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2. 6. 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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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가운데 성도들은 마음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 기도를 시작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나의 여러 소원을 아뢰며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기도제목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변화를 경험하기도 하지요. 때로는 낙심과 절망의 상태에서 시작된 기도가 확신과 감사의 기도로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16편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 기도 가운데 믿음의 확신으로 변화되는 하나의 예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믹담"이라는 표제어를 가지고 있는 시편 16편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 그러나 다윗의 부르짖음은 곧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변화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 되신다는 다윗의 확신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구절은 시편 16편 5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5절) 본문 5절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세 가지 단어로 묘사합니다. 곧, 산업, 소득, 그리고 분깃입니다. 다양한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은 나의 기업"이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땅이 그들의 기업인 이유는 그 땅이 먹을 양식을 공급하는 원천이며, 삶을 영위하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업'이란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원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시대로 말하자면, 직장이나 일터가 개인과 가정의 기업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개념을 넘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기업'이 되신다고 노래합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모든 원천이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오늘의 시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확신이 되었고, 주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신다고 노래하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탄식이 변하여 확신이 되니,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절) 본문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지금 이 자리는 너무도 위험하여 하나님께로 피하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바로 이곳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실로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현실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탄식하며 부르짖는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되니, 이전에는 당장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의 고통과 아픔을 벗어났을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신다고 확신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이곳에 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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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2. 5. 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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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이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였던 존 맥케이(John Mackay)라는 분이 계십니다. 존 맥케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가지 이미지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발코니’이고 또 하나는 ‘길’입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발코니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존 맥케이는 페루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는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발코니는 스페인의 가옥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인데, 건물의 위층 창문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신의 집 앞의 길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발코니와 같다는 비유는 시시각각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그 모든 장면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 가운데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을 일어나고 그 가운데는 우리의 예상이나 계획을 뛰어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그때 성도들은 개별적인 사건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존 맥케이가 사용한 ‘발코니’라는 비유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존 맥케이는 ‘발코니’라는 비유가 하나의 이상으로 작용할 뿐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는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구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발코니’의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맥케인이 두번째로 제시한 비유인 ‘길’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발코니 위에 올라가서 길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넓은 시선으로 조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자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설치된 발코니가 아니기에 그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길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길을 걸아가면서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제 모습입니다. 


순례자의 길

오늘 본문 시편 23편은 너무도 유명한 시편이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편을 하나 꼽는다면 오늘 본문 시편 23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 1절부터 얼마나 아름다운 시구가 시작되는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계속해서 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시편 23편을 읊조릴 때마다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어 어린양과 같은 우리를 돌보시는 장면,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니 어린양들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에서 평안하게 풀을 뜯으며 물을 마시는 모습이 우리 마음에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본문이 노래하는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많은 성도들도 이 시편을 사랑하고 애송하다 보니, 주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어 어린양을 돌보시는 장면의 그림이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액자로 걸려 있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저희 집에도 시편 23편의 시구를 그림으로 표현한 액자가 걸려있는데요, 그 액자에는 우리 주님께서 어린양을 품에 안고 계시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성도님들이 시편 23편을 낭독하고 암송하면서 떠올리는 장면은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져 있는 장면, 혹은 주님께서 어린양을 품에 안고 계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3편의 전체 내용, 곧 1절부터 6절까지의 모든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시편 23편이 묘사하는 성도들의 삶은 발코니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나의 넓은 전망이 아니라, 길을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장면을 마주치는 지속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십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주님께서 누이신 푸른 풀밭에 그대로 누워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푸른 풀밭에서 다시 인도하셔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시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도록 이끄신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의 유목민들에게 이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지요. 그들은 언제나 양 떼를 몰고 다니면서 양들에게 풀을 먹일 수 있고 물을 마시게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동한다’는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3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로움’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처럼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그 과정에서는 본문 4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등장하고, 때로는 본문 5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원수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시니 이 모든 길의 끝에서 우리는 본문 6절이 노래하듯 ‘여호와의 집’에 안전하게 당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성도의 삶을 존 맥케이의 비유를 인용하여 설명한다면, 발코니 위에 푹신한 소파를 놓고 편안하게 앉아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걸음 뒤에서 조망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한가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성도의 삶은 발코니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사이에 끼여 쉴 새 없이 부대끼는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요, 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길’입니다. 

시편 23편을 순례자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으로 이해하면, 이제 본문 1절의 말씀이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본문 1절이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 그리하여 내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그 말씀은 내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는 높은 발코니에 올라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위험하고 무서운 곳은 모두 피하고 언제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 지나게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어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니 나를 괴롭히는 원수와 같은 존재는 처음부터 주님께서 다 물리쳐 주신다는 의미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1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벗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있지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벗어나 원수들이 가득한 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할 때도 많지만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나를 지켜 보호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본문 4절은 이렇게 노래하잖아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로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바로 그때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여러분이 원수를 마주치는 바로 그 장소에서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출애굽부터 가나안까지

시편 23편이 묘사하는 신앙의 여정을 한절 한절 묵상하다보면, 구약성경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여정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모세를 부르시지요.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면서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처음 알려주십니다. 모세 이전에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은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다음 구절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으로 살고 있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빠져나오고 홍해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이제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감에 부풀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의 진행과정을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그들 앞에 펼쳐진 신앙의 여정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40년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주 정도 광야를 체험한 것 아닙니다. 그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광야가 그들의 집이고 광야가 그들의 모든 생활공간이었어요.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마실 것이 없습니다. 더위나 추위를 피할 건물이 없습니다. 반면에 광야이기에 만날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들짐승의 공격이요, 밤마다 찾아오는 살을 에일 듯한 추위와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으로 말미암은 뜨거운 열기입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온 민족이 40년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으니 아말렉 사람들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을 약탈하려고 시도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오늘 본문 4절과 5절이 묘사하듯 원수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같았어요. 그런데 여러분, 광야 40년이 마쳐가는 바로 그 시점에 모세가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선포하였던 믿음의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먼저 신평기 29장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 29: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옷이 낡아지지 않았고, 신이 헤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신 8:4). 신명기 2장에는 더 놀라운 모세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신 2:7) 

