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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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오늘 이 시간에도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두 가지로 묘사해 주십니다. 그 첫번째는 '전능자'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처비와 형편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에 있어 조금도 한계가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절망에서 구원하고, 슬픔의 현장에서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을 전능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참으로 힘주어 말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두 번째 모습이지요.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전능자이셔서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팔장을 끼고 우리의 행동을 가만히 보면서 선을 행하면 구원해주고,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해야 구원을 주시다가, 우리의 행동에 실수와 잘못이 보이면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하시며 우리를 죄에서, 절망에서 슬픔의 현장에서, 나아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모든 은혜와 축복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격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해주시기로 결심하셨던 겁니다. 우리가 작은 일이라도 교회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겠노라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시겠다고 먼저 결심을 하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여러 가지 모임에 참여하면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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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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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왕이 남 유다를 다스리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만 하고 있어도 예루살렘 성은 그들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새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약점이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 샐 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식수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전략은 실패합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까지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 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한줄기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성벽의 튼튼함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로 통과하여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물줄기가 참된 위기의 순간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스며 나오더라

히스기야 시대의 예루살렘은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실로암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물줄기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결국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 그것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진 것이었지만 실상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에 은혜의 물줄기가 사라진 것이요 그들의 마음과 심령이 메말라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그들의 영혼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강줄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오늘 본문 1절과 2절의 말씀은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성전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어야 그 뜻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목표가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에 최대한 간단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2절 중간을 보시면 “동쪽을 향한 바깥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기준으로 한쪽에는 성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에스겔이 서 있습니다. 1절 말씀이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려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물은 자연스럽게 이 문에 다다르겠죠. 문제는 이 문이 열려있지 않고 닫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을 기준으로 성전이 있는 쪽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 문의 반대쪽인 에스겔이 있는 곳에는 물이 넘어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바로 그때 에스겔이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본즉” 에스겔이 그 닫힌 문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합니까? “물이 그 오른쪽 – 그 닫혀 있는 문의 오른쪽을 말합니다. – 그 오른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스며 나오더라” 이 장면이 상상이 되시나요? 문이 열려 있다면 물줄기가 시원하게 나왔을 거에요. 그러나 문이 닫혀 있으니 물줄기가 막혔어요. 그러나 그 문에 물이 스며들어서 그 문을 뚫고 생수가 조금씩 스며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스며 나오더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물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의성어입니다. 우리말의 의성어 가운데 그 의미가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졸졸 흐른다’ 혹은 ‘똑똑 떨어진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수도꼭지를 끝까지 열어놓은 것처럼 콸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이 막혀 있기에 스며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똑똑 떨어지는 물이고, 기껏해야 졸졸 흐르는 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똑똑 떨어져도, 졸졸 흘러도 – 거대 한 물줄기가 아니라 – 그저 스며서 나오는 정도의 물줄기라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것은 은혜의 강물이 되어 나의 발목을 적시고, 나의 무릎까지 차오르며, 나아가 나의 허리를 넘어 머리 위까지 차고 넘치는 은혜의 강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무엇입니까? 은혜의 물줄기가 스며서 나오는 것, 은혜의 생수가 똑똑 떨어지는 것, 많이 나와야 졸졸 흐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스며나오는 은혜가 결국은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고 그 강물은 이제 만물을 새롭게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다(9절)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위대한 환상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각종 은사를 부어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생수의 강물이 머리 위까지 차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큰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물줄기는 거대한 강물이 아니라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이어지는 조그마한 히스기야 터널이요,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가 아니라 그저 똑똑 떨어지고, 많아야 졸졸 흐르지만 메마른 우리의 심령을 조금씩 적실 수 있는 스며 나오는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지요.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직장과 교회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우리가 닥면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로워지기 위하여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강줄기가 나의 삶 속에서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는 내 마음의 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가 스며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성전 문을 활짝 열고 물줄기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기만 하더라도, 그리하여 나의 마음이 조금씩 촉촉해지기만 하더라도 어느새 나의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허리가 잠기고 나아가 나의 머리 위까치 차고 넘치는 은혜의 강줄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의 물줄기를 허락하시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사건, 이사야 선지자가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와서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대하는 장면, 그리고 앞에서 소개해 드린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까지 생명의 물줄기가 이어진 장면 등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 연못에 모여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실로암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던 어느 장막절, 예수님께서 행사를 거의 마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38)

