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2016. 2.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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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의 모습

 

바울은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의 모습과 믿음이 성숙했을 때의 모습을 비교하며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믿음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이 저 말을 하면 그 말이 또 맞는 것 같아요. 복음 안에서 나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세상의 온갖 유혹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바로 그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도, 내 곁의 어떤 사람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봐야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저 적당히 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마음이 흔들려요. 그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성숙한 믿음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 여기에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이고, 두 번째는 ‘사랑 안에서 참된 일을 하라’입니다. 정리하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참된 것을 행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 그것이 믿음의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의 성숙한 믿음이 우리 교회 안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이미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믿음의 성숙을 허락해주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숙한 믿음은 무엇보다 주변의 유혹과 속임수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들 속에서 교회를 무너트리려는 유혹과 속임수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교회를 무너트리려는 모든 유혹과 속임수 속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마음이 되어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도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얼마나 성숙한 믿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어요.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더욱 믿음이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믿음의 성장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더욱 자라야 해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을 위한 훈련

 

저는 이따금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저의 대답은 언제나 듣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줍니다. 왜냐하면 저의 대답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그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잘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죠.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 꼭 필요한데, 그 과정에는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나기 위해, 이 두꺼운 성경을 폭넓게 공부하고 깊이 묵상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시간과 더욱 많은 노력을 요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저 식사하기에 앞서 1분 이내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의 깊이를 더하여 하루에 최소한 한 시간 이상 하나님과 기도로 교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성경 66권을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보다 더욱 어렵고 고단한 과정인 듯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바꾸어나가기 위해, 성경 66권을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보다, 아울러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과정이 하나 더 남아있는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과정입니다.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의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성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가는 것, 우리의 감성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갖는 것, 우리의 의지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오랜 시간 훈련 받지 않고는 성장하는 측면이 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훈련의 시간을 그 누구의 도움이나 협력이 없이 저 혼자 해내야 한다면 저는 포기하고 말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제 아무리 의지가 강하여 결심한 바는 반드시 행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인 혼자서 지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감성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갖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요,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직분입니다.

 

 

직분의 제정자 예수 그리스도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11-12)

 

여기에는 교회의 직분이 다섯 가지로 등장합니다. ,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직분은 무엇이며, 그것을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지를 논의하는 것은 교회에 별로 유익이 없어요.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분을 세우신 목적입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의 역할은 성도들이 온전하여 지도록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말의 주어는 5가지의 직분자들이 아니라 ‘성도들’이라는 것이 성서주석가들의 중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흔히 직분자들만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직분자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세우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로 세워진 사람은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성도들까지도 한 마음이 되어서 서로 힘을 북돋아주고 교회의 성장과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 안에 직분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또 연결됩니다. 이것은 교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한 설명이지요. 성도들 개개인 모두가 다 연결이 되어 서로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의 각 지체들, 각각의 성도들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교회에 직분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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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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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그리고 크리스천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놀라운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도 부릅니다. 온 만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 질문에 전도와 선교로 대답할 것입니다.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교회는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의 모든 노력, 교회의 모든 예산, 교회의 모든 인력을 전도와 선교에 쏟아 부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 옳은 지적입니다. 교회는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노력에 앞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가 사회 봉사와 구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온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힘으로 억누르는 통치가 아니지요. 우리 주님은 온 만물을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부름 받은 교회는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이 땅에 가난한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 그리하여 주변 사람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습니다. 교회는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하고 아름다운 손길로 봉사하고 구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한 모든 노력에 앞서는 한 가지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1-3)

 

