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6. 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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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궁극적 지향점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단 두 개의 명령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포함한 율법 조항의 최종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율법의 지향점이 ‘사랑의 마음’이라는 가르침은 우리에게 격려가 되면서도 아울러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격려’라는 의미는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사랑의 마음을 품기만 하면 율법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요, ‘절망감’이라는 의미는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에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율법의 시작이요 완성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은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고 맙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빚’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빚만큼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강조합니다. 빚이란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을 때 시작됩니다. 이미 받았으니 빚이 발생하였고, 이미 받았으니 나에게는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미리 받았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빚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의 빚이 발생하였고,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으니 빚을 갚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보상을 주신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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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6. 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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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기독교의 복음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담겨있는 성경의 책입니다. 한 평생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설명한 글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로마서는 편지입니다. 편지란 특정인이 편지를 받는다는 전제 하에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가 되고, 로마교회 성도들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됩니다. 곧,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히 무엇인가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로마서인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5절을 보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음에 대해 알려주고,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 신자인가요? 아니면 불신자인가요? 우리가 전도를 한다고 할 때 주로 불신자를 만나 전도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기존 신자들에게도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불신자에게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편지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곧 갈라디아 지방, 마게도냐 지방,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거쳐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사도 바울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 로마 교회 성도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기에 아주 귀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교회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도 무엇이 필요해요?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 내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너무나 즐겁습니다. 내 마음에 감격이 흘러넘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들 수조차 없는 죄인인데 나의 그 많은 죄악이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해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말하죠. 처음 예수님을 믿으면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요. 이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것이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시간이 흐르면 불행히도,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내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복음의 감격이 껍데기만 남아요. 복음에 대해 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지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 마음에 그 감격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고, 다시 복음을 묵상해야 하며, 다시금 복음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하였고,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이 사라지셨다면 다시금 우리가 바른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고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 –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편지를 시작하는 로마서 1장 1절부터 복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2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날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길을 막아서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믿음의 길을 시작하도록 하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의 회심을 그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한 순간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한 순간, 예수님을 대면했던 그 신비한 체험이 바울이 회심하는 전체 과정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이 그 근거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이 선언은 예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그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이후에나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직후 아라비아로 갔다고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cf 갈 1:17). 아무도 없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구약성경을 다시 읽으며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진지하게 탐구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거부하고 박해하였던 예수님이 과연 누구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나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인가? 이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구약 성경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창세기 12장 2절에 등장하는 열방에 복을 주시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7장에 등장하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임마누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예언이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이사야 53장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어요. 그런데 다시금 성경을 읽고, 다시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야 말로 온 인류를 구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요, 사도 바울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자가 되셨던 거예요. 사도 바울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며 바로 2절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3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이 모든 것을 구약 성경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다메섹에서의 단 한번의 체험은 바울이 회심하는 계기는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바울이 회심하는 전체 과정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후, 구약 성경을 깊이 읽었고, 예수님의 생애를 깊이 묵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알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탐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복음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흘러넘쳤으며, 어떠한 고난이 찾아와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놀라운 체험을 했지만,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신비한 체험을 계속해서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과 같이, 마음 가득히 복음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도 구원의 감격이 다시금 풍성하게 흘러 넘치시기를 원하시나요?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신비한 체험을 쫓아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다시금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집중하시고,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들려 달라고 요청하지 마십시오. 너무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마세요. 성경 저 구석에서 한 구절을 찾아내어 뭔가 새로운 이야기인 양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바로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부르심 – 복음이 일으키는 변화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먼저 복음에 대해 간단히 서술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묘사하지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5-6절)

바울은 먼저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사도 바울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직역입니다. 본문에는 ‘이사일의’라는 수사학적인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설명은 다 뒤로 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우리말 성경의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라는 표현의 뜻은 ‘은혜, 곧 사도의 직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습니다. 곧 사도의 직분이라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기 전, 바울은 복음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자 복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삶의 정체성이 변화되고, 삶의 목적이 바뀐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했지요. 바울은 다음으로 이방인들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5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 다음에 누가 등장하지요? “모든 이방인”이 등장합니다. 그들도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요 그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믿어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니, 그들도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변화를 설명했지요. 마지막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이 등장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여기서 너희는 당연히, 로마교회 성도들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인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로마의 시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성도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박해자였던 사울을 불러 바울 사도로 삼으시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을 불러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변화시키고, 로마의 시민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곧,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삶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복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런데 그 변화라는 것이 만사형통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내 삶의 변화는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인생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도라는 직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어요. 이방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로마교회 성도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엇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복음의 은혜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자아가 죽어 있는 사람이에요. 나의 자아는 죽고 예수님만 살아있는 사람이지요. 그에게는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집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만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만 있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정체성만 있어요. 내 손에 있다고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려 합니다. 나에게 조그마한 힘이 있다고 그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너무도 풍성하기에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성숙이고, 신앙으로 말미암은 인격의 성숙입니다. 

