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1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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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난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그저 글을 읽고 쓸 정도의 교육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초등학교를 다 졸업하지 못한 채, 가난한 가정에 도움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항아리와 주전자를 수선하는 땜장이의 일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그는 고서를 파는 서점에서 헌책을 수없이 읽으며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갑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가난하지만 매우 경건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되었고, 조금씩 복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자 그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혔고, 평신도이지만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국교회나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설교는 모두가 불법이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이 사람의 설교가 국교회나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고, 그는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복음의 열정이 불타오릅니다. 그의 머리에는 넘치는 상상력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감옥 안에서 조차, 복음에 대한 열정과 넘치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펜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지나온 삶의 길을 돌아보며 그는 장장 5년에 걸쳐 위대한 기독교 고전을 집필하게 됩니다. 바로 그 책이 전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알려져 있는 『천로 역정』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은 Pilgrim’s Progress, ‘순례자의 여정’ 정도가 될 것입니다. 

『천로 역정』을 통해 존 번연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 있으면서 얼마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번연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돌아갈 본향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저 천국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수많은 환상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환상들은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은 개개의 사건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지금도 땅에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장부터 16장까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어떠한 환난과 재앙을 받는지를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7개의 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재앙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일곱 인의 재앙으로 마쳐지지가 않아요. 그 다음에는 일곱 나팔들의 재앙이 찾아옵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하나씩 불 때마다 재앙임 내려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도 않아요. 이제 일곱 대접의 재앙이 등장합니다. 대접이 하나씩 쏟아질 때마다 재앙이 임하는 거지요. 여기에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가 알려주는 바는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 속에는 고난의 연속, 환난의 연속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이 세상에서 고난만 받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7장과 18절은 바벨론으로 비유되는 악의 세력이 무너지는 장면이 등장해요. 그리고 19장에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등장하고, 20장부터 마지막 22장까지 천년 왕국,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환상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 바로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속에서 고난과 환란을 당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저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 혹은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까요? 당연하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순례자이고,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리가 우리의 본토도 아니고, 우리의 돌아갈 고향도 아닙니다. 그러니 괴롭고, 그러니 어려움이 많지요. 집 나가면 고생이잖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걷는 이 길은 하늘의 저 천국을 향한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 14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저 천국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며,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절부터 6절까지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이 크게 3가지로 등장합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첫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에게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하지요. 우리 다 함께 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1절 말씀을 보면, 시온 산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곁에 서 있는 14만 4천 명이 등장합니다. 최근 극성을 부리고 있는 신천지가 다른 이단들에 비해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계시록에 등장하는 14만 4천 명에 대한 그들의 해석 때문입니다. 많은 이단들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래전 큰 물의를 일으켰던 다미선교회입니다. 그들은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 다시 오신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어때요? 그들이 주장했던 날짜에 주님이 안 오셨거든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신천지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짜를 못박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신천지에 들어온 선택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14만 4천 명이 차면 그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가르치는 거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포교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을 정확하게 보세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19장에 가서야 나오거든요, 천년왕국,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20장부터 등장해요. 그러나 14장에서 이미 14만 4천 명이 등장해요. 사실, 14만 4천 명이라는 용어는 요한계시록 7장에 이미 등장해요.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만 4천 명은 그 숫자가 채워져야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14만4천명이라는 성도들, 곧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 무엇이 있습니까?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어요.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는 분명한 언약과 약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위치해 있는 자리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6장부터 16장까지 계속되는 재앙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일곱 인의 재앙이 있어요, 그 다음에 일곱 나팔 재앙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의 재앙이 이어져요. 그런데 오늘 본문 14장은 지속적으로 재앙이 이어지는 그 한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 꼭 이와 같아서 환난과 고난이 멈추는 날이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환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라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고 인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큼은 그 어느 순간에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 다음에 어떠한 말씀이 이어집니까?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시민권을 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해요.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요. 

여러분, 지금 세상 속에서 괴로움과 어려움을 당하십니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데, 어려움과 괴로움이 따르세요? 바로 그때 확신하십시오.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약속, 마지막 날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약속에 대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더욱 든든해지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찬양의 이유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 그 첫 번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에게는 “분명한 찬양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함께 2절과 3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에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그 소리가 어떤 소리입니까?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이 모든 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천상의 소리지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3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들었던 이 소리는 “그들이”, 곧 십사만사천명으로 표현되는 크리스천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세상이 마치 영원토록 머무를 수 있는 고향 땅인 것처럼 착각하는 넌크리스천들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결코 따라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그 누구든 이 천상의 찬양을 함께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할 분명한 이유가 있잖아요. “속량함을 받은”,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나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조니라는 이름의 어린 여자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며 수영 선수로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은 소녀로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세상의 가치관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리겠다는 결심도 합니다. 특별히 자신이 수영선수이니 자신의 달란트를 이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결심을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조니는 다이빙을 하다 그만 목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는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팔과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영선수로서 꿈을 키워가던 조니라는 어린 소녀가 팔과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더 이상 수영 선수로서의 삶이 끝난 것이죠. 조니는 비록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헌신하였지만,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장애인으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조니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수영을 포기하고 자신의 입에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니는 자신이 그린 그림마다 조니(Joni)라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PTL이라는 영어 대문자를 반드시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조니가 자신의 그림에 적어 놓았던 PTL은 “Praise The Lord”(주님을 찬양하라)는 문장의 영문 이니셜이었습니다. 조니는 어떻게 자신에게 찾아온 그 불행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으며 PTL, 주님을 찬양하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조니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순례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죠. 자신의 모든 달란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렸잖아요. 자신은 천국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에 불과하잖아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좌절도 딛고 일어설 수가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조니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찬양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 비록 수영이 아니라 입으로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마지막 날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는 비록 조니와 같은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 날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소망이 있는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독특한 삶의 방식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 그 첫 번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특징, 그 두 번째는 분명한 찬양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에게는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4절에 등장하는 ‘여자’는 당시의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라는 의미는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삶의 방식, 곧 우상과 쾌락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을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거부해요,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4절 중반부를 보시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독특한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손해를 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의 본향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이기 때문이지요. 