이스라엘은 분명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더위와 추위를 피할 장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들짐승의 공격은 늘 있었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말렉 군대의 위협은 늘 있었어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니, 결론이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이제 결론입니다.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오늘 본문 1절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1절의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믿음의 고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 40년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을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하였던 믿음의 고백이지요.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는 시편 23편의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때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스라엘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노래했던 믿음의 고백입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편 23편의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만났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내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며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는 바로 그때에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니 비록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지라도,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나에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이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가르쳐주지요.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시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15절) 

성도들의 인생은 저 높은 발코니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크고 작은 일들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순례자의 길이지요. 그리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있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이었고,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저 안락한 하늘의 보좌, 편안하게 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발코니에서 스스로 내려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의 가장 험한 길을 걸어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시고, 스스로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셔서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평안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신 희생의 결과인 줄 깨달아 이제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의의 길을 향해 힘껏 달려 가십시오. 반대로, 여러분 가운데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시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눈을 들어 먼저 그 길을 앞장서서 가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어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그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X2)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절)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여러분 모두의 순례길에 
이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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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11. 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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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지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는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비유를 사용하는데, 그 가운데 한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 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 아침에 또는 단 기간에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한 두 가지의 중요한 생각이나 행동 혹은 특별한 체험이 잠시 행복한 감정이 들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삶 전체를 행복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나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되지 않는다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는데, 이번에도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의 예가 등장해요. 그 장군에게 주어진 자원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군인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전쟁에서 군마로 활용할 수 있는 말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군인들을 먹일 수 있는 군량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장군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군대로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전략을 짜는 일이 중요하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입니다. 제화공이 사용할 수 있는 가죽의 종류, 가죽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제화공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주어진 가죽을 가지고 가장 훌륭한 구두를 만드는 일이죠. 우리가 나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과정이 꼭 이와 같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처지와 형편이 다 다릅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주어진 것들 것 나에게는 이렇게 부족하냐고 불평하면 내 삶을 행복으로 바꿀 수 없어요. 그 대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주어진 군대로 가장 적절한 전략을 짜는 장군처럼, 마치 주어진 가죽을 가지고 최고의 구두를 만들어내는 제화공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내용은 이후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해온 행복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형편을 탓하기보다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나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교훈이지요.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와 같은 가르침에 치명적인 오류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트로이의 마지막 왕이었던 프리아모스입니다. 그는 트로이의 왕으로 지혜롭게 자신의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통치로 말미암아 트로이는 번영하였고 프리아모스 왕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년이 되어 우연히 일어난 트로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장자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고 말지요. 프리아모스 왕은 적진에 들어가 비굴한 모습으로 아들의 시신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프리아모스 왕은 젊은 시절에는 행복했지만, 외부로부터 큰 불행이 거듭되면서 노년에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들었지요. 그렇게 열심히 성실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주어진 군대로 최선의 전략을 짜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처럼 오늘 나의 행동이 내일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불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추구하던 행복이 얼마든지 빼앗겨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까요?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던 프리아모스 왕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불행이 겹쳐 몰려오니 그의 노년은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헛되다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우리 신앙인들이 애송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본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본문 1절과 2절은 매우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절) 

여기에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다’는 말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네요.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2a절) 

이 짧은 구절에 ‘헛되다’는 말이 세번이나 나오는데 그 의미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구약 전도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서의 이 구절에서 헛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벨’입니다. ‘헤벨’이라는 단어는 의성어로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숨소리를 ‘헤벨’이라는 발음으로 나타내었던 것이죠. 이 단어가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해서 수증기, 연기, 안개와 같은 구체적인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추상적인 개념까지 포괄하게 되었는데 무상 혹은 덧없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추상적 개념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헤벨’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보면 독특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이방의 우상을 이야기할 때 ‘헤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복을 받기 위함이지요. 정성을 다해 우상을 숭배해서 그 우상의 도움으로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을 받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성경은 이방 우상에 대해 ‘헤벨,’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에게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우상은 우리 인간에게 단 하나의 복도 가져다줄 수 없어요. 그러니 그것들은 ‘헤벨,’ 헛된 우상입니다. 

구약의 전도자(코헬렛)는 인간의 일생이 ‘헤벨,’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우상을 열심히 숭배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의 힘으로는 우리의 행복으로 이끄는데 큰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자신이 관찰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전 9:11) 

우리는 마땅히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달리기 연습을 열심히 해서 빠른 경주자가 된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닙니다. 뛰어난 장군이라고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고 명철하다고 하여 큰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없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헤벨,’ 아침 안개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같이 헛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

시편 127편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b절)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잠, 곧 휴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네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수고하는 인생, 고생하는 인생, 아침 이른 시간부터 늦은 밤까지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다른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셨잖아요.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열매가 없는 것 같아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신 분도 계시잖나요?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쉼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절의 구절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는 말씀은 다른 방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여러 번역이 존재하지만, 표준새번역성경의 번역만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삶은 헛된 인생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가꾸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만 그 수고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수고한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수고한 것 이상으로, 우리가 노력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잠을 자고 있는 그때도 베풀어 주시는 넘치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면서 그 축복의 대표적인 예로 가정의 행복을 말합니다. 시편 127편이 시작하는 1절부터 가정에 대한 소재는 다루고 있거든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1a절) 여기서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계속해서 3절부터 5절까지 자녀에 대한 내용을 노래하지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3절)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가정 생활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가정의 행복만큼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수고가 그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영역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정의 행복에 있어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한다고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아니지요. 가정의 시작은 결혼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를 찾기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수고할수록 나에게 적합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수고와 자신의 노력으로 우리의 자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가정생활은 인간의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가정생활만큼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헛된 영역도 없어요. 그리하여 시편 127편은 인간의 행복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가정의 행복이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3절) 

