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11. 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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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귀에는 매 순간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처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지심리학에서는 ‘칵테일파티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운집한 파티장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런데 시끄러운 파티장 안에서도 연인들은 주변의 소음은 무시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큰 불편 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칵테일파티 현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콜린 체리라는 분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 과정에는 ‘칵테일파티 현상’이 일관성 있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참으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때로는 기쁨의 함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의 통곡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요.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소식이 들려오는가 하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도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길을 걷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처럼 예배당을 찾아 하나님을 예배하면 함께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TV와 라디오, 최근에는 핸드폰을 통해 나와 상관없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도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귀에는 매일 수많은 목소리와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지요. 그리고 이른바 ‘칵테일파티 효과’는 지금도 우리의 머리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무엇을 듣고 무엇은 버릴 것인지 선택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담아 있는 것은 나의 귀가 들은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들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나온 일 년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보다 풍성한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지요. 올해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달려온 10개월 동안, 우리의 귀에 들어온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찌 감사할 것들만 있겠습니까? 지난 10개월 동안 여러분의 삶에 등장한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 가운데 불평하고 걱정할 거리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찰 것인지, 아니면 나의 처지와 환경에 대한 불평과 근심으로 가득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나에게 들린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선택하여 듣고 마음에 쌓아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에 불평과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은 모두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의 영을 주셔서 나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나의 삶을 무너트리는 생각과 이야기는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쁨과 감사의 언어들만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충만

오늘 본문에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여러 권면이 등장하지요.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는 오늘은 본문의 여러 권면을 ‘감사’라는 주제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권면을 감사라는 주제로 살펴보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을 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 특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자,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는 ‘충만’이요, 그 두 번째는 ‘찬양’이요, 마지막 세 번째는 ‘실천’입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라 하라”(15a절) 계속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15b절) 하나님께서 성도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의 목적이 등장하네요. 그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마음의 평강이지요. 하나님께서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골로새교회 성도들이여,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십시오’라는 권면입니다.

본문 16절에는 또 하나의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야기하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은 넓은 의미로 신구약성경이라고 적용할 수도 있고, 좁은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15절과 16절의 말씀을 종합하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너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고, 너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장한다, 혹은 풍성하게 한다는 것은 거의 동일한 의미죠.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지요. 심지어 우리가 크고 작은 잘못을 행할 때에도, 심지어 우리가 크고 작은 죄를 범할 그때에도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이 온전히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는 것을 넘어,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며 기도하는 바는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 곧 예수님의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하며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그런 점에서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충만입니다. 내 안에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요,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해지는 것이요,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충만한 삶을 위해, 지금도 여러분의 귓가에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겠지만 그리스도의 평강에 집중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온전히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며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감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찬양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두 번째는 ‘찬양’입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5절)

바로 여기에 “감사하는 자”, 곧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권면이 등장하지요. 눈치 채신 것처럼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이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자, 그러면 감사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무엇일까요? 계속해서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절)

본문 15절과 16절에 감사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감사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보다는 구체적인 표현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참 고맙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으로 감사를 표현하라는 권면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히도록 해야 합니다. 곧,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충만의 삶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해지면 그 충만한 마음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성령의 은혜로 충만합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지요. 나아가 감사하는 사람은 그 충만한 은혜를 자신의 입을 열어 표현합니다. 바로 그것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입니다.

본문 16절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가지 용어는 그 지시하는 바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는 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할 때 시편을 외우곤 했거든요. 기독교의 2000년 역사에도 시편을 찬양으로 부르는 것은 예배의 매우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또 ‘신령한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노래는 대중이 부르는 통속적인 민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노래’라고 했으니 사람들에게 익숙한 멜로디나 민요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를 덧붙인 노래를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중요합니다. 본문 16절에 등장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16절의 마지막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여러분의 입술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10개월의 은혜를 기억하며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찬양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사람의 찬양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실천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두 번째는 찬양이지요. 자, 이제 감사하는 사람의 마지막 세 번째 특징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천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도 감사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네요.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러면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본문 17절의 앞 구절이지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우리는 이미 감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과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마음에는 성령의 충만을 누립니다.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아가 그의 마음에 충만한 은혜를 누리니 그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의 모습은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곧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인 ‘찬양’은 주로 예배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지금처럼 여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표현하지요. 또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예배할 때, 혹은 자신의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 이외에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이 ‘실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곧 나의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삶이지요.