저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11월인데 그해 12월 말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결혼한지 약 한 달 뒤에 유학을 떠난 것이죠.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치고 유학을 앞두고 있는 저희에게 제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저희 부모님께서 출석하시는 교회가 교회 건축을 목표로 헌금을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 마음에 적지 않은 금액을 헌금하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셨겠지요. 어떤 분들에게는 적은 금액일지 모르지만, 저희 부모님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을 건축헌금으로 내어 놓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제안을 듣고, 어머니께서 딱 짤라 거절하셨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지요. 이제 아들이 결혼을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갈 텐데, 유학하는 동안 한 푼이 아쉬울 것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신 금액의 헌금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아끼고 절약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노력해서 헌금을 할 것 같으면 그 돈으로 아들 유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저희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보, 이제 나는 아들의 유학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없소. 앞으로는 나이가 계속 들기 때문에 나의 능력은 더더욱 없을 것이요. 내가 그 작은 돈을 어렵게 모아서 우리 아들에게 도와주고는 더욱 크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손길을 우리가 차단할까 봐 그것이 두렵소. 그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 하나님께서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드리고, 우리 아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립시다.” 저희 아버지의 이 말씀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셨어요. 그리고 이제 막 결혼한 아들 내외를 앉혀놓고는 그 다음날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서 헌금을 작정하려 한다고, 아버지 어머니의 이 마음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소식을 듣고 우리에게 유학 자금은 한 푼도 안 도와주셨으면서, 어떻게 그 큰돈을 건축헌금하실 수 있느냐고 서운해하지 말라는 당부였지요. 그리고 실제로 유학기간 부모님의 경제적인 도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저희 부부가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한 푼이라도 아쉬운 데, 어떻게 부모님은 그것을 헌금하실 수가 있느냐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어쩌면 유학을 떠나는 우리에게는 조금도 도와주지 않으시면서 건축헌금을 할 수 있느냐고 서운해 했을까요? 아니지요. 결코 그렇지 않죠. 그날 저녁, 저의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셨군요.” 

여러분, 이것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것을 챙기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녀에게 도움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 천국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걷는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것을 챙기기에 앞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더욱 좋아합니다. 내 자녀에게 한 가지라도 더 챙겨주기에 앞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 천성을 향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가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첫째로,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상황을 만나든 상관없이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찬양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과감히 거부하고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기억하며 저 천성을 향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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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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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그리고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과 성경이 약속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볼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세상에 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잖아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이 늘 친밀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고 따뜻한 부자의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실질적이고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죠. 우물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땅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간 우물은 그 누가 보아도 우물입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가뭄이 어찌나 극심하였는지 우물이 말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한 방울의 물도 길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물이라는 이름과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는 우물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물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단 한 바가지의 물도 길어 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메말라 성경이 묘사하는 그 충만한 하늘의 은총을 조금도 경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힘겨운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실질적이고 너무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줍니다.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행함으로 그리고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대답이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꼭,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대답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계속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어떻게요? “이로써”, 곧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9절은 더욱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로써” 곧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19절 뒷부분,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그러므로 내가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세게 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인생의 풍파가 찾아옵니다. 계획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그저 눈물로 기도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광야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지만 우리 마음에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을 생길 때도 분명히 있지요.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나? 과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맞나? 과연 지금 내가 걸아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생명의 길, 기쁨과 행복의 길이 맞나?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분명히 믿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문이 들고 걱정이 찾아는 경우가 있어요. 바로 그때 누가 확신을 가지고 그 마음을 굳세게 붙잡을 수가 있을까요? 매일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어디를 가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대답을 전혀 내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강력한 폭풍우가 몰려와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믿음 안에 굳세게 설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회 생활, 여러분의 가정생활, 심지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별로 큰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마땅히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단지 그 사람과 여러분의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드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먼저 용서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이해하고,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축복 – 기도의 응답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 오늘은 두 가지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을 알면서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했다면,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면, 여전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여 내 마음이 그 사람을 싫어한다면,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그것이 마음에 걸림이 되지요. 자책이 되잖아요. 당연히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1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새 계명과 같이 서로 사랑하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데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계속해서 설명하지요.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 곧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로 그 계명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에 따르면 우리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새벽과 밤으로 매일 같이 교회에 나와 울부짖으며 기도하지만,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의 기도를 과연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과연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사랑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 나의 마음을 조금 속상하게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사람. 하나님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은 구약시대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7-8)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신 15:10a)

이제 이 말씀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10b)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마다 모두 응답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축복 –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 첫 번째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이었을 때, 여러 선배 목사님들과 짧지 않은 여행길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여행길에서 들었던 어느 선배 목사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기도의 중요성,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깊이 오랜 시간 기도하며 교제하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요 실제로 기도하려고 앉으면 몇 마디 기도하고는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좀더 길게 좀더 깊이 기도하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가 않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제가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오래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며 교제하고 싶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불현듯 하나님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셨답니다. 그 지혜는 이것이었어요. “교회 요람을 보고 기도하여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바로 그 날부터 그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이 새벽마다 교회 요람을 펼쳐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어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첫 페이지부터 한 분 한 분의 성도님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 기도 시간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요 기도가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 지더라는 거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도 내일부터 새벽예배에 오실 때에는 성경책과 찬송가만 가지고 오지 마시게 교회 요람을 가지고 오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요람을 펼쳐놓고 기도하는 것이 왜 그토록 그분의 기도를 풍성하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본인이 목양하는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 생각하며 진심으로 기도하다 보니 그분의 마음속에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일어났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곧 예수님을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면,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바로 그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거하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리 계신 분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 내 삶에 가까이 오신다는 것이 별로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계신다는 성경의 표현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해도 경험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읽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사랑으로 응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과 반응에 상관하지 말고 여러분은 끊임없이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확신을 얻게 되고,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그렇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끝까지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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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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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모순된 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지요.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참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야’라고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도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언듯 보기에는 모순된 내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표현이지요. 

