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신학적 교회론2020. 6. 17. 09:56
반응형
이 글은 2012년 버클리기독대학에서 행한 "제자훈련"에 대한 특강 원고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그들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과,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고 영적 성숙은 마지막 날까지 지속되는 끝이 없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회 현장에는 성도들의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지속적인 영적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사례 1 _ 윌로크릭교회 

2007년, 미국 윌로크릭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대한 자체 보고서인 Reveal을 출판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이들 중 25% 이상이 자신의 신앙이 정체 상태에 있으며 영적 성장에 있어 교회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영적 성장을 경험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영적 침체기를 겪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윌로크릭교회의 Reveal은 당시 한국 교회 안에서도 논쟁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온누리교회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윌로크릭교회의 ‘구도자 중심 예배’를 이른바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외에도, 한국 교회 역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광범위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윌로크릭교회 성도들의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가로막고 있었는가?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 학장인 필립 크레이톤(Philip Clayton) 박사는 윌로크릭이 내세웠던 ‘구도자’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몇 해전, 사람들은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의 하위 집단을 ‘구도자’(seekers)라는 용어로 정의 내리기 시작하였다. …(중략)… 그러나 이 용어에는 불합리한 점이 있는데, 곧 ‘구도자’(seekers)가 ‘소유자’(possessors)의 반대말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자’라는 용어는 그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열등한 사람인데 반하여, 교회 안에 있는 그 외의 사람들은 이미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도자’라는 개념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중구조를 교회 안에 형성하게 된다.”  필립 크레이톤의 비판에 따르면, 윌로크릭교회는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centered Worship)을 통해 새로운 신자를 확보하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영적 성숙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도 여전히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구도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만 것이다.  



사례 2 _ 사랑의교회 

‘제자 훈련’을 가장 중요한 목회 철학으로 여기는 사랑의교회는 어떠할까? 고(故)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이 지속적인 영적 성숙의 과정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내내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문제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도는 성장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현실의 목회 현장이 제자훈련에 대한 옥한흠 목사의 분명한 철학과 괴리된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옥한흠 목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의교회에서도 ‘나는 제자가 아직 아니예요. 훈련을 받지 못했거든요.’라고 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시각인가를 잘 알면서 목회자들 역시 비슷한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사람은 제자로 대접하고 어떤 사람은 무리의 한 사람처럼 대접한다. 자연히 한쪽에서는 무슨 특권층이나 되는 것처럼 우쭐거리게 되고 다른 쪽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살게 된다.”  윌로크릭교회가 ‘구도자’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구도자’와 구별되는 ‘소유자’로 여기도록 하는 오류를 범했다면,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의 과정(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수료한 사람들만 소그룹(다락방) 리더로 세우면서 제자훈련의 과정을 이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게 되었다. 나아가, 이미 제자훈련을 마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나아가야 할 목표나 비전을 제시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마치 장로 교회에서 장로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어 장로 장립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의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Missional Church)를 만들라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도들의 영적 훈련을 자극해야 한다. 새신자는 물론이요, 이미 다양한 성경공부를 이수한 사람들, 이미 교회 안에 중요한 사역자로 봉사하는 사람들, 이미 장로 혹은 권사라는 교회의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금 훈련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선교하는 교회’(Missional Church)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장로라는 직분, 혹은 소그룹 인도자(ex. 구역장)가 평신도들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자리에 다다른 성도들은 더 이상 나아갈 목표를 상실한다. 그러나, 교회가 중직자를 선교사로 파송할 수 있다면, 평신도 지도자들을 다수 포함시킨 교회 개척팀을 구성할 수 있다면, 평신도 전문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하나님 나라를 펼치기 위한 기독교 운동을 주도할 수 있다면, 교회는 비로소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던져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소그룹 인도자가 되는 것이나, 당회원과 같은 중직자가 되는 것이나, 혹은 신학을 공부하여 안수받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 크리스천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 환경

이 글은 2012년 버클리기독대학에서 행한 "제자 훈련" 특강 원교입니다. 소그룹은 제자 훈련을 위한 필수적인 환경이다. 주일 예배와 같은 대형 모임에서는 정보의 전달은 가능할지 몰라도, 성도

hanjin0207.tistory.com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실천신학적 교회론2018. 11. 14. 07:30
반응형