가정의 행복,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축복

시편 127편은 크게 두 가지를 노래하지요. 첫째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데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헛된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만이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시편 127편의 주제를 정리하고 나면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와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복음의 진리도 이처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는 모두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고행을 하고 선하게 살기 위해 참선을 하고 철학과 윤리와 종교를 제 아무리 연구하여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인간이 도저히 찾아 나설 수 없는 그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X2)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주어진 군대로 최선의 전략을 짜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요. 행복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수고에는 너무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행복론을 주장한 뒤 약 500년이 흘렀을 때,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행복한 삶>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성도들에게 행복한 삶을 위해 권면하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 <행복한 삶>이라는 책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도 분명한 차이는 이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그쳤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면 이제는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의 진리를 더욱 확신하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절)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2절, 표준새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반드시 행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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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10. 2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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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34편에는 표제어가 붙어 있지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여기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을 통칭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블레셋의 성읍이었던 가드를 다스리는 아기스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골리앗이라는 그 누구도 쓰러트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블레셋의 장군 앞에서 사기를 잃고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지켜보았던 다윗은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의 손에는 가장 익숙한 무기였던 물매를 가지고,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큰 승리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윗의 승리를 오히려 시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시기심에 이끌려 다윗을 죽이려 하였고, 다윗은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지역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런데 다윗 자신이 전쟁에서 이겼던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군이었잖아요. 당연히 블레셋의 가드를 다스리던 아기스 왕은 다윗을 보자마자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잡아 죽이려 하였지요. 그 급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척을 합니다. 나 다윗이 당신에게 그렇게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요. 다윗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미친 척을 하였는지,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윗이 실제로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다윗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네요.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천천히 읽어보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다윗의 경험을 다윗 자신이 스스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바로 본문 6절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6절) 

본문 6절의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체험을 노래하는 구절이지만, 동시에 본문 6절은 다윗 개인의 인생을 묘사하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6절의 체험은 지금까지 시편 34편을 노래하였던 수많은 신앙인들의 체험이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경험아기도 하지요. 

자, 다윗이 묘사하는 자신의 경험, 나아가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 그 첫번째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한 단어로 표현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너무도 곤고했습니다. 우리는 크지도 않은 재산을 잃어버려도 우리의 삶이 곤고해집니다. 계획한 바를 이루지 못할 때도 우리의 삶은 곤고해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다니고 있어요. 심지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갔더니 거기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뿐이네요. 그러니 다윗의 삶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여러분, 다윗이 지금 큰 잘못을 저질러서 이렇게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무엇인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쳤기에 블레셋 나라에서 생명을 구걸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어서 지금 곤궁한 상황에 빠졌나요?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상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펼쳐진 현실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도 미친 모습을 보이며 생명을 구걸해야 하는 곤고한 상황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 6절은 다윗의 경험을 묘사하지만 동시에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행동한 결과로 우리 성도들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그렇게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우리 성도들의 삶에는 큰 아픔과 시련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왜 나의 삶이 이토록 곤고한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어요.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혹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는 것인지 우리 인간은 다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삶은 곤고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의 인생도 곤고하였고, 지금까지 시편 34편을 노래하였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형통의 삶보다는 곤고한 삶을 살아왔고,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에게도 곤고한 삶을 결코 피해 가지 않습니다. 

다윗이 묘사하는 자신의 경험, 나아가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 그 두번째는 “여호와께서 들으시고”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다윗은 곤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 기도를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다윗의 생명이 위태로워졌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하는 그 순간에도 곤고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그 기도도 듣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시편에는 다윗의 이름이 표제어로 등장하는 수많은 시편들이 있지요. 다윗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사울의 모든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구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날이 살아 움직입니다. 아직은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도 그곳에서 살해의 위협을 느낍니다. 여전히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누구에게나 곤고한 삶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하지요. 물론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곤고한 삶이 형통의 삶으로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곤고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지금도 듣고 계십니다. 

다윗이 묘사하는 자신의 경험, 나아가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 그 세번째는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큰 아픔을 당하며 마음이 곤고하고 심령이 곤고할 때를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셨다고 지금 당장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셨기에 마침내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구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체험이었고,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들은 다윗을 따라 본문 6절의 말씀을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절)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곤고하여 부르짖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성도님들 중에도 형통한 날을 살아가기보다 곤고한 날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요? 마음이 곤고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보지만, 여전히 나의 삶은 형통으로 바뀌지 않아 괴로운 시간을 여전히 보내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심령이 곤고한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믿음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곤고한 심령으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지금도 들어주시며, 마침내 여러분을 모든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찬양으로 초대

다윗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시편 34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1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제안하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2절) 

다윗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이러한 찬양을 들으며 ‘곤고한 자들이’ 기쁨을 얻게 되네요. 그리고 다윗은 3절에서 자신의 곁에 있는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3절) 

여전히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곤고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향해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을 향해서 권면도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8절) 

이 구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 그리고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가 받는 복’을 노래하고 있지요. 다윗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얼마나 감미롭고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풍성한 행복으로 감싸는지,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책이나 글을 통해서도 배울 수 없으며 단지 실제 경험을 통해서 맛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면 여러분, 지금 다윗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가 지금은 큰 고통을 당하며 곤고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으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삼으신 그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젊은 시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재물과 큰 권세와 큰 명성을 얻게 해 주신 그 복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저는 본문 8절의 말씀을 아무리 묵상하고 묵상하여도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선하심,’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가 받는 복’은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출세나 그가 왕으로 누린 권세나 재력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표제어를 다시 보세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어요. 심지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날은 여전히 기세 등등합니다. 사울을 피해 이스라엘을 벗어나니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척하여 지금 간신히 쫓겨나 생명만 붙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의 상황은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서 모든 고통과 환란이 사라지고 그의 앞에 형통의 대로가 펼쳐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은 여전히 곤고합니다. 여전히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곤고한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에 누리는 복 아닙니다. 오히려 곤고한 현실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입니다. 비록 곤고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곤고한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비록 곤고한 상황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지만, 나의 부르짖음에 지금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사방이 꽉 막혀 어디로 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나를 붙잡아주셔서 또 한고비를 넘기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여전히 형통의 삶이 아니라 곤고한 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8절) 