신앙생활의 경륜이 한 해 한 해 더 늘어날수록 우리의 믿음도 성숙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해보다 내년에 나의 믿음이 더 성장하고,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격이 더 성숙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그 해답, 그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온갖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박해자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은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부르신 은혜, 로마의 황제가 정해놓은 법률에 따라 살아가던 로마의 시민들을 천국에 그 시민권을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신 그 은혜가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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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5. 1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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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느헤미야 7장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이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특별히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오늘 본문과 같이 생소한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어서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성경에 이와 같은 이름들을 나열하셨을까요? 과연 오늘 본문 느헤미야 7장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의 명단일까요? 나아가 오늘 본문 느헤미야 7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느헤미야 7장의 명단이 시작하는 5절과 6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 함께 5절과 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모두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는 말씀입니다. 5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인구조사를 실시한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인구조사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5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곧,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그 명단을 기준으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과 지금 느헤미야가 그때의 명단을 확보해서 인구조사를 하는 시점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었을까요? 학자들은 바벨론에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을 편의상 ‘1차 포로 귀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편의상 ‘3차 포로 귀환’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1차 귀환으로부터 3차 귀환에 이르는 시간의 차이는 대략 100년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7장 5절에 등장하는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다고 했을 때 이 명단은 100년 전의 명단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느헤미야 7장 6절은 느헤미야가 확보한 명단, 곧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옛적에” 옛적의 일을 언급하는데, 그 옛적의 일이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사로잡혀서 포로의 신분으로 끌려간 일이 있은 후, 그들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까지는 모두 7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데 70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시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을 건축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 100년입니다. 그 170년의 오랜 세월 속에는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고난의 시간이 있었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려고 노력하는데 도비아와 산발랏과 같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야 하는 등의 시련이 끊이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1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 그들의 명단을 보존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왜 느헤미야 7장에는 생소한 사람들의 이름을 그토록 길게 나열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의 생각에는 잊혀졌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은 유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셨고 그들을 보존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른스트 라이트라는 분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다는 것도 담고 있지만, 그보다 더욱 많은 내용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보여준다는 의미이지요. 바로 느헤미야 7장이 그렇습니다. 느헤미야 7장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기셨고(사 49:16),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잡고 보호하셨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여러분이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을 붙잡으시며,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7장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7장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존하셨던 이름들을 모두 기록한 뒤에 마지막 73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존하신 사람들 중에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전의 문지기들도 있었고, 성전에서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역할이 달랐지만, 그 마지막은 동일합니다. 73절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한사람 한사람 인도하여 주셨고, 그들을 각자의 성읍에 거주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레위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문지기나 노래하는 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고 우리 개인을 각자에게 꼭 필요한 자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오늘 나의 하루가 사람들에게는 잊혀진듯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기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장소로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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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5. 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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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요인이 있다면, 단연코 코로나 바이러스일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교회도 올해 상반기 약 두 달여 동안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였습니다. 몇 주 전부터 주일예배를 성도님들이 함께 예배하고, 이번주부터 새벽예배와 수요예배도 성도님들에게 예배당을 개방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예배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던 중 저의 눈에 크게 들어왔던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 있는 말씀인데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렘 32:42) 

이 구절에 제 시선이 고정되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큰 재앙”이라는 단어가 먼저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허락한 모든 복’을 내려 주시겠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재앙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지나간 후에는 허락한 모든 복을 내리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큰 재앙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지금, 이 땅의 모든 국민들, 특별히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선포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모든 재앙이 미치게 하였으나,
이제 내가 이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베풀어 주겠다.

약속하신 모든 복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셨지만, 그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단연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욥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욥은 큰 재앙을 만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일곱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그런데 사탄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욥의 몸을 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한 종기가 일어나게 합니다. 재산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니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재앙이 그의 삶에 닥쳐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점차 지나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욥의 큰 재앙이 모두 지난 후, 하나님은 욥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부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욥의 재산 목록이 등장합니다. 양이 만사천 마리, 낙타가 육천 마리, 소가 천 겨리, 암나귀가 천 마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욥의 재산은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 곧 욥기 1장에 등장하는 욥의 재산과 비교하면 정확히 두 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욥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은 단지 재물의 축복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계속해서 14절에는 세 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미마와 긋시아와 게렌합북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딸들에게도 풍성한 기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딸들에게만 기업을 주었겠습니까?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열명의 자녀들에게 풍성한 기업을 나누어 주며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큰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은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자, 욥기 1장은 욥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가 부자였고 많은 자녀들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제사를 드리는 의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욥기의 마지막장인 42장에는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이 잃어버렸던 재물도, 잃어버렸던 자녀도, 잃어버렸던 건강도 다시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겉모습은 큰 재앙을 만나기 이전이나 큰 재앙을 만난 이후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욥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정말로 큰 재앙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은 별로 큰 차이가 없었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16절과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서술처럼 보입니다. 큰 재앙이 지나고 140년이라는 긴 세월 장수하였고, 이후 늙고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내용에 친숙하신 분들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며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구절은 큰 재앙의 터널을 지나온 욥의 후반기 삶은 고난을 당하기 이전의 삶과 겉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욥은 큰 재앙을 만나기 전에도 많은 재물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욥은 큰 재난을 겪기 전에도 이미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욥은 큰 아픔을 겪기 전에도 때를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도, 이러한 행복도 사탄이 마음먹고 달려들자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이렇듯 허무하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이 욥기 1장이 묘사하는 욥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큰 재앙을 인내하였고, 마침내 그 모든 재앙이 물러가자 욥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도, 자녀도,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가 있었으니 욥의 세계는 더 이상 사탄의 유혹에 쉽게 붕괴되지 않는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큰 재앙을 지난 후 14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욥의 인생은 거대한 풍파가 몰려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창세기의 족장들이 그러하였듯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삶에 있어 고난은 더욱 견고한 믿음의 반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욥의 변화 – 하나님 체험

욥은 자신의 삶에서 커다란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지난 후 욥의 삶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했지요,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겪는 동안 욥의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과연 욥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기에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삶,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큰 재앙을 겪으며 경험했던 욥의 변화를 욥기 전체에서 찾아본다면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 체험’입니다. 