에베소서 4장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를 부르셔서 열방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절 뒷부분에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도 아니고, 우리 교회에 약점이나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교회를 사용하셔서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는 위대한 꿈과 비전을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꿈과 그 비전에 참여한 사람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어떻게 지켜요?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놀라운 비전과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열방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족속들에게 선포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우리의 모든 마음으로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됨,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온 세상에 사랑과 정의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는데 결정적인 장애요소가 있으니, 곧 성도들의 마음이 서로 나뉘어지고, 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7)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행하고자 하시는 위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꿈에 집중되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교회가 황폐해져요, 무너집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뒤로 연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4 1절부터 10절까지를 설명하면서 많은 성경의 전문가들은 에베소 교회에 성도들 간의 갈등과 다툼이 매우 심하였을 것이라고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역했던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쓰임 받는 교회가 되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지요. 그런데 바울에게 들리는 소식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나뉘어지고, 서로 다투며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였던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사역했던 교회가 다시금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께서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하나됨을 지켜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4:4-10)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한 분이시지만,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하게 은혜를 베푸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함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각자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의 개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그보다 더욱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각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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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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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에는 바울의 기도제목, 즉 바울이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기도문이 두 번 등장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15-19)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교회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는 에베소교회를 위한 계획과 비전이 있는데,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4-19)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최선을 다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지성과, 자신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였지요. 아울러 그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간절함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흘렸을 눈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토록 간절히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였던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3:20-21)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며 계획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선언하고는 자신의 입으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적어놓은 구절 바로 뒤에 글씨로 직접 “아멘”이라고 붙여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를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알기 위해 에베소서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가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그리고 있는 그러한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고, 우리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고, 우리 교회 안에는 화해와 화목의 사건이 일어나며, 우리 교회는 날마다 성장하여 부흥하는 교회되는 그 장면을 마음에 그리며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셨던 것, 소원하였던 것, 꿈꾸었던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하여 기도하였던 그 기도의 제목과 그 기도의 내용 이상으로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본문의 말씀을 읽고, 마지막에 ‘아멘’ 부분은 우리 모두가 한 목소리로 봉독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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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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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면,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고, 4장부터 6장까지를 또 한 부분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4장부터 6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이고, 그 복음이 충만한 교회는 어떠한 곳인지를 밝혀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 말씀의 마지막 내용은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3:14-15)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단어가 ‘이러므로’라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오늘 본문 앞 절에서 바울은 바울 자신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기까지 에베소교회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며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사용하셔서 에베소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가고 계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에베소교회의 일꾼으로 삼아주셔서 바울이 교회의 사역자가 되었으므로,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에베소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바꾸어 가시는 일에 일꾼으로, 도구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교회 행정을 처리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주셨으므로 자신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입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제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소그룹의 리더로 책임을 맡으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 소그룹원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성가대로, 혹은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이 성가대원이나 교사로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성가대원들, 교회학교 학생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그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요,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이 되게하소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서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 그리고 모든 개인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모든 족속에서 이름을 주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제 아무리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넘쳐흐르는 교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화목이 일어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부흥하는 교회, 그것이 바울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모습은 바로 에베소교회라는 구체적인 교회 현장에서 현실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꿈이 불분명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울이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되어 하나님께 간절히 올려드렸던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교회에 대한 비전의 말씀이 바로 에베소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 - 그 족속에는 에베소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그 족속에는 우리 민족도 포함됩니다. - 그 모든 민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교회입니다. 그 충만한 은혜 안에서 화해와 화목의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적으로 자라나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곧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현장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6-17)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덧붙여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지나놓고 나면 별로 큰 문제도 아닌데, 그때는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우리의 마음이 마구 흔들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중심이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고, 강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시고,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 예수님과 내가 단단히 묶여 있을 때, 우리는 몰려오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사람의 강건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기도를 따라 우리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속사람의 강건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8-19)

 

사도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속적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지금까지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욱 깊은 은혜, 더욱 깊은 사랑, 더욱 깊은 은혜의 충만함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돼요. 더욱 깊이, 더욱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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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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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를 봉사하는 가운데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현실도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토록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던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에베소교회를 세우시고, 에베소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3:8)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바울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처 죽이는 데 앞장섰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에베소교회를 위한 헌신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헌신은 작은 것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교회를 위한 헌신을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주신 은혜와 선물과 비교해본다면 한 없이 작은 헌신이요, 한 없이 작은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려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자리에서 눈물로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 교회를 위한 우리의 헌신, 교회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크고 귀한 것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시간에 함께 모여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더 큰 것이 아닌가요?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 에베소교회를 섬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자신의 헌신과 노력은 작은 것들 중에 가장 작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분명 교회를 위한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은혜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 은혜의 감격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헌신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작은 헌신과 봉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중에 지극히 작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들, 곧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에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헌신,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사용하셔서 에베소교회에 복음을 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2:10)

 