성도 여러분, 어느덧 올해 2021년도 어느덧 10개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난 10개월을 돌아보면, 여러분의 삶도 곤고하지 않으셨나요? 물론 나의 잘못과 실수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우리의 삶에 곤고가 찾아오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난 10개월을 다시금 기도하며 되돌아보면 나의 곤고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지 않으셨나요? 곤고한 삶을 살았기에 바로 그 자리에서 곤고한 자의 하나님게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위로를 누리지 않으셨나요? 우리의 삶은 여전히 형통의 삶보다는 곤고한 삶에 가깝지만 곤고한 가운데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사방이 막혀버린 듯한 상황에서도 피할 길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지난 10개월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다윗과 함께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며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에게 곤고한 삶이 멈추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를 찾아와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살아가십시오. 나의 삶이 형통의 삶으로 바뀌지 않아 여전히 부르짖고 있을지라도 지금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마침내 모든 환란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이 되시니 곤고한 가운데 부르짖는 여러분을 그 모든 환란으로부터 구해주실 것이요,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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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7. 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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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샤를 드 푸코는 프랑스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는 가톨릭 교회에 귀의하였고, 수도사가 되어 사하라 사막에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다가 원주민의 총에 맞아 순교한 인물입니다. 그의 책 <사하라의 불꽃>은 샤를 드 푸코가 사막의 수도사로서 자신이 지나온 영혼의 여정을 기록한 수기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경건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십니까? 아니면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신가요? 어떤 분들은 일상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샤를 드 푸코의 대답은 참 의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분명히 믿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샤를 드 푸코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믿음, 그리하여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큰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오랜시간 준비한 것이 실패하기도 하고, 또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요인으로 나의 삶에 큰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나의 삶에 큰 어려움이 찾아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을 찾아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어렵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지요. 그때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비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주시는 경험을 하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만 계속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한두달 기도했지만 아직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요.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한 달이 1년이 되고, 두 달이 5년이 되고 10년이 되어도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만 흐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그 오랜 시간 하나님의 손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어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를 맞이하게 되지요. 바로 그때, 샤를 드 푸코의 경고는 우리에게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요, 그래서 예배도 참석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가 너무도 어려워집니다. 


어리석은 자

본문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이 치명적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1절) 

여기에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생각이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표현을 단순한 무신론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들 – 이 세상에는 영적인 존재도 없고 신적인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않았던 가나안 사람들도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많은 신들을 섬겼지요. 그러니 본문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생각은 모든 영적인 존재와 신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믿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위대한 기적으로 이끌어내 주셨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삶에 찾아오셔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믿지 못합니다. 자신의 일상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을 의식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채 매일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실제 나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단순한 무신론과 구별하기 위해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오히려 더 주님을 찾게 됩니다. 거대한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에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삶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실천적 무신론에 너무도 쉽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인간들의 마음을 살펴보시네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살펴보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각이 있는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본문 1절의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지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3절) 

이 말씀 역시 불신자나 우상숭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이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처럼 가장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지금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망각하게 되면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여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또 다른 별칭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삶에서 미끄러져 악을 행하는 자리에 앉고 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일 뿐, 그 믿음이 자신의 삶을 선한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4절은 어리석은 자, 곧 죄악을 행하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네, 그들은 이처럼 악을 행합니다. 동시에,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을 찾는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무서운 말씀은 바로 5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절) 

나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조금씩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 마음에는 무엇이 찾아온다고 말씀합니까?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을 잊어버린 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눈이 지금 당장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 하여 나의 마음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이 끝을 알 수 없는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분은 안 계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 지 반드시 점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삶에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여러분,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죄악을 행하는 자리로 미끄러지고, 그러한 나의 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끝을 알 수 없는 걱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가난한 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 성도들에게는 너무도 무서운 유혹이 찾아옵니다. 이른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 지금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더 이상 경외하지 않게 되는 유혹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늘 경외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많은 성도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이 무서운 유혹을 이겨낸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 가난을 포함해서 정치적 권력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으며 때로는 신체적 건강도 없는 장애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는 그의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요. 분명히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한 사람도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이르면 느닷없이 ‘가난한 자’가 등장하네요. 그러면 우리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편 14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구약성경의 여러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탄하시는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떠오르지요. 하나님께서 온 지면에 큰 홍수를 쏟아붓는 이 사건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너 나할 것 없이 큰 죄악에 빠진 현상이었거든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악한 생각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창 6:5-6). 그래서 하나님은 근심하며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 시대에도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열심히 방주를 만들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열심히 방주를 만들어 있었던 노아의 눈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오랜 시간, 노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끝까지 붙들고 방주를 마지막까지 건조해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은 노아의 삶에 현실이 되었지요. 

[어리석은 자들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우리는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려오기 전, 함께 모여 예배하다 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다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지요. 우리가 함께 모여 봉사하면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그만큼 교회의 모든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첫 번째 갈림길은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심지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러하듯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이미 말씀을 드렸지요. 그 마음에 하나님을 잊은 어리석은 사람은 죄악을 행하는 자리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바로 이때에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쁨

시편 14편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사람들 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때를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절) 

히브리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지요. 그 430년의 세월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지요. 그 70년이라는 세월은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던 세월이었어요. 그러나 70년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이르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켜 주시잖아요. 43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도 길어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잖아요. 그러므로 아무리 오랜 세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괜찮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만 한가지,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만큼은 반드시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아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지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날 것이요,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b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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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7. 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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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24편은 표제어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요. 동시에 시편 24편의 지리적 배경은 예루살렘입니다. 본문 안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 ‘거룩한 곳’ 등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표현이 시편 24편에는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은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대해 노래한 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거든요. 