자, 욥은 큰 재앙을 만나기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욥은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은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을 것입니다. 욥 자신도 이만하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삶에 큰 재앙이 찾아오니 그 모든 것이 헛된 자랑이었습니다. 고난의 순간이 찾아오자 그제서야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채 그저 풍월로 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실체가 없고 그저 입술의 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급기야 욥은 이렇게 탄식하지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8-9)

그런데 여러분, 큰 재앙을 만난 욥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풍월로만 하나님을 알았던 욥인데, 그저 입술로만 하나님에 대해 떠들어댔던 욥인데 큰 재앙을 지나며 욥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 5절에 등장합니다. 욥기 42장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몇 달 전만하더라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심지어 주일예배까지도 온라인 예배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성도님들이 이 기간을 통해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경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코로나 이전에는 교회 활동이 바빴어요. 교회 모임에 참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러나 이제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주일예배, 새벽예배, 수요예배 등 한주에 10개 가까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예배 영상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영상을 시청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열심히 성경도 읽고,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의 활동이 위축된 이 시기에 오히려 개인의 믿음과 신앙이 더 깊어지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멈추지 않은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여러 활동이 멈추었지만 여러분의 개인 경건의 시간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아니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가정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와 가정 예배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러 갈 것입니다. 마침내, 이 큰 재앙도 지나갈 것입니다. 이 모든 재앙이 지난 후 우리도 욥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변화 – 우정의 회복

큰 재앙을 겪으며 경험했던 욥의 변화, 그 두번째는 ‘우정의 회복’입니다. 

큰 재앙을 만나기 전, 욥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재앙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지요. 욥이 평안하고 부유하고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았을 때 그의 곁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정작 욥에게 큰 재앙이 찾아오자 친구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이것이 욥기 전체에서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할수록 그들로부터 위로받기보다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표현하는 욥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 16:2)

욥의 주변에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들은 욥의 마음을 위로하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큰 재앙을 겪으면서 욥과 친구들의 관계가 변했습니다. 욥의 마지막 장인 42장 10절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큰 재앙을 겪으며 먼저 욥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욥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1절도 보십시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먼저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욥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와서 욥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욥을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욥은 큰 재앙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를 얻었고, 형제와 자매들을 얻었으며, 마침내 이웃을 얻었던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적게 만나다 보니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지 않으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그 누구보다도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여 더욱 그리운 우리 교회 교우분들을 서로 돌아보십시오. 여전히 멈추지 않은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와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보다 깊이 체험할 뿐만 아니라, 참된 우정을 회복하십시오. 

마침내 이 모든 재앙이 지난간 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모든 재앙이 미치게 하였으나,
이제 내가 이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베풀어 주겠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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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7 “욥의 회개와 결말” (32장)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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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성경공부" 목차 (Contents)

욥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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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9. 5. 13.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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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많은 성도들에게 무서운 책,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책, 잘못 읽거나 잘못 이해하면 이단의 가르침에 빠지는 책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래서 교우분들 중에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머뭇거리는 분들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계시록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여러분에게 적극 권해드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꾸며낸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가르침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면 요한계시록 자체만을 여러 차례 읽는다고 하여 이단의 가르침에 빠질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많은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의 공동체

요한계시록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기도에 대한 유익한 가르침이 가득하지요. 성경은 성도들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는 모습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계시록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요한계시록 5장 8절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장은 천상에서의 예배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을 그때에 이 세상은 로마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고, 세상의 주인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여기며 경배하였습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황제가 신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억울하게 매를 맞거나 심지어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하였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든 환란과 박해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그 어두컴컴한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초라하였고, 그들의 형편은 비참했으며, 그들의 종교활동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성도들의 겉모습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였습니다(고전 4:13).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이 있었으니, 저 낮은 지하감옥에서, 저 낮은 지하 무덤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에 담겨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고, 로마의 황제가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로마의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실상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기에, 그리고 그들의 기도가 지금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고 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결국에는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여러분의 처지가 초라하다고 여겨지십니까? 때로 여러분의 형편이 비참하다고 여겨지시나요? 여러분의 종교활동이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열려 겉모습만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 모르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는 지금도 천사들의 손에 들린 금향로에 담겨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 때,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도 기도에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나의 간구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소망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신앙인으로서 삶의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비결 역시 기도에 있습니다. 나의 앞길이 캄캄하여서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지금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귓전에 들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향해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을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연약하고 미약한 성도라할지라도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성도님들을 귀하여 여기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 시대 이 땅의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여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기도와 예배가 지속되는 한 이 땅의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찬양의 공동체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은 바로 이 교회의 영광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9절과 1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9절 말씀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물론,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의 구성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러서야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의 찬양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로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 다른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감시를 피해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무덤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 제국을 벗어나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장소도 없고, 그럴 만한 형편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든 세계 각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는 하늘 보좌에까지 상달되어 그곳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은 온 세계 각처에서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재산의 손해를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제국에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하심이 오직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이 초라할 지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지하 동굴, 지하 무덤에서 드리는 금새 사라질 듯한 연약한 목소리라 할지라도 그 찬양의 가사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상달되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크고 넓은 예배당에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지만, 여전히 조그마한 예배 처소에서 몇몇 되지 않는 교우들이 함께 예배하는 이른바 많은 개척교회들의 예배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여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는 아름다운 찬양이요 영광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주일 예배뿐이겠습니까? 구역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드리는 구역예배에서도, 그저 부부 두 사람이 거실에 앉아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부르는 찬양 속에서도, 때로는 내 곁에 함께 예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고 홀로 찬양을 부르는 개인의 예배에서도. 우리를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고, 그 무엇보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씻어주시어 모든 어두움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는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의 찬양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울려퍼지는 영광의 찬양, 영광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보여주셔도 이 땅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회인지, 이 땅의 성도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인지 충분히 알려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한에게 보여주신 장면을 이제는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하지요. 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찬양을 부르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곧 13절의 질문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4절 이후부터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도들은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기도는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갑니다. 성도들의 겉모습은 초라하고 비참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한 곡조의 노래는 천상을 울리는 영광스러운 예배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15절은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매우 놀라운 비밀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위에”, 곧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쉬지 않았던 성도들 위에 무엇을 치신다고요? 장막을 치십니다. 이 장막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 세상 사람들은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막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재물도 없고. 그래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로마제국에서 살면서 모진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그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쳐 놓으신 장막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16절과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라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합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지 않아서 늘 배고프고, 늘 목마를 것같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아요, 목마르지 않습니다. 16절을 계속 보십시오.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합니다.’ 위태위태하고, 다칠 것 같고, 저렇게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다가는 만신창이가 될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주시니 상하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17절입니다.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닦아 주십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을 묘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19장에 이르러서야 나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 가운데 있고, 비록 지금은 환난을 만나지만 – 먼 미래가 아니라 –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리지 않습니다. 목마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여러분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친히 닦아주십니다.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펼쳐놓으신 이 장막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신 뒤에 들어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쳐 놓으신 장막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따스한 사랑을 느끼며 천국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나의 삶에 고난이 많고, 비록 우리 시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며,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의 찌꺼기처럼 보일지라도,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찬양하십시오.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이 많고 슬픔이 많을 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간절한 기도와 진실한 찬양이 흘러나온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가정,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장막이요, 곧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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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9. 3. 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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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모방심리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려는 마음이지요. 인간의 모방심리는 매우 어린시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첫돌이 되지 않은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면 아이도 혀를 내밀고,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면 아이도 머리를 흔드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모방심리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모방심리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별로 차이가 없어서 드라마 속의 유명 연예인이 특정한 가방을 메고 나오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성인들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마련입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선택할 때에도 누적관객의 숫자가 백만이다, 천만이다라고 하면 그 영화를 먼저 보게 되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할 때에도 그 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메뉴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모방심리입니다.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이트 가운데 최근 몇 년간 급부상한 기업이 있습니다. ‘핀둬둬라는 기업입니다. 이미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선점한 기업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핀둬둬라는 회사는 여러 가지 신화를 만들어내며 짧은 시간에 거대한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잠식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핀둬둬가 이룩한 급성장의 배후에는 이른바 짝퉁이라는 모조품을 묵인하고 판매하였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명품을 나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좀더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용하여 모조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바로 그 점을 활용하여 핀둬둬와 같은 기업이 호황을 맞이했다는 분석이지요. 그러고 보면 명품을 따라하는 모조품의 생산과 판매, 나아가 모방 범죄나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모방 자살 등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모방 심리가 매우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모방심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사람의 뇌에서 거울신경세포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거울신경세포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뇌 안에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거울신경세포가 자리잡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키는 상황에서 혼자만 짬뽕을 먹겠다고 주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상충하는 행동입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는 현장에서 혼자 일본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듯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인 것이지요.

