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2020. 5. 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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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81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제를 벌이면서 함께 불렀던 찬양입니다. 본문 3절이 그 정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요.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3절) 

3절에는 보름이 등장하고, 명절이 등장합니다. 시편 81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9월의 보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해의 곡식을 추수하는 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시편 81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를 맞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시편 81편은 그들이 함께 불렀던 찬양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81편의 독특한 점은 6절부터 마지막 16절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인데, 그 내용의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81편을 묵상할 때, 6절부터 16절까지 이르는 긴 구절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그 가운데 6절부터 10절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6절부터 10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곧 우리 시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자,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그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사건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분명한 구원의 사건이 있었지요.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어요. 

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그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일입니다.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7b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시험이 없는 것이 좋고, 아무런 역경도 만나지 않는 것이 복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신 것만으로는 그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씩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그 세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신에게 절하지 말지니라 (9절) 

시편 81편 9절은 십계명의 제 일 계명입니다. 시편 81편은 십계명 전부를 기록하지는 않고 있지만, 제 일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신 사건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신 사건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은 은혜입니다. 율법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에게 참으로 행복한 길을 알려주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주신 것만이 아니라, 때에 맞춰 시험을 주시고, 율법의 명령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더욱 깊은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이 오늘 본문 10절에 묘사되어 있지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입을 크게 열라” 여기서 입을 크게 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금 당장의 기도응답, 하나님께서 주시는 눈에 보이는 축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눈 앞에 커다란 장애물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시험과 때로는 버겁게만 느껴지는 율법의 명령까지도 입을 크게 열고 마음을 크게 넓혀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세. 바로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입과 마음과 영혼 가운데 풍성한 하늘의 은총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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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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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왕이 남 유다를 다스리던 때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니 이미 유다의 다른 성들은 모두 앗수르 군대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만 하여도 예루살렘 성은 머지않아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새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오죽하면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가나안 땅 한 중심에 위치하였던 예루살렘은 이후 다윗이라는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점령하지 못했겠습니까? 그토록 예루살렘 성은 군대의 힘만을 가지고는 점령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건기에 해당하는 4월부터 10월까지는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린다고 해요.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랍사게 장군은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 샐 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명에 꼭 필요한 식수를 얻기 위해 기혼 샘까지 나올 수 없으니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이 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안으로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 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튼튼한 성벽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따라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고,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과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샘물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하니하리로다

앗수르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에워싸기만 하면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혼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에 머무르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생존하였던 유대인들은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들의 믿음의 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1절)