예루살렘은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가나안 민족이었던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다윗이 등장하기까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은 가나안의 한 중앙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았을 뿐 차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단순한데요. 예루살렘 성이 산 높은 곳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누구입니까? 어린 소년 시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향해 당당히 달려가 큰 승리를 이끌었던 사람이지요. 그는 이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도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다윗에게 예루살렘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성읍이었지요. 


여호와께서 그 터를 건설하셨도다

오늘 본문 시편 24편에서 다윗은 예루살렘 성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1절)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모든 것의 주인이시요,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들의 주인이십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주인이 여부스 족속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명히 믿고 확신했습니다. 저 예루살렘 성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도성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예루살렘의 주인이 다윗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노래하는 믿음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점령한 이 예루살렘 성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2절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2절) 

여기서 ‘그 터’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당연히 예루살렘의 터, 예루살렘의 기초를 말합니다. 그런데 2절이 묘사하는 내용은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다르지 않으세요? 예루살렘의 터, 곧 예루살렘 성의 기초를 하나님은 바다 위에 세우고 강들 위에 건설하셨다고 말씀하네요. 바다의 물결은 시시각각 변하잖아요. 강물도 쉼 없이 흘러가지요. 어떻게 파도치는 바닷물 위에 튼실한 건물을 지을 수 있으며,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든든한 성벽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다윗이 체험했고, 그리하여 다윗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도성으로 삼았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도성이 된 이후에도 예루살렘을 뒤흔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마치 바다의 풍랑이 몰아치는 것처럼, 마치 강물의 물결이 굽이쳐 흐르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기초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수없이 몰려왔겠지요. 그러나 다윗이 체험하고 다윗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에 넘실거리는 바닷물에서도 든든하고, 소용돌이치는 강물 위에서도 튼튼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의 4차 대유행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사회적거리두기의 최고 단계인 4단계가 적용됩니다. 거리두기 4단계에서는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임이 온라인으로 전환하게 되어 있고, 우리 교회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 이와 같은 지침을 따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일5부예배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있지만, 당장 다음 주에는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몇 주나 온라인 예배가 지속될지도 알 수 없고, 또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 우리의 마음이 더욱 답답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루살렘 성에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이 몰려왔지만 다윗의 마음에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소유이니 그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굳건하게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에게 그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다 위에서도, 강물 위에서도 예루살렘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이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의 교회를 든든한 기초와 토대 위에 세우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상황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비록 무수한 광풍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니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우리 예배를 든든히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든든히 지켜 주십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루살렘에 바닷물이 흘러오고, 예루살렘에 강물의 위협이 몰려올 때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는 따로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3절) 

여기에서 여호와의 산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곳도 당연히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파도 위에서도, 강물의 물결 위에서도 예루살렘 성을 든든히 지켜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의 위협이 극심한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교회의 터를 튼튼하게 건설하십니다. 제 아무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며 우리의 삶과 우리의 예배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의 예배를 다시금 새롭게 회복하실 것입니다. 비록 모든 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할지라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실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다른 말로 바꾸어 볼까요? 나는 과연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를 사람이 맞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맞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시편 24편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도 제시하네요. 4절입니다. 첫째로, “손이 깨끗하며” 손으로 행하는 행동이 깨끗해야 합니다. 둘째로 “마음이 청결하며”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나의 마음이 정결한 사람이 거룩한 산에 올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요. 셋째로,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구약성경에서 ‘허탄한 것’은 주로 우상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사람, 곧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로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언어로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한 구절이 본문 6절입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6절) 

누가 거룩한 성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할 사람입니까? 누가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말로,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야곱이라는 이름과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창세기를 읽다 보면 야곱과 하나님의 얼굴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나시나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얻는 가족과 큰 재산을 거느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형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고향 땅에서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얍복 나루를 건너기 직전 야곱은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지요.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줄 수 없다’고 말하며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며 기도했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은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구나’라고 말하며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사람이며,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예배할 사람입니까?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6)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당장 내일부터 모든 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든든히 지켜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란과 고통의 소용돌이가 찾아와도 주님의 교회이기에 하나님께서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것입니다. 물론 극심한 코로나의 확산으로 교회가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개방하지 못하고 모든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당연히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교회의 모든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동안 우리가 늘 관심을 가지고 주의할 것이 있으니 지금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지 나 자신의 마음을 늘 돌아보십시오. 그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지켜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손을 늘 조심하여 우리의 행동을 늘 깨끗이 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닌 다른 허탄한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늘 주의하고, 그 무엇보다 내 곁에 있는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 항상 노력하십시오. 현장에서 함께 예배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만 예배에 참여하시는 동안 우리 모두가 더욱 힘쓰고 더욱 애쓰고 더욱 노력해야 할 것, 그것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간구하는 일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도성을 삼았지요.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 성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했어요. 마치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구했던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 간절한 마음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졌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다윗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어요. 마침내 예루살렘 성안에 법궤가 들어오게 되었고, 다윗은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7절) 

네, 그렇습니다. 시편 24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실 때 불렀던 찬양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9절) 

본문 7절과 9절에 등장하는 문은 예루살렘 성의 문이기도 하고, 법궤를 모셔야 하는 곳인 성소의 문을 말합니다. 모세 시대에 만들었던 성막에는 법궤를 모시는 장소인 지성소까지 모두 세 개의 문이 있었어요. 성막에 들어가는 문, 그리고 성막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 마지막으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이전에는 예루살렘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의 문도, 성소의 문도, 지성소의 문도 쉽게 열리거나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본문 7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니 그 앞에서 모든 문이 열립니다. 예루살렘 성의 문이 열리고, 성막의 문이 열리며, 성소의 문과 마침내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지금 다윗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지성소 안에 법궤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노래합니까? 법궤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영광의 왕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안에 들어가고 계시는 현장을 다윗은 분명히 체험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감격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8절) 

법궤가 들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임하는 현장을 체험하면서 다윗의 마음에는 예루살렘 성을 점령할 때부터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오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여호수아의 시대로부터 오랜 세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 예루살렘 성을 뒤흔드는 거센 바다의 파도와 휘몰아치는 강물 같은 위협 속에서도 그 기초를 든든히 붙잡아주셨던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마음을 자신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 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문이 열리고 성막의 문이 올라가며 성서와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려 법궤와 함께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예루살렘을 뒤덮는 그 영광의 장면을 바라보며 다윗은 벅차오른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 찬양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10절) 