2000년 교회사에서 매우 존경받는 성 안토니우스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AD 3세기와 4세기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다짐하며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생을 바쳤던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르지요. 성 안토니우스는 당시 사막의 수도사들 가운데 가장 혹독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훈련하였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 안토니우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우스, 너의 영혼은 알렉산드리아에 거하는 한 구두 수선공만큼도 완전하지 못하구나.” 안토니우스는 깜쪽 놀라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 구두 수선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지요. “자, 이리로 와서 저에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기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러자 구두 수선공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선생님, 저로 말하면 선행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일 뿐입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가 거주하는 도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제 일을 시작하는데,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해서 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늘 거짓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은 진실하게 지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보잘것 없이 시간을 보낸 때에는 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교훈합니다. 이것이 제 단순한 생활의 전부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5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분별하고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분별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하게 하십시오. 나아가 여러분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마음의 진실함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거짓을 멀리하십시오. 사람들과의 약속을 진실하게 지키십시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교훈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충만과 찬양과 실천의 삶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감사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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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6.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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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명, 북한군 전사자는 약 52만 명,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사자는 약 30만 7천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만 해도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런데 625 전쟁은 군인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죠. 625 전쟁으로 사망한 민간인의 숫자는 약 24만 4천 명이요, 그 외에도 실종자나 부상자는 더욱 많으며 그 과정에서 부모를 잃고 버려진 전쟁고아도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은 인명피해만 입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서 남북한의 경제는 사실상 초기화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남한 제조업의 약 42%, 북한 공업의 약 60%가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의 파괴와 도로, 교량, 철도 등의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625 전쟁은 예배당을 비롯한 기독교 시설을 무너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그 마음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해졌습니다. 이처럼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며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우리 모두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주관자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는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을 허락해 주시기를, 나아가 하루속히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의 시대, 평화의 시대

모세의 시대,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큰 전쟁을 치렀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요단 동편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고,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40년 간 광야에서 생활했던 시대에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은 성인이 되어 모세의 지위 아래 요단 동편을 점령하였고, 나아가 여호수아의 지위를 받으며 요단 서편을 점령하였습니다. 가히 그들의 일생은 전쟁의 삶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 여호수아 22장에 이르면 전쟁의 시대가 마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수 22:1-2) 

여기에서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다는 듯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수 22:3) 

지금 여호수아가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이라는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안정의 시대, 정착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수 22:4)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완벽한 평화는 아닙니다.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국지전은 계속되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모세의 시대, 나아가 여호수아의 시대에 펼쳤던 전면전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정착의 시대요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사람이 어느 시점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요단 동편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또한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반면, 그들의 다음 세대는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야기하는 그 전쟁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한 지역에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평화로운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지 답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약 7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625 전쟁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기보다는 평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남과 북은 전쟁을 끝낸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쉬고 있는 휴전이지요. 그래서 625 전쟁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과 국지전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약 70여 년 전 이 땅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교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분명 평화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 전쟁의 시대를 지나 안정과 평화의 시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

이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이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스라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가장 큰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시대, 곧 이스라엘 12지파가 함께 힘을 합해 적군을 상대할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그들에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 문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은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이스라엘은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히 나뉘어 있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단 동쪽에는 두 지파와 반지파가 정착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와 반지 파는 요단 서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강이나 바다가 있어도 그 위에 다리를 놓고 차도나 철도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왕래할 수 있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요단강과 사해를 건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여러분, 여호수아 3장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으로 요단강의 물이 멈추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에요. 그런데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정착의 시대, 평화의 시대에 요단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서편으로 건너올 일도 없거니와 요단 서편에 정착한 아홉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건너갈 일도 없겠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이 서로 왕래를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리되지 않겠어요? 이러한 위험이 지금 평화의 때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앞에 놓인 위험성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약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입니까?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었지만 온 한반도를 뒤덮었던 625 전쟁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평화의 시대를 보낸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서로 왕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분들이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정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분단이 고착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이 서로 나뉘어 있는 문제는 단지 정서적으로 나뉘고, 문화적으로 괴리감이 생긴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직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 안에 그 위험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수 22:24-25) 