성경에도 역설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면서 참 하나님이십니다.’ 역설이지요. 인간이면 인간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어떻게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까? 언듯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너무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이 가르침은 모순처럼 보이니 나는 그 가운데 하나만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는 결코 참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참 인간이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입니까? 안 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면 온 거고, 아직 안 왔으면 안 온 것이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언듯 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는 죄악이 가득하고 어둠의 세력이 힘을 쓰고 있으니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아직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은 분들에게는 그저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그러나 새로운

오늘 본문에도 역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곧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일이삼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조금 더 넓게 해석한다면 신약성경 전체, 혹은 신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말씀이거니와” 무슨 말씀입니까? 요한일이삼서를 비롯하여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은 누군가 새롭게 고안한 말씀이 아니고 성도들이 예전부터 들었던 내용, 성도들이 예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 그래서 그것은 새 계명이라고 보다는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하고 있을 그 때에도 많은 이단의 가르침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계명 –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은 – 언제나 옛 계명입니다. 과거에도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선포되며, 이후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해도 예수님의 계명, 곧 예수님의 가르침은 동일하게 선포되고, 동일하게 가르쳐야 하는 변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 성경의 교훈은 언제나 옛 계명입니다. 

특별히 이단의 공격이 갈수록 대범해지는 우리 시대에, 여러분 모두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교회를 출석하면서 배웠던 복음의 내용 이외에 무엇인가 특별한 계시, 무엇인가 특별한 복음의 내용, 무엇인가 특별한 하늘의 비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집사님, 권사님, 제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성경공부는 없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여러분 마음속에 ‘아~ 뭔가 이상한 것을 가르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선포하고, 우리가 듣고,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 – 곧 예수님의 계명은 – “옛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 이른바 기도 가운데 특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8절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여기서는 또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네요. 그러면 7절에 등장하는 옛 계명과 8절에 등장하는 새 계명은 다른 계명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7절에 등장하는 옛 계명과 전혀 다른 내용의 새로운 계명을 다시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7절에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옛 계명이 동시에 새 계명도 된다는 것입니다. 8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이것이 새 계명의 특징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요한일이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이미 성도들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그러나 그 옛 계명은 그저 과거의 유물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단지 옛 계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새 계명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어둠이 지나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능력의 말씀이요 능력의 계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금 활력을 얻고, 다시금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기를 원하신다면 어떤 새로운 내용,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을 찾으시면 안됩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는 옛 계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금 새 힘을 얻고, 활력을 얻고,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게 될까요? 이미 알고 있는 옛 계명, 이미 알고 있으며 믿고 있는 그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의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생활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변함없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옛 언약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이 어느 순간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수 천년 동안 동일한 내용으로 전해오던 옛 언약의 말씀이 동시에 나의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씀 생활이 깊어지고, 나의 말씀 생활에 늘 활력이 넘치기를 원한다면 성경 이외에 다른 자료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손때가 뭍은 성경을 다시 읽고, 다시 묵상하고, 다시 생각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성경 말씀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름 행사가 모두 은혜 가운데 마치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9월을 맞이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생활, 기도생활, 예배 생활에 힘을 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신앙생활과 다른 어떤 것을 찾지 마시고, 그저 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이 더욱 힘을 내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매일 시간이 지날수록, 매월 시간이 흐를수록, 매년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질수록 여러분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 – 사랑의 계명

오늘 본문에는 옛 계명, 그리고 새 계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두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곧, 변함없는 옛 계명이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드는 새 계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조금이라도 익숙하신 분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옛 계명, 그리고 새 계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붙잡히시는 바로 그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가르치시는 이 말씀을 잘 관찰해보면, 이 말씀에는 평서문과 명령문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평서문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5)

이 모든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구절들입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죠. 예수님의 계명,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한 예수님의 계명 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죄인이었던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여 구원하여 주셨다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에는 평서형 문장이 등장합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에는 명령형 문장도 등장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옛 언약이요, 동시에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교회 안에 입술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실상 자신의 삶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들에 대해 평가하기를 믿음은 있는데 그에 따르는 행함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깨달아 알고 있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 말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믿음의 고백이 자신의 삶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여 여전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9절의 마지막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의 형제를, 믿음의 자매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9절의 말씀에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반드시 비추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빛 안에 거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내용을 듣고,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내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랑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1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참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0절의 마지막 구절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 