다윗의 입술이 영광의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였을 그때, 성막의 문이 열리고 성소의 문이 열리고 지성소의 문이 열리듯 다윗의 마음도 활짝 열렸겠지요. 법궤가 성막을 지나고 성소를 지나며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놓이듯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활짝 열린 다윗의 마음에 들어가 그의 마음에 좌정하셨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예루살렘을 뒤덮듯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득 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다윗 한 사람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앞에 거대한 풍랑이 이는 바다가 놓여있고, 비록 지금은 무서운 물결이 휘몰아치는 강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지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면 마침내 하나님은 우리 앞에 모든 문이 열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우리의 마음에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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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5. 1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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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판된 책 가운데 <가짜 행복 권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비교할 때 훨씬 불행해졌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행복은 감소하는 현상, 이것을 ‘풍요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비롯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풍요의 역설을 경험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니 오히려 행복 열풍이 불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행복 열풍은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의 길은 숨기고 거짓 행복만을 추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입니다. 소확행은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생활이 고달프니 점심시간에 고급 커피 한잔을 즐기며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일주일간 힘겨운 삶을 살았으니 주말에는 잠시라도 여행을 떠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경험하라고 말입니다. You Only Live Once. 이른바 ‘욜로’ 역시 동일하게 권면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 지금 당장 원하는 그것을 체험하라고,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고단한 삶을 살면서 커피 한잔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과제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원하는 그것을 체험하는 것도 때로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소확행과 욜로로 대표되는 행복 열풍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의 행복을 그저 한 순간의 즐거운 감정으로 축소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단지 그 순간만의 좋은 느낌을 행복으로 여기며 나의 삶을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고, 참된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참된 행복의 길

시편의 문을 여는 시편 1편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시편 1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복 있는 사람은.” 곧 참으로 복된 인생, 참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노래하는 행복한 인생은 소확행이나 욜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 우리의 인생 자체를 복된 인생, 행복한 삶으로 가꾸어 가도록 초대하지요. 

자, 시편 1편이 묘사하는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인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행복한 사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측면에서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 본문 1절에 등장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편 1절)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고.’ 곧 행복한 삶을 위해 피해야 할 것이 세번에 걸쳐서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서 지금 당장 재물을 얻을 수 있겠지요. 부정한 방법으로 지금 당장 지위를 얻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 지금 당장 칭찬과 평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재물과 지위와 평판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거짓 행복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을 보면 지혜라는 추상명사가 마치 인간처럼 말을 하며 독자들을 지혜로운 길로 초청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지혜의 의인화’라고 불러요. 마찬가지로 잠언에는 미련이라는 추상명사가 마치 인간처럼 말을 하며 독자들을 미련한 길로 이끄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 미련이라는 추상명사가 의인화되어 나타날 때 한글성경은‘미련한 여인’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미련한 여인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도둑질 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언 9장 17절) 문장으로 써 놓고, 눈을 읽으면 이것은 거짓 행복을 설파하는 것이라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요.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 행복을 따라가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 하나님은 시편 1편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복된 인생, 참된 행복의 삶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와 악을 멀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의롭지 못한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2절은 참된 행복을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편 2절)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비결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요,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보면묵상하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또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격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큰 위기의 순간을 만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핵심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 보지요.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장 36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누가복음의 이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의무감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조금씩 넓히려고 노력합니다. 비록 이 세상은 자신의 것을 움켜잡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즐거워하여 매일 조금씩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면 나의 삶에는 거짓 행복이 아닌 참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하지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아니, 나는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데살로니가전서의 이 말씀을 즐거워한다면, 그래서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그날의 감사한 일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나아가 내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면, 그렇게 조금씩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면 나의 인생이 복된 삶, 참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복된 인생, 행복의 인생으로 변화되는 비결은 말씀을 즐거워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닙니다. 단지 종교생활로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말씀이 그저 좋아지고 말씀대로 그저 살고 싶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 말씀이 진리로 믿어지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즐겁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말씀을 즐거워하니, 그의 삶은 매일 조금씩 변하여 이 사회가 권하는 거짓 행복이 아닌 성경이 약속하는 참된 행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신명기 10장 12절)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 10장 13절)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요, 나아가 그 말씀을 살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훼방꾼

사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설교를 듣기 전에도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것이 참 힘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오늘 본문인 시편 1편에서 발견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 곧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누가 있습니까? 악인이 있고, 죄인이 있고, 오만한 자가 있습니다. 여기에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할 때, 행인 1 2 3이 무대에 오르지만 그들이 각각 누구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 주위에 악인도 있고 죄인도 있고 오만한 자도 있어 복 있는 사람을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절에 등장하는 ‘복 있는 사람’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한 명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죄인과 악인과 오만한 자는 모두 복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며 복된 길을 가려는 한 사람 주위에 죄인과 악인과 오만한 자의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에서 참된 행복을 따라가려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나는 혼자인데, 나의 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은 그 숫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며 복된 길을 걸어가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훼방꾼이 존재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어떠한 훼방꾼들이 있으세요? 본문에 등장하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대표되는 훼방꾼들은 오늘 우리에게는 특정한 인물일 수도 있고, 지금 내가 처해있는 특별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죄와 악을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따라 참된 행복을 추구하려 할 때 반드시 우리 주변에는 나의 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이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된 행복의 길을 따라가려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장면도 본문에는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한명이요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5절과 6절에 이르면 복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른바 ‘의인’들인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으로 등장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의인들의 모임’이 등장하지요. 처음에는 나 혼자 외롭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나의 곁에는 의인의 모임, 의인의 회중, 곧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있어 나의 걸음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거짓 행복을 권하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곁에는 함께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기준