 

 

모방 금지

 

그런데 오른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방을 금지하십니다. 다른 사람, 특별히 다른 민족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따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의 문화와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3절이 언급하는 두 개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나라들입니다. 먼저는 애굽이 등장하지요. 3절은 애굽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애굽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풍속이 너무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의 문화와 애굽의 풍속을 모두 끊어버리고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어린시절 형성된 습관이나 행동방식을 성인이 되어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만 애굽에서 태어나 생활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생활한 역사가 430년이니 그들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고, 그들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여러 세대가 내려오도록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거주하였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애굽의 모든 문화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의 문화도 본받아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 뒷부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데려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익숙한 애굽의 문화와 풍속도 모두 벗어버리고, 앞으로 들어가 살게되는 가나안 땅의 문화와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애굽이 당시 거대한 문명을 창조하였던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어떨까요? 가나안도 나름대로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키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이 애굽만큼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문화에 있어서는 당시의 유행을 주도하는 문화였어요. 실제로 광야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그들은 가나안의 문화에 넉을 잃고 맙니다. 그만큼 가나안의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력적이 것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결코 우리가 따라갈 삶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 세상의 행복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힘과 재물과 명성을 따라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아무리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모방심리가 작용하고, 우리의 머리 안에는 거울신경세포가 있어서 우리 마음의 모방심리를 자극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외길 인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문화도, 가나안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따라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이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문화를 배척하고 모두 벗어버리라고 명령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나름대로의 문화와 풍속을 창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레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당시 유행을 주도하는 화려한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눈에 보이는 웅장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2:2).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2:3). 그때에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2:11-12). 그러나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2:4-5).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 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상관 없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세상의 모든 문화와 풍속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로마서 12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하는 외길인생입니다.

 

 

생명의 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가나안의 풍속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하나님은 이와 같은 명령에 한 가지 약속을 첨가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어떻게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외길 인생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였던 애굽의 문화가 대단해 보이지만, 가나안의 풍속이 대단히 화려보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풍속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외길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서 참된 생명의 길과 행복의 길은 우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면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살게되라는 약속을 가만히 묵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광야 40년의 세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더라고요.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유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들이 행한 범죄, 그들이 저지른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특별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한 것은 그들이 떠나온 애굽의 문화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삶을 훈련하는 시간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의 문화가 너무도 익숙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 곧 생명과 행복의 외길을 걸어가려면 먼저 430년 동안 익숙해진 애굽에서의 삶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광야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며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애굽의 문화를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는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애굽과의 단절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언약을 채결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는 삶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가나안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하였기에 가나안의 화려한 문화에 물들기 전에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가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애굽의 모든 문화를 벗어버리고 가나안의 풍속에도 물들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여 결국 행복과 생명의 길에 들어서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계신분이 계십니까? 내 곁의 누군가는 크고 웅장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애굽의 길을 걸어가는데, 왜 나는 초라한 광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가슴 답답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곁의 누군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가나안의 길을 걸어가는데,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외로운 광야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걷는 그 외길 인생이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광야길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풍속과 문화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십시오. 비록 지금 내가 걷는 광야 길이 척박하고 메마를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풍속과 문화를 벗어버리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외길인생을 걸어갈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걷는 바로 그 길이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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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9. 3. 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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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라는 영웅이 활동하던 시대의 한 에피소드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대단한 힘을 사용해서 블레셋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나귀의 턱뼈를 무기로 혼자서 블레셋 군인 천명을 쓰러트렸으니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수시로 침공하여 괴롭혔던 블레셋 군대를 삼손은 혼자 힘으로 천명을 무찌르는 대단한 전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그와 같이 큰 일을 행했지만, 그의 몸에 피로가 몰려왔고 삼손의 목은 타들어갔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8절)

