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8. 7. 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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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켈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야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이천 2,600년이라고 하니 제 아무리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제너럴셔먼트리의 연수를 가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2,600년 된 제너럴셔먼트리는 높이가 83m, 나무 밑둥의 둘레가 31m에 이른다고 합니다. 제너럴셔먼트리와 거의 동시대의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제너럴셔먼트리 역시 지금까지 83번의 화재를 겪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6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지역에 화재가 일어났고 제너럴셔먼트리는 83번이나 큰 화재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제 부터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의 안내문에 의하면 제너럴셔면트리가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X2) 이것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 가운데 동물들은 태어나 성장하여 성체가 되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러나 나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고 제너럴셔먼트리는 2,600년 동안 83번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그 모든 시련과 아픔을 이겨낸 채 지금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두 가지 형태의 성장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의 믿음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라나는 경향과 동일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듯, 어린 동물이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고점에 이르면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믿음이나 신앙이 그 상태로 머무거나 혹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대부분의 동물들이 성장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은 동물의 성장이 아니라 나무의 성장과 같습니다. 세쿼이어 국립공원의 안내문처럼 나무는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어린시절을 지나며 성장하지만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추는 시기가 찾아오고 시간이 더 흐르면 점점 노쇠해지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만큼은 육신의 모습과 상관 없이 끝없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우리의 겉사람인 육신은 생로병사의 주기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나무와 같이 끝없이 자라날 수가 있고 그것이 신약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진보입니다.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속사람은 어떠하십니까? 세쿼이야 국립공원의 제너럴셔먼트리처럼 지금도 자라나고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육신이 시간이 흐르면서 노쇠해지는 것처럼 여러분의 속사람까지도 믿음의 진보를 멈추고 정체기, 아니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마음의 집을 채우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귀신에게 놓였고 비로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서 떠난 귀신이 자신이 머물며 쉴 곳을 찾아 헤맸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귀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나왔던 사람을 다시 찾아가보았습니다. 가서 보니, 자신이 나온 집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수리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 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귀신은 잘됐다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보다 더 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이전 형편보다 더 심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은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자 귀신이 쫓겨났던 것이지요. 그러나 조금 전 말씀드렸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귀신이 쫓겨난 이후, 곧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이후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진공상태 혹은 중립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채우지 않는다면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한 우리 마음의 집에 다시금 악한 귀신이 찾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어둠의 세력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청소하고 수리한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어제보다는 오늘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왔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집에 경건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1] 날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의 집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면 깨끗이 청소하고 잘 수리한 마음의 집에 더욱 악한 것들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에 대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 “믿음은 진보하지 않으면 쇠퇴합니다.”(X2)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후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또다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에게 귀신이 한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후에는 자신만 들어간 것이 아니고 일곱 귀신을 데리고 옵니다. 그것도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시죠.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11:26b)

 

신약성경을 보면 이와 같은 가르침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하였지만 지속적으로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 그래서 믿음이 후퇴하거나 파선하면 믿음의 길을 시작하기 이전보다 더욱 비참한 형편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새신자들은 마음이 순수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게 다가와 감사와 감격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엇이든지 교회가 지도하는 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시작하였지만 믿음이 진보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분들은 그 마음을 다시금 새롭게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대해 아는 것 같고,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아는 것 같지만 그러한 지식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해요. 그러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하였지만 그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진보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옛모습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재물에 대한,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던 분이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지 못하면 그가 소유한 신앙은 자신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정당화하고 포장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에 그 어떠한 성경말씀으로도 그 마음 깊이 자리잡은 탐심을 뿌리뽑지 못합니다. 그 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얄팍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저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자들을 축복해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믿음의 길을 들어서지 않았다면 자신의 탐심과 욕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을 텐데, 믿음을 가졌다고 하니 자신의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세상적인 성공을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부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으면 과거에 가졌던 권력에 대한 욕구, 세상적인 성공에 대한 갈망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그런데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 인격을 다듬어가는 노력이 없으니 이와 같은 강력한 말씀도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지배하려는 세상적인 출세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지 못해요. 오히려 하나님을 그저 자신의 세상적인 성공을 보장해주시는 분으로 왜곡시켜버리고 마는 거에요.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하였지만 그 믿음이 성장하거나 진보하지 못하여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 이전의 모습보다 더욱 악한 모습으로 변하는 최악의 경우는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이것이 베드로후서 2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요. 베드로후서 222절은 두 개의 속담을 인용합니다. 첫번째 속담은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간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속담은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다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등장하는 이 속담은 과거의 더러운 행실을 벗어난 듯 하지만 정작 다시 돌아가는 행태를 묘사하지요.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던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더러운 행실을 버렸습니다. 마치 개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토해 내버린 것처럼, 마치 돼지가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살펴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도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더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개가 태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마치 돼지가 깨끗이 씻은 몸으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워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는 이 두 가지 속담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베드로후서 222절의 마지막에 “(이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베드로후서 2장 전체가 묘사하는 이단자들을 말합니다. 이단의 특징이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지 않고 주로 신앙인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믿음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그만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버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훨씬 더 못하게 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단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그들의 속임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끊임 없이 우리의 믿음을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숙시키는 것, 곧 믿음의 진보입니다.