비록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기혼 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 실로암 연못에 물이 고였지만 예루살렘은 이후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목마른 사람은 값없이, 돈 없이 물과 포도주를 사라고 초대하였지만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생수의 강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생수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는 동쪽을 향한 바깥문처럼 여전히 우리 마음의 문도 굳게 닫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고 거대한 물줄기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졸졸 흐르는 은혜, 똑똑 떨어지는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의 심령에 흐르는 작은 실로암 연못이면 충분합니다. 그저 나의 심령을 조금씩 적시는 스며 나오는 은혜의 한줄기만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요,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 은혜의 강물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의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새롭게 되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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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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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의 죄악

 

에스겔 25장부터 시작하여 에스겔 32장까지 남 유다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 가운데 그 첫 번째 장면으로 암몬이라는 나라에 대한 심판 선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암몬 나라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이웃 나라인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 그때 그 장면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암몬 나라의 죄악으로 지적하시는 것은 사람을 죽이거나,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암몬의 이웃 나라인 유다 백성,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함을 받았던 유다 백성이 재난을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그 장면을 보고 ‘아하 좋구나’라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는 암몬 백성이 남 유다의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기뻐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암몬 나라 백성들은 남 유다가 큰 재앙을 당하고 큰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온 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했어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지적하시는 암몬 나라의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암몬나라의 죄악을 분명히 지적하신 뒤에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패망하게 멸하리니” 그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남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고 온 몸으로 즐거움을 표현했던 암몬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 모든 심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시고 기억하셨다가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 고난이나 역경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우리의 삶에 고난도 찾아오기 마련이고 역경도 늘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금 당하는 고난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하고,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난과 역경에 마음으로부터 동참하지 못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때로는 비난하며 멸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응하실 만한 큰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죄를 지어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이 맞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유다 백성을 비방하고 멸시했던 암몬 족속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의 고난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하고 잘됐다고 고소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볼 때 진심으로 그들의 아픔에 돌아보며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아니라 “힘과 용기를 주는 위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여전히 나의 백성

오늘 본문은 암몬 나라에 대한 심판에 이어 모압 나라에 대한 심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모압 나라의 죄악도 암몬 나라의 죄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암몬뿐만 아니라 모압 역시도 유다 백성의 고통과 고난을 기뻐하고 그들을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깊이 묵상해볼 만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로 8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 

모압과 세일은 남 유다가 멸망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비난하고 조롱했어요. 네~ 물론 이것도 큰 죄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이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8절을 다시 보시면, 모압과 세일이 스스로 말합니다.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에 무너진 나라가 남 유다만이 아니었어요. 바벨론이라는 제국은 워낙 힘있게 일어났고, 그 세력을 전 오리엔트 지역에 확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남 유다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당하고 점령을 당했습니다. 바로 그때 모압이라는 나라, 그리고 세일 혹은 에돔 나라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바벨론 나라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 유다 백성이나 그들이 이방민족이라고 여기던 다른 민족 백성이나 똑같네. 바벨론이라는 큰 위기 앞에 유다 백성이나 그 외의 다른 백성이나 별 차이가 없네. 이런 생각을 모압 나라 백성들이, 그리고 세일 나라 백성들이 마음에 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모압 나라의 그 생각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뭐라고,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 앞에서 남 유다나 다른 나라다 다 무너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유다 나라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다른 나라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너희 모압을 벌하셔서,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유다 백성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어 저 멀리 타지로 끌려가고 있지만, 그래서 주변 나라들은 남 유다나 다른 이방 나라들이 무엇이 다르냐고 비웃고 조롱하지만 여러분 바로 그 순간에도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은 장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지금도 붙잡고 계시며 그들을 마침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서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그 장면을 놓고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서 뭐하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차이가 없네,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질문해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역경을 만나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하는 바로 그때에도, 역경을 만나는 바로 그때에도, 그래서 나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바로 그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손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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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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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남 유다 

