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교2020. 8. 1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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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군인이 적었다는 글귀를 소개하며 오늘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나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히 순종할 수 있는 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치 있는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질병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자가 되어 행복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하여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나는 능력을 받아 사람들에게 칭송받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기도한 것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내가 말하지 않았던 모든 기도의 제목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름의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세우며 실천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잘못된 계획 때로는 죄악 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합니다. 요셉에게 폭력을 가하고, 급기야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을 받고 그를 팔아버린 요셉의 형들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잘못된 행동, 나아가 인간의 죄악 된 행동까지도,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인간의 악한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선하신 뜻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요셉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지요. 본문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입니다.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하였고, 그리하여 아버지가 보지 않는 곳에서 폭력을 행사하였고 급기야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이들의 죄악 된 행동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도, 정의도, 사랑도 결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악한 행동은 생명을 헤아려는 죄악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된 행동을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 그 땅의 총리가 되는 하나의 계기로 삼아, 7년의 대흉년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게 하셨습니다. 형들의 행동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어 더욱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선하신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 놀라운 섭리를 깨달은 요셉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그 다음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계속해서 요셉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8a절)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가장 심도 있게 서술하는 로마서에서, 그것도 복음의 확신을 선포하는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마십시오(시 37:1). 그들의 모든 계획과 그들의 모든 행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이 행한 잘못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의 선한 계획과 간절한 기도가 지금 당장 응답받지 못할지라도 너무 괴로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며 간구하는 우리의 선한 뜻도 하나님의 더 크신 뜻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십시오. 마침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섭리와 눈물

언제부턴가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요셉의 나이가 열일곱이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무엇인가 의미있는 꿈이었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시리라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요셉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싹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향해 품고 계시는 선한 뜻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형들에게 매를 맞고 웅덩이에 갇혔습니다. 급기야 애굽에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팔려 종이 되어 끌려갑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는 있지만,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가는 그 길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기 위한 첫 단계라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 울부짖으며 끌려갔던 것이죠(cf 창 42:21).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지만, 그곳에서 만난 술 관원장의 추천으로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으니 억울함의 눈물을 뿌리며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겠습니까?(cf 창 40:14-15) 그리고 마침내 모든 형제들을 다시 만나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는 오늘 본문의 현장에서도 요셉은 또다시 엄청난 양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1a절)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2절)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4절) 

요셉은 그의 형제들, 특별히 친동생 베냐민을 2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는 형제 상봉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형제들을 만나는 이 자리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꿈이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인도하여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종으로 팔려 애굽에 내려온 그날부터 자신이 겼었던 모든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으니, 그 모든 아픔을 충분히 보상하여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격의 눈물을 요셉은 하염없이 흘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지난 20여 년간 요셉은 그만 울보가 되었고, 형제들을 다시 만나는 이 자리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니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요?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아가는 그 기나긴 과정은 성도들이 흘린 눈물로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이니 괴로운 일을 당하여도 슬퍼하지 말라고요?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고백하였던 요셉도 그의 인생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이토록 힘있게 선포하는 로마서 8장도 눈물과 탄식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서 8장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장 23a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속에서 가족을 대면하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탄식합니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오랜 장마와 홍수 속에서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이재민들이 지금도 탄식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집값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래로 불안해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믿지만 나와 우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탄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피조물의 탄식과 하나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도 지금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b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피조물의 탄식, 성도들의 탄식, 나아가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성령 하나님의 탄식을 기억한다면 이 땅의 그 누가 자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에 슬픔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한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였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믿지만, 아니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믿기에 세상의 탄식소리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며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톰 라이트, <하나님과 팬데믹> 서울: 비아토르, 2020.)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고 여러분의 눈물을 아끼지는 마십시오. 형제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멋지게 고백하였던 요셉도 그리움의 눈물, 아픔의 눈물, 감격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시고 이웃을 향하여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리십시오. 우리가 흘린 눈물이 한 줄기 강물을 이룰 때, 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섭리와 사명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2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제들을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으니, 요셉은 자신이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남겨진 사명을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요셉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7년의 대흉년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고, 이를 위해 애굽에 끌려와 큰 고난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형제들, 곧 자신을 미워하여 폭력을 가하고 급기야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야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세대를 이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1절) 