 

이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비유가 있지요. 바로 위조 지폐를 어떻게 감별하는가입니다. 위조 지폐를 감별하기 위해서는 위조지폐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대신 진짜 지폐, 위조되지 않은 바른 지폐를 유심히 관찰하고 깊이 있게 연구합니다. 그러면 위조지폐를 만났을 때 금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세대가 갈수록 악해지면서 이단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는 지금 여러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도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진보할 수 있도록, 여러분 마음의 집을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은혜로 가득 채우기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이단을 비롯한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어가 되는 것입니다.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기만 하면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방을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지속적인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쉽고 단순한 답이지만 그렇기에 너무도 쉽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정답입니다. 곧 말씀과 기도이지요. 지금 나에게 말씀 생활, 기도 생활이 풍성하면 내 마음의 집에 선한 것들이 채워지고 있는 거에요. 반대로 지금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무엇인가 막혀있는 것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 나의 마음은 고갈되고 있는 것이죠.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선한 것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비로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요.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믿음의 진보를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는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반드시 필요한데,  여기서 말하는 말씀과 기도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Aha-Moment’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말씀과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는 점이죠. 그런데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만 또 좋아하며 묵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익숙한 내용으로만 기도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깨달음으로 무릎을 치는 ‘Aha-Moment’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당연히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모습으로부터 조금도 진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셨다면 이번에는 믿음의 성숙을 위해 고난도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로마서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묵상했다면, 이제는 야고보서를 통해 복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했다면, 죄를 미워하시고 반드시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도 깊이 묵상해볼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믿음의 진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제너럴셔먼트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공원 앞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의 일부를 제가 누락한 것입니다. 세쿼이야 국립공원에 있는 안내문은 정확하게 이렇게 쓰여져 있어요.

 

나무는 충분한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기만 하면 끝없이 자란다.”

 

나무는 동물의 몸과 달라서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2,600년이라는 거대한 세월을 지나와도 제너럴셔먼트리는 자랄 수 있어요. 그 오랜 세월 80회가 넘는 화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나무는 끝없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10년 전, 20년 전에 공급되었던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은 지금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달 전, 일년 전에 공급되었던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도 지금의 성장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영혼에 말씀과 기도로 말미암은 햇볕과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된다면 지금도 여러분의 믿음은 끝없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1] 데럴 보크(Darrell L. Bock)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였다면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응답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Darrell L. Bock, Luke (IVP: 1994),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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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4.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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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기도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먼저 기도를 권면하지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7)

 

베드로 사도의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며 마지막까지 요구하셨던 단 하나의 명령이 있었다면, 그것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저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였지요. 넘어지고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의 실패를 디딤돌 삼아 초대교회를 향해 간절히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십시오.’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사랑에 대해 권면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이 명령 역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12명의 제자에게 주셨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큰가 논의하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살피고 있었던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가슴에 남아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를 향한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부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명령 곧 기도와 사랑 은 개별적인 항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를 따로 생각하고, 사랑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저 한순간 우리의 마음을 스쳐 가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언젠가 당신이 세상에서 멸시 받는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던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에게 만일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참 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 자신의 욕구만을 쏟아 놓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도 필요하지요. 그러한 기도가 필요가 없다거나 수준이 낮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고 내 곁에 신음하고 있는 이웃을 향한 중보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기도는 그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 곧 이기적인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하여 뜨겁게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비로소 이웃을 위한 진실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얻을 수 있는 한 두 가지 교훈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기도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에 대한 교훈, 그 첫번째는 기도의 완성은 사랑이다는 교훈입니다. 조금 전 인용하였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예수님께서 이 위대한 새 계명을 주시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는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지요.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우리가 교회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성경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부서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해도 그것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뜨겁게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을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단지 세상 사람들의 평가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면서 이러한 구절을 덧붙이고 있지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사랑하면 허물을 눈감아 준다는 의미입니다. 곧 사랑은 용서를 동반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 구절에는 보다 깊은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것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멈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신약학자는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명하시고 본보기로 보여 주셨던 사랑에 의해서 실제로 [죄가] 뿌리 뽑힐 수 있다는 것이다.”[1] 사랑이 우리 공동체 안에 가득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실제로 멈추게 되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지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3:10)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우리의 기도, 우리의 찬양, 우리의 예배, 우리의 교회 봉사, 우리의 경건생활….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사랑이 실제로 가득하게 넘치면 서로 허다한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공동체 안에 죄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모든 신앙생활의 완성, 모든 기도의 완성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적인 열정이 때로 사랑과 역행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열심히 해요. 매일 새벽 예배에 빠지지 않고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해요. 그러면 그 기도의 결과가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갖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아무게 집사는 집도 가까운 사람이 왜 이렇게 새벽 예배에 안 보이는거야?”

 

어떤 분은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매일같이 큐티를 하며 말씀을 묵상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날마다 나에게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요. 그런데 여러분, 말씀 묵상의 결론은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하잖아요. 내가 말씀을 늘 묵상한다면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넘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구역모임이나 소그룹에 참여해서 큐티를 나누면서 아무게 집사님이 나눔을 잘 못하면 사랑의 마음은 사라지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들어요. “저분은 저렇게 큐티도 안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볼까요?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열심히 전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어디에 있든 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도 참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 역시 그 지향점은 사랑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쩌다가 일년이 지나도 전도를 하지 않고, 십년이 지나도 전도를 하지 않는 분들을 보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분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전도 한 명 안 하는 것을 보니 그의 신앙생활은 헛 거 아니야?”

 

기도도 유익하고, 말씀 묵상도 필요하고 전도도 신앙인으로서 행해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 기도보다도, 말씀묵상보다도, 전도보다도, 봉사보다도 무엇보다도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의 근거는 종말신앙이다

 

기도와 사랑에 대한 교훈, 그 첫번째는 기도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에 대한 교훈, 그 두번째는 기도와 사랑의 근거가 종말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베드로 사도는 교회가 기도에 힘쓰고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딱 하나로 이야기합니다.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 곧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안개와 같다는 사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 모른다는 종말에 대한 신앙이 흐려지기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어린 아이가 두 명입니다.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죠. 두 아이가 사이가 참 좋아요. 특별히 언제 사이가 좋으냐면, 두 아이가 공조해서 아빠와 엄마의 말을 안들을 때 두 아이의 사이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잘 지내고 친하게 지내고 같이 노는 것도 잠깐입니다. 오빠하고 동생이 친하게 잘 지내는 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갑자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급기야 둘 중에 한 명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싸우나 가서 살펴보면 이런 거지요.