오늘 본문은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을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너는 반역하는 족속에서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12절 뒷부분을 보시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왕이 예루살렘에서 남 유다를 다스리고 있던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는 내용이지요. 바벨론 제국은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남 유대를 다스릴 새로운 왕을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왕족 중에서 한 사람을 세웠다고 말씀하는데, 실제로 바벨론 제국이 사로잡아갔던 여호야긴 왕의 삼촌이 됩니다. 여호야긴 왕의 숙부인 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택했다는 말씀이죠. 13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시면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시드기야 왕에게 어떠한 맹세를 하게 했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잖아요? 거대한 제국 바벨론이 조그마한 유대 나라의 왕을 바꾸었으니 당연히 남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 제국은 잘 섬기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유다)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바벨론을 섬기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야 능히 생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포로가 된 것,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여러분, 남 유다는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었어요. 물론, 그들 안에 우상숭배도 있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언약의 백성이었잖아요. 백번 양보해서 바벨론 제국처럼 공식적으로 마르둑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은 아니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 하나님을 오히려 대적하는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가고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신앙인은 –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 유대 민족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서 저 이방인인 바벨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 같지 않으세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바벨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대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참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아버지,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여러분의 자녀들이 직장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상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상관을 만나서 너무 큰 핍박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새벽 기도에 나오셔서 어떻게 기도하시겠어요? ‘하나님, 우리 자녀가 믿음 때문에 너무도 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그저 감사하고 만족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겠어요? 아니면, ‘하나님, 우리 자녀를 괴롭히는 그 놈이 지금 당장 회사에서 잘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자녀가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겠어요? 우리는 다 똑같아요. 우리가 예수님 믿는 사람이고, 우리 자녀가 믿음의 자녀라면 이 세상 속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머리가 되고 형통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기 마련이지요. 

여러분, 모르긴 몰라도, 에스겔 시대 유다 백성들도 동일한 기도를 했을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우리 민족이 지금 하나님을 모르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제국에 포로가 되었고 식민지가 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 우리를 구해주시고 저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모든 멍에를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을 방법으로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큰 나라였던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참으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게 있다가 죽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데요. 하나님께서 확고하게 말씀하시는 거죠.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는데,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을 섬기겠다는 맹세를 저버리고 바벨론 왕에게 맺은 약속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서 머나먼 바벨론 땅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 곧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서 바벨론을 떠받히고 바벨론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 곧 ‘하나님과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은 왜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이방 나라 바벨론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과 맺은 약속으로 생각을 하실까 질문을 하고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러자, 그 안에 중요한 교훈이 한 가지 있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해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는 바른 생각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함께하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사화복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그러므로, 비록 불신자가 세상에서 우리의 상관이 되고 때로는 불신자들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하게 되더라도, 여러분 그들의 뒤에서 실제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려움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신자가 있으세요?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놀라운 계획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 

에스겔 시대,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식민지가 되어가는 모습 속에서 유다 민족이 바벨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꾸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참 단순합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고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 속에서 묵묵히 유다 민족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조금씩 성취해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는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하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서 다시 심으시겠답니다. 연한 가지를 꺾어서 다시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으시겠데요. 이 비유의 의미는 너무도 명확합니다. 지금 남 유다는 바베론의 포로가 되어가고 식민지가 되어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부를 다시금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 심어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23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새롭게 심으실 사람들을 통해 이루실 놀라운 역사를 분명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가득가득 맺게 됩니다.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어서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각종 새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유다를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바벨론을 포함한 모든 열방을 의미합니다. 열방의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 보낼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유다 민족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넘치게 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령을 근원부터 바꿀 수 있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 바벨론을 통해 그 일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이죠.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올때, 특별히 불신자들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저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게 해 다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기보다 그러한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펼치고 계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를 결코 포기하거나 방치해두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잠시 잠깐 우리에게 아픔도 허락하시고, 고통의 시련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믿고 확신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기도의 제목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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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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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설교자 가운데 한명인 토니 에반슨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평소에 통닭을 참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에반스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달라스에서 아틀란타로 이동하기 위해 공항에 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탑승할 때까지 조금 시간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분의 눈 앞에 어느 유명한 프라이드 치킨 간판이 보이는 겁니다. 평소에도 치킨은 참 좋아하셨던 분이라 잠시 시간도 있어서 통닭을 사먹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토니 에반스 목사님은 이 사건이 있은 후 자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닭다리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닭다리와 같은 작은 것, 부수적인 것 때문에 자신이 가야하는 중요한 목적지를 놓치면 안된다는 교훈이지요. 


