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3. 3. 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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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교훈을 얻고 계십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던 중,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십자가는 어떠한 장소입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인류 최악의 범죄가 펼쳐진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던 우리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나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해습니다. 그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자, 레슬리 뉴비긴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의 죄악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죄악에 얼룩져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로 내모는 나의 죄악을 깨달아 회개하게 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침내 우리에게 또 다른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두 용서하셨다는 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입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사도행전 15장은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지하게 의논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초대 교회에 무엇인가 큰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할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루었던 핵심 의제는 단 한 가지였는데, 그 내용이 사도행전 15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행 15:1)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율법교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들, 곧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지요. 여기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태어난 지 팔 일이 지나면 할례를 받았거든요. 그러므로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대상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굳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은 이방인들에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이 명령하는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습니다. 그들이 할례에 대해 가르쳤던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의미가 무엇이라 말씀드렸지요? 첫째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곧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만 있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가르칩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이방인에게는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지요.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반박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우리’로 호칭하는 대상이 있고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이 있지요. 베드로가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곧 율법에 대해 모르고 그 율법을 준행하지도 않던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나 우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그 오랜 세월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어떤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을까요?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렸잖아요. 

첫째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요,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지요. 그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방인들 역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지만 십자가의 은혜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절) 

여기에서도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명사가 등장하네요.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유대인을 그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은 어떤 뜻이 되지요? ‘그들과 같은 이방인도, 우리와 같은 유대인도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이었고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믿음이지요. 


십자가의 가르침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복음의 은혜를 나 자신에게는 너무도 쉽게 적용하지만 그 동일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는 너무도 인색한 것은 아닐까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학장이었던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놀랍다고 찬양하면서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은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쳤던 유대 출신의 교사들이 범했던 오류,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범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없다고 여러분은 자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한평생 교회를 출석하며 충성으로 봉사하는 여러분들과 이제 막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새신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던 것과 동일하게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은 풍성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도 바울이 그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너희만이 아니라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깊이, 그리고 더욱 넓게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였다면, 이번 사순절에는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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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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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고통에 대해 사유해보면, 인생의 고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에게 왜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고, 또 내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결책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만일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고난의 또 다른 특징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부정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평안하고 안락할 때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이 모가 나고 마음 깊은 곳에 상처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길 수가 있지요. 내가 평안하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면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나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니 그 또한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레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이나 평안할 때는 차이가 나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고통의 시기가 찾아오거든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일어날 때, 곧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합니다. 그러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은 허물어집니다. 이처럼 홍수가 몰려올 때, 곧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고난의 일반적인 특징을 한두 가지 말씀드렸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왔을 때만 그것이 나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바라보며 공감해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는 아픔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경도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장면이 욥기입니다. 욥이 큰 고통을 당하였지요.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욥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욥 자신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욥 자신의 아픔일 뿐 친구들의 아픔은 아니라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헨리 나우웬은 “가장 치유하기 힘든 아픔은 나 자신의 상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언제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나에게 아픔이 찾아올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

우리의 경험도, 우리의 사유도, 그리고 동서고금을 박론한 인생의 지혜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은 지독하리만치 개인적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 모든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위대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25a절) 

지금까지 누누히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이나 고난은 언제나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고통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은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아픔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고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범죄 때문에 당하신 대속의 고난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지요. 분명히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내가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를 위한 고난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신비를 설명할 수 없어 단지 이 신비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가’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께 옮겨갔습니다. 전가되었지요.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내가 지은 수많은 죄악이 예수님께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에 내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친히 달려 그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입니다. 

자,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전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뒤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공로와 은혜가 이제는 우리에게로 전가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절)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는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성경의 선언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을 계속 읽다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가 합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분명히 다르지만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가지는 생사고락을 같이합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다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과 합해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도 합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예수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죽음이요,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자, 로마서 6장 3절은 우리와 예수님이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고난이 곧 우리의 고난이 된다고 말씀하지요. 바로 이어지는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합하였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 우리는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할 때,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과 하나되기를 추구하십시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순절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가 되고, 바로 그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세례와 성만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르치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되는 중요한 현장이 어디인지 말씀합니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로 합하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요, 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됩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어서 지금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였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한평생 세례를 한번 받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사건은 한번 일어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이미 접붙여진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현장은 어디일까요? 오늘도 우리가 행하게 되는 성만찬 예식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살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받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연합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이 신비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그 신비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이 있는 그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하여 주실 것이요, 바로 그때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얻고 예수님의 부활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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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2. 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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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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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누가복음 2장 8-20절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한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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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요한복음 1장 1-14절 “영접하지 않는 세상, 영접하는 성도”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을 맞이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1차 대유행으로 우리의 예배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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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에게 성경 퀴즈를 하나 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기적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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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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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여러 나라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우리나라는 태평양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새해를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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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여호수아 1장 “새롭게 출발하는 공동체”