요셉은 어떻게 자신을 미워하여 폭력을 가하고 급기야 은 20을 받고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과 그들의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떠안을 수 있었을까요?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라고요? 네, 물론 옳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단지 머리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형제들과 그 가족을 온 마음을 다하여 부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요셉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형들에 대한 상처와 아픔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는 불가능한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이 사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수 있었을까요?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요셉이 흘렸던 그 수없이 많은 눈물이 그 대답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형들을 향한 분노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눈물이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닦아주었겠지요.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버지와 동생을 향한 그리움의 눈물도 참 많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눈물이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닦아주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억울함의 눈물, 원통함의 눈물, 간절함의 눈물, 마침내 형제들을 만나며 감격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을 수십년간 펑펑 흘렸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눈물은 큰 강줄기를 이루었고 어느덧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형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다 씻을 씻어 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또 다시 발견합니다. 지난 20여 년의 세월, 요셉의 가슴에는 눈물의 강이 마를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의 강이 있었기에 요셉의 가슴에 새겨진 아픔과 상처를 씻어낼 수 있었으니 그의 가슴에 한없이 흐르는 눈물의 강줄기는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맡기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의 주인이 되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기까지 우리에게는 한없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통곡의 눈물, 탄식의 눈물, 감사의 눈물, 감격의 눈물, 그리고 그 무엇보다 기도의 눈물을 하나님 앞에 쏟으십시오. 마침내 여러분의 눈물이 하나의 강줄기를 이루었을 때 그 끝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여러분에게 나타날 것이요, 여러분이 흘린 눈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각자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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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6. 1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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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도망자 신세에 있는 다윗에게 한가지 소기이 전해지면서 시작합니다. 그 소식이란 다윗과 동일한 유다 지파에 속해 있는 “그릴라”라는 지역에 대한 소식입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상 23장 1절을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아마도 곡식을 거두는 시기가 되었고, 그일라 사람들이 곡식을 거두어 그것을 타작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자 때맞춰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지역을 공격하여 그들의 재물을 탈취해갔다는 소식입니다. 바로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집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입니다. 사울 왕으로부터 쫓기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가장 최신의 정보를 얻고 싶은 영역은 무엇일까요? 사울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사울이 자신을 찾아 죽이기 위해 어디로 군대를 보내고 있는가?입니다. 사울에 대한 정보, 자신을 찾아 죽이려는 사울의 전략에 대한 정보야 말로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엉뚱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곧, 유다 지파의 그일라 지역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입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2절에 등장합니다. 2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지금 다윗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자신의 생사와 연관된 소식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에게 급박한 소식이 아니라, 그일라 지역 사람들에게 급박한 소식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여쭙니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있는 소식에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는 정보를 찾아나서지, 다른 사람을 위한 정보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급박하고, 지금 나는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몸을 최대한 굽혀야 하는 상황이니 그일라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코가 석자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들리는 그일라 지역 사람들의 아픔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윗과 같은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지금 다윗이 처해있는 상황만큼 어렵지는 않지 않습니까? 나라의 왕이 나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오지는 않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를 위해, 우리 가정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내 주변에 환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주변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열기가 오늘 우리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 하나님께 묻는 질문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 제가 그일라 사람들을 도우러 올라가면, 사울이 저를 찾아내어 공격하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지를 묻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안위가 아닌,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3절을 보시면,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윗의 결정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의 안위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를 질문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자신의 사명에 대해 질문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여러분, 참된 믿음의 사람이 보여주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데, 이것을 행하면 저와 우리 가정에게 결과적으로 유익할까요?” 라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그에 앞서, “주님 제가 이것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명입니까?”라고 질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당하라고 주신 사명이라면, 비록 그러한 결정이 나에게 손해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할 행동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그저 기도만 하고, 그저 말만하고 마치자 않았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안전을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구하고, 자신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삶들을 위해 기도한 뒤, 그들을 위해 직접 찾아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실제로 감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한 기도, 우리 가정을 위한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주변에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형편과 나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내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사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다면 그를 위해 우리의 손을 내미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로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후부터는 다윗이 그일라 백성을 구원한 사건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쉽게 예상했던 바와 같이 다윗을 죽이려 찾아다니던 사울이 다윗의 행방을 알게 되고, 다윗을 찾아 그일라 지역으로 옵니다.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 10절부터 등장합니다. 10절과 11절의 말씀을 함게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0절과 11절의 말씀을 찬찬히 읽으며 관찰을 해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첫번째 질문은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질문 가운데 다윗이 정말 궁금한 질문은 무엇일까요? 네, 첫번째 질문이지요. 왜냐하면 두 번째 질문은 누구나 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찾아 죽일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따라올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일라에서 블레셋과의 전투를 막 치른 상태이니 사울이 그일라로 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정말 궁금한 것은 자신이 그 큰 위험을 무릅쓰고 구원한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사울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다윗 자신을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인가? 입니다. 

자, 다윗이 두개의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1절에서 한 가지 질문에만 답을 주십니다. 11절 뒷부분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 오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두 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다윗이 정말 듣고 싶은 이야기는 답을 안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에만 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이 답답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해 주십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그 함께한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다윗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위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빠진 그일라 사람들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다윗이 최선을 다하고, 위기를 무릅쓰며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나라로부터 구해주었을 지라도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이 믿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지는 않더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할지라도, 그들이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에요.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을 찾아 죽이려는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신뢰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함께 찾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이 매일 찾았지만,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묵상을 하다보니,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신의 직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미리 교육받고 훈련받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그는 최선을 다해서 백성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지라도, 다윗이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왕권을 지속하기 위하여 믿고 신뢰해야 할 대상은 백성들이 아니라, 바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뿐입니다. 

여러분이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여러분이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랑과 섬김을 다 한다고 해서, 그들이 여러분에게 믿음직한 언제라도 믿고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여러분만의 착각입니다. 인간은, 사람은 제 아무리 많은 사랑과 섬김을 쏟아붙는다 할지라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섬겼던 사람을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우리가 믿고 신뢰할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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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6. 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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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보수하는 요시야 

오늘 말씀은 요시야 왕의 행적을 묘사하는 본문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였기에 성경이 인정할 만큼 선하고 의로운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의 업적으로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였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사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절 말씀은 함께 읽겠습니다.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한마디로, 성전을 수리하고 보수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특별히 남 유다의 역사상 손에 꼽힐만큼 악한 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므낫세를 그토록 악한 왕이었다고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아닌 이방 우상을 섬긴 것은 물론이고,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제단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버젓이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므낫세를 악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보수했던 요시야 왕은 선하고 의로운 왕이라고 평가하시죠. 

여러분, 오늘 우리시대에도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들이 계세요. 하나니은 신실하시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지만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온갖 위선과 죄악이 난무한 곳이고 세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교회를 마구 비난합니다. 
물론,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와 장성한 분량까지 다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에 – 인간적인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허물 많고 죄악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그 교회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시고,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것은 여러분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예요. 마찬가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언제나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교회 위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바로 이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요시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보수하고 수리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이 교회를 날마다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율법책을 발견하는 요시야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보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다보니 하나님의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8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뜻하지 않게 율법책을 발견한 거지요. 그리고 이것은 요시야 시대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된 것부터 발견한 율법책을 근거로 요시야가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그 사이에 몇 가지 단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일 먼저 율법책을 발견한 뒤에 그 율법책을 읽었다는 사실입니다. 

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대제사장 힐기야가 사반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는 말씀에서 드디어 사반이 율법책을 개인적으로 탐독을 한 겁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시면,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라고 왕에게 보고를 한 뒤에, 그저 책을 왕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10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서기관 사반은 제사장 힐기야로부터 율법책을 받은 뒤에 자신이 직접 그 율법책을 읽었어요. 그리고 그 율법책을 요시야 앞에서 다시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열왕기하 23장 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처음에는 사반 한 사람이 읽었어요. 그리고 그가 왕 앞에서 그 말씀을 읽었고, 이제는 모든 백성이 그 율법의 말씀을 귀로 듣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책을 옆에 둔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부지런히 읽으셔야 합니다. 