 

삼손은 자신의 손으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는 큰 일을 행했지만 뒤돌아서니 정작 자신의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를 나귀의 턱뼈로 혼자 물리친 삼손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삼손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였고, 그의 명성은 하늘에 닿았겠지요. 그러나 정작 삼손 자신은 피로가 몰려오고 목이 마르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무기력으로 말미암아 죽을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한 분이 둔탁한 소리를 듣고 그곳을 가보았더니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한 남성이 피를 흘르며 쓰러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경비원은 남자의 집에 뛰어 올라갔고 다급하게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문을 열고 나온 여자에게 경비원이 물었습니다. "남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조금 전에 안방에 들어갔어요." 심지어 가까운 가족에게도 남편은 그저 평안한 마음으로 안방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타는듯한 목마름이 있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죠.[각주:1]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갈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고, 그에 따른 좋은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내가 행한 성과와는 상관 없이 나의 목이 마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지만 정작 나의 목은 타들어갑니다. 나의 영혼은 그 어디에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나의 내면을 알 수 없기에 부러워하는 눈길로 칭찬하지만 나의 영혼은 그만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곧, 번아웃(Burn Out), 영적인 탈진입니다. 


삼손이 역사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기억될만한 큰 일을 행했지만, 정작 그의 깊은 곳에서는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아시고 그에게 은혜의 생수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19절)

 

모든 사람이 삼손이 이룬 위대한 역사에 관심을 두고 칭찬을 하지만, 정작 삼손의 깊은 내면의 갈증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시원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아무로 알지 못했던 삼손의 깊은 갈증을 하나님께서 해갈하여 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수를 마시고 비로소 정신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샘을 이름하기를 "엔학고레"라고 불렀습니다.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교회에서 여러 가지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지만 실상 여러분의 내면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책임감이 있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실상 나의 깊은 내면에는 사람들의 그 어떠한 칭찬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내면의 깊은 갈증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삼손의 타들어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엔학고레,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을 허락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생수의 강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b-38)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생수의 강을 흘러넘치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내면의 깊은 갈증이 온전히 해갈되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정혜신, <당신이 옳다> 가운데 한 대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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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1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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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3장과 14장은 제사장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역할 하나를 소개해줍니다. , 나병 환자를 진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라는 병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건강검진 결과 몸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사람 마음이 걱정부터 앞서지요. 정밀검사,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죽음을 생각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처럼 절망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에는 암이 무서운 질병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암은 그렇게 두려운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암세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나병이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습니다. 나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의학 지식이 전무했던 그때에 나병은 민족이나 종교를 초월하여 신의 진노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두려웠던 질병이 나병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몸에 나병으로 의심이 가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수군거리며 그를 멀리했습니다.

 

제사장의 진찰

 

바로 그러한 시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레위기 132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사람들이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 사회에서 나병이 가장 무서운 질병이고, 전염되는 질병이고, 신의 저주를 받은 질병이기에 나병 환자는 격리하고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만큼은 그 처리 방식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 백성의 최고 어른인 제사장이 그 환자를 직접 보고, 그 환자를 직접 진찰합니다. 진찰하려면 가장 증상이 심한 부위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가까이 봐야 하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필요에 따라서는 환처를 잘 관찰하기 위해 손으로 만져봐야 되잖아요. 율법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을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직접 하게 되어 있어요.

 

어디 그 뿐인지 아세요? 레위기 13장에 의하면 제사장이 환처를 주의 깁게 관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병인지, 나병이 아닌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칠일 후에 그 사람을 다시 진찰하게 되어 있어요. 4절을 보십시오.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피부가 우묵하고 그 털이 흰색이면 나병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환자는 증상은 나병과 비슷한데 피부가 우묵하지도 않고 털도 흰색이 아니어서 좀 애매한 상황인 거에요.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계속 보십시오.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 둘 것이며” 7일 동안 입원입니다. 그렇게 7일을 입원시킨 뒤에, 5절로 이어지지요.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 지니, 두번째 진찰을 합니다. 두번째 진찰을 했을 때 결과가 나오면 거기에서 끝입니다. 그런데 5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여전히 불문명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 둘 것이며입원이 일주일 연장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주를 입원한 환자를 제사장이 또 찾아갑니다. 6절입니다.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그러면 이 사람은 제사장이 몇번째 진찰하는 것이죠? 세번째 진찰입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한다고요?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직접 합니다.

 

모든 사람이 멀리하고 싶어하는 나병환자, 혹은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환자를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진찰합니다. 한번 해서 안되면 두 번 하고, 두 번 해서 안되면 세번 진찰합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환자를 직접 만나 진찰하라고 율법으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제사장이 환자를 만나 병의 경과를 보고 진찰만 하라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나병이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환자를 제사장이 직접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따스하게 보살펴주기를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신 것은 아닐까요?

 

모세가 활동하던 시대, 곧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이 아니라면 과연 어느 사회에서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나병환자를 찾아가겠습니까? 과연 어느 사회가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직접 나병환자를 진찰하고 환처를 살펴보겠나고요. 그러나 레위기가 꿈꾸며 바라던 사회는 바로 이런 사회입니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요, 모든 백성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제사장이 당시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생각했던 나병환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가며 진찰하는 사회. 한 번으로 안되면 두번 만나고, 두번으로 안되면 세번 만나서 진찰하고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회. 바로 그러한 사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요, 레위기를 비롯하여 모세의 율법이 추구하였던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Purity and Impurity

 

제사장이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환자를 진찰하면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첫째는 나병이 아닌 경우입니다. 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지금 이 환자는 증상이 있어서 제사장에게 온 사람입니다. 아무런 증상도 없이 건강했다면 제사장을 만날 이유도 없었겠지요. 몸에 여러 가지 증상이 있었고 그 증상은 당시의 최고로 무서운 질병이었던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증상이었어요. 자신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가족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등장하는 사람은 실제로 나병이 아니라, 그저 피부병 환자거든요. 피부병으로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난 거지 그 무서운 나병은 아니라고요. 바로 이때 제사장이 직접 율법을 기준으로 진찰합니다. 한번으로 정확히 진찰 할 수 없어, 두번하고, 세번합니다. 그렇게 정성으로, 최선으로 진찰하여 이 사람은 나병이 아니라고 선언하면 그 사람도 억울하게 나병환자 취급을 받지 않아도 되고 주변 사람도 그를 더 이상 외면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레위기의 율법입니다.