오늘 본문 시편 46편 1절의 말씀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46편의 역사적인 배경이 히스기야 시대의 바로 그 사건이라는 데 많은 성서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자,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심장 깊은 곳에 새영의 샘이 솟아나게 하시니 온 땅을 뒤덮을 듯한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 명이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에워싸더라도 그들의 생명은 안전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더욱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부터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절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땅이 움직입니다. 지진이지요. 산이 흔들려 바닷물에 빠집니다. 거대한 홍수입니다. 바닷물이 솟아나 뛰놀며 산을 덮칩니다. 쓰나미 현상이지요. 그러므로 2절과 3절이 묘사하는 위기의 장면은 문자 그대로 자연재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거대한 재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18만 5천 명이라는 쓰나미와 같은 적군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해오는 경우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은혜의 샘을 마셨던 유대인들은 3절 뒷부분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교회 역사상 시편 46편을 무척 사랑했던 사람으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꼽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앞장서면서 지진과 같은, 홍수와 같은, 쓰나미와 같은 위험과 시험이 찾아와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그의 동역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필립, 우리가 시편 46편을 노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습관적으로 시편 46편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시편 46편을 사랑하며 노래하였던 마틴 루터는 이 시편에 근거하여 지금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을 작곡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찬송가 585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온 땅을 뒤덮는 쓰나미와 같은 앗수르의 군대를 바라보았던 히스기야의 마음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강력한 공권력과 무력을 휘두르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위협 속에서 마틴 루터의 마음에도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이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지진과 홍수와 쓰나미와 같은 위험을 당할 때 그들의 마음에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에 엄습해 올 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입술을 열어 지금도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난 큰 도움이시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은 큰 환난 가운데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적군의 쓰나미, 두려움의 쓰나미, 재앙의 쓰나미가 우리를 찾아와도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 우리의 심령에 고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위기의 순간도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 피난처 되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과연 위기의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46편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명령, 특별히 위기의 순간에 봉착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딱 하나가 등장합니다. 시편 46편은 첫 구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찬양이지만, 유일하게 딱 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구절 안에 위기를 맞이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찾아보며 오늘 본문 10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르시기를” 네,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10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네, 이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단 한 가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말하지도 말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군대식 명령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차렷!’ 정도가 됩니다.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라고요? 그저 가만히 있어서, 그저 차려 자세로, 그저 열중쉬어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되시는 바로 그 장면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 등장하는 성경의 인물이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기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성숙도를 생각한다면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혹은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혹은 역사적 배경을 따라 ‘히스기야의 하나님’ 혹은 ‘여호사밧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시편 46편은 굳이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선언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기록된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 야곱은 젊은 시절 자신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창세기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 도 없이”(창 31:40) 일했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렇게 악착같이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최선을 다하여 아들을 낳고 재물을 모아보았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들에서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자신의 모든 재물은 애굽에 임한 7년 흉년 가운데 채 1~2년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젊은 시절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반전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렇게 지칠 줄 몰랐던 야곱이,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노년이 되어 이제는 자신의 두 팔에 다 빠져버리자, 그는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그저 차려, 열중쉬어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두 팔에 힘이 모두 빠져버린 야곱, 그리하여 이제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에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고, 그것도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에 힘이 모두 빠져 그저 열중 쉬어 자세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자 야곱의 자손이 애굽에서 번성하는 그 풍성한 은혜가 그의 삶 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은 시편 46편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히스기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성벽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손으로 무기를 들고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나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절정, 곧 신앙의 하이라이트는 달려가는 것도 아니요, 힘껏 소리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 그저 가만히 있어, 그저 차려 자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잠잠히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 위기가 찾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뛰어넘는 쓰나미와 같은 문제를 만나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여러분의 손을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 그저 차려 자세로 하나님을 주목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켜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

히스기야 시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생명의 물줄기를 통해 예루살렘 백성들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군대 18만 5천 명을 하룻밤에 멸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주셨고, 유대인들은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장막절의 마지막 날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 되면 기혼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 연못에 모인 물을 금항아리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선두로 하여 물이 가득 찬 금항아리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대제사장을 선두로 한 그 대열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면 악기 소기가 들려오면서 시편을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렇게 시작된 시편의 찬양이 모두 마치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성들은 일제히 소리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X3) 이렇게 세 번 큰 소리로 외칠 때 대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져온 물 항아리를 성전 제단에 쏟아부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시대 장막절의 마지막 날 있었던 의식입니다.  

이와 같은 장막절 행사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오래전 히스기야 시대에 임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매년 동일하게 진행하는 장막절 행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생각이 교차하지 않았을까요? 앗수르의 군대는 오래전 물러갔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은 로마라는 새로운 이방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의 물을 성전 제단에 쏟아붓는 행사에 참여하는 유대인의 마음에는 어제의 은혜가 아닌 오늘의 은혜를 향한 갈망. 어제의 구원이 아닌 오늘의 구원을 향한 갈망. 어제의 역사가 아닌 지금도 자신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치지는 오늘의 역사에 대한 갈망. 그것이 유대인의 마음에 가득했겠지요. 

그렇게 또 한 번의 장막절 행사가 그저 습관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 한 중앙에 일어서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7-38)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한 줄기 생명의 강줄기를 흘려보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과거에 체험하였지만 어느덧 그 모든 경험은 아득한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아 가슴 답답해하는 것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처한 현실은 아닙니까? 우리는 어제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을 갈망하며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 생명의 강줄기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기에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하고, 다시금 낙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신다고 믿는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분주한 손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반드시 흘러넘칠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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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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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문을 여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인생을 비교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시편 36편 역시 복이 있는 인생과 악인의 인생을 뚜렷이 구별하여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인생의 길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악인의 길이요, 또 다른 하나는 의인의 길 – 곧 복 있는 사람의 길입니다. 