여러분, 지금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걱정은 결코 괜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에는 요단강을 건너 서로 왕래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어요. 그런데 당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장소로 가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임재하시니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는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 곧 성소에 가야 제사를 드릴 수 있고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는 요단 동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단 서편에 있거든요. 그러니 요단 동편에 정착해야 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야 요단 동편에 정착을 해도 한평생 전쟁의 시대를 보내며 하나님을 섬겨왔으니 그 믿음이 변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22장을 읽고 묵상하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했던 그 걱정이 실제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서 현실이 된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휴전선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왕래가 멈추었지요. 이산가족이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도 크고 시간은 흐르는데 그리운 고향 땅을 찾아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슬픔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쟁 후 70여년이 흐르면서, 남과 북은 문화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며 살아가는 모습도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민족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자유롭게 교제하며 함께 모여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남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 가득 차 있어요. 서울의 밤하늘은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휴전선 이북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요단의 서편이든, 요단의 동편이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38선 이북이든 38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휴전선 이남이든 상관없이 우리 민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단 서편의 아홉지파와 반지파가 아무리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더라도 요단 동편의 두 지파와 반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만 아름다운 예배당에 함께 모여 마음껏 예배하고, 북녘의 동포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깊은 지하 교회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면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어찌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요단 동편에 정착하였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자신들의 후손이 너무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단 동편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요단강 가에 제단을 하나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엣이라고 불렀지요. 여호수아 22장 마지막절은 그 제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수 22:34) 

본문이 설명하듯이 ‘엣’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34절은 그 앞에 매우 중요한 표현을 첨가하고 있네요. “우리 사이에”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할까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와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를 모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엣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지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뿐만 아니라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625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휴전선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휴전선 북쪽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그들의 후손이 요단 동편에 거주하든지 요단 서편에 거주하든지 상관없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엣이라는 이름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625 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지파들이 ‘엣’이라는 제단을 쌓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 마음으로 오늘 우리도 우리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휴전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이 땅 한반도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넘치며 이 땅 한반도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이 넘쳐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마침내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는 그날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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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4. 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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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한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였습니다. 먼저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을 부활절 날짜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은 구약성경에 따라 아빕월 14일 – 그런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아빕월을 닛산월이라고 불렀어요 – 그러니까 닛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의 유월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고, 그날 저녁에 붙잡혀 바로 다음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그 날짜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금식도 하고 성만찬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정해진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키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지겠지요. 마치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해 놓으니 매년 성탄절의 요일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AD 2세기경,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던 것과 달리,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을 중심으로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요.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기독교에서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 곧 주일에 부활절을 지킬 수 있도록 날짜를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집니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AD 2세기 소아시아 교회와 로마의 교회는 서로 다른 날 부활절을 기념하는 두 가지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각주:1]

그런데 이러한 전통에는 날짜와 요일이라는 눈에 보이는 기준보다 더 중요한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닛산월 14일, 곧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기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매우 강하지요. 반면,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삼는 전통은 바로 그 요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 가운데 무엇이 더 옳고 무엇이 더 그르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이러한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고대교회로부터 견지하였던 진리의 두 기둥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코 놓칠 수 없는 진리, 기독교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리,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요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입니다. 