 

제사장이 진찰하여 내리는 두번째 결론은 환자가 나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환자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사장이 정확한 진단을 통해 환자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 환자는 진영 밖에서 혼자 살게 됩니다. 레위기 1345절과 4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던 나병 환자를 격리하도록 규정을 정하시지만, 격리 자체가 최종 목표는 아니었습니다.[1] 레위기 13장이 나병을 진찰하는 규정이라면, 레위기 14장은 나병으로부터 깨끗이 치유된 사람이 이스라엘의 공동체로 복귀하는 과정을 서술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4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 나병이 치유된 사람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병의 증상이 사라진 사람, 그래서 자신이 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을 누구에게 데려갑니까? 또 다시 제사장에게 데려갑니다. 나병과 관련하여 모든 일은 결국 제사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나병환자를 진찰하는 일은 누구의 역할이지요? 여기서도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스쳐지나가서는 안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진영에서 나가입니다. 나병환자로 판명이 나면 그 사람은 진영 밖에서 혼자 살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 중에서 내가 몸이 나았다고, 나에게 증상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실제로 치유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찰하기 위해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서 나병환자를 찾아다니며 진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말로, “왕진이지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나병 환자가 한 두 명이겠어요? 진영 밖에 살면서 자신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제사장은 이곳과 저곳을 계속해서 돌아다니면서 왕진하는 거에요. 고대사회이니 나병환자를 격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그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다니며 돌아보는 제도를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된 환자는 언제든지 제사 절차를 통해 이스라엘의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율법에 근거하여 정확히 진찰하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제사를 통해 공식화하니 환자의 주변 사람들, 가족과 친구들이 그 사람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바로 이것이 레위기가 꿈꾸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었습니다. 너무도 멋진 공동체 아닌가요?

 

의학 지식이 발전하고, 인권에 대한 개념이 강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가장 비참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을 민족의 최고 지도자들이 정기적으로 찾아가 진찰하고 돌아보는 사회는 없습니다. 하물며 모세가 활동하던 고대 사회에서 신의 저주로만 여겨졌던 나병환자를 제사장들이 지속적으로 진찰하며 돌아보고, 억울하게 나병환자로 간주되는 사람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고 나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언제라도 백성의 일원으로 다시금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와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

 

레위기를 중심으로 한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제사장이 직접 진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다루는 일에는 제사장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역할은 진찰이지 치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진찰하라는 명령만 주어지지, 치료하라는 명령은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레위기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곤든 웬함 박사는 레위기 14장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14장에 묘사된 절차는 치료 절차가 아니라 의식 절차다. 제사장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 제사장은 그를 치료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축사와 마술을 도구로 사용한 이웃 민족들과 달랐다. 이스라엘에서 사람은 의심스러운 민간요법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도움을 기도로 구해야 했다.”

 

많은 민족들은 나병을 비롯하여 치명적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마술이나 축사나 어떤 신비한 절차를 통해서 병을 치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모든 시도를 배제했어요. 어차피 근대적 의미의 의료시설은 전무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레위기를 비롯한 율법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의 영역은 인간이 손을 대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제 아무리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진찰만하고 환자들을 찾아가 돌봐주는 일만 합니다. 인간을 치유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고 약 1,500년이 흐른 후,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여전히 나병은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고, 신의 저주를 받은 질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비로서 치유하기 시작하십니다. 제사장에게는 치유가 아니라 진찰의 역할만 주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나병을 치유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40절 이하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1:40)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환자에게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어느 부위에 손을 대셨을까요? 당연히 나병이 가장 심한 곳이 아니셨을까요? 천오백년 전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제사장들이 직접 환자들의 환처를 살펴보고, 제사장들이 직접 환자들의 환처를 만져보며, 제사장들이 직접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환처를 살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환처를 어루만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이것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치유되기를 간절히 원하시오니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원하신데요.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원하신다고요. 주님께서는 나의 영혼이 더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온갖 종류의 아픔과 슬픔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2)

 

우리 주변에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 그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 주변에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을 입고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제사장들이 나병환자를 찾아가 그들의 환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격려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십시오. 우리 주변에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이 병들어 가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권면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 누군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때로는 육신의 질병, 때로는 마음의 아픔, 때로는 영혼의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십니까?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 원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치유를 위하여 다른 것을 찾지 마십시오. 제사장이 나병을 고칠 수 없고, 뛰어난 의학기술을 소유한 의사도 여러분의 치유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를 지금도 간절히 원하시며, 여러분을 능히 치유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여러분의 환처를 내보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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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11.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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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이 지우는 짐을,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우는 짐을 지고 살아가지요. 가정에서 살림하시는 분들도 그 나름의 인생의 무게를 좁은 어깨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에는 너무도 젊고 어린 나이에 삶의 무게를 미리부터 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하는 약 60만 명의 학생들의 어깨에도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입시경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짐의 무게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학력고사의 상위권 학생들이 혼자서 교과서만 공부했다고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내신을 챙기기 위해 학원을 가야 하고, 생활기록부를 관리하기 위해 교내 활동도 해야 하며,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회에 참가하여 입상도 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수학능력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외국어 인증시험에 응시해서 등급도 받아내야 합니다. 그만큼 어린 학생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점차 많아지고 또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어린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의 현실을 보면 안타까움이 밀려오고, 많은 부모는 그들의 어깨에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지요. 마치 부모가 열심히 노력하면 자녀의 어깨에 실려 있는 무거운 짐의 일부라도 대신 질 수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어깨에 놓여 있는 짐은 그 누구도,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대신 질 수 없고 대신 지어서도 안 됩니다.