몇 해 전 세례 교육을 하며 어느 성도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어떻게 세례 문답을 신청하게 되셨습니까? 세례 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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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스바냐 2장 1-3절 "카이로스의 시간을 준비하라"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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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요한계시록 21장 6절 "유한한 시간, 그러나 무한한 소망"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소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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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수세주일] 마가복음 1장 9-13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작년 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TV 드라마 가운데 이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도 작년 말 열심히 이 드라마를 챙겨 보신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실 것으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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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변모주일] 마가복음 9장 2-8절 “보라, 그리고 들으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지금이야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그곳의 랜드마크인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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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편 22편 “고난과 구원”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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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편 32편 1-11절 “죄 용서의 축복”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Cur Deur Homo?)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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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도행전 15장 9-11절 “모두에게 동일한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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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로마서 4장 25절 “우리의 범죄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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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시편 31편 5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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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복음 14장 32-42절 "겟세마네, 영혼의 고난"

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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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복음 15장 1-15절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는 오늘의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동사가 하나있습니다.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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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태복음 2장 19-23절 / 부활의 능력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약함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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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태복음 28장 1-10절 "두려움과 큰 기쁨"

코로나19의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2020년 부활절은 많은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부활절 예배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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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가복음 16장 1-8절 / 부활의 경험

언젠가 세례 교육을 받는 한 성도님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으려고 결정하셨습니까? 그 성도님의 대답이 저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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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누가복음 24장 / 부활의 증인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든 활동에 함께 했던 제자들도 이 사실을 믿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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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부활의 복음”

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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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믿음의 가정" / 여호수아 24장 14-18절

이번 가정에 대한 시리즈 설교의 주제는 다섯 가지입니다. 믿음의 가정, 소망의 가정, 사랑의 가정, 축복의 가정, 그리고 행복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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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소망의 가정" / 사무엘상 1장 10-18절

오늘의 주제는 소망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언듯 보면 소망은 힘이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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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사랑의 가정" / 룻기 1장 15-21절

오늘 주제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지난 이틀에 걸쳐 함께 생각해본 믿음과 소망과 함께 기독교의 3대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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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축복의 가정" / 요한삼서 2-4절

오늘 주제는 축복의 가정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6장을 보면, 제사장의 축복문이 등장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들은 민수기 6장에 등장하는 축복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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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행복의 가정" / 시편 128편 1-6절

오늘의 주제는 행복의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등장하는 시편 127편과 함께 시편에서 가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시편 128편은 아름다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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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베드로전서 3장 1-12절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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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느헤미야 1장 1-11절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면,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특별히 한반도의 국제 정세가 시시각각 변할수록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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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예배] 여호수아 22장 34절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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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에스라 3장 8-13절 “통곡과 기쁨, 그리고 감사”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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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골로새서 3장 15-17절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의 귀에는 매 순간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처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지심리학에서는 ‘칵테일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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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1장 3-4절 “성장하는 믿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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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마땅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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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정예배] 출애굽기 40장 36-38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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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정예배] 로마서 12장 13절 "서로 주의하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4장 13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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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2. 2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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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 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는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크고 무거인지 진지하게 숙고해보지 못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라도 가볍게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선언하면 모두 끝나는 일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깊이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죄악을 깊이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 살펴보는 일이지요. 바로 그때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깊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죄 용서의 복

본문 시편 32편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시편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던 이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그 복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어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2절) 