자,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면서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견한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한 단계를 더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1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요시야 왕이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그의 옷을 찢고, 그의 마음을 찢었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절에는 모든 백성이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들었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3절에는 백성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모든 백성이 어떻게 합니까?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먼저 부지런히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나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데서 멈추면 안되고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찢고 그 말씀 한 구절이라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D. L. 무디는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우리의 지식을 넓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으시고, 그 읽으신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과 언약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충만하게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 (2) / 열왕기하 22장 12-20절

과거와 현재를 읽는 길 – 성경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한 뒤, 그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찾아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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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설교2020. 6. 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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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 (1) / 열왕기하 22장 1-11절

성전을 보수하는 요시야 오늘 말씀은 요시야 왕의 행적을 묘사하는 본문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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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를 읽는 길 – 성경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한 뒤, 그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찾아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잠시 확인한 것처럼, 요시야 왕의 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왕의 서기관 사반과 요시야 왕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시야 왕과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들은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의 마음으로 읽고 그들의 마음으로 읽었지요. 자, 이제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듣자 그의 삶에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3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자 유대 나라의 역사, 곧 유다 나라의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13절 뒷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율법책의 말씀을 들어보니 지나온 유다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는 역사였어요. 율법은 분명히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령하였지만, 유다인들은 이방의 우상을 섬겼어요. 율법은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느덧 유대인들은 그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율법의 말씀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요구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욕심에 이끌리는 삶을 살았어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었고, 그들이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자, 유대 나라의 과거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꿰뚫어 볼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유대나라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가 있었지요. 13절 중간부터 다시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기까지는 그들의 과거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그들의 현재 모습을 묘사합니다. 어떻게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요시야 왕은 율법의 말씀을 듣지 하나님의 기준에서 과거 역사를 바라볼 수 있었고, 율법의 말씀을 듣지 현재 유대 나라의 형편을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그들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다는 거죠.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듣기 전까지 그는 이전의 여러 왕들에 대해 경제적인 평가를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왕은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어느 왕은 유다를 통치하는 시절에 경제를 오히려 위축시켰다. 어쩌면 하나님의 율법책을 듣기 전까지 요시야 왕은 이전의 왕들에 대해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왕은 적국과의 전쟁이나 다양한 외교를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혹은 어느 왕은 적국에 대해 대처를 잘못해서 오히려 국가의 큰 위기를 초래했다. 뭐 이런 평가를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율법책의 말씀을 듣지 그에게 하나님의 명확한 기준이 생겼어요. 그리고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분명한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과 귀가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듣지도 않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당신도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죄인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키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왜 죄인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감옥에 들어가거나 형사처벌을 받을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데 왜 자신이 죄인이냐고 오히려 반문하지요.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거나 듣지 않는 사람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아니, 지금까지 내가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아냐고, 지금 그래도 이 정도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노력했고, 내가 노력했고, 우리 가족 식구들이 열심히 노력하며 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없으면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 모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에게도 성경의 기준이나 성경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관점이 밀고 들어올 때가 있어요. 여러분, 세상의 관점과 세상의 기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위협할 때, 어떻게 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그리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분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읽는 길 – 성경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자 과거의 역사가 정리되었어요. 그리고 현재 유대 나라의 형편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진단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눈만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중요한 말씀을 주시지요. 오늘 본문 16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제 하나님은 요시야 왕에게 율법책을 근거로 미래의 일을 예언하십니다. 율법책의 내용 그대로라고 말씀하시죠. 다시 말해, 유대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율법책에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통해 자기 민족의 과거도 볼 수 있었고, 현재도 볼 수 있었고, 나아가 미래의 역사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책이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미래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그 미래가 이미 정해졌기에 도저히 변경하거나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내용이 오늘 본문 19절에 등장합니다. 19절의 말씀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율법책의 내용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 그대로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재앙의 날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유대 나라에 대한 심판을 결정하셨어요. 그런데 19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 곧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미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요시야 왕이 듣고 그의 마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드러워졌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그의 마음도 찢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19절 마지막입니다. “나도 너의 말을 들었노라” 하나님도 요시야 왕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율법책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어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부터 지금 요시야 왕의 시대까지 줄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제 유대 나라에도 율법책에 기록된 그대로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하나님은 미래의 심판을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소망이 있어요. 여전히 변화의 가능성이 있어요.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드러워졌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그의 옷을 찢고 그의 마음도 찢고 통곡하며 자복하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바로 그 요시야 왕에게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부드러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옷을 찢듯이 여러분의 마음을 찢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 가정의 평안을 약속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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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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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국제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는 감옥에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고 합니다. 시의 제목은 ‘진정한 여행’입니다. 그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나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을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오늘 본문 창세기 47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나이는 130세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삶을 묵상하면 할수록, 나짐 히크메트가 감옥에서 노래한 이 시만큼 130세 된 야곱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던 분들은 야곱의 삶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갖고 계실 것입니다. 야곱의 팥죽 사건이라든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사건이라든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수일처럼 여기면서 열심히 일하는 장면 등. 우리는 야곱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갖고 계신 야곱에 대한 모든 정보를 총 동원해서 추론해 보십시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이라는 인물이 한 평생 추구했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야곱이 한 평생 추구했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다양한 대답이 물론 가능하겠지만, 저는 그 대답을 창세기 30장 30절에서 찾았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신이 일한 대가에 대해 라반과 의논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열심히 일했고, 그 일의 대가로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얻었고요, 또 큰 재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라반과 협상하면서 야곱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30장 30절 하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열심히 일해요. 열심히 일하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계약 조건에 따라 재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내를 얻고 재물을 얻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했던 그 모든 노력은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야곱 자신의 집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가정을 세우기 위해, 배우자를 찾고 자녀를 낳으며 재물을 모으려는 노력의 연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자 

야곱은 그의 젊은 시절, 자신의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 가지를 확보하면 자신의 가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첫째는 배우자입니다. 

야곱의 러브스토리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지요. 야곱이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라헬”입니다. “라헬”. 여러분, 야곱이 라헬을 처음 만났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급하게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나서는데, 이거 그냥 한번 해보는 말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정말 미친 듯이 달려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까지 가지요. 자,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는 아버지 집으로 달아갈 수도 없느다는 위기감이 그를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운명의 여자를 만났으니, 그 장소는 우물가입니다. 