우리는 교회를 믿는가? 과연 교회는 신앙의 대상인가? 248년부터 258년까지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은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했다.[1] 종교개혁자 칼뱅은 키프리안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장차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어머니로서의 교회에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뱅은 이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2]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연합된 교회에 확실히 접붙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선택받은 무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장차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칼뱅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헌법은 교리편 제1부에 사도신경을 기록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에 따라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공회”, 곧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위에서 인용한 키프리안은 동일한 논리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교회란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감독이 있는 교회, 곧 정통 가톨릭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는 키프리안의 주장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감독의 지도를 받는 가톨릭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거부당한다. 종교개혁가들이 말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의 모임이지, 베드로의 사도성을 이어받은 감독들에 의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믿는다고 했을 때, 분명히 특정한 사람, 곧 감독 혹은 목회자의 지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 동일한 이유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교회가 정한 절차에 따라 기독교라는 종교단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만을 지칭하는 것일 뿐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여기에 제외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견적인 교회도 복음 아래 있는 보편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율법시대와 같이 한 민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하여 참종교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손들로서 구성된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권속이다. 이곳을 떠나서는 구원의 정상적 가능성은 없다. 이 교회를 통하여 사람은 보통 구원을 받으며 그것과의 결합은 그들의 최선의 성장과 봉사에 가장 요긴한 것이다.

 

다시 사도신경으로 돌아가자. 사도신경은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리고 둘째로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을 믿는다. 셋째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이로써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이 교회에 대한 신앙이다. 다시 말해 사도신경을 외우며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가 곧 성도의 교통, 죄사함과 부활 그리고 영생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믿는다. 여기서 교회는 비록 결점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불러주신 성도들의 모임, 곧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보이는 교회’이다. 물론 교회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잘못이나 오류가 전혀 없는 언제나 거룩한 곳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믿는 것은 죄인인 인간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임하듯,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사역을 교회를 통해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구원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시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을 전파하시려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도자는 아니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3]

 

나는 한분이신 성부 하나님과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분이신 성령을 믿기 때문에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한 교회를 믿는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죄 많고 연약하고 분열된 공동체 속에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공동체가 지닌 어떤 능력이나 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이 공동체를 그분의 선물을 전하는 자로 부르고 또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정의한다( 1:23).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충만이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기보다는 사단의 세력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2).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충만,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미 종결된 것이 아니다. 바울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 3:7-9).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그의 기도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에베소 교회의 충만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3:14-21).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란 하나님의 풍성함,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부어주시는 풍성한 구원의 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나타나는 곳이다.

 

“교회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일을 위해 나를 헌신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부탁한 기도제목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셔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복음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고, 이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 6:19-20) 이것이 “교회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교회를 믿는가? 그렇다면 바울과 같이 우리도 교회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교회를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이다.

 

 



[1] Cyprian, De Unitate, 『공교회의 단일성에 대하여』, p. 6, 재인용, E. G. Jay, 주재용 역,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1, 2.

[3]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서울: 복있는사람, 2012), 106-107.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9
반응형

무엇이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 되게 하는가? 교회는 필연적으로 많은 부수적인 제도들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는 가운데 고대교회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별하는 기준, 곧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되게 하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되어왔다. 니케아 신조는 4가지 교회의 표지(標識)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으로 이는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교회의 표지가 되었다. 이후 종교 개혁가들은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가지 표지를 제시하였고, 개신교신학자들에게 큰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도 니케아 신조의 4가지 표지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도 개혁가들의 두 가지 표지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표지인가보다는 과연 그것들이 우리 교회의 생명력 있는 특징인가이다.

바울이 언급하는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2:20). 교회가 사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12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적 전승’은 신약성서의 범위를 규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도적 전승을 받아들였다고 할 때 신약성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의 기초로 받아들인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것으로, 결국 참된 교회란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이다.