여기에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등장하죠. 이 문장에서 거리낌이라는 것이 ‘스칸달론’이라는 헬라어 단어인데요, 이 단어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의 의미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하지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용납하니, 누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거리낌이 없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믿음도 크게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걸리는 돌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 자신의 믿음이 굳건한 반석 위에 놓여서 제 아무리 크고 위협적인 비바람과 풍랑이 몰려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튼튼합니다. 견고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교회가 따뜻한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교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자신의 믿음이 든든한 반석 위에 놓이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을 무너트리려는 수많은 공격이 몰려올 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여기에도 또 하나의 역설이 있네요.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것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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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2.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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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이 있다면 바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부모의 마음에는 우리 자녀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나의 자녀들이 당하게 될 고생, 고난, 어려움들을 미리 예측하고 최선을 다해 자녀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을 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고난의 길, 고통의 길을 가급적 피하고 평안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닫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에 고난이나 역경이나 고생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부모의 역할이란 자녀들에게 고생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하지 말고, 자녀들에게 고생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러한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고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간구할지라도 우리 앞에는 어려움이 찾아오고 고난과 고생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고난이나 역경을 피해 갈 수는 없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어떻게 우리가 고난이나 역경을 피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면 과연 어떠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다시 말해, 고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우리는 두 가지 고난 가운데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고난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고난은 무엇이지요? 두 번째 고난은 악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은 복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14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여러분, 나는 매일 새벽 주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나는 매주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하는데, 왜 여전히 나의 삶 속에는 이렇게 고난이 많고 고생이 심하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을 행하든,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고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을 거부하든 상관 없이 모든 인간에게는 고난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아니,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국 멸망의 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그래서 의를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복된 인생입니다.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을 때 겪는 두 가지 경우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을 행하며 받는 고난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받는 고난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게 되면 우리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를 마주하게 됩니다. 첫번째 경우는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는 우리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아 여러분의 속 사람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찾아와 여러분의 마음에 담겨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선을 행하냐고, 도대체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것 같은데 끝까지 선을 행하냐고 질문한다는 것이죠. 바로 그때 그 이유를 대답할 수 있도록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항상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천국의 소망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 마음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게 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지요. 바로 우리의 선행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선행을 욕하고요, 우리의 선행을 비방합니다. 그것 보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렇게 선을 행해도 너 자신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무엇이냐고 우리를 비방합니다. 바로 그때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분이 한 분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누군가 저에게 오늘 본문 18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조사하는 꼽을 것 같습니다. 바로 18절 처음에 등장하는 “그리스도께서도”에 등장하는 “도”라고 하는 조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말씀합니다. 곧, 우리만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도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같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욕을 해대고 비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을 버리고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이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질문하며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를 욕하고 비방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다가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온 우주만물 위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나에게 조그마한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기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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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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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또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양육하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바울도 어느덧 늙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바울의 사역이 맺은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 전역에 바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에게 양육받은 사람들이 믿음의 일꾼들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어서 그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집안의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는 여러 명의 노예, 곧 종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유한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자, 그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였고 빌레몬의 집에서 매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빌레몬을 생각할 때마다 빌레몬의 영적인 아버지요, 믿음의 스승인 사도 바울은 큰 기쁨이 그 마음에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하루는 빌레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종이 주인을 피해 도망을 갔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종이 주인을 피해 도망을 가는 것은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워낙 넓은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주인의 눈을 피해 멀리 도망을 가면 주인에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인의 눈을 피하고 나서부터 찾아옵니다. 바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그래서 당시 주인의 집을 도망쳐 나오는 대부분의 종들은 단지 자신의 몸만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집에서 값나갈 만한 재물들을 훔쳐서 나오곤 했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빌레몬의 집을 도망쳐온 그 오네시모라는 종도 주인의 재물을 한 손에 움켜쥐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할렐루야.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자꾸 과거의 일이 생각이 나요. 계속해서 과거의 잘못이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해요. 그래서 하루는 사도 바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앞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원래는 종이었거든요. 제가 주인집에서 나올 때 재물도 훔쳐왔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고 보니 그때의 일이 너무도 회개가 됩니다.’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 ‘어~~’하는 거예요.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도 바울에게는 더 분명해져요. ‘오네시모 네가 브루기아에 있는 바로 그 빌레몬의 종이었다는 거야!!’ 사도바울은 오네시모가 섬겼던 주인이 사도 바울을 영적인 스승으로 모시는 바로 그 빌레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쳐서 도망쳤어요. 그 장면만 놓고 보면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사도 바울 자신은 오네시모를 그의 원래 주인 빌레몬에게 넘겨서 죄의 댓가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잖아요.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오네시모를 어떻게 죄의 대가를 받으라고 무정하게 주인에게 보낼 수가 있어요? 사도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지요. 바로 이때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씁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큰 잘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주라는 권면의 편지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빌레몬서입니다. 


권위와 명령이 아닌 사랑의 간구 

자, 바울이 어떻게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지, 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에게 마땅한 일로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도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를 보면 얼마든지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는 영적인 스승이기 때문에 바울이 가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명령을 내기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계속해서 보십시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아기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사도 바울은 이제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달려왔고,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바울 자신도 알고, 지금 이 편지를 받아볼 빌레몬도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한 평생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던 사도 바울이 지금도 – 백발이 무성해진 지금도 복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헌신과 노력 가운데 (10절을 보세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너 빌레몬에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도라는 권위, 빌레몬에게 영적 스승이라는 권위, 그와 같은 권위를 내세워 명령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를 언급하면 간청합니다. 자신이 이제는 나이가 많아져 기력이 세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 갇혀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으로 간청하는 거지요. 누구를 위해서요? 빌레몬에게 큰 해를 끼쳤던 오네시모를 위해 간청합니다. 

여러분,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는 자세를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간구하는 사도 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원칙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고,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오랜 한 사람들 믿음이 좋은 분들이 그렇지 못한 분들을 섬겨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다고 우리는 원칙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지식과 정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여러분에게 참으로 겸혼하고 낮아진 마음이 있는지, 여러분에게 참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손길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매우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간구하는 언어가 여러분에게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삶에 어느 한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간구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최근 여러분의 입술에는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참으로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라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젊은 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박해를 받고도 지금 또다시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힌 내가 참으로 부탁한다고, 사랑으로 간구하는 말이 여러분의 입술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를 낮은 마음으로 섬기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나의 권위와 지식과 지위를 가지고 누군가를 향해 명령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설득하고 권면하고 간구하는 말이 없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를 낮은 마음으로 섬기시는 겸손한 일꾼은 아직 아닙니다. 