다윗이 노래하는 신앙의 참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를 용서받는 것, 나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신앙의 참된 축복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인물인데,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길이 있었을까요? 구약의 율법에 따라 범죄한 모든 인간은 용서가 아니라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죄를 저지른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가축을 끌고 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위한 속죄가 되게 하셨습니다(cf. 레 1:4).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려 우리 모든 성도들의 죄악을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 용서의 방법에 있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조금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도 그리고 신약성경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죄용서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복을 받으셨습니까? 마음의 평안, 가정의 화목, 교우들과의 교제, 물질의 축복 등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입을 열지 아니할 때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죄 용서의 축복을 노래하는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죄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선포합니다. 본문 3절부터 이제 다윗 자신의 경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여기에서 입을 열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죄의식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하루 종일 신음하였고 뼈가 쇠할 정도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다윗이 지금 묘사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죄를 범하였지요. 곧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사건입니다.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의 잘못이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지지 않고 씨앗이 되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곧,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밧세바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립니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있었습니다. 그러니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당연히 다윗 자신의 아이였지요. 그런데 다윗은 오늘 본문 3절의 표현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윗은 명령을 내려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전쟁에 대해 질문하는 듯하더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아에게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하룻밤 휴가를 줍니다. 다윗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분명히 다윗 자신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면서 그 아이를 다윗 자신의 아이가 아닌 우리아의 아이로 바꾸려는 시도였지요. 그런데 우리아는 그날 밤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시도가 이렇게 실패합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본문 3절 그대로이지요.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다윗의 첫번째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입을 열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게 되지요.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명령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입니다. 그렇게 밧세바는 사별하였고 다윗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행동한 다윗의 의도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마치 다윗과 밧세바의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인 것처럼 꾸미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다윗의 두번째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처리하고 그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합법적인 혼인관계를 맺었으니, 이제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자인 다윗 왕을 공개적으로 비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다윗의 죄악은 감추어지는 듯했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가 없잖아요. 다윗이 큰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다윗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감히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자신을 짓누르고 계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의 영적인 상태는 한 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 메마름입니다(4절). 나의 죄악을 말하지 않고 깊이 숨겨두면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결코 감출 수 없으니 우리의 영혼은 메마름, 곧 영적 기근과 영적 고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영적인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몸에 큰 질병이 찾아온다거나, 삶의 환경이 급격히 변해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침체를 겪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큰 죄악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순식간에 바싹 메말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는 나의 죄를 숨기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숨길 수 없기에 회개하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복할 때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숨기려 할 때 그의 영혼을 메말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죠.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을 다윗은 얼마나 큰 수치와 모욕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받더라도 회개할 수 있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절) 

다윗이 자신의 모든 허물을 하나님께 다 자복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그를 짓누르는 듯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그의 뼈가 쇠하고 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서 그의 영혼이 바싹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6a절) 

이 구절에서 “주를 만날 기회”라는 번역에 미주가 되어 있지요. 미주를 보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다고 나와있습니까? “죄를 깨달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라” 죄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까요? 당연히 회개의 기도지요. 다윗은 계속해서 회개가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와 축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6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거대한 홍수를 마주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요. 그런데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모두 회개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홍수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홍수가 그 사람을 삼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홍수가 와도 두렵지 않고 홍수가 그 사람을 쓰러트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특권이지요.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절) 

아니, 앞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짓눌러서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져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은신처가 되어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보호하신다고 노래하네요.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지요? 딱 한 가지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되니 이제는 환난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 용서의 축복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동행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환란이 찾아오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회개라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시작된 사순절 기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십시오. 우리의 회개가 깊어질수록 사순절을 보내며 누리는 십자가의 은혜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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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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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많이 듣고 또 부릅니다. 캐럴이라는 단어는 전 세계적으로 성탄절 음악, 성탄절 찬양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기원한 캐럴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야외 축제 등에 참여하면서 함께 기쁨을 표현했던 노래를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는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표현한 음악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에도 성탄절의 기쁨을 노래하는 곡이 많지요. 예를 들어, 찬송가 117장 “만백성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가 저 마귀 권세 이기고 우리를 구했네” 이 찬양의 마지막 후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주 오셨네” 어디 그뿐인가요? 성탄절이 되면 수없이 듣고 부르는 찬송가 115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크리스마스 캐럴만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인사합니까? MERRY CHRISTMAS!! 기쁨의 성탄, 즐거운 성탄이라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인사를 통해, 그리고 노래를 통해 성탄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 그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시는 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싶어 먼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경로를 변경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던 별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 바로 위에 머무르자,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 2:10) 

여러분, 동방의 박사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어린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직 30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준비한 예물을 드린 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후 성경의 기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동방의 박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이 주어졌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헤롯의 눈길을 피해 조심조심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이처럼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그 어떠한 유익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이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성탄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수여한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기쁜 성탄절, 즐거운 성탄절, 곧 성탄의 기쁨입니다. 

