈출지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향해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 풍요의 시대,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는 시기에도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안의 시대 쇠락의 시대 궁핍의 시대,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도저히 해석되지 않아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는 이 시대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인생길 붙들고 계시다는 이 믿음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어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시하신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어떠한 말씀을 주시는지, 곧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분명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메시지입니다. 계속해서 10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지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쉽게 납득할 수도 없지만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도 결코 선포하고 싶지 않은 메시지였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전하신 말씀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 백성은 그 마음이 더욱 둔하게 되고,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귀가 더욱 막히게 되고, 이사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눈이 더욱 어두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통의 시기,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때까지니이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유대 백성에게 하나님은 왜 굳이 이와 같은 부정적인 말씀을 전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아파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굳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씀을 전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희망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내일이 보이지 않아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시고,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시며, 그들의 눈이 어둡게 하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리 묵상하고 묵상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요. 우리 인간은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깊은 의미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적 한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시대가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날 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 시기를 보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지만, 그저 주어진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코로나 시대를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곳저곳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새로운 길,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서기에 앞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뜻과 계획은커녕 그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울부짖었던 또 한 사람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노래는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애 3:26-28)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그 밑동 말입니다.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이 되는 이 시기를 지나 마침내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의해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는데,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그루터기를 ‘거룩한 씨’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13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작년 우리나라 동해안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온 산을 뒤덮었던 나무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화마 속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남겨져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그 씨앗이 발아하여 새로운 나무가 탄생하고, 새로운 숲을 조성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거룩한 씨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오늘 본문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

나무가 모두 베어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루터기, 온 산림이 불에 타 없어져도 여전히 남아있는 거룩한 씨앗, 겨울철의 한파가 모든 생명 현상을 질식시키는 현장에서도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나뭇가지. 이들은 자연 현상의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고단한 역경의 세월을 그저 묵묵히 인내하여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발아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 인생의 주권자가 되어 주십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하지만, 
인내하며 이 아픔의 시기를 끈까지 견디어 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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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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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분주한 일상을 살다 보니 '희로애락'이 뒤섞인 삶을 살곤 했습니다. 이렇게 도심을 벗어나니 '생로병사'의 주기가 온 세상에 유유히 반복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생' 태어나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고, 늙어 병이 들면 마침내 '사'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은 '사'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니 생로병사의 순환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누구도 예외 없이 '생'을 출발하여 '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끝이 아니기에 다시금 '생'이 되어 생로병사의 주기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가 다시금 '생'이 되는 과정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곧 '생'이 '사'를 경험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곧 '생'이 '사'를 경험하면 다시금 새로운 '생'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죽는 것은 밀 한 알입니다. 그러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는 것은 씨앗 한 알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온 산천을 뒤덮는 푸르름입니다. 

우리는 고인의 육신을 이 곳에 묻으려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고인의 육신을 이 곳에 심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고인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인의 육신은 이곳에 심겨지지만 고인의 영혼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심기는 것은 한 분의 생애이지만 그 열매는 풍성하여 고인의 영혼이 영원한 천국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고인을 기억하는 모든 유가족의 마음에도 영원토록 살아있을 것입니다. 

유가족 여러분, 고인의 육신을 이곳에 심으며 고인의 영혼이 영원한 천국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과 고인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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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1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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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3-18) 

 


발인예배를 시작으로 오늘의 장례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모든 장례 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고인을 떠나보내는 모든 유가족의 마음에 평화와 위로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곧 다시 살아나는 일은 반드시 있습니다.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진리인지 오늘 읽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고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 진대" 곧, 성도의 부활은 얼마나 확실한 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사실만큼 분명한 진리입니다.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요, 역사적 진리인 것처럼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을 믿은 모든 성도들은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반드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본문 15절이 이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곧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경험하신 분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인간은 죽음 이후의 일을 살아서는 목격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체험할 수 없고 알 수 없을 뿐,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 인간은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생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요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고인께서도 비록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였지만 반드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계십니다. 유가족 여러분, 오늘 하루 이 한 가지 진리를 반드시 마음에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부활의 확실한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로 그 목적을 이야기하지요. 그 첫번째 목적은 슬픔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누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비통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유가족 여러분, 오늘 하루 장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에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는 마십시오. 오늘 하루 장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에 상실감과 비통한 마음이 찾아올 지라도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지는 마십시오. 고인은 반드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니, 그 사실을 믿으며 슬픔이 찾아오나 그 슬픔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 유가족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며, 여러분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이 부활의 진리를 강력히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 그 첫번째는 슬픔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함이지요. 본문 16절부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부활의 이 확고한 진리를 선포한 후, 본문 18절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유가족 여러분, 장례식을 진행하는 오늘 하루 서로 위로하십시오. 나의 마음에도 슬픔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겠지만, 바로 그때 내 곁에 있는 가족들도 슬픔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고인께서 반드시 부활하신다고, 고인은 반드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다고, 그러니 슬픔에 사로잡히지 말고 상실감에 무너지지 말자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장례식을 진행하는 오늘 하루, 서로를 위로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평강을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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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7. 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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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의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죠.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교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 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포기하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면 지금 당하는 극심한 박해를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 말로 권면하였을까요? 