하나님께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는 에베소교회를 통하여 전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헌신과 수고가 귀한 것이지만 그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한다면 작은 것 가운데 가장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그 수고와 헌신을 사용하셔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에베소교회를 통하여, 물론 에베소교회가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 갈등이 있고 위기가 있고, 다양한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에베소교회를 통해 이제는 전 우주 가운데 복음을 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개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요. 하루하루를 살면서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그때마다 회개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일상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한 순종, 우리의 작은 것들 가운데 가장 작은 헌신과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가득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완전한 교회인가요? 아무런 흠이나 단점이 없나요?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떠한 흠이나 잘못이 전혀 없었던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연약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시는 것처럼, 연약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아니 더 나아가 공중의 천사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전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 개개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고 싶어 하세요. 우리가 여기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볍게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 가운데, 나아가 공중의 천사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전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낙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속해있는 성도들에게 주눅 들지 말고 가슴을 열라고 당부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3:12-1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단 하나도 없고, 교회를 위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이 완전하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범죄 합니다. 교회를 향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너무도 부족하여 그 누구에게 드러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연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세상에 전파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교회를 통해서 열방 가운데, 나아가 공중의 천사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전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의 연약한 모습을 보았다고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우리 교회에 여러 가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교회를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품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약한 개인을 사용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연약한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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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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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서 1장과 2장을 묵상하는 가운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였습니다.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더욱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네 가지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그려준 교회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바울이 그려주었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하죠.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입니다.(1:23) 여기서 충만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의 충만함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과거에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과거에는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은혜, 복음의 감격이 풍성한 곳, 그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세대가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곳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이제부터 주목하여 들어보십시오.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7)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넘치는 현장, 바로 그곳이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며, 동시에 예전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 안에서 화해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2:14).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허물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세대가 제 아무리 흘러도 지속되는 교회 안에서는 서로 불화했던 사람들까지도 서로 화목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바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21) 이 문장의 원문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한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서는 누락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자란다’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자라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위한 바울의 사역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는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일구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도들의 헌신이 함께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는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한 바울의 노력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전체가 바울의 사역에 대한 말씀이지요.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3:1) 바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일로, 그리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일, 곧 에베소교회가 지금까지 설명하였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말하기를’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원문에서는 동사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구절을 적으면서 마음에 큰 울컥거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사를 쓰지 않아요. 아니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자신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가 비록 감옥에 갇힌다 할지라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에베소서가 말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음 세대에 지속적으로 계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그 풍성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바로 그러한 교회 되기를 바라시나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세요? 만일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바울과 같이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편지를 쓰면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서술해주지요.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편지로 써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기 이전에 바울은 먼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자신이 감옥에 갇힐 만큼 헌신하며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죠.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3:7)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 되어 에베소교회를 위해 충성하였고, 그 결과가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바울의 헌신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 바로 그 사역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3:2-6)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사도 쓰지 않고 마음에 울컥함을 가지고 자신이 감옥에 갇힌 사실을 이야기하죠.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에베소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쓰기도 전에 2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여러분 경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에베소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던 사역은 바울의 사역이 아니라 실상은 에베소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마음이 울컥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의 마음을 기록하는 바로 이 장면에서 바울이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역과 자신의 헌신이 제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바울은 자신을 사용하여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역, 곧 하나님의 경륜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찬양 <우릴 사용하소서>의 가사는 교회를 위한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 희생과 포기와 가난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바로 이 마음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고 이야기하는 바울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함께 불렀던 찬양은 후렴구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교회를 위해 희생합니다. 포기합니다. 가난이나 고난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헌신이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참된 교회 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을 사용하셔서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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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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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 지난 2005 11월을 기준으로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의 결과가 발표되면서 한국 교회는 개신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5 11월을 기준으로 이전 10 동안 가톨릭이 70% 이상 성장하고, 불교 역시 3% 이상의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였지만, 유독 기독교만이 1.6% 감소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전, 미국의 영국 식민지 시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미국 기독교가 성장하는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이 출발되었습니다. 책의 영어 제목은 The Churching of America입니다. 그런데 책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제목은 바로 『미국 종교 시장에서의 승자와 패자』입니다.