 

"오빠가 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뺏아갔아요." 

"동생이 내가 보고 있는 책장을 넘겨버렸어요." 

"내가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 과자를 오빠가 먹어버렸어요." 

"내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미술작품 여기서 미술 작품이란 공을 들여 접은 딱지 등을 말합니다. – 을 동생이 망쳐버린 거에요." 

 

만일 여러분이 이와 같은 일을 당하면 속에서 울화가 터질까요?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분노가 화산처럼 일어날까요?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만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사실, 아이들이 싸우고 우는 이유를 살펴보면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따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인들 사이의 갈등과 불화의 원인을 살펴보면서 제 마음에 저희 집에서 자라는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원인을 확인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것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을 가지고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거나, 제 삼자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다투고 갈등하고 싸우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특별히 종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 개인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두 놓고 가야 하는 것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혀서 아둥 바둥 다투는 어리석음이 우리 가운데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할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종말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9장의 가사 가운데 참 깊은 묵상으로 인도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지막 4절의 가사 가운데 일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죠.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이 찬양의 가사와 같이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영원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일년이 지나면 한 살을 더 먹고,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동일한 시간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동일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여전히 고난과 슬픔이 존재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영원이라는 관점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파묻혀서 살아갈 때도 있지요.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관심이 온통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의 것에 사로잡혀 서로 다투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시금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소서. 나아가, 우리의 마음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바로 이와 같은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세상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요, 비로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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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20 “마더 테레사”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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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램지 마이클스, <베드로전서> 박문재 역, vol 49 of WBC (서울: 솔로몬, 2006),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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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3. 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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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도폭발훈련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 그리고 전도에 대한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일어나는 시점이지요. 하지만 오늘 저의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 전도자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었던 최근의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미투운동 일어나면서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가 크게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미투운동이 촉발하게 되었던 한 인터뷰를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현직 여성 검사가 8년 전 남성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지요. 그 여성 검사는 인터뷰의 마지막에 자신이 굳이 방송을 통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 가해자가 최근 종교에 귀의하여 자신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많은 매체들이 이 인터뷰를 2007년에 개봉하였던 영화 <밀양>의 한 장면과 빗대어 표현하곤 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신애는 신앙생활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평정심을 되찾고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였던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감옥에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들을 잃고 괴로워했던 자신의 모습과 달리 감옥에 있던 그 살인범은 너무도 말쑥하고 평안한 얼굴로 신애를 대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신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고요?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하나요?’ 이후 영화의 내용은 주인공 신애가 겪은 마음의 분열과 고통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이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행하신 일,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생의 길이 열렸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복음 제시 혹은 전도폭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제시 전문 에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는 것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물론, 구원을 은혜로 받은 이후 선행과 경건생활에 힘써야 한다는 대목도 있지만 복음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면 다 되었다는 인상을 얼마든지 풍길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일어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전도자로서 마음에 무거운 짐이 생겼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오용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많은 피해자들에게 더욱 깊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는 자책감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자로서 느끼는 자책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주목하게 되는 성경 구절이 조금전 함께 읽은 로마서 1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을 향한 권면: 두려워하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치밀한 논리로 행위로서 구원에 이르려는 모든 주장을 봉쇄하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힘있게 선포하였지요. 로마서 8장에 이르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8:38-39)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힘주어 외쳤던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폭발훈련을 통해 더욱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되지요. 구원의 확신,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확신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놀라운 확신을 선포한 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새로운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cf. 11:13). 이방인, 곧 율법 없이 살았던 사람들, 그리하여 혈통이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곧 유대인도 아니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도 아니지만 그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의 풍성한 삶을 누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18a)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0b)

 

구원의 확신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쭐대지 말고 교만하지 말하야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좋은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참감람나무라고 부르지요. 참감람나무는 뿌리가 튼튼하여 그곳으로부터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 누립니다. 그러나 그 옆에 나쁜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돌감람나무라고 부르지요. 돌감람나무는 뿌리로부터 좋은 양분을 받지 못합니다. 당연히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의 나무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참감람나무란 뿌리를 통해 좋은 양분을 받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죠.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참감람나무의 가지들은 오직 유대인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시내산의 언약이 주어진 유대인만이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헬라사람이나 로마사람이나 아시아 사람, 혹은 우리와 같은 한국 사람은 참감람나무가 아니라 돌감람나무의 가지입니다. 그런데 참감람나무의 가지 가운데 몇 개가 잘려 나갔어요. 참감람나무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이야기하죠. 그리고 잘려나간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의 가지 가운데 몇 개가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7)

 