오네시모의 변화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가 그 동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여러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용한 자’,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오네시모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인정하는 바가 한 가지 있어요. 11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오네시모]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그것은 사도 바울도 인정하는 바예요.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이었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네시모는 그 주인 빌레몬에게 그저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으니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종이었지요. 이름은 유익한 자, 쓸모가 있는 자라는 뜻인데 그의 행동은 오히려 주인에게 무익했고 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무엇인지 아세요?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그의 이름의 뜻과는 전혀 상반되게 주변 사람들에게 무익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났고, 그러자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치던 사람에게 드디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고. 12절 뒷부분을 보시면, 이제는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의 무엇이 되었습니까? “심복”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 되었어요. 드디어 참된 의미의 오네시모, 곧 유용한 사람, 필요한 사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술에는 권위를 내세우고 권세를 내세워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언어가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간구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부탁하는 언어가 있었어요. 그러한 언어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대하자 과거에는 그의 주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해를 끼치던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처럼, 여러분의 사랑이 담긴 간구, 사랑이 넘치는 권면을 통해 여러분 주변의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여러분 주변의 누군가가 여러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오네시모를 여러분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주인에게서 도망쳐나왔어요. 처음에는 자신의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훔쳐서 나온 재물이 있었기에 이렇게 저렇게 먹고살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재물도 사라지고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어요.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한 평생 복음을 위해 충성하였던 사도 바울을 만났어요.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 전역에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과 같은 영적인 제자들이 가득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도 바울이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오네시모를 만난 거예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굳이 오네시모를 환대하고 그를 따뜻하게 대해줄 어떠한 인간적인 이유도 없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맞이했고, 결국 그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심복과 같은 사람이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났을 때, 권위를 가지고 권세를 내세우며 명령을 하였을까요? ‘아무리 봐더 네가 지금까지 인생을 잘못 살아왔으니 지금 당장 회개해라. 지금 당장 자세를 바꿔야 한다.’ 이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했을까요? 아니면, 사랑으로 간구하듯 이야기했을까요? ‘지금까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왔니? 어디 갈 곳이 없으면 이제 내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지 않겠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인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사랑으로 간구하지 않았겠어요? 그러자 오네시모의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심복과 같은 – 심장과도 같은 –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자꾸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저 사람이 과연 우리 교회에 나와서 적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오면 내가 불편해지지 않을까?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온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될 수 있을까? 여러분, 이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었던 사도 바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노력이 있었기에 그를 통해 오네시모라는 귀한 일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참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관부터 무너트려야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피하고 싶고, 별로 만나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고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늘 여러분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간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 

사도 바울은 드디어 그의 영적인 제자 빌레몬이 니고데모를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하는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함이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해방해줄 것을 말씀합니다. 13절을 다시 보시면,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종으로서 다시금 빌레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 있게 하지 말고, 자유인이 되어서 사도 바울 곁에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3절을 다시 보시면,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그다음에 무엇입니까?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복음을 전하는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와 복음을 증거 하는 동역자로 삼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이요,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받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13절에서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곧, 13절에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자신의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사도 바울이 지금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각하면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 곁에서 수종을 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 오네시모가 바울 자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시점 – 오네시모를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바로 이 시점 – 에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는 점을 언급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은 물론이요,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 그의 삶이 변화된 오네시모는 물론이요, 지금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는 빌레몬 너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매인 사람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묶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평생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지만, 그의 나이가 많은 지금까지도 그는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의 신분이 종이었지만, 그래서 인간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섬기는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빌레몬은 사회적인 신분으로 보면 자유인이고 빌레몬이라는 악한 종을 처벌할 수 있는 주인의 입장에 있지만, 그러한 빌레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더 이상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재물, 자신이 가진 모든 사회적인 위치,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워주기를 부탁하고 있어요. 그것은 단지 오네시모만을 위한 부탁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빌레몬 자신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재산과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老)스승의 간곡한 부탁 

사도 바울은 그의 한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매인 자가 되었고, 묶인 자가 되었고, 실제고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사도 바울도 나이가 많아졌지요 어쩌면 그의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로 인식하면서 주변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자, 너희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자. 사도 바울은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노 스승인 사도 바울의 간곡한 부탁으로 말미암아 오네시모는 물론이고, 빌레몬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귀한 사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과연 어떻게 사도 바울은 권위와 권세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간구로 주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로 바꾸어갈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 공격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언어는 권세를 부리며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었잖아요.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람이고,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그의 언어가 바뀔 수 있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에게 먼저 사랑의 간구로 다가왔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을 때, 예수님게서 바울을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훈계하거나 심판을 선언하시거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면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아 사울아 네가 가시채를 열심히 발로 차고 있지만, 그러면 너의 발만 아프지 않으냐?’ 바울을 만나 그에게 사랑으로 간구하고 사랑으로 권면하신 분이 계셨어요. 그분의 사랑을 조금씩 깨달아가면서 사도 바울은 그의 입술에 판단과 권위와 명령의 언어가 사라지고 사랑으로 간구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권면하는 언어가 가득하게 되었던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려서,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고 강요하여서 예배 자리에 나와 계신분은 안 계시잖아요. 우리가 여전히 범죄하고 있을 그때에,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돌이키라고, 생명의 길로 나아오라고, 하나님과 등진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로 나아오라고 사랑으로 권면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사랑으로 권면하셨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입술에 권위를 내세우고 명령을 내리는 언어가 사라지고 사랑으로 권면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언어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들도 우리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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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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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駐) 서독 미국 대사로 활동하였던 아더 번즈(Arthur Burns)는 미국 정가에서 매우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여러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아더 번즈는 신실한 유대인이었지요. 그런데 아더 번즈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로 구성된 백악관의 비공식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 모임을 인도하던 분이 모임의 마지막 기도를 유대인이었던 아더 번즈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아더 번즈는 이렇게 기도했죠.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각주:1]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럽지요. 회교도, 곧 무슬림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 역시 자연스러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사람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와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크리스천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더 번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더 번즈의 이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요.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닌가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살아가셨던 삶의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여러분들도 지금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고 계시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를 본받으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17절)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위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믿음의 수준이, 믿음의 경지가 어느 정도로 높아져야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미 올랐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여전히 수준 낮은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완성된 믿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온전한 믿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울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기록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이미 잡았나요? 아닙니다. 아직 잡지 못했기 때문에 잡아보려고 이제도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다음 절인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이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바울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전히 그의 앞에는 달려가야 할 푯대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바울은 자신이 온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 앞에 놓여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어떠한 의미입니까? 온전한 수준에 이른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다 이루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푯대를 향해 걸아 가는 자기 자신, 쉬지 않고 보다 높은 수준을 향해 달려가는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누구도 자신이 크리스천으로서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당연하지요.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자기 자신은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지켜보면, 마치 자신은 완전한 상태에 이른 듯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어요. 