음식, 그 뒤에 계신 분 

오늘 본문에도 이와 비슷한 교훈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누군가 여러분을 초대하였습니다. 특별히 힘이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 곧 관원이 여러분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할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귀한 음식, 좋아보이는 음식만 바라보지 말고 그 뒤에 앉아있는 사람 – 곧 나에게 이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 – 이 누구인지, 그가 나에게 이 음식을 제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은 1절의 내용을 더욱더 강경하고 분명하게 명령합니다.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특별히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식탐이 올라오는 사람들은 더욱더 주의해야 하는데, 어느정도까지 주의를 해야 합니까? “너의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내가 이 음식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음식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매일 우리가 먹는 음식은 참으로 귀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우는 찬양이 있잖아요?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 다음에 이떻게 됩니까?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매일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면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밥 한 그릇을 보면서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오늘도 나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귀한 음식도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이처럼 귀한 음식을 가지고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하거나, 너머지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음식을 대할 때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음식을 대하는 지혜란 그 음식 자체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 뒤에 누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 8:8) 

여러분,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기름진 음식을 먹었느냐, 아니면 그저 하루 세 끼를 채우기 위해 거친 음식을 먹었느냐는 오늘 하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람되고 의미있는 하루를 보냈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 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이 아니락 분명히 말씀한 뒤에 조금 더 내려가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내 앞에 있는 음식을 바라보며 그 음식에만 초점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어진 밥 한 그릇을 대하면서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마라 

오늘 본문은 좋은 음식을 대할 때, 그 뒤에 누가 있는지를 바라보라고 교훈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은 단지 음식을 대할 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만이 아니라 나의 눈에 좋아보이는 것, 나의 마음을 빼앗을 만한 좋은 것들을 보더라도 그 뒤에 계신 분을 기억해야 할 경우는 더 많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가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에 등장합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옛 지계석은 땅의 영역을 구분해 놓은 표시이지요. 그런데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내가 돈을 주고 땅을 샀으면 지계석을 옮겨도 되지 않아요? 내가 고아들을 밭이나 땅을 돈을 주고 정당하게 샀으면 그것이 내 땅이나 밭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이나 밭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인간이 사사로이 사거나 팔 수 없다는 것이 구약 율법의 정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죠.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지금 당장 내 앞에 땅이나 밭을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듯하지만,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소유하고 싶은 바로 그것의 뒤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가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허락도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얻는 참된 지혜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만족하는 ‘자족하는 지혜’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루 세 끼의 식사를 주셨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오직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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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연구" 목차 (Contents)

"잠언 연구"는 구약성경 잠언의 주요 주제를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잠언은 매우 쉬운 성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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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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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우리 입술의 언어에 대한 교훈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입술의 언어에 대한 교훈이 여러 곳에서 등장합니다. 


마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언어로 표현된다 

먼저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잠언은 지혜에 대해 가르치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잠언은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지혜로운 입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말은 다른 사람들 – 곧 인간 – 을 향해 내뱉는 언어들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의 마음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내뱉는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 교훈이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가득 차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향해 내뱉는 우리의 언어가 지혜로운 언어가 된다는 점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언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있다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없는 것이지요. 반대로 어떠한 사람이 그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소망을 불어넣고 기쁨을 불어넣는다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책망하시면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 12:34) 

여러분, 이 시간 잠언의 말씀을 묵상하며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언어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지혜를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불평의 말을 멀리하시고, 감사하는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멀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언어가 우리의 입술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입술은 세상의 금이나 좋은 진주보다도 더욱 귀한 보배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입을 열어놓은 사람이다 

한편, 오늘 본문에는 지혜 없는 자가 어떻게 자신의 입술로 자신의 미련함을 드러내는 지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어리석은 자는 두루 다니면서 무엇을 합니까? “한담”을 합니다. 그렇다면 한담의 뜻이 무엇이지요? 한가롭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저 이말 저말 내 뱉는 것을 뜻하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아무런 의미도 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속에는 꼭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언어가 꼭 들어가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꼭 무엇을 말합니까?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다른 사람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다른 사람들이 알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들을 어리석은 사람은 꼭 이야기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의 마지막은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한 마디로 이렇게 묘사하는데, 그것은 “입술을 벌린 자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존경 받는 고대 고부 가운데 한 분이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당신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을 때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다”  

여러분,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욱 좋아하십시오.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러분의 입술은 닫고 여러분의 귀는 여십시오. 나의 말과 나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경청의 자세”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다는 증거입니다. 