복음의 두 기둥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진리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면서 복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하지요. 그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3절과 4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이요, 또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시기만 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에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셨다면 이번에도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의 상태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게는 지난 사순절이요 짧게는 지난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셨다면 이제는 부활의 복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만 있으면 안돼요,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인생의 참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바로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부활의 복음이 살아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고 새로운 희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의 두 기둥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1a절)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이야기하면,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겠다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전한 복음,’ 그 복음은 ‘너희가 이미 받은 것이요 또한 너희가 이미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미 알고 있고, 그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복음을 알려주고 가르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처음 믿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복음의 은혜가 나의 마음에 가득 넘쳐서 찬양을 한 곡 불러도 감격이 되고, 기도를 한마디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큰 기쁨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1~2년이 아니라, 10년이나 20년, 혹은 그 이상 하신 여러분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느꼈던 그 구원의 감격이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혹은 10년이 지나도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남아 있던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어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그렇게 나의 삶에 소망과 희망을 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구원의 감격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흩어져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어도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로 치부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점차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면서 세상의 걱정, 세상의 염려, 세상의 자랑, 세상의 관심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여기에서 알게 한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알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알려주겠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죠, 설명할 수 있죠. 마음으로 동의하죠. 그러나 그 복음이 그들의 삶에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니,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품고 오늘 본문을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어보면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강조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자,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두 가지 기둥을 서술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5절부터 보세요.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중략)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지금 반복되면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보이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괴로워는 우리 각 사람을 생명의 빛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곧 객관적인 진리로서 부활을 실현하신 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열두 사도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오백여 형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야고보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나아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도 바울을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 명씩 찾아가 만나주시니 그들의 삶에 부활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참된 소망이 임하게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삶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시고 임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가 영생의 충만한 은혜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절 논쟁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좀더 구체적으로 AD 2세기 고대교회에는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고, 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계산하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절을 계산하는 기준이 다르다 보니, 한쪽에서는 부활절을 맞이하였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고난주간을 보내며 금식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이지곤 하였지요. 그래서 교회는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자, 그러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과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는 전통 가운데 무엇이 점차 기독교 전역에 확산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요. 21세기 이 땅의 교회가 지키는 성탄절은 12월 25일로 날짜가 정해져 있지만 그 대신 매년 요일이 다르고, 부활절은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매년 주일에 지키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AD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매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 계산법을 간단히만 말씀을 드릴까요? “매년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맞이하게 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편할까요? 닛산월 14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편할까요? 당연히 사람들이 부활절 절기를 지키는 데는 닛산월 14일이 훨씬 편하죠? AD 2세기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검색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역사의 흐름은 손쉬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포기하고 주일이라는 요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진리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가운데 더욱 중요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래서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고난주간과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부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은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하잖아요. 그러나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지요. 계산이 복잡하다고요? 기억하기 어렵다고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계산하기 아무리 어려워도, 기억하기 힘들어도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곧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그들이 행한 위대한 사건과 업적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로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귀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나타나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도 크고 작은 일이 많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러분의 삶에 너무도 크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삶을 그 토대부터 바꾸어 놓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바로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실 때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이 찾아오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실 때 허무한 우리 인생이 비로소 값진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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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립 샤프,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이길상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205-2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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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3. 2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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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먼저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이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함께 묵상하였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거듭남의 비밀 등을 먼저 머리로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지식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지식이 있다고 하여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이 있으면서도 믿음의 두번째 요소인 동의는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종파가 가르치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파로 분류되는 이단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동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데,’ (그들은 성육신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은 대속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겠어?’ (마음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입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리라고 동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세번째 요소는 신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있고 동의하지만 믿음의 마지막 세 번째 요소인 신뢰는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이순신 장군이 군사전문가로서 매우 큰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큰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그 누구도 이순신 장군이 여전히 우리나라와 민족을 지켜줄 수 있다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동의와 신뢰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이제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 맡기는 신뢰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인간에게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계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믿음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지식,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라는 동의,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지식, 동의, 신뢰 가운데 어느 단계에 있으십니까? 


고통과 신뢰

시편 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은 지금 극심한 고통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인이 처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한 두개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시편 31편 9절) 

시편 31편은 지금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아픔이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시편 31편 10a절) 

지금 시인은 고통과 근심 때문에 몸과 마음이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만성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분위기가 암울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런데 시편 31편의 분위기는 이러한 예상과는 정반대입니다. 큰 고통 중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 아픔이 지속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소망이요, 오히려 평안입니다. 참 놀라운 반전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아픔 속에서도 시편 31편은 어떻게 그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편 31편 3절)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밑바탕에 든든히 깔려있고, 그 위에 간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편 31편 4절) 