1970년대 한국 교회 안에 이른바 제자 훈련이라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의 기본 취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단지 예배당을 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1980년 대 이후, 여러 교회가 제자 훈련을 시행하면서,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 나타난 부작용이 무엇인지 아세요? 제자 훈련을 수료한 사람과, 제자 훈련을 수료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제자 훈련을 수료한 성도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제자 훈련의 모든 과정을 마쳤기에 더 이상은 별도의 훈련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제자 훈련을 이미 수료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차별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일들이 교회의 직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 교회를 포함한 많은 교회가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을 세웁니다. 직분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보면 교회가 직분을 세우는 이유는 “선한 일을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딤전 3:1). 성도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직분자들이 직분을 받으면, 이미 직분을 받았으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일, 곧 지속적인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을 하지요. 그리고 어느덧 선한 일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받아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저를 포함하여,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보다 높은 성숙, 보다 높은 믿음의 단계를 향해 걸어가는 도상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려 할 때, 성경을 가르치기 가장 어려운 분들은 누구일까요? 이미 성경에 대하 많이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 해석에 대한 선입관 역시 강하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과거에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랜 시간 성경 말씀을 묵상하셨던 분들에게, 성경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불태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다시 성경을 묵상하셔야 해요. 그러면서 더욱더 깊은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고, 그때에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다시 한번 말씀에 비추이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 훈련을 시키려 할 때, 기도 훈련을 받기 가장 어려운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기도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오히려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기도를 많이 하셨던 분들이 오히려 교육 받기가 어려워요. 자신만의 기도 방식이 강하신 분들일수록 자신의 기도 습관을 깨치고 나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과거에 많이 기도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를 향해 달려가셔야 합니다. 

제가 한 가지만 더 질문해보죠. 일반적으로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키려 할 때, 훈련 받기 가장 어려운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아시나요? 교회 성도들 가운데, 과거에 전도 훈련을 이미 받았던 분들, 과거에 이미 전도를 많이 해 보았던 분들입니다. 전도 훈련, 이미 받았다는 겁니다. 전도 나만큼 많이 해 본 사람도 별로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신앙생활의 완성을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과거에 전도 훈련도 받고, 열심히 전도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전도의 열정을 가슴에 지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믿음의 성숙과 신앙생활의 높은 단계를 위해 앞으로 달려가는 도상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원수 VS 그리스도의 제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온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의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지속적으로 달려가면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빌립보교회 성도들 역시 본받기를 원했지요. 그런데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시대에,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그분의 진정한 제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과연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요. 율법주의자들이다, 혹은 복음을 위한 고난을 회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 가운데 존 칼뱅의 설명을 소개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판단됩니다. 칼뱅은 설명하기를 “그들은 복음의 친구인 척하지만 복음의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이미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나아가 정기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겉모습만 본다면 복음의 친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그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그들의 배, 곧 식욕과 탐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광을 구하지만 그 마지막은 그들의 부끄러움이지요. 그리고 19절 마지막을 보시면,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미 크리스천이 되었다니까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니까요. 나아가 정기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겉모습만 본다면 복음의 친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의 성숙을 아직은 이루지 못하였다고 고백하며, 멈추지 않는 열심과 열정으로 자기 자신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지라도 식욕과 명예욕과 같은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바울 시대에도 존재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도상에 서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시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21절 뒷부분을 보시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는 분’이지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다 깊은 신앙, 보다 높은 믿음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들의 소망을 하늘에 두며, 마지막 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과,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들의 특징을 상반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 남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겉모습은 복음의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은 너무나도 자주 중간지대를 생략합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 

그런데 시편 1편 4절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으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 중간지대는 없어요. 

예수님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말씀하셨지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가 넓어서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우리는 그 두 가지가 적절히 섞였으면 좋겠습니다. 문도 크고 길도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국에는 그 길이 멸망이 아닌 생명의 길이기를 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 두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지대를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쉬지 않고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겉모습은 복음의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중간지대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은 것이죠. 


