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2021. 9. 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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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노년에 자신의 사역을 계승해야 할 디모데에게 사역의 자세와 목표에 대해 교훈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성도들을 참된 경건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디모데전서를 통해 바울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참된 경건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여 경건한 삶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발목을 붙잡는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장애물이 무엇인지 언급하면서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다른 교훈

복음만이 성도들을 참된 경건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다른 교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3절)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교회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본문 3절이 지적하는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불편한 현실이지만, 바울이 다른 교훈을 경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초대교회 안에도 ‘다른 교훈’이 존재하였고,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복음에 마음과 관심을 묶어 두지 않으니 다른 교훈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4절) 

여기에 변론과 언쟁이 등장한다. 복음의 진리는 너무도 명백하여서 우리는 복음에 대해 변론할 것도 없고 언쟁할 것도 없다. 그런데 ‘다른 교훈’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 외에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복음을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다른 교훈에 대한 언급이 더욱 많았고, 이는 서로에 대한 분쟁과 비판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본문의 ‘다른 교훈’을 “허황된 잔소리”라고 평가하였는데 허황된 잔소리가 무성해지자 성도들의 마음은 점차 참된 경건으로 인도하는 복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욕심

복음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인도한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경건한 삶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욕심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9절) 

과연 얼마나 많이 욕심을 부려야 경건의 삶을 방해하는 탐심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수준 이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탐심에 빠진 사람이요 그들의 믿음은 참된 경건에서 벗어나 파멸을 향하게 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0절)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 가르친다. 시편 34편 10절이 노래하듯,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복음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 탐욕은 인간들에게 언제나 ‘더 소유하라’고 다그치니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 풍성함을 빼앗아 늘 궁핍에 처하게 만든다. 탐욕이 경건한 삶의 큰 장애물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토의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에게 경건한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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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9. 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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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결론은 두 개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하나는 미가라는 인물과 단 지파의 이야기이며(17-18장), 또 하나는 어느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일로 불거진 이스라엘의 내전이다(19-21장). 이 두 개의 사건은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방종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본문은 그 첫 번째 이야기의 일부다. 

에브라임에 거주하였던 미가라는 사람은 큰 돈을 들여 신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때마침 그의 집을 찾아온 레위인을 자신의 제사장으로 삼았다(삿 17장).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행해서는 안 될 우상숭배의 죄악이었다. 그런데 미가의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죄악이 이제 단 지파의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단 지파의 신상 탈취

단 지파는 가나안의 여러 곳을 다니며 점령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 일을 위해 파송받은 정탐꾼 다섯명이 미가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 집에 큰 신상과 제사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탐을 마치고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정탐꾼들은 동료 군인들에게 미가의 집을 소개하며 이렇게 제안한다.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삿 18:14) 

단 지파의 군인들은 정탐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였다. 그리고 미가의 집에 들어가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탈취한다. 단 지파의 군인 육백 명이 무장하고 있으니, 미가의 제사장은 그 장면에서 반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제사장은 단지 반항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동의하였다. 단 지파는 그 제사장에게 이렇게 제안했기 때문이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삿 18:19) 

이 장면은 사사시대에 팽배하였던 ‘힘의 논리를 따르는 성공주의’를 보여준다. 미가와 그의 가족들은 떠돌이 레위인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받아주었고, 그를 ‘아들처럼’ 대해주었다(삿 17:11). 그러나 미가의 제사장은 그러한 미가의 집을 배반하였다. 한 가정의 제사장이 아닌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성공이 그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는 단 지파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호위하고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호의에 대한 배신은 단 지파도 마찬가지다. 미가는 정탐꾼 다섯 명을 자신의 집에 유숙하도록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를 배반으로 갚았으니, 육백 명의 군대를 앞세워 미가의 집에서 값진 것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 힘의 논리를 따르는 성공주의,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의 행동을 좌우하였던 시대적 흐름이었다. 