 

예레미야라는 구약성경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던 시절, 유대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이미 유다 영토를 침공하였고, 대부분의 성읍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유다를 다스리던 시드기야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에게 바벨론 군대는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들의 어깨를 억누르는 거대한 멍에로 작용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장면을 눈에 보이는 하나의 동작으로 표현하였는데, 나무로 만든 멍에를 자신의 어깨에 채워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유대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멍에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그의 어깨에 놓여있던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언하죠.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바벨론 군대를 물러가게 하실 것이다. 하나냐의 예언은 모든 백성에게 은혜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백성은 바벨론 군대가 하루빨리 물러가고 그들의 어깨를 억누르던 멍에가 하루빨리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모든 백성들의 소망을 담아서 하나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어깨에 있던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바로 그 일이 있은 직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렘 28:13b)

 

나무 멍에를 어깨에 매는 것이 싫다고 그것을 끊어버렸는데, 오히려 쇠로 만든 멍에를 어깨에 지우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어깨에 무거운 짐과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내 어깨에 있는 짐과 멍에를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지요. 할 수만 있다면 자녀들의 어깨에서 짐을 제거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의 어깨에 있는 나무 멍에를 벗어버리면 그 자리에 쇠로 만든 멍에가 지워진다는 사실, 어린 자녀들에게 수학능력시험은 거대한 멍에가 틀림없지만 이 과정을 넘어선다고 하여 그들의 어깨가 가벼워지고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많은 부모가 내 자녀는 고생을 안 하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요 또 그것이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도 아닙니다.[1]

 

예수님도 인생의 멍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예수님 역시 우리 어깨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자유로운 어깨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깨의 멍에를 내려놓는 방법이 아니라, 나의 어깨에 어떠한 멍에를 올려놓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멍에를 메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지어야 할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요, 곧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입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우리는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과 안식은 어깨의 모든 짐을 내려놓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멍에, 곧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로 말미암아 우리는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소에게 메운 멍에는 소 한 마리에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 – 곧 한 겨리 – 에 메우는 멍에입니다. 하나의 멍에를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지고 가는 형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하나의 멍에를 메었기에 예수님께서 가시면 우리도 가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멈추시면 우리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예수님의 발걸음과 엇박자가 되면 그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데 내가 멈춘다든지, 예수님께서 멈추셨는데 내가 가려고 하면 그 멍에만큼 무거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내가 그 발걸음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멍에는 너무도 쉬운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멍에를 벗어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어 예수님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쉼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먼저 부모인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과 함께 짊어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가 예수님과 발걸음을 맞추어 걷기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의 자녀들이 이 험하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멍에를 벗어버리려 하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워서 인생의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그 마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Cf. 조선미, “고통, 아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값진 선물”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 (서울: 북하우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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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10. 2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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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평생에 잊지 못할 한 분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저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어 주신 목사님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에 계십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입학했다는 소식에 참으로 기뻐하셨고, 제가 유학을 떠날 때까지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종종 찾아 뵐 때마다 따뜻하게 맞아주시면서 밥도 사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본인이 직접 읽으시던 책도 그 자리에서 저에게 건네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공공연히 저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참으로 따뜻하게 돌보아 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루는 명절이 되어 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 방에서 제 눈이 띄었던 글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양일념이었습니다. 20대의 어린 신학생이었던 저는 그 글씨에 담겨있는 목사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목양일념그 글씨는 사실 저에게 고리타분하게 느껴졌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로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청운의 꿈을 품고 신학교를 입학했던 저에게는 목양보다는 크고 화려한 사역, 그래서 교회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을 감당하고 싶은 욕심이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서 한 해 두 해 시간을 보낼수록 그 어르신의 다짐, 목양일념이 얼마나 귀한 가치이며 목회자가 추구해야 할 사명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크고 위대한 일,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일들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이 믿음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 그래서 선배 목사님들이 간절히 소원하셨던 목양일념의 길.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사역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저도 조금씩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지도력

 