복음의 선포를 들은 사람에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 그 마음에 믿음이 생긴다. 교회란 이렇게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긴 사람들의 모임이다. 개혁가들이 주장한 참된 교회의 두 번째 표지인 성례전(세례, 성찬)은 이러한 믿음을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칼빈은 성례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1) 복음을 믿어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증표로서 세례를 받고, 지속적인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크리스천의 삶을 영위해나간다. 말씀도, 성례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한평생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크리스천은 참된 교회의 말씀선포와 성례전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표지는 오로지 교회의 사도성이지 결코 도덕적 자질이나 교회 성도들의 양적인 숫자가 아니며, 교회 헌법도, 교회의 건물이나 화려한 장식도 아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터를 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요건이다. 이 기준으로 종교 개혁가들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외쳤다.2)

유대인들은 성전과 의식과 제사장들의 활동을 굉장히 자랑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회를 확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교회 대신에 외관을 자랑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또 없어도 교회는 훌륭히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의 미련한 자신감을 꺾는 데 썼던 논증을 사용하려고 한다. 즉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7:4). 주께서는 주의 말씀이 전해지고 양심적으로 지키는 곳이 아니면 어떤 성전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만일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를 집행하는 일에 있어서 순수성이 훼손 되었다면 그 외향이 아무리 화려하다 할지라도 참된 교회로 볼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만일 우리의 교회가 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예배에 진실함이 있다면 아무리 많은 다른 결점들이 있더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교회를 떠올리며 “교회를 믿습니다”3)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를 참된 교회되게 하는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개혁가들의 전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된다. 첫째, 우리 교회의 참된 교회됨의 표지가 사도성에 있다면, 교회의 내용, 교회가 선전해야 할 그 알맹이는 결코 민주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형태는 민주화된다 할지라도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 그리고 교회를 궁극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은 교회의 구성원 중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 참된 교회의 표지가 사도성에 있기에 교회 안의 모든 계급이 사라지게 된다. 사도들의 증언(신약성서)에 따라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내의 갈등과 분열은 근본적으로 참된 교회의 특징일 수 없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사도적 전승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그 알맹이로 가지고 있기에 하나의 교회이다.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요, 주님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다( 4:4-6). 그러므로 같은 신앙을 소유한 모든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교회로서 서로간의 갈등과 분쟁을 용납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한 분리주의자들에게 “왜 당신들은 주님의 옷들을 나누는 죄를 지으려 하는가? 왜 당신들은 주님의 처형자들도 찢지 않은 위로부터 통째로 짠 저 사랑의 옷을 전 세계와 함께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가?4)라고 절규했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가 말한 참된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단일성이다.

셋째, 매주 드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말씀에 응답하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씀과 성례전이 시행되는 곳은 바로 예배이다. 말씀에 대한 온전한 선포와 진실한 응답이 있는 예배 속에 참된 교회 공동체가 있다. 만일 이것을 제외한 다른 어떠한 사교모임 속에서 교회의 친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교회의 친교가 아니라, 거짓 교회의 친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만드는 시작점은 교회의 예배에서부터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특징이 살아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견고히 세워진다고 선포한 후, 교회의 신비한 연합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간다( 2:20-22).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모임은 이미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서로 연합하며 완성되어지는 과정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올바른 성례가 이뤄지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각 지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설명하는 에베소서 2장의 교회를 한번 상상해보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모든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고 성례를 행하는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어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아름다운 처소로 변해간다. 전 세계로 확장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오늘 드리는 예배로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다.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14, 1.

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2, 3.

3. 이한진, "우리는 교회를 믿는가?", 블로그(http://hanjin0207.tistory.com) 참고.
4. Augustine, Letter, 76,
재인용, 이양호,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 『현대와 신학』, 12 (1989 5), p. 175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197398959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8
반응형

교회의 능력, 곧 교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1장은 부활 이후 승천까지 예수께서 하셨던 두 가지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 첫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4)는 말씀이다. 또 하나의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정지해 있으라는 것과 나아가 선포하라는 것, 두 가지였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받은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또 ‘흩어져’ 전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시작되었다. 이 모임과 흩어짐의 연속이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교회의 시작이요, 교회의 역사이다. 교회는 이와 같이 모이는 힘과 흩어지는 힘, 곧 구심력과 원심력이 균형 있게 강화될 때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의 구심력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에 예배가 있다. 이미 앞장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예배를 언급했다. 예배는 참된 교회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흩어짐’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기독교 교육을 신앙공동체적 차원에서 이해한 기독교 교육학자 John H. Westerhoff Ⅲ는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1)

주일의 예전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인생의 이해와 선택된 삶의 방식을 그 자리에서 집약함으로 공동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포기는 신앙의 소실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다음 세대를 공동체의 모든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자로 들이며 끌어들이는 일이다.