지금 대적자들이 쳐놓은 그물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그물에서 나를 빼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고난 중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시편 31편의 뒷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편 14절)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기에 “그러하여도”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앞에 9절부터 13절까지 시인이 처한 위기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그리고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그러한 일이 모두 자신의 삶에 닥쳐오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저는 시편 31편을 읽을수록 이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신뢰가 형성되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당당함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으니 그 마음에 드넓은 대양과도 같은 평강이 넘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큰 아픔과 슬픔이 찾아왔지요. 물론 그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의 일생 동안 뼈아픈 가시가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 사람을 누가 불쌍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표제어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굳이 다윗의 삶을 이 시편에 대입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다윗이 누렸던 권력과 다윗이 이룬 성취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편 31편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부러운 신앙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지고 특별히 목사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도 시편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을 너무도 닮고 싶어요.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더니 재정의 문제도 사라지고 건강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고 자녀들에 대한 근심도 모두 다 사라졌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 같아요. 그 대신 한 평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때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도 그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은 더욱 풍성해져서 이제는 나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가득하다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큰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큰 확신과 평안을 누렸던 한 신앙인의 믿음의 깊이를 헤아려보십시오. 그에게 닥친 고통이나 환란이 사라졌든 그렇지 않든, 그가 당한 아픔이 이후에 전화위복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인생의 굴곡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뿌리 깊게 내렸기에 이제는 그 어떠한 아픔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의 거인, 믿음의 어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몰려옵니다. 시편 31편이 노래하듯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은 나의 일생동안 지속되며 나의 모든 날은 괴로움의 연속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크기나 그 아픔의 결과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삶에 거대한 고난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 우리의 신앙은 정말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평화를 누리며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뢰와 수용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가 시편 31편을 묵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시편 31편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시편 31편 5절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시편 31편 5a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일곱가지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라는 뜻으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였기에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인용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다 인내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숨을 멈추는 바로 그때 예수님은 시편 31편을 인용하며 성부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을 인내하신 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이 끝나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성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그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십시오. 시편 31편을 읽으며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였던 모습, 곧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누리며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서는 신앙의 거인은 결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저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곧 신뢰는 수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지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에 곧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뢰는 예수님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지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죽음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넉넉히 받아들이며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견고한 바위와 구원의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의 마음이 있다면 그 신뢰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어떻게 빚어가실지 몰라도, 심지어 지금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나에게 복이 아닌 화가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곧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지식은 있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지식과 동의의 단계까지는 나아갔지만 여전히 신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식과 동의와 신뢰를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신뢰를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여드리죠.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빠가 지켜보고 있었죠. 아빠는 높은 바위에 올라간 아이에게 아빠를 향해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높은 바위 위에 서 있는 아이의 눈에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면 혹은 바위 아래에 건장한 남자가 서 있기는 하지만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면 그때에도 이 아이는 바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이미지에서 저의 시선이 머무는 장명은 아이의 표정입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밑에 있는 아빠의 표정을 보면 어금니가 보일만큼 웃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지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아래에 아빠가 없다면,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저 사진에서 아이에게 불안한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유, 저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 아래에 나의 아빠가 있고 나는 그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라도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수용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시편 31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도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예수님과 같이 믿음의 거인이요, 믿음의 어른으로 성숙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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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2. 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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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의 고난

오늘 본문 시편 22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시편 25편과 마찬가지로 탄식시입니다. 곧, 깊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편이지요. 성경은 일반적으로 신앙인이 당하는 고통에는 다 목적이 있고, 그에 따르는 유익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지금 당장 너무도 아프고 쓰리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아픔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감추어진 성도의 유익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은 시편에 너무도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인 시편 34편의 몇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편 6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19절)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경은 고난을 통해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을 시편에서 찾아본다면, 시편 119편이 될 것 같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편 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고난을 통해 또다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 고난을 통과한 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더욱 성숙할 나 자신을 소망하게 됩니다. 


시편 22편의 고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에는 이와 같은 교훈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상황도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환난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삶에 큰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그 아픔은 너무도 쓰라렸지만,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시고 나아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고통은 더해가기만 하고 그 아픔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2편이 꼭 그와 같은 고난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 1절) 

지금 시인은 자신의 몸에 질병이 찾아왔다거나, 지금 당장 극심한 궁핍에 시달린다거나,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자들이 많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정황이 그다음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편 2절)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고난이 찾아왔다고요? 아닙니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기도했다고 말하잖아요.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밤낮 부르짖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신앙인들에게도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신다는 말이 최소한 시편 22편에는 안 맞아요.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을 기억하며 기도하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편 4-5절) 

이 구절에서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 ‘다윗의 시’라고 표제어가 붙어 있지만, 시편이 현재의 모습과 같이 150편으로 묶여진 것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라는 점을 기억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사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그 무엇이 되었든,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에게 행하셨던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였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과거에 큰 구원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구원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어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편 22편 6절) 

인간이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배웠고, 성경을 통해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인가 봐요. 내가 사람이라면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었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셔야 하잖아요. 우리 조상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그들을 큰 고통에서 구하여 주셨다면서요. 나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믿으며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만은 외면하고 계시니,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라 벌레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시편 22편의 깊은 탄식입니다. 