마태복음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던 동방의 박사들을 소개한다면,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목자들을 소개합니다. 목자들은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도 목자들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밖에서 가축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천사가 나타나 목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천사는 목자들에게 매우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인류의 구원자, 곧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1) 

여러분,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목자들의 입장에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었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기까지는 아직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30년이 흐르는 동안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목자들은 나이 많은 노인이 되거나 혹은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기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바라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그날 밤 예수님을 찾아온 목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기쁨의 성탄, 즐거움의 성탄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공생애는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공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탄생, 곧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사도 요한은 동방의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충만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아기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사도 요한에게도 하나님은 성탄의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즐거움입니다.


만백성 기뻐하여라

본문 시편 97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시편 97편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시인은 누구에게 기뻐하고 누구에게 즐거워하라고 초대합니까?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1b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워하자고, 바다에 떠있는 섬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만백성이 함께 기뻐하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탄이 선사하는 크고 위대한 기쁨은 성도들의 기쁨을 넘어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시편 97편 1절 말씀을 유심히 관찰하면 우리는 먼저 누가 기뻐해야 하는지 기쁨의 주체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편 97편 1절은 기쁨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1a절)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니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즐거워하고 바다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기뻐하자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을 때, 그리고 시내산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약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다스려 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는 회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위에 구름과 불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막에서 정해진 율법의 절차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통치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모든 장면을 다 소개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편 97편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던 그때의 장면을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등장합니다. 지금 시인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고 노래하며 만백성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감정만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기쁨이라는 감정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은 큰 두려움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위인, 레위인 중에서도 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로 향을 피워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잖아요. 이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분향을 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악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절차상의 문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로 그 불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도 아닌 레위인, 레위인도 아닌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97편은 무엇을 노래합니까?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은 물론이요 나아가 만백성이 기뻐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이요 곧 우리의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사건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나아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성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며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선포했던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에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날 매우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 지금 나의 삶에 성탄이 선사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이 보이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이날,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즐거움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도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려 주옵소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하였던 시인의 마음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며 기쁨으로 경배하였던 동방의 박사들과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득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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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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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Bresson)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단수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은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사진집이 195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수록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은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라는 작품입니다. 이 사진을 잠시 보시겠습니까? 기차역 뒤에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남성이 그 웅덩이를 뛰어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모습이 그 아래의 물에 반사되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매우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사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대목은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발과 그 아래 물에 비췬 그림자의 발이 이제 막 부딪치려는 찰나!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역동성과 함께 안정성을 한 장면에 담은 데 있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자신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밀이나 노하우가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은 수수께끼와 같아서 자신도 잘 모른다고 말입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은 잘 짜인 각본에 맞춘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폴 드 곤디(Jean François Paul de Gondi)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There is nothing in this world that does not have a decisive moment) 

비록 평범해 보이는 사람과 사물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결정적 순간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던 결정적 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를 살았습니다. 오늘과 같이 의료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대에도 175세이면 매우 장수한 것이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던 아브라함이지만, 그의 삶을 변화시켰던 한 순간, 곧 그의 삶을 완벽하게 변화시켰던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b-3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바로 이것이 결정적 순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만나 이렇게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 당신은 75세 되는 그때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받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였는데,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결정적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이나 노하우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질문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과 동일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내가 계획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마치 수수께끼처럼 알 수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할 때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찾아오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아브라함과 같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대표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단연코 출애굽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세월은 자그마치 430년이었습니다. 430년이면, 나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이제 나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세월이지요. 430년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가 애굽에서 종으로 살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손자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그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세대가 세대를 이어 애굽의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 무엇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아무런 전망이나 기대도 없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사건이지요. 그리하여 출애굽 사건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사건과 대해 이야기한 내용과 동일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순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니, 실마리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던 수수께끼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풀리듯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다고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바로 그때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지금도 기다립니다. 카리티에 브레송이 인용했던 문장, 곧 17세기의 프랑스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곤디의 문장 그대로,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다리라

본문 시편 80편에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회상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온 결정적 순간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 시편 80편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회상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셨던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러면 1절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두 개의 그룹, 곧 천사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따라가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본문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장면을 회상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시편 80편은 1절부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빛나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마치 모든 사진사들이 포착하고 싶어서 사람과 사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를 수 있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바로 그 순간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는 시편 80편은 감사와 찬송의 시가 아니라 간구와 탄식의 시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시편 80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모든 국민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80편은 나라가 멸망한 절망의 상태에서 출애굽이라는 과거의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노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한번 경험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며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이제 다시)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이제 다시) 빛을 비추소서 (1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이제 다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이제 다시)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준비하고 기다리라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한 후, 수많은 사진가들이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은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자신도 그 비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의 말년에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카리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만약 사진을 잘못 찍었다면 그림을 그릴 때 지우개로 스케치를 쓱쓱 지우고 다시 그리듯 사진을 다시 찍으면 됩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다 보면,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출애굽의 사건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리에게 찾아온 최고의 결정적 순간, 곧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리지요. 그런데 여러분, 대림절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다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삶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나의 삶에 친히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니,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는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어제는 결정적 순간을 놓쳐버린 사진작가가 오늘 또다시 찾아올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스케치를 잘못 그린 화가가 새롭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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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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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어느 집사님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의와 평화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재차 질문하였더니, 그분은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구한말 시작된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 성도들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우리나라와 민족이 더욱 풍성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주기도문의 한 대목이지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제왕시