“여러분은 믿음의 성숙과 신앙생활의 더 깊은 단계를 향해 오늘도 걸어가고 있는 도상 위의 그리스도의 제자이십니까?”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사도 바울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1. 오스 기니스, 『소명』(서울: IVP, 2009), pp. 173-17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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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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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제목은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다른 여타의 모임이나 조직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 가장 현저하게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임이 매주 일요일마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제외하고 그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이 매주 일요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며, 일요일에 모이는 정기모임을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이 기독교의 눈에 띄는, 가장 직접적으로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구약성경이 매주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까지도 바꾸어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매주 그 주일을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독특한 특징입니까? 이처럼 기독교는 주일을 거의 생명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처럼 주일에 집중하고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여주시기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날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매주 성 금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주일을 지키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쁨과 즐거움의 공동체이지요. 세상 속에서 슬픔과 괴로움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는 성경 안에서도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교회가 얼마나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뒷부분을 보시면,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에게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 역시 기쁨이 넘쳐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기쁨,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쁨 외에도 하나님의 기쁨이 등장해요. 13절을 보시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 뒤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란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목회자들이 또한 즐거워하고, 이 모든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시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러한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즐거워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목회자들이 기뻐하고, 나아가 그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시며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실 만한 기쁨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과연 어떠한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대답을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내부의 관계에서, 둘째는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과연 어떠한 교회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요, 하나님께서도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교회, 그 첫 번째 특징은 - 교회 내부의 관계에서 -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 다 함께 1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구약 성경 사사기를 보면 흥미로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나라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또 당시 이스라엘은 암몬 나라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그러게 짧지 않은 시간이 흘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족 영웅 입다를 세우셔서, 암몬 군대를 몰아내게 하십니다. 입다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임했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기쁨을 빼앗아가는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암몬 나라의 군대를 모두 몰아낸 입다와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였던 에브라임 지파의 지도자들이 입다를 찾아와 시비를 붙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삿 12:1)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주장은 사실 정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암몬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그들은 용기를 내어서 그들과 싸우러 나갔던 사람들이 아니죠. 입다는 그들의 주장이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입다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내전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4만 2천 명의 에브라임 사람이 죽고 말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땅에 가족을 잃은 탄식과 고통의 눈물이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로 그 시점,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바로 그 시점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원망과 갈등으로 말미암은 시비가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주신 큰 기쁨의 사건이 슬픔과 통곡과 눈물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국 교회의 워치만 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농사를 짓는 크리스천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교회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인 논에서도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논에 물길을 내고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논에 나가보니, 누군가 자신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터트려 자신의 논에 물이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분노가 있었지만, 그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수로를 복귀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천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달라고 기도 요청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천 형제의 기도제목을 다 들은 어니 교회 지도자 한 분이 크리스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지는 않을지 기도해 보시가로 말씀드리고 싶소.” 

크리스천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로 제가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의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주변의 논에 흘러가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워치만 니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 크리스천 형제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 가운데 큰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서 촉촉한 하나님의 은혜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사단의 탁월한 공격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원망과 시비입니다. 나는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다른 누군가로 인하여 나의 헌신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올린 정성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때로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의 원망이나, 우리의 시시비비가 옳고 정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원망과 시비가 고개를 들고일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흠 잡히지 않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는 어떠한 교회 일까요? 둘째로, -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세상에 흠 잡히지 않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그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우리 한 목소릴 봉독하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을 무엇이라고 묘사합니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니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것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포스트모던시대라 불리는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옛날 바울 시대에도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동일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 그리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자신들과 다르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 높은 기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때로는 비판도 하죠.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 그래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올곧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세상에 실망감을 안겨주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교회라면 – 설령 그들의 주장에 맹점이 있더라도 – 그 교회가 어떻게 기쁨의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셋째로,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실 만한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여기서 ‘밝혀’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붙든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제시한다’(밝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한글성경에는 ‘밝혀’라고 번역해 놓고는 거기에 각주를 달아서 ‘붙들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16절의 말씀을 기록할 때 ‘붙든다’는 의미와 ‘제시한다’ 혹은 ‘밝힌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교회의 특징은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요, 나아가 생명의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밝히 보여주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옳은 것을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옭은 것을 명령하죠.  예를 들어 십계명에서 ‘살인하리 말라’ 얼마나 상식적인 명령입니까?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남의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얼마나 상식적인 명령이십니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옳은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일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라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옳은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그 이상의 위대한 것을 권면하시죠.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크리스천의 삶을 “상식에 준해 살면서도 상식의 한계를 넘어서 사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때로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에 드렸던 중국의 한 크리스천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농부의 논에 나누어주자,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못되어 주변의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는가?” 그러자 이 크리스천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네.” 그러자 깜짝 놀란 이 동부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자네가 소작농이었나?.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자 크리스천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네. 그분은 나에게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명령하셨다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라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농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사건들, 기쁨과 즐거움의 사건들이 가득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상식에 기준하여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옳은 일만이 아니라, 옳은 일 이상의 더욱 위대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안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실천할 때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옳은 것을 넘어 더욱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언어와 삶으로 선포할 때, 우리 교회에 하늘의 기쁨이 쏟아지는 것이요, 그러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참된 기쁨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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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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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란 곧 ‘자유’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재물, 곧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왜 그 재물을 얻어야 하고 그토록 노력하여 얻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그저 재물을 모으려는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술의 노예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쾌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학벌이나 권력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궁극적으로 죄와 사망의 종이로 고통하며 신음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곧, 모든 얽매었던 것으로부터, 특별히 죄와 사망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자유가 넘쳐흐르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남편에게 얽매어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자녀들에게 얽매어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시댁에 얽매어 있는 것 같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언제나 참된 자유를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바로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의 말씀을 우리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나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로, “오직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자리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있어요.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여러분의 가정에서 사랑으로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섬기는 종의 자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종의 자리를 선택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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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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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기도’를 생각할 때, 기도가 점점 깊어지는 기도의 단계에 대해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많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햄린 제일침례교회의 존 포웰 목사님입니다. 존 포엘 목사님은 기도의 단계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존 포엘 목사님이 제시한 네 가지 단계를 예외 없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 참고가 될 수 있기에 한번 소개를 하겠습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첫번째 단계, 곧 기도의 시작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따라 하는 단계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나 미션스쿨을 다녔던 분들은 그곳에서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이 들려주었던 기도 가운데 일부를 그저 따라 하는 것이지요. 성인이 되어 교회를 출석하였더라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교회에서 들었던 기도를 자신의 입으로 흉내 내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두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여 자신만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기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기도의 네 단계 가운데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존 포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기도의 세번째 단계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슬픔, 아픔, 괴로움,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쁨, 감사, 찬양 등.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죠. 존 포웰 목사님은 시편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 깊은 것을 표현하는 세 번째 단계 기도의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기도라면 충분히 깊이가 있는 훌륭한 기도가 되겠지요. 
그런데 존 포웰 목사님은 이와 같은 세번째 단계를 넘어서는 더 깊은 단계, 곧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언어가 필요 없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단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단계, 바로 이러한 단계가 가장 깊은 기도의 단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각주:1]  