대속의 고난

여러분, 어떠세요? 성경이 고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이 시편 22편과 부합하지 않죠.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으로는 시편 22편의 탄식이 해석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시편 22편의 탄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시편 22편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것은 ‘대속의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그것을 ‘대속’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리고 마태복음은 그 의미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장 46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1절 외에도, 시편 22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묘사하는 장면이 참 많아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16절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편 22편 16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잖아요.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17-18절)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앞에 조금도 죄를 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밤과 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어요.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바로 그때,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였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귀를 닫으셨으며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섭고 그토록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대속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무거웠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무서워야 했고,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치명적이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참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인간들이 겪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홀로 감당하시는 대속의 고난이었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을 예언한 또 다른 예언자인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4-6절) 


구원의 은혜

시편 22편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홀로 견디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대속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모습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지만, 시편 22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의 대전제는 시편 22편의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이 묘사하는 대속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22절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22편 22절)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형제들에게 선포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편 22편 24절) 

우리가 곤고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살아왔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위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까지와 후반부, 곧 22절 이후의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집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21절 이전, 곧 전반부에서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있는 주인공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대적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뿐, 그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11절) 심지어 하나님조차 그를 버리셨지요. 철저히 한 사람의 고독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22절 이후, 곧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이 등장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매우 중요한 특징 하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홀로, 고독하게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렇게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의 고독한 대속의 고난이 우리 모두의 구원과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는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 하나님은 그 죄를 벌하지 않고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너희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토록 모질었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안셀무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무서운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범죄 한 인간이지만,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내버릴 수가 없으셨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버리시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직접 체험하였던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9-1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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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2. 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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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지금이야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그곳의 랜드마크인 금문교가 세계의 유명 관광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요.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 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몰려온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서 금문교를 관람하곤 하지요. 그런데 남쪽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동하는 방향에 마련되어 있는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은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그 다리를 배경으로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으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요, 화장실도 없어요.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20-30분을 주차할 때까지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의미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을 참 많이 보았지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의 일을 하고있을 때 자신을 찾아와 부르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도 모았지요.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고,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과 많은 장소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수 없이 보아왔지만 바로 그날 높은 산에서 뵙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마가복음 9장 2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변형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동일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다음 구절이 설명하지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마가복음 9장 3절)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자, 예수님에게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은 설명하거나 묘사하기가 참 힘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빨래를 해도 그 옷이 그 정도로 흴 수는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는 모습이요,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바로 그 순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영광스러며 너무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의 변화된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을 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마땅히 경배하며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에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아주 잠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매일의 출퇴근 길에 바라보았던 금문교나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머물며 사진을 찍는 금문교의 모습이 아니라,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비로소 보이는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의 참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월등히 아름다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화산 사건의 목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자 그들의 눈에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본문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와 목적입니다. 과연 성부 하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자(마가복음 8장 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처음으로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로부터 정확히 6일 후,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할 수난과 죽음을 가르치신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시고 그곳에서 변형되셨습니다(cf. 마가복음 9장 2절). 그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다시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9장 12절).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위치한 마가복음 9장이 채 마치기도 전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모든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9장 31절).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죠.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가르치시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흐름은 교회의 절기에도 적절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이지요. 곧,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그 모습이 변모되었던 오늘 본문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음 주부터 어떠한 절기가 시작되나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자, 그러면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명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비록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계속 말씀하고 계시지만,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것이지만,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게 되겠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실 것인데, 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십자가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수요일부터 40일간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에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 있음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겉모습은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인생에는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며 헌신하였지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으니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뿐이요, 여러분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전심으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힘을 내어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십시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 하나님은 높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더라도 주님이 누구인지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넘기 어려운 한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딱 한 번만 일어났고 제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사건을 의심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그곳에서 무기력하게 채포되어 심문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셨잖아요. 과연 단 한 번의 변화산 사건, 그 짧은 시간의 경험이 제자들에게 이 모든 십자가의 길을 넉넉히 이겨낼 힘을 줄 수 있었을까요? 단 한 주의 산상변모주일이 이후 40일에 걸쳐 지속되는 사순절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충분히 불어넣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본문 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장 7절) 