자, 야곱이 먼저 그 우물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우물가에 있던 목자들과 대화를 하지요. 그 대화의 내용이 창세기 29장 7절과 8절에 등장합니다. 7절에서 야곱에 목자들에게 말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풀을 뜯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목자들이 야곱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8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답이 나왔습니다. 목자들이 우물에 도착했지만 양들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물 위에 큰 돌로 된 뚜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목자들이 모여서 함께 그 돌 뚜껑을 옮겨야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잘 보세요. 그 다음 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야곱이 라헬을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야곱이 라헬을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양 떼를 데리고 왔어요. 그러자 우물을 막고 있던 큰 돌 뚜껑, 여러 사람의 목자들이 모여서 함께 옮겨야 하는 그 돌 뚜껑을 야곱이 혼자서 옮겨 버립니다. 그리고 라헬이 데려온 양 떼에게 물을 먹이기 시작하는 거죠. 여러분, 야곱은요, 라헬을 보자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큰 돌 뚜껑도 옮겨 버립니다.  

야곱이 그렇게 첫눈에 반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칠년 더하기 철년, 도합 십사 년을 죽도록 고생하며 일을 했는데,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 29:27)는 성경의 선언은 유명하잖아요. 

야곱은 한 사람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마침네 그녀를 자신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야곱은 분명한 확신이 있었을 거예요. 내가 저 라헬이라는 여인을 얻는다면, 나의 이 불타는 사랑이 저 여인을 내 아내로 취할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한 가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야곱이 라헬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려 했던 그 모든 노력은 자신의 가정을 세우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잖아요. 야곱이 취했던 네 명의 아내들 중에서 가장 먼저 하늘나라로 간 사람이 누구죠? 레아인가요? 실바인가요? 빌하인가요? 아닙니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요. 그것도 나이가 많이 들어 지병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이 참으로 얄궂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편으로 인해서, 아내로 인해서 이토록 큰 아픔을 주시는 거지요? 왜 그토록 금술 좋던 부부가 한순간에 배우자를 잃어야 하느냐고요. 


자녀들 

야곱은 그의 젋은 시절, 세 가지를 확보하면 자신의 가정이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였는데, 그 첫째는 배우자였지요. 특별히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었습니다. 둘째는 자녀들입니다. 야곱은 자녀를 낳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레아와 라헬이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하였지만, 야곱이 싫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아내들의 요구에 다 응했죠. 아니, 그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던 겁니다. 

자, 그러면 야곱이 기대했던 것처럼, 아들을 12명이나 낳고, 딸도 1명 낳았으니 이제 그 자녀들로 말미암아 야곱의 가정이 세워지고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두 가지 사건만 말씀드리죠. 첫번째 사건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력을 당한 것이죠. 자녀들이 많아질수록 가정이 세워질 것만 같았는데, 식구가 많을수록 사건들도 많아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습니다.” 딸이 성폭력을 당한 이 장면에서 야곱의 가슴도 무너지고, 야곱의 가정도 무너지고 있었죠. 두 번째 사건은 요셉의 죽음입니다. 물론 요셉이 죽지 않았죠. 우리는 알아요. 그런데 야곱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뒤 20여 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요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그것도 들짐승에 물려서 찢겨서 먹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37장 33절에서 35절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야곱이 아들의 죽음을 접하며 통곡을 합니다. 통곡하는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스올은 당시 사람들이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더 이상 못살겠다’는 거죠. 그럼요. 살아갈 힘이 나겠습니까? 자신이 평생을 다해 사랑했던 라헬도 죽었어요. 그리고 라헬이 자신에게 낳아준 아들 요셉도 비참하게 죽었어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살아갈 힘이 없죠. 

우리는 가정을 세우기 위해 자녀들에게 기대를 겁니다. 자녀들을 통해서 가정이 세워지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우리가 도무지 손쓸 수 없는 불의의 사고가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재물 

야곱은 그의 젋은 시절, 세 가지를 확보하면 자신의 가정이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였는데, 그 첫째는 배우자였지요. 그리고, 둘째는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재물입니다. 외삼촌 집에서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일한 이후에 또다시 6년을 일합니다. 왜요? 재물을 얻기 위함이지요. 아내들도 생겼어요, 자녀들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어요? 돈이 없거든요. 가정을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한 뒤에 자신의 20년 세월의 이렇게 회상합니다. 창세기 31장 38절부터 40절입니다.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 야곱은 결국 큰 돈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재산이 늘어났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인 창세기 47장의 장면에서 야곱은 부자일까요? 가난뱅이일까요? 돈이 하나도 없어요. 없어도 너~~~~무 없어요. 애굽과 그 주변의 지역에 7년의 풍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7년의 흉년이 찾아오는데, 지금 창세기 47장은 흉년이 2년 지속되었을 시점입니다. 여러분, 흉년이 2년 지속되니, 그렇게 돈이 많고 가축이 풍부했던 야곱도 가족들에게 먹일 하루 세끼 양식이 없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들을 애굽, 이집트로 보내서 양식을 사 오게 했잖아요. 

여러분, 올해도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가족들에게 하루 세끼 밥을 먹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노동의 강도가 뒷밪침 되어야 하는 건가요? 그런데 재물이라는 것이 2년 흉년이면 다 날아가요.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세우시겠습니까? 



평안의 17년 

야곱은 젊은 시절 세 가지를 얻으면 자신의 가정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배우자이고, 둘째는 자녀들이며, 셋째는 재물이었죠. 그런데 자신이 아둥바둥, 아등바등 배우자를 얻고, 자녀를 얻고, 재물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사시을 배웁니다. 그의 나이 130세, 130세에 드디어 그 깨달음을 얻게 되죠.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강력한 의지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17년이 시작되는 거죠. 