 

책의 저자인 로드니 스타크와 로저 핑크는 1776년부터 1850년까지 미국의 주요 교단이었던 회중주의와 성공회가 침체하고, 오히려 신흥 교단이었던 감리교와 침례교가 급성장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다양한 원인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가 바로 목회자들의 학력 차이입니다. 당시 미국의 주요 교단이었던 회중주의 목회자들은 95% 대학 졸업생들이었는데 반하여 침례교 목회자는 11.5%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고, 감리교의 경우에는 거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에 대하여 로드니 스타크와 로저 핑크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분명하게, 종교적인 참여는 인구의 교육이 증가하여도 줄어들지 않는다. 대신에 종교가 학자들의 비평과 관심의 초점이 될수록 설교 내용은 점점 세상적이 되어 가며, 점점 확신 없는 설교를 하게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미국의 하버드와 예일에서 공부하였던 회중주의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사변적인 학문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감리교와 침례교 목회자들은 비록 대학에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경험한 복음의 능력을 있게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의 학력 수준이 올라간다고 하여 교회의 부흥이 저해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진리가 우리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으로, 단순한 비평과 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원리를 한국 교회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라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시금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한국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능력 가운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역시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지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많아지지만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누리는 복음의 삶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려주는 교회의 모습을 단어로 표현하라면, 저는 ‘부흥’이라 표현하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2:21-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 원문에는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단어인데 개역개정성경에는 누락되어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단어는 바로 ‘자란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자란다’는 단어를 포함하여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자라나는 곳입니다. 지속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식구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니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흘러넘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래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과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성전으로 자라나는 , 바로 부흥의 현장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부흥의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이러한 부흥의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함께 교회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흥의 기초

 

신약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분명 정체하는 교회가 아니라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미 한국의 기독교는 교인의 숫자가 정체 혹은 침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신약 성경이 부흥하는 교회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는 쇠태하고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의 교회도 부흥하는 교회가 있을까요?

 

교회의 부흥을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의 기초가 분명히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흥하는 교회의 든든한 기초는 무엇일까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 2:20)

 

바울은 교회가 개의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진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도들의 기초이고 둘째는 선지자들의 기초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의 기초는 신약성경의 전통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기초는 구약성경의 전통으로 이해할 있지요. 그러므로 교회의 든든한 가지 기초는 무엇입니까? 신약과 구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퉁이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 신구약 성경의 든든히 기반하여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풍성하게 선포되고, 또한 경험되는 , 바로 그것이 교회의 기본기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기초, 교회의 기본기가 든든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흥하는 교회가 됩니다.

 

언제든 부흥은 교회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미 한국 기독교 안에도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이 있고, 전도 세미나가 있습니다. 최근 시작된 어느 전도 세미나에는 일주일 안에 전도를 위한 총체적인 매뉴얼을 교육하는데, 수천 명의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매뉴얼이 중요하지요, 교회의 어떠한 사역이든 매뉴얼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부흥을 바라면서 전도 프로그램, 전도 매뉴얼, 전도 노하우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서 어느덧 사라져버린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부흥의 길은 우리 교회 안에 신구약 성경에 근거한 복음의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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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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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무엇을 생각합니까?

 

과거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거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바울은 11절과 12절에서 우리의 과거 상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때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제는’입니다. ‘그때는’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

 

 

출애굽기의 구조

 

구약 출애굽기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구조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먼저 야곱이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애집트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언급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물론이요, 그의 아들인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죽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애굽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은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서 완전히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학대받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인 40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인 회막 만드는 일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막 제작을 완성했다는 기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막 제작이 마치니,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그 성막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40장의 마지막절인 38절은 이렇게 끝이납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만든 성막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회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이스라엘은 애굽 땅의 이방인이었지요. 노예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지요.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가 마치는 40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백성의 눈앞에 활짝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기억하다’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이 지나온 지금까지의 삶을 기억해보십시오. 출애굽기 안에 다양한 사건과 사고가 많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도 슬픔과 기쁨이 마구 혼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과거에 우리가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살아가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한 식구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도 이와 동일하다고 확신합니다. 비록 과거에 출애굽기 1장과 같은 모습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바라보는 현실은 출애굽기 1장이고, 최근 며칠, 몇 주에 일어난 상황은 출애굽기 1장의 장면일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넓은 손길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지금도 출애굽기 40장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화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때에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살던 우리를 지금은 하나님의 시민, 하나님의 한 식구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과거의 삶, 곧 ‘그때에’의 삶과 ‘이제는’의 삶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그 차이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화해’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멀리 있던 두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여기에서 멀리 있던 두 대상, 곧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나뉘고 다투던 두 대상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렇게 구별되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헐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상황, 곧 출애굽기 1장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도요, 거룩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한 식구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론, 우리가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깨끗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세상의 풍속을 쫓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상태로 옮겨왔다는 그 사실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뛰어 넘습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그 전에 다투고, 시기하고, 분열하고, 싸우던 대상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화해의 근거 -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은 과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지독한 분열과 다툼과 미움의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허무시고, 그들이 화평하도록 하셨습니까?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6-18)