오늘 본문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 모세와 아론이지요. 출애굽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성경의 핵심적인 주인공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아론을 세울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이후 모세가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운 것은 자신의 사역을 계승하기 위한 후계자를 세운 것이지만, 모세가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은 모세 자신의 사역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모세와는 또 다른 형태의 지도력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세우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모세의 지도력과 더불어 제사장 아론의 지도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지도력이 각각 어떠한 특색을 지니고 있기에 하나님은 모세의 지도력에 만족하지 않고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지도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목적, 곧 모세의 소명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가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하며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을까요?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사명이지요. 나아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물론 모세의 삶 속에서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곳에 거주하는 것까지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지요. 물론 모세는 이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그 남겨진 사명을 완수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그 시대에 필요한 역사적인 사명을 위하여 모세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지도력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도력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 아론의 지도력은 어떠한 특색이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아론이 제사장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라시며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셨을까요? 제사장 아론에게 주어진 역할은 모세와 같이 특별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론에게는 출애굽의 역사, 시내산 언약, 혹은 가나안 정복과 같은 시대적 과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론에게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지는데, 레위기를 계속해서 묵상해보면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이를테면,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백성들에게 율법을 들려주어 그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 혹 백성 가운데 피부병이나 문둥병이 발생하면 그들을 진찰하고 치유된 사람들이 다시금 제사를 통해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그 시대의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른으로 자리를 잡아주는 것, 백성들이 언제든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론의 지도력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지요. 쉽게 말해서, 옛 선배 목사님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사명, 목양일념의 사명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지도력 사이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모세와 같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마른 막대기 하나로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맛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회개를 촉구했던 지도자 사무엘에게는 한 마디의 말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은사가 주었습니다. 성전 건축의 지도자 솔로몬에게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가 있었고,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은사를 사용해서 그들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아론에게는 그와 같은 놀라운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지도력은 특별한 은사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알려주신 제사의 규정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절차를 지키면서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잘 연구하여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풀어 설명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요, 피부병이나 문둥병이 발생한 환자들을 만나면 그러한 질병에 대한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환자를 진찰하고 율법의 지시대로 처방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세가 감당했던 역사적 사명은 크게 여기고, 아론이 제사장으로 담당했던 일상적인 사명은 반복적인 일이요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아니라고 하여 그 중요성을 잊어버립니다. 역사적 사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발휘하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는 일꾼인 것처럼 보이고 그저 말씀에 근거하여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들은 외면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모세의 지도력과 더불어 아론의 지도력이 함께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경험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제작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아니, 사회가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모세가 감당했던 시대적 사명이 완수되면 완수될수록 아론과 같은 일상적인 사명을 위한 지도력이 더욱 중요하게 대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모세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모세의 역할을 감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역할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이 손에 꼽히는 몇 분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날마다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병자를 돌보는 제사장의 사명은 아론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비롯하여 모든 아론의 자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부르십니다. 너무도 유명한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벧전 2:9a)

 

종교개혁가들은 이 사실을 만인제사장혹은 만민제사장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모세와 같은 시대적 사명자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기록할만한 위대한 일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요구하십니다. 그저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 내 곁에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진심으로 돌보는 일. 그와 같은 귀한 일을 감당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레위기 8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의 주역이 되어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복, 관유, 그리고 제물

 

레위기 8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이 과정에 필요한 것이 세 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그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2)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더불어 세 가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의복입니다. 두번째는 관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아지와 양과 무교병으로 구성된 제물입니다. ,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을 위하여 의복과 관유와 제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레위기 8장은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을 크게 세 가지 순서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의복을 입히는 것이고, 둘째는 관유를 붓는 것이며, 마지막 셋째는 제물을 잡아 위임식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모세는 먼저 아론에게 제사장의 옷을 입힙니다. 의복은 그 사람의 역할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배시간에 찬양대가운을 입은 사람은 찬양대원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날 빨간색 자켓을 걸치면 새가족 사역자가 됩니다. 판사는 법정에서 판사 가운을 입고, 군인은 전쟁터에서 군복을 입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병원에서 환자복을 갈아 입으면 그때부터 진정한 환자가 되지요. 이것이 바로 의복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의복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의복을 입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의복을 입기도 하고요 때로는 찬양대원, 교회학교 교사, 구역장 등의 의복을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의복을 입으면 우리의 역할을 규정하기는 하지만 의복이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아론에게 제사장 옷을 입히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그의 내면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관유가 필요하고 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먼저 의복이 필요했습니다. 두번째로 관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8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

 

아론이 제사장의 옷을 입으니 그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백성들도 그를 제사장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가 제사장에 합당하게 내면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론의 머리에 관유를 부어 그를 거룩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목사의 옷, 장로와 권사의 옷, 구역장의 옷을 입으니 나의 내면이 그에 합당하게 변화되던가요? 교회에서 임명을 받고 임직식을 행하니 우리의 속 사람도 겉모습와 합당한 사람이 되던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관유를 붓는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을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의복으로 아론에게 제사장 옷을 입히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관유로 아론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제물을 드려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레위기 8장은 모든 제사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해 주는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23)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드리면서 그 피를 아론에게 바르죠. 구체적으로 아론의 몸에 세 군데에 피를 바릅니다. 귓부리, 엄지손가락, 그리고 엄지 발가락입니다. 사람의 신체 가운데 왜 귀와 손과 발에 제물의 피를 발랐을까요? 딜만(Dillmann)이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사장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성별해야 했고, 언제나 거룩한 행동을 하기 위해 손을 성별해야 했으며, 늘 거룩한 길을 걷기 위해 발을 성별해야 했다.”[1]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귀를 성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손을 성별해서 거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나아가 발을 성별해서 거룩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다면,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며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분들을 찾아가 돌보며 위로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의복을 입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라는 옷, 교회학교 교사 찬양대원 구역장이라는 옷. 그 무엇보다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옷. 이와 같은 의복을 갖추셨다면 이제 여러분의 심령에 관유를 붓고 제물의 피를 발라 여러분의 내면을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결론 및 적용

 

설교를 시작하며 저를 따뜻하게 돌보아주셨던 한 목사님을 소개하여 드렸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목사님으로부터 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분에게 들은 조언도 많고, 목사님께서 주신 책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또렷이 기억되는 하나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목사님의 가정으로 저를 불러 주셔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장신대를 다니는 신학생이었던 목사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한진군. 성경을 많이 읽어. 무엇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고, 특별히 신약성경을 많이 일도록 해.”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요? 제가 그래도 신학생인데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나 신학교에 입학할 만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설마 제가 성경을 안 읽고 기도를 안 하겠어요? 사실. 그 자리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나라는 그런 마음에 제 안에 있었어요.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러 몇 해전 목사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제 마음에 가장 깊이, 가장 오래 울리는 목사님의 조언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한진군. 성경을 많이 읽어. 특별히 신약성경을 많이 읽도록 해.” 그러고 보니 그분의 목양, 그분의 섬김, 그분의 사랑. 그 출처가 어디였는지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으십시오. 기도에 항상 힘쓰십시오. 여러분의 귀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손을 거룩하게 하여 여러분이 행하시는 일을 성별하십시오. 여러분의 발을 거룩하게 하여 여러분이 걷는 인생길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1] 고든 웬함, <레위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161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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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