이제 야곱은 압니다. 자신이 아둥바둥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야곱의 아들 요셉은 이집트의 국무총리입니다. 젊은 시절의 야곱 같았으면 고위 관료들하고 거래했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저 가축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세우시렵니까?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재물을 모으려고 아둥바둥 살아봤지만, 그것으로는 우리의 가정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130세가 되어서야 깨달으시렵니까? 아니면, 이 모든 집착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여러분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면 기다리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시편 127편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그런데 여러분, 이 시편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을 잘 세울 수 있는가입니다. 시편의 처음이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가정을 세우려는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3절은 보다 구체적으로 자식농사를 언급하고 있어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식 농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가정을 세우기 위해 재산을 증식하는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아요. 이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나 능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이지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소개해드린 시, <진정한 여행>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디로 가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그때, 우리의 가정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명절을 맞이하면서도 마음이 마냥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은 이때, 비로소 여러분의 진정한 여행을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능력을 깨닫는 바로 그때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을 붙잡기 시작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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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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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는 성경의 인물은 바로 노아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또 언제 태어났는지가 매우 중요한 듯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고사성어 가운데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의 예를 찾아보더라도 사람이 주변 환경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살았던 애굽의 문화도 버리고, 그들이 앞으로 살게 될 가나안 땅의 문화도 취하지 말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문화도 아니요, 가나안의 문화도 아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들만의 문화를 일구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의 죄악 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나안 백성의 우상숭배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주변 환경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한 가운데에서 나만 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 사람이 중국집에서 가서 모두가 자장면을 시키는데 혼자 간짜장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하물며, 모든 사업체가 탈세하는 현장에서 혼자 수입과 지출을 정확하게 보고하여 정해진 세금을 내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연약한 우리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죄악 된 시대 속에 살아가는 의인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오늘 설교의 주인공, 노아는 오늘 우리의 시대보다 더욱 더 악한 시대를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7절까지 우리 함께 봉독하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굉장히 속이 상하신 듯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라고 표현하지요. 하나님께서 이토록 속이 상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읽은 성경에 나와 있지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한 두 사람이 죄를 저지르는 시대가 아닙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충만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시대인지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모든 인간과 모든 생물을 다 쓸어버리시기로 결정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악한 시대입니까?  바로 그때, 노아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시대에 살고 있던 노아의 인생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평가하지요? 
창세기 6장 9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그가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노아는 의인이라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선언해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을 바라보시며 너는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날아가겠습니까. 그런데 노아는 죄악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 그 죄악이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온 세상의 인간과 생물을 홍수로 쓸어버리실 정도로 죄악이 가득하였던 바로 그 시대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께 의인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부럽지 않으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죄악 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싶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깊이 노아의 인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러분, 노아가 몇 세까지 사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습니다. 이 부분이 여러분의 믿음에 걸림이 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사람이 950세까지 살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성경이 보여주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는 어리석음이 여러분들 가운데 없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왜 오늘날 인간의 수명이 100세 전후인지를, 그 이유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거기에 답할 수 없는 우리들은 노아가 어떻게 950세까지 살았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러니 대답할 수 없는 문제로 씨름하면서 성경의 참된 의미를 놓치는 일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습니다. 950년이라는 노아의 일생 가운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사건은 얼마 안 됩니다. 노아의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노아가 아들 세명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500세 이후에 아들 세명을 낳았고, 그들의 이름을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붙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노아가 경험했던 홍수 사건에 대해서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때로부터 홍수가 다 지나고 방주에서 나올 때까지 약 일년 정도가 소요됩니다. 우리는 그 일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옷을 다 벗고 장막에서 누워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네, 우리가 성경을 노아에 대해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위의 세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노아는 950년을 살았습니다. 그 오랜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100년도 살지 못하지만 벌써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경험하였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 겪었던 일만 떠올려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머리를 스치고 있습니까? 노아는 950년을 살았다고요.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사건들은 고작해야 10년 도 안 되는 사건들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950년의 노아 인생 가운데 10년도 안 되는 생애를 기록해 놓고는 노아에 대해서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의인이라면, 성경이 평가할만한 그 시대 완전한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가는 모든 말과 행동과 생활이 다 의롭고 하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저는, 천국에 계신 노아 할아버지께서 노하실지 모르겠지만, 홍수 이후 포도주를 마신 뒤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장막에 누워있던 그 장면을 보면서 노아에게서 의인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아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상태로 잠든 것은 자신의 실수가 아닌가요? 그런데 노아는 그 사실을 보고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둘째 아들 함과 그의 자손 가나안을 저주한단 말이지요. 아니, 어떻게 이런 모습 속에서 노아가 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의 해답을 창세기 6장에서 찾고자 합니다. 창세기 6장 8절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바랍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특별히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악 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실 때,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선언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런 점에서 성경이 소개하는 그 어떠한 영웅들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자신의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애굽 사람을 쳐죽었던 살인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백성을 다스렸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의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은 파렴치범이었습니다. 한 사람만 더 소개할 까요? 신약 시대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박박던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쓰임 받은 믿음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가 600세가 되기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가 세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큰 홍수를 맞이하기까지, 곧 노아의 나이가 600세가 되기까지 노아의 삶은 굳이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했다는 것입니다. 그 악한 세대 속에서 노아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의로웠겠습니까? 홍수 이후에 포도주 마시고 장막에서 옷 벗고 누워 자는 모습이 600세 이전의 평소 노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노아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큰 홍수로 쓸어버릴 계획을 미리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비하도록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홍수로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리실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하셔도 노아 입장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할 수가 없어요. ‘왜 의인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도 홍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지 않았나요’라고 내세울 수 있는 노아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가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은혜가 풍성하니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죄악 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결심을 하셨지요? 이제 새해를 맞이한 지 열흘이 되었습니다. 이 열흘 동안 새해 결심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보시라고 하면, 적지 않은 분들이 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연약하여서 결심하고 또 결심을 해도 그것을 지키지 못해요. 하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의 결심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큰 홍수로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방주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열심히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충만하여 말씀에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행위로 인정하십니다. 창세기 6장 22절의 말씀을 우리 다 함께 찾아서 읽겠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7장 1절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저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크리스천을 평가하시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노아는 600세 이전까지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방주를 만들자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여러분, 방주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걸렸을까요?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으니 여유 있게 10년 정도 걸렸다고 합시다. 방주 안에 모든 생물을 인도해서 그들을 돌보았던 시간은 약 1년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몇 살까지 살아요? 950세까지 삽니다.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서 동물들과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약 10년 정도라 하더라도, 950세까지 살았던 노아에게 10년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한 일년 정도의 시간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서 일년 정도 전력으로 헌신하며 달려갔더니, 하나님의 평가가 뭡니까?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한 번 순종해볼만 하지 않으세요? 

한 평생 순종하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헌신하며 봉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홍수를 보낸 이후 노아는 얼마나 기뻤는지 포도주 마시고는 옷을 다 벗고 장막에서 누워 자잖아요. 그 정도의 실수는 노아의 자녀들이 덮어주고 하나님께서 덮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홍수가 일어날 때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물의 종을 보존하여 준 노아를 의인이라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크리스천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 방식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치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들의 의로운 행동들만 기억하시려고 작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 한 가지를 행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허물, 잘못, 죄악들은, 마치 노아가 벌거벗은 상태로 누워있을 때 두 명의 아들이 옷으로 수치를 덮어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여러분의 모든 허물과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덮어주십니다. 