말씀 드린 것처럼, 존 포웰 목사님이 제시한 기도의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때나 어느 상황이나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포웰 목사님이 제시한 가장 깊은 단계, 곧 더 이상 그 어떠한 언어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는 그 깊은 기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쯤은 꿈꾸는 기도의 깊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언어들 가운데, 그와 같은 가장 깊은 단계의 기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빠” “아바 아버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더 이상 어떠한 인간의 언어를 계속해서 쏟아놓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깊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질문,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두 번째 질문,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특권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첫째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지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신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아래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면, 율법 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들을 속량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명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량하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주셨다는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얼마 전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가족을 심방하였습니다. 그 가정은 오래전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던 가정이었지요.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교회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운영하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왔어요. 그것을 계기로 지난 10여 년간 신앙생활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였던 가정이지요. 
그날 모임에 대학생 딸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생인 그 자매에게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전에 신앙생활도 해보았고,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는데 자매의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교회를 생각할 때 기독교를 생각할 때 어떠한 마음과 생각이 드나요?” 그러자 그 청년이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자라났고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온 식구들이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했다는 거예요. 어린 중학생의 마음에 아빠와 엄마를 비롯해 온 식구들이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실 거라고 믿었데요. 그런데 현실은 자신의 믿음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도와주지 않으셨데요. 
대학생 청년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가 그저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온 식구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온 식구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압장서서 감당하였지만, 그리고 그 가정을 향해 몰아치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온 식구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 온 식구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한참 들은 뒤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나님을 향한 실망,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배신감 등 자매의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슴에 품었기에 하나님을 더욱 멀리한다면 자매의 마음에 있는 실망감은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불평, 불만, 배신감을 간직한 채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님께 쏟아놓는다면 자매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마음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었어요. 지금까지 자라면서 부모님께 실망하고 서운했던 적이 왜 없겠어요? 부모님이 왜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원망스러웠던 적이 분명히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때로는 그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도 계속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자매를 향한 부모님의 더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실망하고, 원망스럽고, 서운한 감정을 간직한 채 하나님께 나아가면 좋겠다고 권면을 했지요. 

그리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나누었던 말씀이 로마서 8장 31-32절이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때로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셨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그 한 가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지금 내가 겪는 삶의 무게가 제 아무리 무거울 지라도, 그 인생의 무게에 눌려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 단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가? 

바울은 먼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지를 보여주고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역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권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아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경기도 포천에 팔호교회라는 조그마한 시골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창립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지역은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가족을 모두 잃은 어느 군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내리면, 어김없이 술을 얼큰하게 한 잔 하고는 강원도와 경기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 강가에 나가 홀로 적적함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너무도 보고 싶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합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많은 술을 마신 채 한탄강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대요.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나 불렀을까요? 마음의 모든 그리움을 담아 ‘아버지’라고 크게 부르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왜 부르느냐?” 그 음성을 듣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음성에 갑자가 술이 다 깨고,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군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곁에 계셨군요.’ 그때부터 그분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교회 장로님이 되셨고, 자신이 ‘아버지’를 찾았던 바로 그 자리, 제8호 한탄강 강변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팔호교회입니다. 

팔호교회를 창립하신 장로님의 경우처럼, 우리 주변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분들이 계세요. 아니면 시간이 흘러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을 언제 불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분들도 계시죠. 어디 그뿐인가요? 가정이 깨어지고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설령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랐을지라도,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 아버지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한이 없이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70여 년을 무신론자로 살았던 이어령 박사는 무신론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 강한 체 오기를 부리다가도 누가 옆에서 조금만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손을 내밀면 금시 울음을 터트릴 그런 사람들이’ 바로 무신론자라고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각주: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잖아요. 수많은 기도의 제목을 다 아뢰지 못했도, 나의 마음을 충분히 하나님께 쏟아 놓을 수 있는 언어가 우리의 입술는 부족할 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심령을 헤아려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 세상의 그 어떠한 아버지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특권,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4장 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여기서 ‘유업을 받을 자’, 곧 상속자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복음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에게, 곧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졌던 그 장면을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량, 곧 죄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중요한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넌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큰 위기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금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나의 앞길이 막막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많은 말과 화려한 언어로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그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딸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의 삶을 인자하게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의 특권, 곧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의 특권인 것입니다. 


  1. The PCC. Equipping Elders (Toronto: PCC, 2010), 122. [본문으로]
  2.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서울: 열림원, 2010), 26-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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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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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시작을 하지요. 1절을 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3절도 보십시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토록 쓴소리를 쏟아 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를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지요. 곧 믿음과 행위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무엇을 행함으로, 무엇을 행했다는 공로로 구원을 받으려는 모든 노력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호통을 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원리, 곧 은혜의 복음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서 행함의 원리, 곧 율법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할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할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아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 위에 행위를 덧붙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지요. 그러나 어떻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교회에 잘 출석해서 헌금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열심히 살아야 구원을 받지 않을까요? 이렇게 믿음 위에 행위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백 번 양보해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신앙생활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호통을 쳤던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이제 질문이 등장하죠.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2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처음 신앙의 길을 시작할 때에는 믿음으로, 은혜로 - 3절의 표현대로 성령으로 – 시작하여 놓고, 이제 와서 왜 율법으로 행위로 공로로 - 3절의 표현대로 육체로 - 신앙생활을 마치려 하느냐고 질책하였던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죠. 이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이후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5절을 계속 보시면,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일생에 한두 번 경험하는 특별한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곧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사도 바울이 의도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듣고 믿기 때문이라고,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호통을 쳤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로 나의 삶을 이끌어가려는 모든 노력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행위로, 공로로, 자격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요,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경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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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