단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

단 자손이 데려간 제사장의 이름이 본문의 마지막에 나온다. 곧 요나단이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삿 18:30) 

요나단은 모세의 둘째 아들이었던 게르솜의 자손이었다. 본문 30절의 ‘아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여러 대를 뛰어넘는 자손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장면이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요나단을 게르솜의 아들이 아니라 게르솜의 자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라는 표현은 단 지파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 장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단 지파는 라이스에 정착하는 그날부터 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론의 자손이 아닌 게르솜의 자손으로 제사장을 세웠고 미가의 집에서 탈취해온 신상을 우상으로 숭배하였다. 단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과 그를 지파의 제사장으로 세운 단 지파는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미가의 집을 배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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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1. 2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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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라고 하면, 흔히 미래를 점치는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예언서를 읽다 보면, ‘사자언체’(messenger style)가 많이 등장한다. 사자언체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와 같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표현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자언체는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율법에 그 기초와 근거를 둔다. 그런 점에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모세도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 18장 18절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모세가 선지자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백성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분류법이 기독교의 구약성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만, ‘타낙’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성경은 율법서(토라), 예언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인들이 역사서로 부르는 책들이 타낙에서는 예언서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유대교 전통에서는 예언서다. 그 이유는 예언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므리 왕조 시대(아합과 이세벨)의 예언자 _ 엘리야와 엘리사 

구약성경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한 이후에도 남 유다는 약 150년 이상 존속하였다.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지만 70년 뒤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였고,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재건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역사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다. 

구약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엘리야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엘리야의 시대적 배경을 열왕기상은 이렇게 서술한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장 29-34절)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은 온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다.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의 유물 가운데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와 ‘키르벳 엘 콤’(Khirbet el Qom)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그의 아세라로 너를 축복하노라”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데, 위의 문구에서는 북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와 아세라 우상이 부부 관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만큼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와 관련된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갈멜산에서의 대결이다. 엘리야는 홀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하였다. 이 대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선언하셨다. 이처럼 갈멜산에서의 사건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였지만, 갈멜산에서의 승리 뒤에도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겨진 사역을 위하여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가 세워진다. 


예후 왕조 시대(여로보암 2세)의 예언자 _ 아모스, 호세아, 요나 

시간은 더욱 흘러 북 이스라엘은 이제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파송하신다. 

아모스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그런데 아모스 1장 1절에는 그를 소개하면서 “드고아 목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드고아 지역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 이스라엘이 아닌 남 유다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의 직업은 목자였다. 한마디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룹이 아니었다. 그는 남 유다에 거주하던 목자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실로 통렬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4장 4-5절) 

벧엘과 길갈은 당시 유명한 성소가 있던 곳이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모스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조롱한다. 벧엘의 성소에서 어떠한 죄를 범하라는 것인가? 희생 제물과 십일조를 드리며 수은제와 낙헌제를 드리는 것이 아모스가 지적하는 죄의 내용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처럼 독설을 내뱉는 이유, 곧 벧엘에서 드리는 제사까지도 이스라엘의 죄악이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사회적 불의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아모스 2장 6-7절) 

아모스 선지자의 언어는 이처럼 매서웠지만 그 안에도 희망은 담겨있었다. 다만, 북 이스라엘이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아모스 5장 14-15절) 

호세아 역시 북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2세 때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아모스서가 주로 사회적 불의를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지적했다면, 호세아는 그들의 종교적 타락을 질타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타락을 꼬집는 방식은 독특했다. 부정한 여인 고멜과의 결혼이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세아 1장 2절)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 고멜이 낳은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고, 고멜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호세아는 선지자의 역할을 위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결혼 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던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 과연 그들의 종교적 타락은 어디서부터 회복이 가능할까? 호세아는 그 시작점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3장 1절) 

고멜의 음행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보여준다면, 그녀를 끝까지 품었던 호세아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여로보암 2세때 활동하였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아모스와 호세아 외에도 요나가 있다. 요나서에는 그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왕기하에는 그가 활동했던 시기와 선포했던 메시지를 기록해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열왕기하 14장 25절)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성경이 묘사하는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상숭배로 점철되어 있으며 불의가 가득한 역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결국 앗수르에 의한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지만, 죄악으로 치닫는 북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기억해야 한다. 곧, 그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위대한 예언자들, 곧 엘리야와 엘리사, 아모세와 호세아와 요나를 북 이스라엘에 파송하셨다. 그리고 심지어 니느웨 성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셨다. 비록 구원 역사의 흐름이 유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을지라도,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나아가 이방민족 니느웨도 긍휼히 여기셨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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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1. 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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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며 그 시기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1-2) 