물론 예배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필요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그리고 예배가 드려진다고 해서 그곳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일 수는 더더욱 없다. 크리스천들은 단지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희망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이 세상을 사랑했듯이 오늘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에 반하여 그의 사역에 뒤따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주장하실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교회를 포기할 수 없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크리스천으로서 예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교회의 구심력, 그 두 번째는 기독교교육이다. 예배가 동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을 다시 일이키는 힘이 된다면 기독교교육은 세대가 바뀌어도 교회의 신앙이 지속되는 능력이다. 이러한 기독교교육의 능력은 비단 언어로 전달되는 몇 가지 지식을 넘어 교회 공동체로서의 경험에서 나타난다. John H. Westerhoff Ⅲ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2)

우리는 타자와의 상호 관련된 활동을 통해서 신앙을 경험하고 표현한다. 신앙이라는 어휘의 의미는 그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해지는 언어와 함께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을 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며, 또한 그 사람들이 동일한 양식으로 그 신앙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신앙을 서로 나누며 또 응답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함께 서로 나누며 상호관련 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는 일이다. 크리스천 부모들의 책임은 자기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천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일이며, 또한 모든 크리스천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만드는 핵심에 예배가 있다면, 기독교교육에 있어서도 예배교육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예배의 장소, 시간, 복장 등의 비본질적 내용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 말씀에 응답하는 전 과정으로서의 예배를 교육해야 한다. 이 교육은 비단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습득된다. 다시 말해 유치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 아동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 중고등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가 곧 그 학생들의 이후 예배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의 능력은 모이는 힘, 곧 구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구심력을 원심력으로 바꿔내는 힘, 곧 ‘모임’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능력을 교회 밖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이끌어낼 때 나타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각각의 역할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4:11-12).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많은 윤리적 덕목들을 나열하고 있다( 4-6).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 된 풍조를 따라 살며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사람을 불러 그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그들을 모아 교회를 만드셨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매주 확인하는 크리스천들은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원심력으로서의 능력이다. 곧 크리스천 개인의 삶과 크리스천 공동체인 교회의 사회참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원심력이 약한 구심력도, 구심력 약한 원심력도 지속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이른바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급격한 교회의 성장, 곧 교회의 모이는 힘이 강해졌지만, 그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원심력은 현재 교회의 구심력까지 약화시키고 있다. 반면 한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의 교회들은 역사적 현실에 따라 교회의 원심력을 강화했지만 상대적으로 모이는 교회로서의 구심력은 약했다. 그 결과 그들이 말하는 원심력까지도 그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의 구심력으로서의 예배와 교회의 원심력으로서의 기독교 윤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영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D. Forrester의 설명을 들어보자.3)

기독교인들의 삶의 전부는 따로 나누어진 시간, 즉 예배의 시간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만약 예배와 기독교인의 삶 사이에 날카로운 분열이 생긴다면, 이것은 예배와 삶 모두를 왜곡하는 것이다. (중략) … 예배는 우리의 전 삶을 거룩하게 하고, 밝게 비출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빵 덩어밝게안에 있는 효모와 같으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교회를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정도로, 그래서 윤리적인 과제를 피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예배는 세상 안에서의 삶의 풍요함과 인간화를 위한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일 어떤 크리스천이 교회 밖에서 크리스천의 윤리적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의 교회 안에서의 예배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어떤 크리스천이 교회 안에서 진실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과연 그가 교회 밖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1. John H. Westerhoff , 정웅섭 역, 『교회의 신앙교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83, p. 108

2. Ibid., p. 163

3. D. Forrester, 김동선역, 『참된 교회와 윤리: 교회론과 윤리학에 대한 재고』,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pp. 74-75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7
반응형

교회는 취미활동가의 모임인가? 과연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은 취미활동의 하나인가? 물론 모든 신앙인들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사고가 가르치는 ‘정답’을 읊어대기 이전에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 생활을 돌아본다면, 얼마나 많은 ‘취미활동’으로서의 신앙생활형태가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취미활동의 특징은 ‘내가 좋아서’ 참가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취향이 달라졌거나, 나의 여건이 어려웠을 때,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취미활동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셔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크리스천으로 불러주셨기에, 나의 마음이 어떠하든지,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신앙생활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지, 수평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자원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의 생활은 결코 취미활동이 아니었다. 사도행전과 많은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삶의 전부였다.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았다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로마 황제 콘스탄틴의 회심이 있기까지 지속된다.