지혜로운 언어의 길 

우리 다함께 본문 24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우리가 말을 적게 하고, 듣는 것을 많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발걸음은 자기 자신의 의지나,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자기 자신의 계획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계획을 너무 확신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계획은 너무도 좁고 미련하여 언제든 다시 수정해야 하고, 언제든 다시금 교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2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오늘 하루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계획을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행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라도 나의 의견이나 나의 계획을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품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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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연구 09 "지혜로운 언어"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수다쟁이’(talkative)가 등장한다. 그는 유창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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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연구" 목차 (Contents)

"잠언 연구"는 구약성경 잠언의 주요 주제를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잠언은 매우 쉬운 성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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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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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어떠한 말로 축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른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이 백성을 축복하기를 바라셨고, 그들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을 축복하는 특권이 제사장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합니다(벧전 2:9).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하나님은 서로를 축복하는 손길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에 주신 축복의 권한을 유감없이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가족을 축복하고 우리의 이웃을 축복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여러분의 손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어떠한 말로 축복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 첫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우리는 수많은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무수히 발생합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지만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는 연얀한 인생일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축복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간구하는 두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보호가 외적인 울타리라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내면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도 필요하지만, 아울러 우리의 내면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도 갈망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한 인생.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지막 세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외부로부터 몰려오는 공격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내면에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 진정한 평강이 찾아옵니다. 물론, 우리를 위협하는 수많은 공격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절박하게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궁핍한 상황도 맞이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만날 때에 우리에게 피할길을 주시며,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마암아 우리는 참된 평화,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간구해야 하는 마지막 세번째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구해야 할 세 가지 축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2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간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여러분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와 평강을 물붓듯 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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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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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주제는 음식을 먹는 것, 곧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식사에 대한 것입니다.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레너드 스윗 교수는 인간의 먹는 행위를 세 개의 영어 단어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가장 낮은 단계, 가장 열등한 단계의 먹는 행위로 레너드 스윗 교수는 그것을 Feeding이라고 명명했습니다. Feeding이라는 단어는 주로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가리키지요. 그래서 굳이 한글로 번역하면 ‘사육’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음식을 먹는 모습 속에서도 이와 같은 Feeding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먹는 것, 단지 배고픔을 잊어버리기 위해 먹는 것, 흔히 하는 말로 단지 살기 위해 먹는 것. 비워진 나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몸에 집어넣는 행위. 그것이 Feeding입니다. 

레너드 스윗이 이야기하는 먹는 행위의 두 번째 단계는 Eating입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영어 단어이지요. 레너드 스윗이 Ea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은 음식의 맛을 추구하거나, 더 좋은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른바 맛집을 찾아다니는 단계,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 조금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Feeding이 주로 동물들의 먹는 행위를 나타낸다면, Eating은 주로 인간들이 취하는 먹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Feeding의 단계를 넘어서, 그리고 Eating의 단계를 넘어선 보다 높은 차원의 먹는 행위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Dinning입니다. 일반적으로 Dining은 우리말로 ‘정찬’ 혹은 ‘만찬’으로 번역하지요. 매우 잘 차려진 식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Dining을 그 음식의 메뉴보다는 식사하는 사람의 정신적 차원, 무엇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이해합니다.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풍성한 감사의 시간,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여러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행복의 시간, 그것이 바로 레너드 스윗이 말하는 Dining이라는 높은 차원의 식사입니다. 

여러분의 식사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하루 식사를 하시면서, 혹은 지난 한 주간 음식을 드시면서 여러분의 식사는 혹여 시간에 쫓겨 음식을 나의 내장에 채워넣기에 바쁜 Feeding의 단계에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조금이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음식 자체에만 관심을 쏟으며 그 무엇인가를 먹는 Eating의 단계에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좋은 음식을 먹기에 우리의 식사가 Dining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에 Dining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한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먹는 행위를 Feeding의 단계를 넘어, Eating의 단계를 넘어 Dining의 단계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요, 그 자리가 천국의 식탁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식탁을 위한 제언 – 풍성한 마음

오늘 본문 레위기 3장의 주제인 화목제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Dining의 단계로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전략입니다. 