그러므로 18절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돌감람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영양분을 받아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일 뿐이지 우리는 여전히 돌감람나무 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20절도 보십시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자격만을 자랑했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꺾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20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아무런 자격도 없는 돌감람나무이지만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접붙여지고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 견지해오던 논리를 지속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신의 자격이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다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지요.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로마서 8장 이전에 다 했어요. 이제는 구원의 확신을 얻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를 이렇게 권면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마치 이제는 구원과 하나님의 은총이 나의 것으로 확실히 소유한 것처럼 교만하지 말고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취하시면 다시금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선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들은 경건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두려움은 나의 행위를 완벽하게 하려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두려움은 마치 구원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완벽하게 나의 것이 된 것처럼, 내가 소유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는 확신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면 다시금 나의 인생이 비참하게 변할 수 밖에 없는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했던 다음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복음을 믿는 자의 자세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살인자의 모습 속에서 관객들이 소름이 끼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해자는 아들을 잃을 슬픔으로 그의 삶이 파탄나고 있는데, 오히려 그 일을 저지른 가해자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평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후배 검사를 성추행한 남성 검사에 대해 우리가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검찰이라는 조직 안에서 권력을 누리고 특혜를 누리면서 그 힘을 가지고 후배 검사를 성추행해놓고, 그래서 그 후배 검사는 지난 8년 동안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는 이제 용서도 받고 구원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천국도 받아서 누린다고 하니, 다른 사람은 짖밟으면서 자기 자신은 모든 것을 누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비치는 것이죠. 그러한 인간이 간증하는 하나님이라면 한 여성은 모든 것을 잃고 지방으로 퇴출당했는데, 그 가해자만을 축복하는 폭군과 같은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밀양>의 살인자나, 여성 검사를 성추행한 남성 검사가 왜 그토록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지 분명해집니다.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이미 자신은 천국을 소유했다고,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고 자랑하고 우쭐대는 모습이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잘못이 피해자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던 것이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격없는 죄인, 곧 돌감람나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다시금 비참한 죄인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두려운 마음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두려운 마음이 있다면 기회가 왔을 때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사죄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피해자들에게 나는 구원받았으니, 나는 용서받았으니 나는 마음에 평화를 누린다고 자랑하듯 말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전도폭발팀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는 먼저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율법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지요.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실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집니다. 그러한 자세로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인 모습을 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 출석이나 금연 금주 등을 강조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로 나선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도자로 나서는 우리에게는 확신과 더불어 두려움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돌감람나무인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참감람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여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분명히 신뢰하기에 우리는 겸손하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만 있을 뿐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교만한 자세로 대상자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확신만 있을 뿐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나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 또한 바른 전도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확신과 더불어 두려움을 가지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안에 거하십시오.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도 품으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는 허리를 굽혀 낮은 자세로 전도대상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요, 바로 그때 우리는 겸손하고 약한 모습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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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3. 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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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고인의 육신을 조그마한 관으로 모시는 입관이 모두 마쳤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유족들은 큰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인을 조그마한 관에 모실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제는 살아생전에 고인의 얼굴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이들은 대궐과 같은 넓은 집에 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세상이 좁다하며 살아가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조그마한 동네, 조그마한 마을을 온 세상으로 알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모두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 그러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한 가지 바꿀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우리의 인생 마지막에는 그 누구도 예외없이 자신의 육신을 누이기 위해 조그마한 관, 조그마한 상자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일진대 예수님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한 나를 믿어라

비록 이 세상에서는 몸을 누일만한 넓은 집 한채 없어도,

비록 인생의 마지막에는 조그마한 상자 하나에 들어가야 하는 인생이라도

나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고인께서 조금전 그 좁디 좁은 관에 몸을 누이셔야 했지만, 그리하여 더 이상은 살아생전 고인의 얼굴을 뵈올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우리가 알고 믿는 분명한 사실 한가지. 지금 고인께서 누우신 그 좁은 관은 고인께서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고인께서 들어가신 그 좁은 관은 하나님께서 고인을 위해 예비하신 그 아름다운 처소로 들어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이라는 본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탑승해야 하는 조그마한 이동수단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우리 인간은 고인의 육신을 위해 좁은 관만을 준비할 수 있었고, 우리 인간은 고인의 몸을 그저 좁은 관에 모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인의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인을 영접하여 주시고 예수님께서 계신 그곳에서 영원히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고인을 좁디좁은 관에 모셔야 하는 유가족들, 나아가 고인의 입관예배로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조금 전 고인의 육신을 모신 좁은 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해 놓으신 저 천국의 본향을 바라보는 영의 눈이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이 좁은 관에 고인의 육신을 모셨지만,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고인의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바라보아 모든 유가족들과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가 가득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찌 고인뿐이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이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육신이 누울 곳은 결국 조그마한 관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넓고 화려한 처소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도 이미 정해진 이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처소, 하늘의 거처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조그마한 관이 인생의 마지막 거처가 아니라 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동수단에 불과합니다.

 

모든 유가족들, 오늘의 입관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고인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조그마한 관을 나의 몸을 누이는 마지막 처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관을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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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2. 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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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교회를 빗대어 설명하는 여러 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진리의 기둥과 터 등이지요. 오늘 본문은 교회를 비유로 설명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신령한 집이라고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5a)

 

베드로가 신령한 집을 이야기할 때 그는 유대인들이 신앙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전서가 6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쓰여졌다면[1]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새롭게 시작된 기독교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보여주며 그들이 주장하는 유대교를 더욱 힘있게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봐라,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가? 이처럼 유대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반면, 건물도 없이 이번 주에는 이 집에서 다음 주에는 저 집에서 예배드리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볼 때마다 그 위엄과 웅장함에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르지요. 마치 상가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대단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를 보면 그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야말로 신령한 집, 곧 살아있는 성전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제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은 생명력이 하나도 없는 돌과 바위로 쌓은 죽어 있는 건물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는 비록 외적인 화려함도 웅장한 건물도 없지만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풍부한 재정이나 성도들의 사회적인 위치나 교회가 소유한 건물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우리들의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우리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자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Scene One. 성막

 