먼저 악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1-2절)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악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악인의 특징은 ‘그의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악인의 길을 걸어가는 그 첫걸음은 구체적인 악의 행동이나 구체적인 악한 언어가 아니라 그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 바로 그것이 악인의 길을 걷는 첫걸음인 것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자신이 아무리 악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것을 드러내어 심판을 할 주체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2절입니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 자신의 악한 행위가 마지막까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그 오만한 마음이 악인의 특징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누구도 처음부터 커다란 죄악과 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작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인식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마음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행동과 나의 말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마음이 사라질 때 우리는 악인의 길로 한 발짝 내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시편 36편은 악인의 특징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인의 모습을 그려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복있는 사람의 길과 그렇지 못한 악인의 길을 비교하고 있지만, 악인의 특징을 설명한 뒤에 의인의 특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의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대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야기하지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5절) 

말씀드런 것처럼, 오늘 본문은 악인과 비교되는 의인에 대해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묘사하고 있지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앞에서 악인의 특징으로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지 않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언급했지요. 이제 의인들 – 곧 복이 있는 사람들 – 의 특징은 그 자신의 선한 행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로운 사람들, 곧 복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모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가득 넘친다는 사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쳐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의인의 발걸음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의인의 참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7절) 

의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보배로운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9절)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있어요. 의인은, 복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의 원천을 찾지 않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묘사하는 의인, 성경이 인정하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가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자신의 삶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선행이나 자기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원천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참된 안식을 찾으며, 주님의 빛 가운데서 인생의 참된 길을 찾는 사람. 바로 그들이 성경이 인정하는 복이 있는 의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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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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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가장 큰 역설이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피조물 된 인간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진심 어린 친구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따라가는 것이 본인에게 큰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까이 있는 동료의 진심 어린 충고를 잘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스승이나 어른의 진심 어린 교훈을 잘 듣고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책이 우리에게 두 권이 주어졌는데 그 첫 번째 책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책, 곧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 지,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6가지의 특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는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7-9절) 

하나님은 율법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또 하나의 책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자연 만물’이라는 책입니다. 자연 만물을 잘 살펴보고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는 일을 나타내는도다 (1절)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두 가지 통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는 율법이 기록되어 있는 율법책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자연 만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장로교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언제나 ‘성경,’ ‘성경,’ ‘성경’을 강조하다보니 자연 만물을 깊이 관찰하고 묵상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통로가 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다른 동물은 이 땅만을 바라보게 창조되어 있지만, 인간만이 삶을 살아가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그저 내 앞에 있는 재물과 권력과 사람 관계 속에 파묻고 살아간다면, 그래서 우리의 머리 위에 펼쳐지는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계속해서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바쁜 일상 중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늘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바로 그때 내가 직면한 문제들이 작아지고 우리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새롭게 깨달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자연 만물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율법책, 곧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에 시편 19편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1절)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자연 만물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지만,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상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시편 19편의 그 마지막절은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지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절) 

오늘도 자연 만물과 성경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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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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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마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습니다. 마차 안에서 인간이 켜놓은 등불을 누리던 부자는 그 조그마한 등불 때문에 결코 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별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빛도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여겼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의 급격한 발전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성적으로 밝혀 낼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유럽 지식인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곧, 과학이라는 등불과 이성이라는 등불이 오히려 온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자신이 마련해 놓은 조그마한 마차 안에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켜 놓은 등불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결코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차가운 밤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들여야 하고, 자신의 앞에 그 어떠한 등불도 비취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온 땅을 뒤덮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

시편 8편은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1절)

그러나 온 하늘과 온 땅을 뒤덮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여기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대조되고 있지요. 한편에는 대적, 원수, 보복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린 아이들, 젖먹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적, 원수, 보복자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인들을 말합니다. 반면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은 누군가의 돌봄이 없으면 생존할 수조차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합니다. 반면 원수들과 보복자로 대표되는 세상의 거인들의 입은 잠잠하게 하십니다. 

오늘의 시편이 다윗의 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하나님은 골리앗이라는 세상의 거인 앞에 서 있던 어린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았던 다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였던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그의 입을 막아버리셨던 것입니다. 