먼저 시기가 등장한다. 로마의 디베료 황제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렸고, 그가 임명한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다. 그 외에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와 같은 권력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종교 권력을 휘두르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있었다. 이처럼 세상 권력과 종교 권력을 틀어쥐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임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소명을 묘사할 때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사 6:1; 렘 1:2; 겔 1:1-3; 호 1:1). 이는 선지자들의 소명에 역사적 신빙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로마가 세계를 다스렸고 황제의 임명을 받은 총독과 왕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시기와 함께 장소가 등장한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장소는 ‘빈 들’이다. 2절에서 ‘빈 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4절에 등장하는 ‘광야’와 동일한 단어다. 빈 들 혹은 광야라는 단어가 본문에 두 번 등장하는 샘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빈 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새롭게 되며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요한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요한이 전한 말씀과 세례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준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설교자 요한 

요한의 역할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었다(3절). 그래서 그의 별명은 세례 요한이 되었다. 세례의 유래에 대해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요한 이전에 그와 유사한 종교 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세례는 이처럼 매우 독특한 것으로 요한은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유대인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켰다. 그러나 본문은 요한이 전한 세례 의식보다 요한이 전한 메시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세례 요한’으로 그를 부르지만, 본문이 묘사하는 요한은 세례자보다 설교자에 가깝다. 본문의 대부분이 요한이 전한 메시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본문이 요한이 행한 세례 예식보다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에 집중하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례를 받았다고 참된 회개를 경험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7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라고 소리친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9b절) 이것이 요한이 전한 경고의 메시지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요한은 세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가? 어떻게 회개가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가? 사람들은 요한에게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0절)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12, 14절) 

무리, 세리, 군인들이 질문하자 요한의 대답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무리로 통칭되는 일반인들에게는 자신의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는 삶을 강조한다(11절).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만 거두라고 말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명령한다. 자신이 처한 사회적 역할과 위치에 합당한 거룩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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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0. 10. 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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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의한 멸망,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 

예레미야 46장부터 51장은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이다. 46장부터 51장은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46장부터 49장까지 그리고 50장과 51장이다.

46장부터 49장이 다루는 나라들을 보면,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 등 많은 유다의 주변국들이 거의 등장한다. 이처럼 많은 나라들을 언급하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는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신흥 강대국을 일으켜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게 하셨으니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거스를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과거에 세계를 호령하였던 애굽도,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다도 바벨론이라는 하나님의 칼에 쓰러진다는 예언이다. 그러나 50장과 51장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던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예언이다. 그러니 46장부터 49장이 바벨론을 일으켜 여러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내용이라면, 50장과 51장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셔서 여러 민족,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 유다를 회복하신다는 예언이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한 유다 멸망 
B.C. 538년. 메대와 바사에 의한 바벨론 멸망  (고래스 칙령) 

 

바벨론의 멸망은 유다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의 고래스 왕이 유대 민족을 귀환시켰기 때문이다. 


참고구절. 에스라 1장 1-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유대인의 과제 

본문 3절은 바벨론이 함락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할 것임이니라" 
바벨론 주민에게는 메대와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하는 그 날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하는 날이 된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포로가 되어 끌려온 유대인에게는 귀환의 날이다. 그래서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귀환을 묘사한다. 

그날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예레미야서는 1장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49장까지 한결같이 바벨론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어 끌려가라고 권면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일으켜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메대와 바사로 하여금 바벨론을 함락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바벨론으로 가라'가 아니라 '바벨론에서 도망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옛날 애굽에서 나왔던 것처럼, 이제는 바벨론에서 나오라.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나오라 
양 떼에 앞서가는 숫염소같이 하라 

그러나 유대인의 과제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공간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옛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출 19-24장), 바벨론에서 나온 유대인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포로 귀환을 허락하실 것이니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신앙적 회복을 요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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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