구약의 역사에서 성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핵심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놓여 있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제사를 드렸던 성전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그 성전이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역할도 하였다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며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전,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약 1년 정도를 머무는데, 하나님은 그곳에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을 진행하시지요. 첫번째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곧 성막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장소가 되었고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들의 눈으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를 출애굽기가 묘사합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4)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장소가 되었고, 그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교제하고 만나는 영광스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였던 성막도 시간이 지나자 그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그들의 눈 앞에 세워져있는 성막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렸고 성막만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실한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여러가지 이방인들의 우상을 함께 섬기고 있었지요. 이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은 블레셋을 통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레셋의 침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회개하는 것, 모든 우상 숭배를 벗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군대가 침공하는 그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 그들의 손에 있었던 성막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며 기도하기보다 그들의 수중에 있었던 성막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아가기로 결정하지요.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군대에 크게 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던 성막은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날의 패배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큰 슬픔의 소식이었고,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위기의 순간 눈에 보이는 성막만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Scene Two. 예루살렘 성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의 시대를 지나며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자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건축사업을 진행합니다. , 수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7년 동안의 대공사가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시고 솔로몬 왕을 필두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안에 임재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역대하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대하 7:1)

 

처음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 그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바라보았을 뿐,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조금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전을 출입하는 것에 만족하며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사사시대 눈에 보이는 성막만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에게서 성막을 빼앗아 이방 나라 블레셋에게 넘겨 주셨던 하나님은 이제 이방 민족 바벨론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죽어 버린 돌이나 흙으로 쌓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신령한 집, 곧 살아있는 성전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본문 6절이 인용하는 구절이지요.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시온 산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성전은 하나님께서 무너트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을 세워주실 것인데 그 중심에는 이미 죽어 버린 돌이나 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잇돌, 곧 살아있는 돌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Scene Three. 신령한 집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건축하실 살아있는 성전의 모퉁잇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4)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살아있는 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살아있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께 든든하게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4b)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5a). 예수님은 저 멀리 계신데 성도들만 많이 모여 있다고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살아있는 성전, 곧 신령한 집은 그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분명히 세워두는 것입니다.[2]

 

우리가 살아있는 돌이요,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건물, 예산, 성도들의 구성 등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성전이, 그리고 교회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어 주시고 성전을 만들어 주시니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에 더욱 집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반드시 깨어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부딧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8)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든든히 서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살아있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분은 딛고 일어 설 수 있는 모퉁잇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부딧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교회의 외형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교회의 외형을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죽어 있는 돌과 죽어 있는 흙으로 쌓은 성전 건물은 결코 우리의 믿음을 바르게 세워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령한 집이요,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죽어버린 돌이나 흙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교회의 든든한 모퉁이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이야기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매우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시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아름다운 땅을 다스리며 가꾸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인간이 죄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맙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죄와 사망과 어둠의 권세가 인간들을 다스리기 시작하였지요.

이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소망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 곧 복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바로 이 복음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 안에는 언제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성도들의 만남 속에서 언제나 복음이 들려야 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남선교회, 여전도회, 구역모임, 큐티나눔방. 그 외의 모든 모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실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복음의 이야기가 다시금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든든히 선다는 참된 의미입니다.

 

바로 그때,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이 비로서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교회 안에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들은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게 되실 것입니다. 나아가 여러분을 어두운 곳에서 불러 내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바로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1] 베드로전서의 저술 시기는 저자에 대한 논의와 엮여 있다. 만일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라면 저술시기는 주후 60~65년 사이가 될 것이지만, 베드로의 제자가 이 서신의 저자라면 저술 연대는 70년 이후가 된다. 최원준, “거룩한 나그네들을 위한 서신” <야고보서 베전후 유다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개정판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203.

[2]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다마 서로 연결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0b-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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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8. 1.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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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본문 민수기 281-8절은 매일 드리는 제사, 그래서 항상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의 상번제의 규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어떻게 드리라고 되어 있지요?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여기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매일입니다. 그러므로 3절의 규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상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상번제는 매일 두 마리의 숫양을 드리도록 되어 있는데 한 번에 두 마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한 마리, 그리고 저녁에 다른 한 마리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4)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라는 명령, 곧 일상의 예배를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1]

 

 

Zoom In, One. 구약성경을 포괄하는 구절

 

유대교 미드라쉬에는 오늘 본문과 관련된 매우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히렐(Hillel)이라는 이름의 매우 유명한 현자가 여러 랍비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대교의 정신을 하나로 요약할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성경구절을 하나만 꼽는다면 어떤 구절을 꼽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첫번째 랍비(Ben Zoma)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구절로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 이 첫번째 랍비는 유대교의 정신, 곧 구약성경 전체의 주제를 유일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참으로 옳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모습을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모든 활동이 나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면, 그저 사람들 사이의 모임이었고 그래서 사람들 마음의 유쾌함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봉사를 통해서, 그리고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지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첫번째 랍비는 신명기 6장의 말씀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첫번째 랍비가 자리에 앉자 그의 뒤를 이어서 손을 높이 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번째 랍비(Ben Nannas)는 신명기 6장보다 더욱더 유대교의 정신을 하나로 요약하는 구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레위기의 말씀을 인용했지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9:18) 두번째 랍비는 그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참된 정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첫번째 랍비와 두번째 랍비의 대답을 참으로 지혜로운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소망이 있다면 첫번째 랍비가 이야기한 것처럼 온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요, 나아가 두 번째 랍비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미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두 번째 랍비의 말이 마치자, 이제 세번째로 손을 높이 들었던 한 명의 랍비(Ben Pazzi)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명기 6장이나 레위기 19장보다 유대교의 정신을 더욱더 잘 요약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구절이 오늘 본문인 민수기 284절입니다.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그리고 세 번째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교의 참된 정신은

아름다운 시구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서술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타오르는 한 순간의 사랑이기보다는

매일의 삶 속에서 친절을 베푸는 결혼 생활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칭송하는 믿음이기보다는