 

예수 그리스도께 오셔서 첫째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곧 이방인이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곧 유대인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좋은 소식, 혹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문 헬라어 단어에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살려 표현하면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도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한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 데 있었던 이방인들과 가까운 데 있었던 유대인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의 종노릇하고 있던 출애굽기 1장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다듬어질수록 점차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 안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구별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 화해하고 평화합니다. 과거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싸우고 대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였지만 그 모든 막힌 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허물어지는 바로 그 현장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지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8)

 

그 하나 되는 장소, 그 현장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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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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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독교 일각에서는 크리스천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많은 어휘 중에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용어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독교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있어서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언듯 일리가 있는 주장인 듯 보입니다. 만일,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이 교회에 출석하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형제, 혹은 자매라는 호칭에 대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 예배 시간에 사용되는 봉독이니, 권속이니 하는 등의 단어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생소한 언어인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몇몇 분들은 기독교가 세상과 더욱 소통하기 위하여 교회의 언어를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언어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작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그 대표적인 단어로 꼭 한 가지를 지적하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은혜’라는 단어를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은혜’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은혜’라는 단어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란 세상 사람들의 용어로 운이 좋은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은혜’라는 개념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듣고 사용하는 그 어떠한 용어나, 그 어떠한 설명으로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기독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풍요로운 선물을 공짜로 받았을 때,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라는 단어를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크리스천이 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어 크리스천이 된 사람이 아니면 제 아무리 쉬운 설명을 듣는다 하더라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은혜’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은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선물들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인간의 노력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의 감격이 다시금 되살아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가득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목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9) 그 누구도 자기가 의로워서, 자신이 거룩하여서 구원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겁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평안함이 없고, 서로 간에 시기하고 경쟁하며 그 안에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나 스스로를 자랑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서로 비교하며 그 안에서 열등감에 빠지고, 그 안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서로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스스로 교만하여집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모든 비교의식이 사라지고, 비교의식으로 말미암은 교만한 마음이나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더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비교의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은혜의 충만함을 경험할 때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들이 사라집니다. 모든 비교의식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경험이 날마다 흘러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인간적인 자랑이 다 사라져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비교하며 상처받는 일이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도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목적: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우리말 성경에서 ‘만드신 바’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단순하게 ‘창조물’ 혹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재창조, 처음의 창조가 아닌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범죄 하지요. 결국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재창조의 은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보십시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역사는 온전한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세상 가운데 선하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를 섬기고, 이 세상에서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 그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결심에 결심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흘러 넘칠 때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에 앞장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개인이 혹은 여러분의 식구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을 밝히 비추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라시나요? 그 비결은 잔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고자 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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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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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교육학자인 존 웨스터호프 3(John H. Westerhoff ) 1976년 기독교교육학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주목받고 있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존 웨스터호프 3세는 이 책의 제목에서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질문하고는 그 책의 제 1장 제목을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잡았습니다. 1970년대 당시, 미국 기독교교육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삼스럽게 존 웨스터호프 3세의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기 원하는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신앙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던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넘치는 현장, 바로 그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며, 동시에 교회란 예전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2: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사도 바울은 단순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한 세대만이 아니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자녀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대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가득한 교회, 바로 그러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가정, 바로 그 가정이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복음의 핵심 3가지

 

그렇다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였지만, 그 은혜를 한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언 어떻게 우리의 교회는, 그리고 우리의 가정은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크게 3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1-3)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일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끊임 없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4)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까?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셧다는 구절 앞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여러분,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긍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허물로 죄로 죽었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휼히 여기셔서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깊이, 이 사랑의 넓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사랑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둘째로 또한 함께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1:20).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하늘에 앉히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실감이 나십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듯이, 지금 우리의 삶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단어나,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는 단어나 원문을 보면 분명한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3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끊임없이 되새길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반복하여 되뇔 때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은 제가 이 땅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진리만큼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진리만큼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만큼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가득 부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복음의 진리가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여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고, 나아가 우리를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 그 충만하심을 날마다 되새기며 복음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삶이 여러분의 전 생애는 물론이요,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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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