레위기 3장에 등장하는 화목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레위기 1장이 소개하는 번제와 비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화목제는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유사점도 있고, 차이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공통점을 말씀드리죠. 번제와 화목제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린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또한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서 번제와 화목제는 가축을 가져와 잡고 각을 뜨고 불사르는 순서 및 절차도 서로 매우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제와 화목제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번제가 고기의 전부를 모두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반하여 화목제는 고기의 일부를 태워 하나님께 바칠 뿐 대부분의 고기를 제물을 바친 봉헌자와 일반 백성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순서가 마치는데 반하여, 화목제는 모든 제사의 과정이 끝나면 사람들이 모여서 제물의 고기를 나누어 먹는 식사의 순서가 이어졌던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일, 특별히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함께 나누는 일이 거룩한 예배의 한 순서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일, 대부분의 짐승에게는 Feeding의 차원에서 진행되었고, 그 옛날 고대인들에게는 Eating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음식을 먹는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차원 – 곧 Dining의 차원 – 으로 승화시켰던 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인 화목제의 규례인 것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화목제의 규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1절) 

화목제의 제물로 소를 드리려면, 수컷을 드릴 수도 있고 암컷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레위기 1장에 등장하는 번제와의 또 다른 차이점입니다. 번제는 숫컷만 드리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함께 나누어 먹는 화목제는 수컷만 아니라 암컷도 함께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화목제 제사를 드린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화목제 식사가 풍성한 식탁이기를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의 수컷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암컷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셨던 거죠. 

그리고 레위기 3장 전체를 읽어보면 화목제의 제물은 소, 양, 염소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장에 등장하는 번제로 드릴 수 있는 새가 화목제 제물의 목록에는 없어요. 아마도 새는 함께 나누어 먹기에 고기의 양이 적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통닭을 한 마리 튀기면 4인 가족이 한끼를 먹기에는 조금 부족하잖아요. 음식이 부족해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Feeding의 차원으로 음식을 대하게 되거든요. 누가 더 많이 먹느냐? 통닭을 한 마리만 튀기면 닭다리 두 개를 과연 누가 뜯느냐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요. 그래서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새로는 안돼요, 소나 염소 적어도 양 정도는 잡아야 화목제를 드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하나님도 풍성한 식탁을 좋아하시는 듯합니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지요?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의 식탁도 하나님의 풍성함, 하나님의 충만함이 깃들여 있는 식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풍성함은 단지 음식의 양이나 음식의 가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풍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식탁을 대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부위를 먹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화목제의 제물로 황소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한 채 그저 새 한 마리 가지고 와서 화목제로 드리려고 하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천국의 식탁을 위한 제언 – 하나님을 향한 감사

하나님은 화목제 제물로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컷만 가져오지 말고 암컷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풍성한 식탁을 준비하라는 뜻이죠. 그리고 2절부터는 그 풍성한 고기덩어리를 어떻게 배분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2절) 

한글 성경에는 2절에서 안수하고 잡는 행위의 주체가 명백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문맥을 통해 그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지요. 누가 예물의 머리에, 곧 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누가 소를 잡는 것일까요? 제사장일까요? 예물을 드리는 봉헌자일까요? 정답은 봉헌자입니다. 전반적인 문맥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소를 화목제로 드리기 위해 가져온 봉헌자가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그리고 봉헌자가 소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봉헌자가 소를 잡고 나면, 그때부터 제사장의 역할이 등장합니다. 2절 하반절에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제물을 드리는 봉헌자가 소를 잡고, 소의 몸에서 피를 뽑아서 제사장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입니다. 
소의 피를 하나님께 바친 뒤, 또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는 지 보지요.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3-4절)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소의 피를 뽑습니다. 그리고 소의 몸 가운데 기름 부위를 떼어냅니다. 특별히 콩팥과 내장에 붙어있는 기름을 중심으로 떼어내지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기름은 액체 형태의 기름이 아니라 짐승의 몸 안에 있는 고체 형태의 기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볼까요? 제물에서 기름 부분을 떼어내는 사람은 누구죠? 제사장이 떼어내나요? 아니면 제물을 드리는 봉헌자가 떼어내나요? 이번에도 봉헌자가 떼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봉헌자가 기름진 부분을 떼어냅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의 역할이 등장합니다.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에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5절)