믿음을 일상 생활 속에서 표현해 내는 삶의 방식입니다.[2]

 

세번째 랍비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 모임을 주관하던 히렐이라는 위대한 랍비는 서번째 랍비야 말로 유대교의 핵심을 찔렀다고 평가했던 것이죠.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첫걸음은 매일 드려지는 우리의 기도, 매일 드려지는 예배,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하여 나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곧 일상의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Zoom In, Two. 가나안 입성을 눈 앞에 두고

 

4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고, 한 해 두 해를 인내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이 모두 끝나가고 있지요. 40년의 세월이 마쳐가자,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요단 강 동편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단 한 평의 가나안 땅도 점령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40년의 세월이 끝나가자 이스라엘은 드디어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아모리 나라를 무너트리고 바산이라는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의 뒤를 이어, 이제는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민족적 숙원을 이루어낼 인물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장, 민수기 2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가나안 땅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곧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곳에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다양한 계획을 세우며 그 땅에서의 멋진 삶을 설계하고 있었겠지요.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알려주십니다.[3] 그리고 그 말씀의 첫번째 규정이 바로 오늘 본문 상번제의 규례입니다. 어찌 보면 시시해 보입니다. 새로운 땅, 약속의 땅, 하나님 역사의 중심지가 되는 그 땅에 들어간다면 무엇인가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딱 한 가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입니다.[4]

 

성경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민족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나오게 되는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비옥한 그 땅의 주인이 되는 사건 역시 주변 모든 나라들이 톱뉴스로 보도할 만한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매일, 매월, 매년 세상을 뒤흔들만한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세상을 뒤흔들만한 거대한 일은 참으로 가끔, 한 세대에 한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한 사건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자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이른바 큰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저 아침과 저녁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 곧 상번제의 규례인 것입니다.

 

원대한 꿈, 원대한 비전,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곧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일상의 예배야 말로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지 않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Zoom In, Three. 일상의 예배

 

가나안 땅이 마치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기나 한 것처럼 들떠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상번제의 규례를 알려주십니다. 이를 위해 먼저 모세를 부르시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2a)

 

오늘 본문을 묵상하려면 이 대목부터 주의해서 읽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규정을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대상에 대해 어떤 구절에서는 아론과 그 자손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구분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들이 주로 기억해야 할 규정들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이르라고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귀 담아 들어야 할 규정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구분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상번제의 규례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제사 제도를 누구에게 말하도록 되어 있지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사실, 매일 하루에 두번씩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는 제사장들이 주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참여하는 제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 전체에게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지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삶, 곧 일상의 예배는 제사장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상번제는 어린양이 가장 중요한 제물이지만, 양으로 대표되는 가축만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4절부터 다시 보실까요?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여기까지만 보면 어린 양이 제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5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빻아 낸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서 소제 드릴 것이니

 

상번제에는 가축을 태워드리는 번제 만이 아니라 곡식을 요리하여 드리는 소제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번제의 규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 (7)

 

어떠한 제사가 등장합니까?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제사, 특별히 포도주를 제단 아래에 부어드리는 전제가 상번제에는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번제를 한번 드리기 위해서는 세가지 형태의 제물을 모두 드려야 합니다. 곧 어린양을 드리는 번제, 곡식을 요리해서 드리는 소제, 아울러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전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8절이 이 사실을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해 질 때에는 두 번째 어린 양을 드리되

아침에 드린 소제와 전제와 같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니라

 

상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이지만, 아침에도 어린양과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려야 하고, 저녁에도 동일하게 어린양과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려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이니, 그것도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이니 오늘만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전제를 빼면 안될까요? 오늘만 곡식을 드리는 소제를 생략하면 안될까요? 오늘 본문은 이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규정입니다. 매일 반복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반복하는 제사이지만 한번 한번의 제사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한해 동안 이루고 싶은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원대한 꿈, 위대한 비전 그 모든 것을 향해 달려가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예외 없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일의 말씀과 매일의 기도와 매일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일상의 예배입니다.

 

 

Zoom Out. 일상의 예배가 보장하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상번제를 명령하셨습니다. 상번제의 규례는 분명한 명령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명령만큼 강력한 약속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그 참된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다는 말씀입니다.[5]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약속의 땅을 점령한 것도,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매일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상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나아가 민수기 28장과 29장은 다양한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와 같은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지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를 조직하고, 군비를 축적하라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저 상번제입니다. 매일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요?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매일 드리는 상번제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 뒤에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상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그저 명령을 받은 데로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상의 예배에 정성을 다하면 됩니다. 평범해 보이고, 시시해 보이고, 사람들의 눈의 잘 띄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상의 예배에 정성과 마음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우리 삶 속에서도 펼쳐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역할이지만, 우리의 일상을 뚫고 들어오는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1] 기독교 전통은 민수기 28-29절을 예배에 대한 교훈으로 재해석한다. Cf. Gordon J. Wenham, Number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4 of TOTC (Downers Grove, IL: IVP, 2008), 219.

[2] Jonathan Sacks, Covenant & Conversation Leviticus: The Book of Holiness (New Milford: Maggid Books, 2015), 28-29.

[3] 민수기 27장과 28-29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Philip J. Budd, <민수기>, vol. 5 of WBC (서울: 솔로몬, 2006), 519를 참고하라.

[4] 동일한 주제가 에스겔에도 등장한다. Cf. 왕대일, <민수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518-519, 604.