고난은 기쁨의 이유 

베드로는 고난이 기쁨의 이유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개인의 슬픔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대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고난이 찾아올 때 기쁨으로 모든 아픔과 슬픔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도 고난이 찾아올 때 슬프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 아픔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그 슬픔으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픔과 슬픔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에도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큰 슬픔의 날이 찾아와도 마음 한편에 흐르는 기쁨의 강줄기로 말미암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시련과 고난은 다른 한편으로 기쁨의 이유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이 두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첫번째 기쁨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쁨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누리게 될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심판의 때 그리스도인은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고난의 현장에서 아픔과 슬픔과 공존하는 기쁨이지만 그날에 누리는 기쁨은 아픔과 슬픔이 전혀 없는 온전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시다면 본문 16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왜 그렇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이유가 있으며, 마지막 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바로 그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크고 온전한 기쁨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베드로가 보내는 편지를 받아 보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기에 더욱 큰 박해를 받았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와 고난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를 포기하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품어보았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어떠한 말로 권면하였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를 믿든, 유대교를 믿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에게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박해와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재앙의 날이 불신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약 성경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예레미야 25장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받고 불신자들은 평안한 듯 보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불신자로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교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자신에게 임한 고난을 피하고자 다시금 유대교로 개종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열방으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당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8절 말씀의 뜻입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나만 고난을 받는다'고, '나는 믿음을 지키지만 고난을 받고 저 친구는 믿음이 없지만 평안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저 우리가 불신자들보다 조금 먼저 심판대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이 평안하다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힘써 달리면 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고난이 비껴가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지도 질문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선을 행하십시오. 그렇게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여러분에게 찾아온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의 이유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최후의 승리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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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2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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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6-17) 


사랑하는 고인을 먼저 떠나보낸 모든 유가족에게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그 마음에 하늘의 평강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찾아올 그 마지막 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데려갈 그 마지막 때, 우리가 사랑했던 고인의 그 마지막 때를 실제로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슬픔이요 너무도 큰 아픔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리 모두에게 정해져 있는 그 운명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그 날은 오고야 말아 우리의 일상을 깊숙이 침범하니 장례식,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식은 도망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의 현장입니다. 

구약 시대 스바냐 선지자는 사람들이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그 날', 곧 마지막 그 때를 선언합니다. 스바냐 3장 16절을 시작하는 단어 "그 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를 평가하시는 날, 그리하여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바로 그날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바로 그 날이요, 오늘 우리 개인에게는 인간의 육신이 무너지는 바로 그 죽음의 날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운명처럼 정해져 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은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스바냐 3장 16절입니다. 그 날에, 바로 그 때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예루살렘아, 너의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이지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계속해서 17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유가족 여러분. 비록 모든 인간이 회피하고 싶은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식장에 모여있지만, 그리하여 영원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날'이 여러분의 일상을 깊숙이 침범하였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두 손을 늘어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유가족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전능자이시니 여러분의 마음에 새 힘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하나님께서 고인을 잠잠히 사랑하시며, 하나님께서 고인으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인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기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로 이 죽음의 순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고인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 믿음으로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슬픔에 잠식당하지 마시고,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지금, 고인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나아가 고인께서 보이신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분의 모든 자녀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고인의 믿음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유가족의 믿음이 되어서 두려움과 낙심이 아니라 소망과 위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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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