본문 시편 72편은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제왕시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편을 말합니다. 우리는 시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안에 인간 왕을 높이고 인간 왕을 위해 기도하는 시도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이 그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1절) 

여기에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시편 72편이 왕이 새롭게 등극하였을 때 불렀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72편에는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두 개 등장합니다. 시편 72편의 표제어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20절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고 말씀하지요.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의 이름을 감안하면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때,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노래가 시편 72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제왕시와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시편에는 오늘 본문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제왕시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왕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절대 권력을 소유한 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지요.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 본문 시편 72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장, 특별히 대부분의 동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첫 번째는 간구와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간구와 기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보십시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1절) 

본문 11절은 간구와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우리 왕 앞에 모든 왕들이 부복하게 하시고 모든 민족이 다 그분을 섬기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추론한 것처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시편을 노래했다면, 그들의 노래는 솔로몬을 위한 중보기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라는 기도였겠지요.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스라엘이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72편을 ‘중보기도’라는 생각 하면서 본문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게 해 주시고]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게 해 주시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시고]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소서] (12-13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 했겠지요.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통해 힘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기도로 이해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이 땅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고대 사회와 같이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하기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땅의 정치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공의와 정의를 행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이 땅에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사건으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이 당에 더 이상 삶이 고달파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본문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비록 이 땅에 억울한 희생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롭게 공의롭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은 시편 72편을 따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유대인들이 시편 72편을 처음 노래하였을 때, 그들의 노래는 주로 중보기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서 많은 백성들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고 솔로몬이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를 기도하였겠지요. 물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가운데 응답해 주셔서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말년은 어땠습니까? 그는 우상 숭배에 빠졌고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았지요. 솔로몬의 과오는 이스라엘을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남 유대의 많은 왕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겠지요.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그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져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하는 처지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본문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유대인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물론,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로만 이해한다면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래했던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 외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자,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본문 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실제로 한글 성경의 번역은 중보기도가 아니라 예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기로다 (11절)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한 왕을 세워주십니다(요 19:19). 그리고 그의 앞에는 모든 왕들이 부복하고 모든 민족이 그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왕은 한 나라의 왕이나 한 민족의 왕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왕 중의 왕, 곧 만왕의 왕이 되시지요. 본문은 그러한 왕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예언의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성취되었습니까?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예수 그리스도는]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의 생명을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구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네요)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2-14절) 

대림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왕과 통치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지요.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어느 인간 통치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셨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대림절을 보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5절) 