[5] Cf. Gordon J. Wenham, Number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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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7. 11.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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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의 하나님

 

나훔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곧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1]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1:2a)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1:3a)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인간의 죄악을 인내하시지만, 그렇다고 벌을 거두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에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1:6a)

 

우리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비로서 두번째 교훈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7a)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으며, 하나님의 분노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재앙과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뿐입니다.[2]

 

 

역사 속에 들어나는 하나님의 성품

 

나훔서가 묘사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곧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나훔서의 주제이기도 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성의 멸망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시기는 아마도 앗수르제국의 힘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3] , 니느웨 성을 수도로한 앗수르 제국이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화려한 겉모습에 감추어진 죄악상을 정확히 꿰뚤어

보고 계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3:1)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그들의 겉모습은 힘이 넘치고 화려하고 영광스러웠지만 그들의 도성에는 거짓, 포악, 탈취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시체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느웨의 죄악을 직시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니느웨 성을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것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3:5-6)

 

모든 사람들이 니느웨 성의 화려함과 강한 군사력에 넉을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바라보시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지만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앗수르 제국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 애굽의 오랜 수도였던 노아몬입니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으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3:8-10)

 

애굽의 수도였던 노아몬(지금의 테베)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보다 더욱 힘이 강하였고 동맹국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훔 선지자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자신의 의로움이나 능력으로 재앙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은 나훔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이 알아야 했던 두 번째 진리 곧 하나님만이 환난 날에 피할 산성이 되어주신다 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앗수르 제국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지요.

 

 

재앙의 날을 이겨내는 두 가지 진리

 

재앙과 아픔의 시간이 때로는 우리 앞을 막아 설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그러면 기도를 통해 깨닫는 첫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재앙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구나.” 기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재난과 아픔을 당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가 의로운 삶을 살았노라고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과 재앙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겨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 하나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1:7a) 사방이 막혀있는 현실 속에서도 이 하나의 진리가 들려오기에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나훔 1:2-8은 운율을 갖춘 알파벳노래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다.

[2]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공의와 사랑, 심판과 용서 은 니느웨에 대한 두 권의 예언서(나훔&요나)가 상호 보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훔서가 끝까지 거스르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고(1:3) 요나서가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4:2), 나훔서 역시 하나님을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선언하며(1:7) 요나서 역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한다(1:2). Cf. 노세영, <나훔, 하박국, 스바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48-49. 

[3] Ralph L. Smith, <미가-말라기>, vol. 19 of WBC (서울: 솔로몬: 200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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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7. 7.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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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인간의 무지

 

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마차도 없었습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지요. 한 사람은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차가운 밤 공기를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말을 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지요. 마차 안에서 인간이 켜놓은 등불을 누리던 부자는 결코 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별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빛도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여겼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1]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이라는 등불을 켰지만,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밝히 비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던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유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일침이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에 있는 조그마한 등불과 같은 진리, 기껏해야 조그마한 마차 안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을 켜 놓고는 그곳에 만족하며 온 하늘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이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전체는 인간들의 말잔치처럼 보입니다. 욥기에서 사건을 묘사하는 대목은 그저 1-2, 그리고 마지막 42장이 조금 등장할 뿐입니다. 우리는 욥기가 의인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내용은 그저 욥기 1-2장에 조금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대신 욥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은 욥이 쏟아놓은 언어, 욥의 세 친구들이 쏟아놓은 말의 잔치입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놓고 이렇 궁 저렇 궁 참 많은 말을 합니다. 끝도 없고 결론도 없이 하나님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계속해서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에 이르러 욥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하고 말을 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안다고 하지만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거저 입술로만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욥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또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합니다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그 문장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은지 그 한 문장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으십니까? ‘천국 영생은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선언하고 있지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다 헤아려보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나의 마음에 조그마한 등불은 켰지만 오히려 그 등불 때문에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면 제 3기 전도폭발훈련을 마치는 지금, 우리는 욥과 같이 고백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변화] 하나님의 개입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기는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저 마차 안에서 누리는 밝은 등불 정도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자신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욥기 42장에 이르러 욥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5)

 

욥이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많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풍문만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몰려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등장해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23:8-9)

 

욥은 당대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대해 많은 지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이 있었어요. ‘내가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안 보이고 뒤로 가도 하나님이 안보인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일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탄식. 그 깊은 탄식이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은 그 답답한 심정이 해결되었다는 선언을 하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저 하나님께 대해 귀로 들은 풍월 밖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만 이야기할 뿐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눈으로 주님을 직접 뵈옵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들은 풍월만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 이 장면 사이에 과연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욥기 전체를 통해 두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고난입니다. 여러분은 욥의 고난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의인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어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지식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나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아무리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고난의 현장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고난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번째, 매우 중요한 과정이 필요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평생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달려가고 있던 그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당한 고난의 사건이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선언하십니다.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자연 현상들을 주도하시는 하나님, 나아가 수많은 생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죠.

욥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이 있었는데, 첫째는 고난의 현장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마차 안에 있는 부유한 남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그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등불과 같은 조그마한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마차 안에 있는 따뜻한 공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고난의 광풍이 찾아와요. 그 거대한 광풍은 마차를 지금이라도 뒤집어 놓을 것처럼 무섭게 휘몰아칩니다. 그 거대한 광풍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요.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는 고난의 광풍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어놓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분석도, 그 어떠한 해석도 그 무서운 광풍을 피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차 안에서는 도무지 지금 불어닦치는 광풍을 이겨낼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마지못해 조그마한 마차로부터 밖으로 뛰어나오는 거에요. 처음 마차를 뛰쳐나올 때에는 어두움의 공포가 몰려옵니다. 처음 마차에서 뛰쳐나올 때에는 한 밤의 차가운 바람이 우리의 온 몸을 엄습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눈에는 비로서 하늘에 가득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안락한 마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눈을 들어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죠.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교재의 내용을 글로 읽고 암기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식은 고난이었고, 아픔이었고, 인생의 광풍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전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깨닫지도 못한 일을 입술로만 떠들어 댔던 우리에게 강풍을 보내어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나라고 비록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하며, 차가운 밤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지만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온 땅을 뒤엎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오늘 본문 5절의 이 고백은 성경 말씀을 달달 암기한 사람들의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교재의 내용을 달달 외운 사람들은 오늘 본문 5절이 아니라 3절을 고백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그러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문제로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던 분들, 그래서 그동안 안주하였던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나를 막아주는 조그마한 마차라는 보호막이 사라져버렸을 때 비로서 등장하는 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았던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생의 광풍 앞에서 눈물 흘리셨던 분들이 많으시죠? 지금도 고난의 광풍을 만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신 분들 많으시죠? 여러분, 여러분이 안주하고 계신 그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그마한 등불도 안락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때가 있어요. 그곳에는 등불이 주는 편안함도 없고, 그곳에는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주는 천막 하나 없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결과] 인식의 확대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고, 비로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풍문 정도를 넘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뵙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욥은 새로운 영적인 단계로 진입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6)