언약의 사람, 노아 

저는 오늘 노아에 대한 인물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노아의 일생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노아는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 언약이란 약속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약속을 뜻할 때 바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9장 8절부터 10절까지 우리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 곧 약속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그 내용이 11절에 나오지요. 제가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너희는 또 다시 범죄하지 말아라. 만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면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하지 않아야 심판이 없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하나님께서는 이제 홍수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 곧 언약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 곧 언약을 지키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노아와 노아의 후손인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입니다. 

노아는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홍수로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는 그 순간에도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노아가 실수하여 벗은 몸으로 장막에 누워있자, 그의 아들들을 통해서 수치를 덮어주십니다. 노아가 950년 일생 가운데 가장 의롭게 행동한 행동, 곧 방주를 만들어 모든 생물의 종을 유지한 그 일을 두고두고 기억하시며 성경에까지 적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 노아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새언약을 마음에 새기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언약의 사람입니까? 

여러분 역시 노아와 같은 언약의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때로 실수하고, 범죄하고, 잘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수치를 덮어주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노아와 같은 언약의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때 하나님은 그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노아와 같은 언약의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거대한 홍수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건지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노아와 같은 언약의 사람이라면, 이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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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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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ambitious is one of the important privileges for young people. 

If you observed a new movement like Jesus movement in the Jewish society, which was oppressed by the Roman Empire and overwhelmed by the strict legalism, and if you were young enough to devote yourself to a promising movement like Jesus movement, wouldn’t you join the movement? 

John Mark had no opportunity to join the movement of God’s Kingdom led by Jesus. However, he was a lucky man. After the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f Jesus, the disciples of Jesus gathered in Jerusalem. And they kept praying. Do you remember where they were praying? It was the upper room of John Mark’s house. So, John Mark experienced the moment of Holy Spirit at the day of Pentecost. 

Can you imagine the moment? It was the moment of Holy Spirit, the moment of presence of God, and it was the initial point of a new family of God – the Church. 
From the experience, John Mark was confident that it was a totally new movement ordained by God. Then, he aspired to join the movement deeper and deeper. And finally, he took a great chance. 

Acts 13:5 says “When they [Barnabas and Saul] arrived at Salamis, they proclaimed the word of God in the Jewish synagogues. John – our character John Mark - was with them as their helper.” 

John Mark was filled with the confidence of God’s calling. 
He was excited by the new vision. 
He was sure that he would be a heroic figure in the new movement like Paul and Barnabas. 

When I was eighteen years old, I went to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in Seoul, Korea. 
At that time, I had a big dream: I will be a great pastor, I will be a great preacher, and finally God will use me to lead big congregation to God the father, by using me – especially by using me. 
I can remember what kinds of books I read in the seminary. They were biographies of heroic pastors and heroic preachers. I enjoyed identifying them with myself. 
I was confident, I had no doubt, if I follow the vision of God and the calling of God, I would be a hero like Abraham or David in the Bible and like Billy Graham or David Cho among the contemporary preachers. 

But, you may know the final scene of John Mark’s trip with Paul and Barnabas. 

Acts 13:13 says “From Paphos, Paul and his companions sailed to Perga in Pamphylia, where John left them to return to Jerusalem.”(x2)  

Long time was not needed until Mark recognized the reality of mission - the reality of ministry. The ministry and the mission are not conducted in heaven. We do ministry and preach standing on the ground. Our ministry absolutely includes some honorable factors like proclaiming the gospel as a messenger of God, observing the presence of God, and listening to the confession of somebody who met God through our ministry. 
However, Mark John also was required to travel long distance by foot. He was required adapt himself to exotic atmosphere, and he was required to confront the antagonists who oppressed him. It is the aspects of our ministry. 

When I was a seminary student, I studied theology very hard. I am serious. I studied literally hard. I was a good student whether you believe or not. 
However, I did not need long time to recognize the fact that my theological knowledge cannot make me powerful preacher. I could discuss on trinity theologically and philosophically. And, it could give me A grade in seminary class, but it could not give my congregation any powerful message. 
I could find some points that seemed to be very important to me and to my congregation during reading the Bible. So I taught them and preached them with the confidence that my audience would also experience aha moment in their lives. But, it was just my dream not my reality. 
Do you know what the most tragic fact was to me? I could criticize the local church that I was involved and the pastors of the local church. But I had no ability to renovate the church and our ministry. 
My dream I dreamed when I went to the seminary was not a dream but an illusion. 

Acts 13:13 says “John left them to return to Jerusalem.”

However, brothers and sisters, who are called as pastors and preachers by God!! 

The story of John Mark does not stop at this moment. 

From his coming back to home, not a short time passed. 
And, Paul the apostle wrote a letter to Timothy. 
And, he mentioned about John Mark in the letter. 

2nd Timothy 4:11 says “Only Luke is with me. Get Mark and bring him with you, because he is helpful to me in my ministry.” 

Do you remember what role of John Mark was when he accompanied Paul and Barnabas? 
He was a helper. 
At the scene of his coming back to Jerusalem, he seemed to be an unsuccessful helper. 
However, Paul finally wrote about him “he is helpful to me.” 
“John Mark is useful in my ministry.” 

As a pastor, as a preacher, 
we may have a big dream to be used as a useful tool of God in God’s ministry. 
However, we are required to do ministry and preach standing on the ground. 
It is the reality of our ministry. 
So, we suffer our disability and our limitation. 
Sometimes, we are desperate because of our disability and our limitation. 

Nevertheless, Nevertheless! 
Although we cannot help weeping in the ground of our ministry, 
Our Lord Jesus Christ whisper to us, 
“You are helpful to me.” 
“You are useful in my ministry.” 

Most of us are not heroic figure in ministry. 

Nevertheless, Nevertheless! 
You are, We are helpful to God. 

Most of us seem not to be a powerful preacher like Martin Luther King or Billy Graham. 

Nevertheless, Nevertheless! 
You are, We are useful in God’s ministry. 

- Preaching in D. Min Class “Incarnation Preaching” / Jun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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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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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amous K-pop group (Korean pop) group called “Defconn” sings an interesting song. 
The titled is ‘a wild goose.’ 
This song being like this: 

They sing the heart of goose father like this. 

Loneliness sinks deep into the heart. 
I want to put the clock back. 
I hope my miserable destiny to help us 
to seek wings of happiness. 