어떤 분들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 피와 기름을 먼저 떼어내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우리 인간의 몸에 좋지 않은 부분은 불태워서 인간의 건강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에 근거한 해석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진 부분이 가장 귀한 것을 여겼거든요.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기름진 것’이라는 표현은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상의 기록을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 가져온 봉헌자들에게 고기의 기름을 태우기 전에 기름이 그대로 붙어 있는 생고기를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삼상 2:16). 그만큼 구약시대에는 기름이 제거된 살코기가 귀한 음식이 아니라, 기름진 것 – 곧 가축의 고기 가운데 기름이 붙어 있는 고기가 귀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가 제물의 기름 부위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한 것은 가축의 가장 귀한 부분, 곧 기름진 부위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먹고 마시고 입고 쓸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죠. 감사의 마음으로 화목제의 희생을 드리면서 그 제물의 가장 좋은 것 – 곧 피와 함께 기름진 부위를 –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매일 음식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내일의 양식을 미리 먹을 수도 없고 어제 먹지 못한 음식을 오늘 마저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매일 필요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의 관점을 바라본다면 우리 인간은 매일매일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도 하루 세끼의 양식을 먹으며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오늘 필요한 양식, 오늘 사용할 물질, 오늘 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은혜, 곧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에 반드시 필요한 오늘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에게 베풀어 주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한끼의 식사를 대하며 오늘도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저 소박한 한 끼의 식사를 대하시더라도 화목제 제물의 가장 귀한 피와 기름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심정으로,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려드리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한 끼 식사를 Feeding이나 Eating에 머물지 않고 Dining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식탁을 천국의 식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천국의 식탁을 위한 제언 – 이웃을 향한 나눔

화목제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소의 몸에서 피를 축출하고 그 뒤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기름진 부위를 떼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드리지요. 이제 피와 기름을 제거한 고기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레위기 7장에 그 이후의 처리 문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중간 단계는 조금 뛰어 넘고, 레위기 7장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레 7:15)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이 있어 소 한 마리를 끌어왔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의 화목제를 드렸어요. 가장 귀한 부분인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 불태워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 한 마리를 잡았기에 고기가 많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많은 고기를 하루 안에 다 먹어라. 절대로, 냉동실에 얼려 두면 안 된다.’ 

여러분 중에 한끼한 끼 식사로 소 한 마리를 모두 드실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러므로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불러서 마을의 잔치를 열어야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이 있어 화목제를 드리면 그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는 천국의 식탁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정작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린 봉헌자가 가져갈 수 있는 고기의 양이라는 것은 그 마을에 가난하게 살아가다가 그날의 화목제 식탁에 함께 참여한 사람과 동일합니다. 곧, 한 끼의 식사로 자신의 배에 채울 수 있는 만큼의 고기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베풀고 나누어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음식을 먹는 식사 행위가 그저 Feeding이나 Eating이 되지 않고 Dining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식사에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화목제 제사가 천국의 식탁이 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사가 결국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는 천국의 식탁을 베풀기 때문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은 그 날에 모두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흐뭇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 부부가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신혼 살림으로 냉장고가 정말 작은 것이 하나 있었대요. 그런데 사모님은 음식을 준비하고 요리하는 것을 참 즐거워하셨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요리를 하려면 음식 재료가 다양해야 되잖아요. 이것저것 요리 재료를 준비하다 보니 냉장고가 부족한 거예요. 또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면 어떻게 한 끼 식사에 다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데 요리한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을 하기에도 공간이 무척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사모님께서 냉장고가 작아서 음식을 다 보관할 수가 없다고 불평을 했겠죠. 그때 목사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그러면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세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집 냉장고가 너무도 크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냉동실에 화목제 제물을 얼려 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매일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에 내일을 위한 나만의 냉동실에 화목제 고기의 일부를 계속해서 얼려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집 냉장고를 가득가득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면 우리의 식탁에 이웃을 초대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식탁은 지금 어떠한 모습입니까? 여러분의 식탁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까? 나아가 여러분의 식탁에는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이웃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천국의 풍성한 식탁을 날마다 누리고자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의 식탁의 분위기를 Feeding이나 Eating의 모습에서 Dining의 모습으로 바꾸십시오. 지금부터라도 한 끼의 식사를 대할 때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오늘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의 식탁에 누군가를 초대하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의 식탁에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식탁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천국의 식탁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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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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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일반적으로 구약의 하나님이 먼저 떠오르나요? 아니면 신약의 하나님이 먼저 떠오르나요? 많은 분들이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정의의 하나님을,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을 보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말씀부터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는 그 옛날 구약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다양한 평가와 소회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뒤에 우리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변함없는 자비하심을 반드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선언하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직후에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32장과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금으로 송아지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범죄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직후,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범죄 한 그 자리에서 더욱더 빛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롬 5:8) 