시편 1편의 주제는 복 있는 사람, 곧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을 훼방하는 악인들도 등장하지요. 그리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들, 곧 의인과 그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의 결말이 얼마나 다른지도 보여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편 3절)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1편 4절) 

이 구절에서 악인들, 곧 죄와 불의를 행하면서까지 지금 당장의 거짓 행복을 쫓는 사람들은 무엇에 비유합니까? ‘바람에 날리는 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가지 이미지, 곧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 안에는 모두 시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그다음 단어입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여기에 시간의 개념이 담겨 있지요?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사시사철 행복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가운데 참된 행복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바로 가을 한철입니다. 4절도 보십시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겨’ 혹은 ‘쭉정이’는 농부가 키질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농부는 언제 키질을 할까요? 당연히 추수 때입니다. 추수하여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섞여있는 것을 키질합니다. 그러면 가벼운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 곡식과 분리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의 유쾌한 감정만을 행복으로 여기고 그러한 거짓 행복을 좇는 사람들의 삶이 불행으로 판가름 나는 것도 봄여름가울겨울 가운데 추수의 때인 가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습니다. 그것은 참된 행복과 거짓 행복을 명백히 구분하는 기준이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참된 행복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쫓으며 추구하는 것이 거짓 행복인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설파하는 거짓 행복은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이 아닌 불행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참된 행복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욱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오늘이 청년주일이지요?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내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불어넣어주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워지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청년들조차 자신의 인생 자체를 보다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에 탐닉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우리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통감하며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풍요의 역설’이 지배하는 시대, 그리하여 행복의 열풍이 불어오고 있지만 그것은 잠깐의 만족만 제공하는 거짓 행복이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먼저 이 세상이 설파하는 거짓 행복의 길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가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외로울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행복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 곁에는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으니 다시 한번 힘을 내어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거짓 행복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행이 되지만 말씀을 즐거워하는 인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의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게 될 것이니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행복을 따라가는 여러분의 인생도, 그리고 여러분의 뒤를 이어 말씀을 즐거워하게 될 이 땅의 청년들의 인생도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서 더욱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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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서론(1편-2편) “복 있는 사람”

구약성경 시편에는 150개의 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그렇다 보니 시편을 묵상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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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2. 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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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사상가이기도 했던 스캇 펙이 저술한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첫 장에서 스캇 펙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을 ‘고통의 감정을 회피하려는 성향’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삶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의 문제를 질질 끌고 외면하면서 그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문제를 정면으로 직면하기보다 그 문제를 그저 회피하는 것인데, 이러한 자세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이른바 탄식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탄식시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편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25편도 대표적인 탄식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25편에는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극심한 고통과 아픔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시편 25편 16-19절) 

오늘 본문 시편 25편 외에도 시편 전체의 약 1/3 이상이 탄식시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노래가 모여 있는 시편의 약 1/3 이상이 탄식시라니, 인간의 삶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했던 스캇 펙의 이야기가 결코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 너 나할 것 없이,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 없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이라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그 고통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그 아픔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신앙인의 자세이겠지요. 시편의 탄식시를 읽고 묵상하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유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아픔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신앙인의 지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시편 25편을 통해 어떠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라

나의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 시편 25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 그 첫 번째는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라”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편 25편 1절) 

우리의 삶에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러한 고통이 내 삶에 엄습하는가?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에게 찾아온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더듬어 찾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의 삶에 찾아온 고통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제 아무리 던져보아도 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욥에게 찾아온 고난이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사단은 왜 하필 욥에게 그 극심한 고난을 내리도록 계략을 썼던 것일까요?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수없이 질문했지만,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왜”라는 질문에는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왜 나에게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질문하는 것은 신앙인의 지혜가 아닙니다. 

시편 25편은 자신의 삶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 아픔의 원인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아픔과 그 고통을 가지고 주님을 우러러보았지요. 그리고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 채 하나님께 자신의 아픔을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2)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 삶에 찾아온 아픔과 고통을 회피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다는 것은 아프고 괴로운 우리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짊어진 채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뢰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2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나를 부끄럽게 않게 하시고” 지금 부끄러움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잖아요.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지금 당장 내가 패배하고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개가를 부를 것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요. 그 모든 괴로움을 다 짊어지고 있어요. 그 모든 아픔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모든 아픔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모든 아픔을 주님께 아뢰라, 그의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찾아왔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편 25편 3절)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2절과 3절은 그 분위기가 상당히 다릅니다. 2절에서는 지금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는 그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 것 같아요.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여주시고, 오히려 까닭 없이 속이는 자 곧 악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죠. 이러한 차이, 곧 2절에서는 지금 당장 큰일 날 것처럼 탄식하며 기도하지만 그다음 구절인 3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은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시편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탄식시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셔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2000년의 교회사에서 예배를 드릴 때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관용어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Sursum Corda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음을 들어 올리다’가 됩니다. 이 말은 우리 예배와 우리 기도의 핵심을 묘사해주는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 시편 25편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신앙의 지혜를 배우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시간만큼이라도, Sursum Corda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님을 향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시간만큼이라도 여러분의 영혼으로 주님을 우러러보십시오. 극심한 고난이 찾아온다 하더라고 Sursum Corda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그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주시기 바랍니다. 


시선을 나 자신에게 두라

나의 삶에 큰 고통과 아픔이 찾아왔을 때, 시편 25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 그 두 번째는 “시선을 자신에게 두라”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시편 25편 6절) 

여기에 갑자기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언급되지요. 시편 25편이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하는 이유는 이제 새로운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편 25편 7절) 

시편 25편이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지속되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던 시편 25편은 이제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뿌리 깊은 죄성을 발견하였지요. 신앙인으로 살아갔지만, 그래서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지만, 내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나의 삶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도 아니고, 나를 괴롭히는 대적자들도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 똬리를 치고 있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고통이라는 계기를 통해 철저히 깨달았던 것이죠. 그리하여 시편 25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하며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자신의 죄악을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오셨지요.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여 ‘내 영혼이 주님을 우러러보나이다’ 기도하며 간구하셨지요. 그리하여 그 모든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을 받으며 지금까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참으로 잘하셨고,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나 대적자들이 아니요, 바로 내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죄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참된 지혜입니다. 