콘스탄틴의 회심이 있기까지, 교회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으며, 그 결과 지하 카타콤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졌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하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313년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드디어 기독교는 지하의 종교에서 벗어난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교회의 형태, 특히 예배의 형태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콘스탄틴 이전까지 기독교의 예배는 상당히 간단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기독교 예배는 궁정의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향불이 교회 예배에도 사용되었고, 교역자들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가 발전하였다. 반면 회중은 예배에 있어서 훨씬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1) 기독교 내의 이러한 변화는 참된 기독교의 삶을 찾아 나선 이들이 교회를 떠나 수도원운동을 시작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4세기 후반, 5세기 초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회를 보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현재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에는 속해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로서 후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보이는 교회’와 의로운 사람이 그 핵심이 되는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제도적 교회 개념이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2)

고대 교회가 밀라노 칙령 이후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재연된다. 조선의 왕조가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기독교는 그 땅에 빠른 속도로 뿌리내린다. 특히 일제로부터 해방되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반외세반봉건의 정신으로 한국사회를 선도했다.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에 협력하였고, 신사참배 강요에 모든 교단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지켰던 신앙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취미 활동일 수 없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냉전체제가 시작된다.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남한 내의 기독교도 서로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수없이 분열을 거듭한다. 민족적으로 남북이 상쟁(相爭)하고 있을 때 기독교는 세계사에 대한 바른 비판 의식을 잃어버리고 기독교 자체가 분열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후 기독교는 당시 집권세력과 급속히 유착되어 급기야 선지자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동조하기까지 한다.3)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자세를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교회사가 이만열 교수의 지적에 귀 기울여보자.4)

19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의 특징의 하나는 양적인 팽창이다. 대형교회가 나타났고, 수십만 명이 회집하는 기독교 모임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교회성장의 척도도 점차 외적인 대형화 여부에 두게 되었다. 이와 함께 우려할 만한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잘못된 축복관이 기독교 진리의 탈을 쓰고 신자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축복이 마치 물질적인 풍요와 신유의 은사로 대표되는 듯이 오도되어지고 있다. 이 그릇된 축복관이 이제 겨우 형성되어지고 있는 한국의 중산층과, 불안 속에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가야 하는 식자층 및 그 주변의 계층을 기독교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그릇된 축복관은 기독교 진리를 은폐시키고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다. 가치관의 타락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물량황금만능주의의 풍조를 쉽사리 의 풍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과 기독교 세력의 증가는 듯불가하고, 일반사회의 윤리도덕의 성장은 엿볼 수 없고 기독교적 가치관의 사회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기독교가 이 사회에 정신적인 지도역귉은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회는 취미활동가들의 모임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바 눈에 보이는 교회,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결코 진정한 교회일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교회를 부정하고, 천상의 교회만을 바라볼 수도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부족하나마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진정한 교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1-10). 교회 구성원들이 처음부터 도덕적이고, 정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바울에 의하면 에베소교회 구성원들은 죄와 세상의 풍조를 따르던 사람,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던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 곧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것을 덮어주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신앙의 사람,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이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교회를 구성한다. 만일 이 믿음을 떠나 로마의 국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여 그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들, 혹은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잘못된 축복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라면, 우리는 또다시 이를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부정하며 새로운 교회를 찾아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 이형기, 『세계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p. 235

2. E. G. Jay, 주재용 역,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p. 130-131.

3. 한국기독교의 이른바 진보진영은 부정선거에 대해 저항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진영의 기독교를 주로 언급하였다.

4. 이만열, “한국 기독교 100년 약사”, 『한국기독교 성장 100년』, 기독교문사, 1986, p. 58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197398959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02 “아우구스티누스”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blog.naver.com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