이후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며 그 시대의 거인들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모든 정치 권력과 모든 종교 권력과 모든 재력을 틀어지고 있었던 사람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인용하셨던 성경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 8편입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 (마 21:16)

그러므로 여러분,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의 지식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은 지하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은 볼 수 없고, 저 높이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사람들,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같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그리하여 치열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시편 8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3절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이 시편 8편을 노래하였을 때는 틀림없이 한 밤중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은 3절에 태양은 등장하지 않고, 그 대신 달과 별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절 마지막에 “내가 보오니”라고 되어 있으니 다윗은 분명 달과 별을 보기 위해 그의 눈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의 삶은 참으로 치열했지요. 그날도 하루 종이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어두운 밤이 되자 다윗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어린 시절 다윗이 목동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돌보는 양떼를 공격하였던 곰이나 늑대와 싸우느라 하루 종일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다윗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후 다윗이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인지도 모릅니다. 사울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이곳 저곳을 정체 없이 도망 다니던 어느 날, 사울의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또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다시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다윗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다시금 바라봅니다.”
혹 다윗의 노년 시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왕궁을 급하게 나와야 했던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왕궁 안에서 쉬지 못하고 다시금 군인들과 야영을 하면서 다윗이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바라봅니다.”

다윗은 이렇게 치열한 하루를 보낸 뒤,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고, 결국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에게 참으로 놀라운 깨달음을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은 치열하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날이 저문 뒤 비로소 자신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거죠? 자신은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치고 이제야 한숨을 돌리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저 자신의 코 앞에 펼쳐진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그때에도,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늘 생각하고 계셨으며, 하나님은 그를 늘 지켜보시며 보호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 다윗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기억하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지만, 우리가 삶의 한 복판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생각하시고, 그 위험한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모든 우주만물을 운영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리하여 온 하늘과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신 분이시지만 매 순간 여러분을 바라보시며 그저 전 세계의 76억 인구 가운데 한 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특별히 사랑하셔서, 특별히 보호하며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림

다윗은 치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고, 그 영광 가운데 자신을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이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자, 이제는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목표, 곧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오늘 본문 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표현, 나아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다’는 표현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특별히 바로 앞 절인 4절의 “사람이 무엇이기에”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노쉬)는 완전히 타락한 인간, 철저하게 범죄한 인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4절과 5절을 조합하면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치열한 삶을 살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혹, 여러분 가운데 예전에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예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느덧 생활이 바빠 너무도 많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다시금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습이 우리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도 주셨거든요. 하나님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다스리는 사명’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실제로 시편 8편의 말씀과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던 다윗을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장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거나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와 같고,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는 세상의 강력한 세력 앞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8편이 말하는 하나님의 비전,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꿈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매우 명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도 없고, 세상을 지배할 수도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신약성경이 이 말씀을 인용하는 구절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죠. 그리고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십니다.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할 때, 신약 성경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모든 만물이 복종하게 하셨다고 오늘의 본문 시편 8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며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힘과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의 거인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세상의 거인들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확신과 찬양

치열했던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을 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던 다윗은 시편 8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지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위기를 겪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때로는 슬픔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서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풍파가 제 아무리 거세게 몰려온다 하더라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요, 바로 그때 온 땅을 뒤엎는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시면서도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등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에 말을 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던 가련한 마부의 처지에 놓여 있는 분들도 계시죠?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부러워하지도 말고, 시샘하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눈을 들어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비록 오늘 하루 치열하고 피곤한 삶을 사셨을 지라도 여러분이 눈을 들어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요, 여러분이야 말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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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0. 5. 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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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생명의 원천인 맑은 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복이 있는 사람은 행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께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은 (1)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2)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3) 궁극적으로 모든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뿌리를 내렸다고 모든 일이 늘 형통하기만 할까요?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를 거부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성공할까요? 시편 2편이 묘사하는 것처럼 세상의 나라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의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모든 일이 다 형통한다는 사람은 이론이나 상상 속의 현실이 아닐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다시금 시편 1편을 살펴보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그 뿌리를 물 근원에 분명히 내리고 있지만 겉에서 보기에는 다른 나무들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차가운 한파가 몰아칠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 역시 그 자신의 몸으로 모진 바람과 추위를 받아내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의 햇살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비켜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추위와 더위를 모두 견디어낸 이후, “철을 따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구절을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그 즉시 형통하리로다’로 잘못 읽었나 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뿌리를 통해 생명의 근원과 맞닿아 있었기에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모두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서리를 맞고 때로는 뜨거운 햇빛을 견디어야 하지만 그 언제라도 푸르고 푸른 잎사귀를 간직하기에 결실의 때가 되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07229136