시편 25편은 시선을 나 자신에게 돌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편 25편 8절) 

하나님께서 그분의 도로 누구를 교훈하십니까? 죄인인 우리를 교훈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시선을 나 자신에게 향하여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신약성경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요한일서 1장 9-10절) 

고난과 고통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인의 모습만 있다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참된 신앙인이요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요한일서에서 말씀하는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말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지혜만이 아니라 나의 시선을 나 자신에게 돌려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지혜까지 배운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요한 일서가 말씀하는 것처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나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통과 아픔이 찾아오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여러분의 시선을 여러분 자신에게 돌려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십시오. 사순절의 첫 번째 주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죄인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성숙

나의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 시편 25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시선을 나 자신에게 두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지혜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정체성이 각각 담겨 있습니다. 곧,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이 두 가지 정체성은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시편 25편이라는 하나의 시편 안에 주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도 있고 동시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죄인의 모습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죄인의 모습은 오늘 우리 안에도 어색하지만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 주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인의 모습도,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도 영락없이 우리 모두의 정체성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인의 모습과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의 모습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에 큰 고통과 아픔이 계속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한 순간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게 되어 나의 죄악이 하나님께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깨달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시니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성숙이죠. 

스캇 펙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을 ‘고통을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찾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인데, 그것을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더욱 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강조하기를, 너 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아픔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대처할 수만 있다면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목을 한 문장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오로지 문제(고통)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아직도 가야 할 길, p. 20-21)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찾아오셨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으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도 말고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아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여러분 자신에게로 돌리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거대한 아픔과 고통이 여러분의 삶을 에워쌀지라도 날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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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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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0편은 1절부터 기쁨과 감사가 가득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절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기 2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은 언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배 시간이지요. 시편 100편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4절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2절이 ‘나아간다’는 동사를 썼다면, 4절은 ‘들어간다’는 동사를 사용하지요. 하나님의 문,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갈 때 어떠한 마음 자세로 들어간다는 것입니까?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문에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는 여러분의 마음이 날마다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는 여러분은 감사함으로 교회의 문을 여시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시편 100편이 이야기하는 이 기쁨의 찬송이 바로 우리의 찬양이고 우리의 감사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시편 100편을 단지 예배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국한시켜서 적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참으로 많은 곳을 방문하지요. 예배를 마치면 가정으로 돌아가시고, 직장을 방문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 참 많은 곳을 방문합니다. 그때마다 감사함으로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질까요? 오늘 하루 여러분이 어디를 방문하시든지, 어느 문을 여시든지 감사함으로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문을 열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 우리가 언제나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3절에 등장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절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지요.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과 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경의 하나님,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3절은 계속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입니다. 시편 100편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하면서 남성인지 여성인지, 성인인지 어린아이인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지 낮은 지, 교회에서의 직분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만 언급합니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이 형통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언제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시편 100편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있지만, 시편 100편이 제시하는 찬양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 하나의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시편 100편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23편도 동일한 마음으로 노래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더라도 우리는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는 안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을 위협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하여 물 위로 첫걸음을 떼었던 베드로였지만, 그가 풍랑과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몸은 물결 안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지팡이와 막대기가 인도하여주셨던 예수님은 직접 그의 손을 내밀어 끌어올려주시잖아요. 시편 100편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풍랑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시편 100편은 우리가 건너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시편 100편의 마지막 5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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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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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2편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상상하지 않는 하나의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신들의 모임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모임의 좌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모임에서 하나님은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 곧 재판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편 82편을 묵상할 때 가정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1절에 등장하는 “신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과연 다른 신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표적인 것 네 가지만 먼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가능성은 이방의 신들(the gods of heathendom)입니다. 세상에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이방 민족이 섬기는 신들이라는 설명이지요. 
두번째 가능성은 영적 권세들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시에서 세상의 권세와 주관자들을 언급하지요. 바로 그들의 존재라는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세번째 가능성은 인간의 통치자들입니다. 각 지역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인간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으로 시편 82편을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마지막 네번째 가능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들의 불의를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입니다. 

만일 누군가 저에게 그 네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해석이 정확합니까? 라고 질문하신다면, 저는 아직 그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어떠한 해석이 정확하다는 확신이 저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82편과 관련하여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신들’이 영적인 존재이든, 특정한 인간들이든 상관 없이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정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2절에 등장하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이 세상의 신들이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든, 인간 통치자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상관 없이 이 세상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단체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불의를 행하고 자신들의 욕심만을 챙기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많습니까? 이 세상의 불의가 시작된 근원을 세상의 신들이라고 지칭하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지칭을 하든, 인간 지도자들이라고 지칭을 하든, 아니면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이라고 지적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정의보다 불의가 더욱 창궐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이 세상이 흑암 중에 왕래하니, 그 결과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립니다.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은 모든 터전이 흔들리고 있어요. 불의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니 우리의 삶도 늘 요동치며 평화, 샬롬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편 82편 1절부터 7절은 불의한 신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재판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이 마치자 마지막 8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짖는 탄식의 기도 소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이 세상은 불의합니다. 이 세상은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경쟁사회가 되어,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불의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나타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82편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 몇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두가 가지만 나누어보도록 하죠. 먼저,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시편 82편에 등장하는 신들은 그것이 이방의 신이든, 세상의 권세와 주관자들이든, 인간 통치자들이든 평범한 백성들이든 상관 없이 불의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을 행하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바로 그때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게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는데, 왜 나에게 억울한 일이 많이 찾아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불의하다고 하나님께 불의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82편을 보면 하나님은 불의한 신들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어요. 

또 한가지,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호소하십시오. 세상의 모든 신들은 하나같이 불의합니다. 시편 82편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의 신들은 단 한명도 없어요. 그러므로 내가 이 사람에게 불의를 당했다고 저 사람에게 가면, 그 사람에게 또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 8절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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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