지나온 시간을 정직하게 돌이켜 볼수록 하나님께 죄스럽고 부끄러운 것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감싸주십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지금까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비록 부족한 것이 많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 많았을지라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깊이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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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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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백마를 탄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1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그곳에서 백마와 그것을 타신 분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 백마를 타신 분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셨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백마는 승리, 그리고 통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이 예수님을 백마를 탄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의 참된 승리자요, 참된 통치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요한계시록의 묵시를 보여주셨던 그 때는 로마 제국이 온 지중해 지역을 통치하고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역사의 주관자가 로마 제국으로 인식되었고, 온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참된 승리자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참된 통치자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은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5-16절) 

16절을 보면, 예수님의 옷과 다리에 그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이 세상에 힘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 – 곧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영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배당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흔히 웨스트민스터사원이라고 불리는 대성당입니다. 이 교회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 성당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1066년 윌리엄 1세의 대관식이 있은 이후, 영국을 다스렸던 대부분의 왕들이 바로 이곳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왕위에 오르는 대관식을 거행했기 때문입니다. [각주:1] 그런데 수많은 왕와 여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했던 바로 이곳의 가장 좋은 제단에는 요한계시록 11장 15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11장 15절)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제단에 새겨진 말씀을 바로 15절의 말씀 가운데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입니다. [각주:2] 이곳은 수많은 정복자들이 대관식을 거행했던 장소입니다. 수많은 권력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시대가 되었다고,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이 세상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장소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렇게 선언했던 것이지요. ‘세상의 나라들, 세상의 권력자들, 세상의 통치자들이 결국에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힘을 가진 사람도 많고,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삶이 힘 있는 몇몇 사람의 손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가 크게 보이고, 세상의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라도,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통치하시며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에서 결코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참된 승리자요, 참된 통치자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하시고, 무엇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까요? 바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9장 13절에 그 대답이 등장합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3절)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피 뿌린 옷’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그분이 흘리 피가 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정치적인 힘이나, 군사력으로 승리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 이 세상을 승리하시고 통치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온전한 희생과 온전한 자기 비움을 통해 부활이라는 궁극적인 승리를 이루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분의 대적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승리의 비결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고난과 순종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승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4절)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성도들,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승리하시며 통치하시는 그 행렬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동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늘의 본문을 관찰하고 관찰해도, 예수님을 따라 이 세상을 정복하고 승리하기 위해 떠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갖췄다는 내용은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있는 군대는 군복이나 갑옷을 입는 대신,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옷(계 7:14),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의미하는 깨끗한 세마포 옷(cf. 계 11:8)을 입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승리하며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승리는 세상의 권력이나, 세상의 재력으로 얻는 승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승리, 나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승리입니다. 

찬송가 150장 <갈보리 산 위에>의 후렴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찬양의 후렴구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두 가지 믿음을 노래합니다. 먼저는 최후 승리를 얻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어 빛난 면류관을 받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때로는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의 문제가 너무도 커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궁극적인 승리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후 승리를 얻게 되는 그 날은 반드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빛난 면류관을 씌워주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아울러, 이 찬양의 후렴구는 또 하나의 진리도 노래합니다. 곧,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빛난 면류관을 받아 쓰려면 험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최후 승리를 주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빛난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험한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으며 희생과 헌신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1. www.westminster-abbey.org/our-history/abbey-history [본문으로]
  2. N. T. Wright, Revelation for Everyone (New Testament for Everyon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p. 101-10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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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