 

시편의 서론(1편-2편) “복 있는 사람”

구약성경 시편에는 150개의 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그렇다 보니 시편을 묵상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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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12. 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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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부를 노래 벌써 열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아홉번에 걸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함께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성도들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때로는 참회요, 때로는 기도이며, 때로는 서로를 향한 격려와 축복이요, 때로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노래를 주고받으며 걸어가다보니 마침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다다르게 되었죠. 그곳에는 하나님을 찾아 올라온 사람들의 모임이 형성되었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산 위에 형성된 믿음의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편 133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며 참회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간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가 필요한 성도들에게는 격려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은 함께 감사하며 간증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때로는 더디고 덧없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함께 부르는 우리의 노래를 통하여 결국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해 주십니다.

 

시편 133편은 산 위에 형성된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두 가지 비유로 묘사합니다. 첫째는 제사장 아론에게 부은 기름이고, 둘째는 헐몬의 이슬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2-3a절)

 

시편 133편이 묘사하는 기름과 이슬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린다는 사실입니다.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서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내림 같도다.”

 

험한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성전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삶에 지쳐 서로를 격려하며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성전에 올라 마침내 믿음의 공동체와 마주하였을 때, 사실은 나만 올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도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그의 어깨까지 흘러내리듯, 헐몬의 이슬이 내려와 시온 산을 생기로 가득 뒤덮듯 하나님의 은혜가 위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머무릅니다. 함께 노래하는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3b절)

 

영생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한걸음씩 올라가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모임 안에 서로를 향한 기도와 간구, 격려와 축복 등 함께 부르는 노래가 더욱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손을 붙잡아주어 연약한 다리에 서로 힘을 더해주며 한 걸음씩 하나님을 향해 올라 갑시다. 그렇게 서로의 손과 손을 맞잡고 한 걸음씩 올라갈 때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은총, 곧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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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11.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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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편은 세 구절로 구성된 매우 짧은 시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는 참으로 깊고, 우리가 신앙의 여정에서 지속해서 추구해야 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설교가 찰스 스펄전(Spurgeon) 목사님은 시편 131편을 가리켜 읽기에는 매우 짧으나 배우기에는 매우 오래 걸리는 시라고 평가했습니다.[1]

 

시편 131편의 교훈은 하나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 비유란 젖을 뗀 아이입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젖을 떼 아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젖을 떼었다는 것입니다. 더는 엄마의 젖으로 생존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입으로 음식을 먹고 보다 딱딱한 재료를 씹어서 넘길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지요. 젖에 대한 비유는 히브리서에도 등장합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5:13-14)

 

그러므로 시편 131편에 등장하는 젖을 뗀 아이는 더는 젖먹이가 아닙니다. 그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장성하였고,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이요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젖먹이가 아닙니다. 젖을 뗀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단단한 것도 씻어 넘길 수 있는 영적 성숙을 경험한 사람들이요, 지각을 사용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31편에 등장하는 비유 젖 뗀 아이는 첫째로 젖을 떼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아직도 어린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131편은 젖 뗀 아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2)

 

젖을 떼었습니다. 그래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이제는 장성했다고 자랑함직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아이와 같아서, 젖을 뗀 아이가 여전히 어머니의 품을 좋아하고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품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 그리하여 영적으로 젖을 떼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이미 젖을 뗀 사람들이고 단단한 음식도 씹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각을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하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가 여전히 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것처럼, 신앙생활이 익숙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 쌓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품에 파고들어 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속적인 과제입니다. 그러니 스펄전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시편 131편은 읽기에는 짧지만, 그 교훈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아니 우리의 전 일생이 소요되어야 하지요.

 

그리하여 시편 1313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찬송가 543장의 후렴구는 이렇습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신앙의 경륜이 길어지고 늘어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젖을 뗀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넓으신 품을 사모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 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1] Michael Wilcock, The Message of Psalms 73-150 (Leicester: IVP, 2001),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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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3.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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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4편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그 안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이야기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지요. 바로 간증입니다. 간증에서는 물론 미래의 소망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의 대부분이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당한 환난과 위기를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는 지를 서술하지요. 그런 점에서 시편 124편의 내용은 우리 시대의 간증을 떠올리게 합니다.