The song continues. 

This thanksgiving as well, 
I would celebrate alone. 
Cannot remember how well we were, 
when we will reunite again, 
and I cannot remember how old my child is 

Lightening the cigarette again, 
I return to my home where nobody welcomes me. 


Naaman is one of characters in the Bible. 

He was a commander of the army of Aram in the time of Elisha. 

Bible says, 
“He was a great man in the sight of his master 
and highly regarded, 
because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 

Naaman was a valiant soldier. 

However, he had leprosy. 

Naaman, he had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He had also financial power. So, it seemed that he could possess everything he wanted with his power and money. 
However, he could not buy his health. 
He could not cure himself. 

Can you find out any similarity between Naaman and you? 

Our friends and neighbors ask us “how are you?” 
Then, we always answer “I’m good.” 
“I’m OK.” 
Actually, you seem to be very good. 
You seem to be OK. 

You have a good job. 
You have a luxury car and house. 
You can buy everything you want. 

And, you can afford your living cost as well as your family’s living cost, 
even though they stay abroad. 

Somebody else around you may envy you 
because they cannot send their children to the oversea for the purpose of education. 

But, let me ask all of you again. 
“Are you really good?” 
“Are you really OK?” 
“How are you?” 

Naaman wanted to cure his own leprosy. 
So, he traveled to Israel. 
He thought that his money might be useful; 
his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might be needed to heal his incurable disease. 

So, he took his huge property with him. 
And, he took a letter by the king of Aram, which was sent to the king of Israel. 

Naaman thought that 
if he brought the huge wealth and the letter of the king, 
Elisha, the prophet, would welcome him and would cure his body with divine power. 

However, Elisha never did it. 

Instead of it, Elisha ordered him to take off his clothes, 
to take off your social position, 
to take off your pretentiousness, 
and to wash your body with water. 

Do you think that your money can cure your heart? 
If your children enter a renowned university with your supporting, 
can your wounded mind be restored? 
If you send more money for your family, can it guarantee the happiness in your family? 

No. No. No. 

You need to take off your clothes. 
You need to take off your mask. 
You need to take off your proud mind. 

And, you need to wash your heart with the grace of God. 

Please remember. 

God our Lord always invite you to the river of God’s grace. 

- Preaching in D. Min Class “Incarnation Preaching” / June 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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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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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들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느헤미야이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사명을 위한 기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서에는 느헤미야가 어떻게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그 성벽 안에서 율법에 근거한 유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총독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직함을 나타내는 것이죠. 느헤미야의 사명은 유다 총독이라는 지위를 활용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그 안에 율법에 근거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의 그러한 사명이 그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기도의 제목이 지금 당장 나의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지금 당장 먹을 거 주세요. 지금 당장 입을 거 주세요. 지금 당장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라는 사실이지요. 물론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죠.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처음 세가지 기도 제목은 뭡니까? ‘주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그 마지막 시간에 참여하는 여러분, 마지막으로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어떠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물론 각자의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에 여러분 자신의 사명을 위한 기도가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사명을 위한 기도’의 특징 세 가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세대를 이어 계승되는 사명 

사명을 위한 기도의 특징, 그 첫 번째는 사명과 비전을 위한 기도가 세대를 이어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명도 주시고, 비전도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한 단어로 ‘언약’이라고 표현하죠.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누구에게 이어집니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이어져요. 그리고 또다시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은 이와 같이 세대를 이어 계승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하였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이 하루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눈물로 호소했지요. 그러나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은 외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루살렘의 모든 성전과 궁궐과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하며 눈물 흘려야 했던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다 무너져 버린 예루살렘, 황폐화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예레미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루살렘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예레미야의 기도로 끝나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예레미야의 기도로 끝나버리지 않아요. 예레미야의 뒤를 이어 누가 기도합니까? 다니엘이 기도하잖아요.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하던 70년 동안 다니엘은 매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였던 솔로몬 왕의 기도를 기억하며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한 평생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신의 그 기도로 말미암아 사자굴에 던져질 위험에 처할지라도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기도죠. 

그렇다면 여러분,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한 기도는 예레미야가 했고, 다니엘이 한 것으로 끝났을까요? 아니지요. 70년이라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기간이 마쳤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대인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바로 그들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 제사장으로서 간절히 기도하였던 사람이 있었으니, 곧 에스라입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평신도 지도자로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던 사람이 오늘 설교의 주인공인 느헤미야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그 순간에,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도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의 기간에 다니엘이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70년의 포로 시기가 마치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그 시점에,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에스라가 기도했고, 느헤미야가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명, 비전을 이야기할 때 ‘나의 사명’, ‘우리 시대의 사명’만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나의 짧은 생애 가운데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명, 성경이 이야기하는 비전은 스케일이 더 큽니다. 하나의 사명을 위해서, 하나의 비전을 위해서 한 세대가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제 일 세대가 기도했다면, 동일한 사명과 동일한 비전을 놓고 그 자녀들의 세대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 세대에도 그 사명과 비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그 다음 세대에게 계승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전이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명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란 세대를 이어 계승되는 사명인 것이죠.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 안에 사명을 위한 기도가 세대를 이어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그 소원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멈추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 오랜 세월 쌓인 기도가 응답되는 현장을 우리의 자녀들이 목도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소원을 품고 간절히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는 기도 

사명을 위한 기도의 특징, 그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느헤미야가 사명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서술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장 1-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수산 궁에 있었습니다. 수산 궁은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가 살던 곳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 관료였고, 수산 궁에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어요. 2절을 보시면 느헤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물었어요. 그때 느헤미야가 들은 대답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본인은 평안해요, 수산 궁에 있어요. 그런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느헤미야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다른 사람의 형편을 묻는 것부터 시작돼요. 나의 삶은 평안하고, 나는 수산 궁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사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명이나 비전은 10대 청소년이나, 20대 청년들에게만 해당되는 단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느헤미야는 이미 중년 신사입니다. 자신의 삶의 기반을 수산 궁에서 확고하게 잡고 있던 분입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는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듣고, 사명을 위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우리 자신의 형편이 수산 궁에 있는 느헤미야보다 못할 수도 있어요. 때로는 우리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능욕을 당하는 사람의 처지일 수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변을 돌아보는 거예요. 지금 나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보고, 그들의 형편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바로 이 자리가 우리의 사명을 위한 기도가 시작되는 곳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따르는 실천 

사명을 위한 기도의 특징, 그 세 번째는 기도에 따르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에 그 내용이 잘 드러나죠.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제 청하건대” 어떻게 해 달라고요? “기억하옵소서.” 이제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또 한 가지를 간구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오늘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가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기도 제목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 사람들’은 아닥사스다 왕을 비롯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고위 관료들입니다. 결국 느헤미야의 기도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출세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11절 마지막을 보시면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 곧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이 출세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 이유가 느헤미야 2장에 나오죠. 느헤미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황제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황제로부터 자신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것은 물론이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에 필요한 모든 자재들을 얻어 내었던 것입니다. 