 

여기에 등장하는 거두어들이고라는 말은 풀어졌다, 녹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욥의 마음에 있던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죠.[2] 아울러, 6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1차적 의미의 회개가 아닙니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말에 대해 회개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 도저히 그 무엇과 비교할 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3], 곧 영적으로 크게 성숙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6절의 의미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욥이 자신의 마음에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이 놀랍도록 성숙하였다고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티끌과 재라는 구절입니다. 욥은 고백하지요.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티끌과 재라는 구절은 욥기를 제외하면 구약성경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데 바로 창세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아니 45, 아니 40, 아니 30, 아니 20,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이 최소한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죠. 바로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묘사하며 티끌과 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 18:27)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지요.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한 없이 나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욥 역시 동일한 의미로 티끌과 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욥은 자기 자신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티끌로 보이고 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표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 자신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 그래서 티끌이요 재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대화 파트너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아브라함을 소돔성을 멸망시킬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협상의 대상자, 대화의 파트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사용했던 티글과 재라는 용어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고 나약한 인간의 연약함이 표현되어 있는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고난 앞에서 자신이 만족하고 안주하였던 마차 안이 작은 등불로부터 뛰쳐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는 어두운 밤 길을 헤매는 방황의 장소였고 칠흑간은 어두움 속에서 살갗을 애이는 온갖 추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하늘에 가늑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소였지요. 비로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 성숙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바로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욥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고 마치 다 깨달은 듯 유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 바를 말하는 것이요 스스로 알 수 도 없는 일을 말하는 미련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동안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던 마차 안의 작은 등불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그 경험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그저 풍문으로 들은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마음으로부터 진실되게 선포하는 참된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한 여러분을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십니다.

  

 

 


 

[1]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 필립 얀시, 홍종락 , <수상한 소문> (서울: 포이에마: 2013), 21.

[2] J. Gerald Janze, <욥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333. 

[3] Francis L. Anderson, Job: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Downers Grove, Illinois: IVP Academic, 2015), 287. 한편, 이군호는 욥의 회개가 교만에 대한 회개였다고 주장한다. 이군호, <욥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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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7 “욥의 회개와 결말” (32장)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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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성경공부" 목차 (Contents)

욥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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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6. 12. 2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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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오후 5시에 심방하기로 약속하셨는데 갑자기 오전 10시에 목사님이 도착하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신이 하나도 없지요. 당장 청소하고, 음식 준비하고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39)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는 특권 중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주방일에 집중하면서 그의 마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생활에 이와 같은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 처음에는 기쁨과 감사로 시작했지요.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지죠.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41-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는 일차적으로 음식의 숫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단지 음식의 종류를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성경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의도하신 바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이 그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39)

 

예수님 당시 여성은 율법 교육의 대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그 어떠한 율법의 교사도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였던 한 여성에게 집중하여 말씀을 전하거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라는 한 여인의 집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만난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 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권면하는 예수님의 모습.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의 전도폭발은 수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전도의 모습은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지난 달 전도폭발팀 25명이 경기도 양평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5명의 잘 훈련된 팀이 2 3일 동안 전도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보고해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통계를 보면, 전도폭발팀 25명이 2 3일 동안 복음을 전한 사람의 숫자는 고작 36명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전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치듯 지나가며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많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분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분의 삶과 그분의 생각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소개하고, 또한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몇 명만 만나든지 혹은 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해도 충분하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대중을 대상으로 한 사역,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사역을 꿈꾼다면 그 열매는 보잘 것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에게 이것 저것 많은 것, 풍성한 것, 사람들이 칭찬할만한 어떤 것으로 준비하려다 그 마음만 분주했던 마르다의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으로 의미 있는 몇가지, 아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로 그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안내하는 바로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분주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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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6. 11. 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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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꼭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그것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 좋은 일이죠? 구약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죠? 그래서 유대 출신 교사나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겠지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할 것은 해야지!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확신 속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모습은 없을까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요. 그래서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을 위한 목적이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 사도가 드디어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베드로와 동고동락하셨지요.

여러분, 인류역사에서 베드로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했어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3년 동안 풍성히 받아 누렸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와 목적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여러분, 오랜 시간 교회를 출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간증이 풍성하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교회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 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 수록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이제 베드로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선언을 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수긍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난 수천년 동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고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여러 가지 기도회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신다고요? 그것이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아직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과의 차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지라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

 

신앙생활을 10, 20, 30년을 하신 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대단히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나 이제 막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이나 이제 등록한 새가족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울러,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와 충성을 다 바쳤던 분이나 이제 교회에 막 등록한 분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하게 권면 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나 새가족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신앙의 경륜 등을 가지고 새가족과 불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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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