 

간증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간증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증은 간증을 하는 사람이나 간증을 듣는 사람에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요 신앙의 공동체로서 함께 부를 노래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간증일 것입니다. 내가 직면한 삶의 위기와 위협을 고백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여 주셨는 지 서로 간증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 그것이 시편 124편을 함께 노래하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시편 124편은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1)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처한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2절부터 그 대답이 등장하는데, 시편 124편은 네 가지의 그림으로 자신의 위기를 묘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첫째로 우리는 산채로 삼겨졌을 것입니다(3). 둘째로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갔을 것입니다(4-5). 셋째로 대적의 이에 씹히게 되었을 것입니다(6). 마지막으로 사냥꾼의 올무에 걸리게 되었을 것입니다(7).[1]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면 사도 바울은 시편 124편의 질문을 이어받습니다. 시편 124편의 그 중요한 질문,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하였으랴?”를 정 반대로 바꾸어 다시 질문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1) 바울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32)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의 질문에 답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7)

 

그러고 보니 간증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지만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위기의 순간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하고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증에는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신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노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간증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간증은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우리 모두가 함께 노래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되지요. 2남선교회가 간증을 이야기하고 간증을 듣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만남이 세상사는 이야기들만 가득한 모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남선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던 이야기에 대한 간증의 소리가 끊임 없이 지속될 때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1] 네 가지 이미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Michael Wilcock, The Massage of Psalms 73-150 (England: Inter-Varsity Press, 2001), 229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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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8. 2. 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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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8편은 시편 전체에서 두번째로 긴 시편입니다. 시편 78편이 이렇게 길게 노래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나열하고 서술하는 것 자체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78편은 과거의 기억을 길게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를 통한 교훈을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시편 78편의 표제어가 아삽의 마스길인데, 마스길이라는 단어의 뜻은 교훈이지요. 그런 점에서 시편 78편은 역사를 통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았을 때 허송 세월하였음에 한탄하는 경우도 있지요. 지금도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편 78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라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과거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교훈을 얻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역사를 통한 교훈으로 말미암은 미래의 소망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78편이 역사를 통해 던져주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경고와 소망입니다.[1] 먼저 경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부족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였지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종 되었던 애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바라보건데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구원을 이처럼 누렸던 민족은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라는 그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했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목이 마르다고 먹을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였고 불평을 쏟아놓았지요. 시편 78편은 그 장면을 회상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라고 서술합니다(17).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을 주셨고 그들은 그곳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시편 78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갔도다”(57)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듯 그들의 행동은 바른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지나온 삶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 얻는 첫번째 교훈, 그것은 경고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도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깨달음이지요.

 

역사를 통한 교훈, 그 첫번째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소망이지요. 시편 78편 전체는 인간의 불순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두 가지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 전체를 읽어보면 마치 시소를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 또 다시 하나님의 구원, 그러나 인간의 배신.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신앙. 이 두 가지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 사건들의 부분만 바라보면 우리 인생의 결론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로 끝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을 전체적으로 그려본다면,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넉넉히 감싸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모자이크를 수놓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인생에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라는 조각을 놓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옆에 덧붙여져요. 이제는 바른 신앙의 모습만 붙여넣고 싶지만 그렇게 안되요. 그래서 또 다시 탐욕, 죄악, 미움, 시기, 교만 등 돌이켜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 조각을 나의 인생 여정에 계속해서 붙여넣고 있어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용서, 관용, 사랑, 은혜의 조각을 더하여 주시지요. 그 부분 부분만 바라본다면 과연 나의 죄악된 모습이 더 많은 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더 많은 지 알 수 없어요. 이 두 가지가 끊임 없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의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면 수많은 모자이크 조각은 우리의 인생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8:28)

 

여러분, 바쁜 일상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십시오. 그리하여 역사의 교훈을 얻으십시오. 나의 죄악된 본성을 깨달아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 위해 더욱 노력하십시오. 아울러, 우리의 인생을 최고의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Walter Brueggemann, William H. Bellinger, Jr., Psalm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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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