대림절 찬양

시편 72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지요.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에 시편 72편을 자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작곡가였던 아이작 와츠가 시편 72편을 기초로 작고한 찬양입니다. 그 찬양의 제목은 “Jesus shall reign”으로, 찬송가 138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다스리시고>입니다. 이 찬양은 시편 72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노래하지요. 그래서 햇빛을 받는 모든 곳이 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찬양의 가사를 살펴보면, 아이작 와츠는 시편 72편을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기도와 간구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의 2절 가사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리니 그 기도 향기 되어서 주 앞에 상달하도다” 아니,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시편 72편의 예언이 성취되었는데 왜 또다시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 완성의 모습도 그려주는데,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6-17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2000년 전에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거하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시편 72편을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거짓과 불의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기보다 자신의 유익만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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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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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9. 8.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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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4장 13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다시는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씀 이면에는 지금까지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하는 모습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의 언행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을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성도들 가운데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였지요. 이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던 바울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자”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권면에 이어 또 하나의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여기에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제”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서로의 출신과 혈연을 넘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넘어지게 하는 그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서로 주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가 서로를 비판하지 않고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서로의 앞에 놓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은 아름다운 가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서로 비판하지 말고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도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서로의 약점과 아픔을 공격하거나 드러내지 말고 덮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드러내고 공격할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다투고 분열합니다. 그러나 덮어주고 용서할 때 화목과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식구들이 서로 받아주고 용납하고 포용하여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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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2022. 9. 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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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기 40장 36-38절)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의 내용을 기억한다면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었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번성하여지자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 왕이 그들을 더욱 압제하고 괴롭혔던 역사가 출애굽기 1장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부터 출애굽기 40장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 더욱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장면, 마지막 순간까지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뒤쫓던 장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격분하게 하였던 장면 등.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도 또 하나의 출애굽기 이야기입니다. 지난 9개월을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할 때도 많았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그의 군대와 같은 거대한 위협 앞에 좌절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우리를 보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의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시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아 방황할지라도 그 모든 과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나아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하나님만 믿고 나아갑시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도, 그리고 우리 모든 식구들의 걸음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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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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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12. 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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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본다는 새로운 경험에 흥미도 있지만, 비행기를 이용하여 하늘을 나른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착륙할 때까지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또 한 명의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 마음에 있었지요.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비행기에 대한 믿음,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에 대한 신뢰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 이처럼 정반대였다면, 그들의 마음과 감정에 따라 비행기 여행의 안전이 좌우될까요? 그럴 수 없지요. 비행기와 조종사를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설령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매우 유사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얼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호수 물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호수의 물은 표면만 얼어 있는 살얼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더라도 살얼음은 순식간에 깨어지고 그 사람은 호숫물에 빠지고 말겠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꽝꽝 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지금 보이는 얼음이 살얼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호수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비록 불안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있기에 그는 호수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겠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확신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신뢰하는지 곧 우리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대상입니다. 믿음이 확고하고 그리하여 분명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다면, 살얼음을 꽝꽝 얼어 있는 얼음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마음을 품더라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호수의 얼음이 살얼음 일지 모른다고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무사히 호수를 건널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의 토대는 든든하고 확고하다는 사실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시인의 기도

오늘 본문 시편 80편은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편 80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명한 확신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라기보다 믿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뒤 흔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80편 안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며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노래하는 장면이 꽤 길게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 대목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2-13절) 

시편 80편이 묘사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 12절과 13절이 묘사하는 내용은 북이스라엘이 아람이나 앗수르제국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침략을 당하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현재 형편은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이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현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은 본문 16절입니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6절)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습니다. 포도나무가 베임을 당하듯이 모든 주민이 앗수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시인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전통적으로 두가지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신명기 언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신명기 언약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르칩니다. 만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한다면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가 임하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직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믿음은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지요. 다윗의 왕조를 마지막까지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완전히 불탔습니다. 그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입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두 가지 믿음이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악인은 벌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저 악한 앗수르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10개의 지파가 모두 멸망했잖아요. 그러니 신명기 언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0개 지파를 이렇게 이방인의 손에 던져주시니 다윗 언약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지요. 이처럼 사마리아 성이 점령당하고,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계십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게 기도하고 있지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의 흔들리고 나의 확신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뢰가 흔들리고 계신 분은 안 계신가요?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의 마음도 흔들렸고, 시편 80편을 읊조렸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나의 눈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관련하여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믿음의 대상이 훨씬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바로 그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다시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내기 위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표현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바로 그 법궤에 두 개의 그룹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오늘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것처럼 이제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완전히 멸망해 버린 절망의 현장입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민족의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시인은 2절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기도는 확신에 찬 기도라기보다는 믿음이 흔들릴 때 드린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대상이지요. 시인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라고 기도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림절을 보내며 오늘 본문 시편 80편을 읽곤 하였습니다. 교회가 대림절 기간에 시편 80편을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본문 시편 80편에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시인이 기도하며 간구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기를 기다리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여 가슴 답답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의 임재를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인생에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성탄절이 오지 않아 여전히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만 계속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돌이키시고

시편 80편에서 시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편 80편이 계속 노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는 그 반대의 방향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3절) 

본문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여기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이니, 본문 3절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마치, 비행기를 탑승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비행기에 결함이 없고 그 비행기의 조종사가 잘 훈련을 받은 베테랑이라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겨울의 강추위로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얼음의 강도가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성탄의 진리가 우리에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에게도 필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도 나의 두 다리로 얼어있는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도 절망적이고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아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 그것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발걸음까지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 믿음이 흔들리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찾아올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믿음의 걸음을 계속 내딛으십시오.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이 찾아오듯, 오늘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삶에 우리 주님께서 깊숙이 찾아오시는 그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과 감정은 요동치고 흔들릴 수 있지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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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