사명을 위한 기도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돌아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사명을 위한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이 기도했던 바로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마치면서, 우리에게 한 가지 결심이 세워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사명을 위한 기도가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순간에도, 어떠한 순간에도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우리가 이러한 결단을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언제라도 나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소원이 우리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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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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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천천히 읽어보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에게로, 선지자에게서 백성들에게로 일방통행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인공인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선지자가 분명한데 하박국서 전체를 잃어보면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보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더욱 많습니다. 하박국은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으로 해답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바로 그 상황에 꼭 필요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힘이 있고, 우리의 믿음을 성숙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학생 한 명이 어느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됩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신학을 공부하면 나의 신앙에 엄청난 유익이 됩니다.” 저는 이 목사님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공부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머리에 쌓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나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그 지식은 비록 성경에 대한 지식이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나의 신앙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유익은 나의 간절한 기도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상관없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처해있는 바로 그 상황에 꼭 필요한 말씀이 여러분에게 들릴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고,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더 확고한 반석 위에 세워놓게 될 것입니다. 


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듯 질문하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하박국 1장 2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박국이 아무리 기도하여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하박국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였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시면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죄악이 가득한 모습, 패역이 가득한 모습이 하박국의 눈 앞에 펼쳐지는 바로 그 상황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나타나도록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죄악이 난무하고, 패역이 가득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박국이 말하는 죄악이 가득하고 패역이 난무한 현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한 의견들 가운데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 하나를 소개한다면 하박국 선지자가 ‘요시야 왕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요시야 왕은 남북 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가장 선한 왕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요시야 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였는데, 성전 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요시야 왕에게 가져오죠.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는 옷을 찢으며 깊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율법책에 근거하여 당시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고 남 유다 전체의 영적인 개혁운동을 펼쳤던 사람이 바로 요시야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은 요시야 왕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그런데 여러분, 이토록 우상숭배를 비롯한 죄악으로 달려가는 남 유다를 율법책에 근거하여 개혁하려했던 요시야 왕의 최후를 기억하시나요? 애굽의 바로 느고라는 왕이 앗수르 제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때 요시야 왕은 애굽 편에든, 앗수르 편에든 가담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요시야는 애굽이 아닌 앗수르를 선택하여 애굽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므깃도 전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요시야는 전사하고 맙니다. 의로운 왕, 율법에 따라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이켰던 왕, 바로 그 요시야 왕은 전쟁터에서 죽고 말지요.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요시야를 이어 남 유다를 다스렸던 여호와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통치 하에서 요시야 왕이 추구했던 그 위대한 개혁의 운동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춰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배반하고, 율법을 저버리며, 죄악을 저지르는 왕 중에는 오랫동안 장수하며 호의호식하고, 그 기간에 나라는 더욱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지는데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국가를 새롭게 세우기 위하여 노력했던 요시야 왕은 39세의 나이에 전쟁터에서 어의 없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는 거죠.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지라도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모든 백성들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요시야 왕이 죽자, 여호와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오는 왕이 없어요. 이 장면을 놓고 하박국은 슬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유다 땅에 존재하는 모든 죄악을 하나님께서 익히 보고 계시며,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갈대아인들, 곧 바벨론 제국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하박국이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마음으로 ‘아멘’하였나요? 아닙니다. ‘아멘’이 안 나와요. 오히려 하박국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유대 민족을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조금도 섬기지 않는 바벨론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질문에 하나님은 또다시 대답하십니다. 결국 때가 되면 바벨론 제국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하박국 2장 3-4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지금 당장은 부당하고 불의가 공의를 압도하는 것 같을 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히 존재하며,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펼쳐나가고 계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뭡니까? 바로 그 다음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하나님은 속히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나 조급한 인간의 마음에는 더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4절에는 매우 유명한 말씀이 등장하죠.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 하박국이 하나님과 기도하면서 깨달은 진리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섭리는 알고 있어요. 이미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라면 왜 그토록 의로웠던 요시야 왕은 젊은 나이에 전사해야 하고, 요시야의 개혁운동은 왜 그토록 빨리 시들어야 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하박국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비록 지금 당장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거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비록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현실에서조차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듣는 설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거죠.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우리 삶의 생사화복 역시 하나님의 손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 노력해도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믿음이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파하실 위대한 비전을 품고 계시다고 확신하지만, 과연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경우가 있다니까요. 바로 그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여전히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 듣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죄악과 패역이 가득할 지라도 참고 인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리스천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쁨과 찬양의 기도 

하박국은 현실 속에서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자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 가운데 하박국은 하나님의 귀중한 음성을 들었지요. 비록 마음이 조급한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을 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늘의 본문, 하박국의 기도는 기쁨과 찬양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부흥이란 유다 민족이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죠. 하박국은 유다 땅에 죄악과 패역이 가득한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갔잖아요. 여전히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아직 유다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은 여전히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박국의 기도는 이제 바뀌었습니다.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하박국은 3절부터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절 뒷부분을 보시면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기도는 오늘 본문 16절까지 계속됩니다. 하박국이 처해있는 현실은 여전히 죄악과 패역이 가득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가 눈에 보이지 않고, 여전히 부흥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하박국은 기도 가운데 바로 그 순간에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집중하고 나니, 17절 이후부터 시작되는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러분,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계신지 알 수가 없으세요? 
여러분,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가정을 붙잡고 계신지 알 수가 없으세요? 
여러분,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자녀의 삶을 붙잡고 계신지 알 수가 없으세요? 

만일 그렇다면, 하박국과 같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시각이 바뀝니다. 현실은 지금 당장 바뀌지 않아요, 현실은 지금 당장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기도 가운데 지금도 나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역시 하박국과 같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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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