성자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 성부 하나님께서 그름 속에서 직접 말씀해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러면서 이제부터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지침을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끊임 없이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비록 변화산의 사건은 단 한 번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들리니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충분히 제공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를 조금 더 멋지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의 마린카운티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이동하다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와 저의 아내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아픔이 찾아왔고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저희 부부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분명히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요.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은 유학생활 내내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무지개는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경험 후, 지금까지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아름다운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저희 부부에게 그와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떠 있던 무지개를 통해 우리 주님의 영광과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던 저희는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금도 우리 인생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없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는 여러분의 삶에 지금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인생의 산상변모주일에 비하여 우리 인생의 사순절이 더 길고 모질어,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되며 무의식의 저 먼 곳으로 잊힐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삶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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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1. 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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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세례 교육을 하며 어느 성도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어떻게 세례 문답을 신청하게 되셨습니까? 세례 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오신 분에게 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질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저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성도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저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이 후회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딱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리셋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 2020년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로 얼룩져있기에, 새롭게 시작하는 2021년만큼은 지난 시간을 리셋하여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도 없고, 오늘은 지난 과거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기에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의 장애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위해 이제 첫발을 떼려는 순간이지요. 그러나 여호수아 1장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저지하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장애물이란 먼저는 위대한 지도자의 상실이었지요. 여호수아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라는 이름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은 모세를 언급하며 ‘여호와의 종 모세’라고 서술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가나안 정복의 비전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어넣었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을 정복을 위해 모세만큼 적합한 지도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던 장애물은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욱 크게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던 장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실패의 경험입니다. 약 40년 전,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지도자로 모시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번째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나안 정복 시도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알려진 하나님을 향한 큰 죄악을 저지른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들은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에게 패배하여 호르마 지역까지 쫓겨나고 맙니다. 그 후로 40년, 그들은 요단 강 서쪽의 땅 가나안 정복을 단 한차례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실패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발목을 여전히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2020년을 보내고 새로운 2021년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출발을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세상을 떠나버리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있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새 해를 맞이하였고, 새로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떨쳐내지 못하여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은 지금 그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출발의 동력 -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장애물들이 있었지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죽음,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내리 누르던 과거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금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이유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기 때문도 아니요, 과거의 모든 과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모세를 잃어버린 여호수아, 과거 실패의 경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 1:3-4) 

모세는 떠났지만 모세가 전한 약속의 말씀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모세가 전한 약속은 모세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살아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실패의 경험은 바로 이점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에게는 모세라는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40년 동안 보류하셨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정복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더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살아 있어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모세가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신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과거 성공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들에게 허락하신 말씀과 약속을 지금도 성취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는 새로운 출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여러 가지 장애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새로운 출발의 기초는 인간 모세가 아니라 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오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과거가 언제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출발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과거의 실패 경험을 떨쳐버리는 담대함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7-8) 

 


동행 공동체 

여호수아 1장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출발이 여호수아나 몇몇 개인의 출발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표현되는 전 공동체가 함께 발걸음을 떼는 출발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작하려는 새로운 출발은 요단강 서쪽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세의 시대에 요단 동쪽은 점령하였고, 그곳에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가 차지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요단 서쪽을 점령하는 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단강 서쪽을 향해 전진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출발은 아홉 지파만의 출발이 되고 맙니다. 12지파로 구성된 전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에게 말합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수 1:14) 

놀랍게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여호수아의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수 1:16) 

오늘 본문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가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들이 순종한 것은 일차적으로 여호수아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이 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른 지파보다 먼저 요단 동편을 차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다른 지파들이 요단 서쪽으로 점령하기까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가 선봉에서 전쟁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비결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의 공동체가 어떻게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까요? 그저 한 사람이나 몇몇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새로운 출발을 향해 힘차게 달려 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인간 모세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과거의 성공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든 새롭게 출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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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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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2020. 12. 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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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을 맞이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1차 대유행으로 우리의 예배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3차 대유행은 성탄절 예배마저 온라인 예배를 강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복음을 축하하고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성탄절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고 때로는 공허함마저 몰려옵니다. 


영접하지 않는 세상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웅장한 필치로 시작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영광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한 요한복음의 본문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베어 나오는 것은 비단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성탄절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잠식당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 곧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본문이 서술하기 때문이지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0)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첫 번째 성탄절이 그러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지만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눅 2:7). 유대 왕 헤롯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율법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을 영접한 것은 목자들과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몇몇의 박사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첫번째 성탄절을 기억하며 사도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였다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다고 세 번이나 탄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성탄절의 이러한 쓸쓸한 모습은 그로부터 약 2000년이 지나 또다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영접하는 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첫번째 성탄절부터 약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둠을 틈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 3장),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물을 맛보았던 사마리아 여인(요 4장), 오래된 병을 치유받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요 5장),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된 맹인(요 9장) 등.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영접하는 자”에 대해서도 서술할 수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어둠은 여전히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굳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첫번째 성탄절부터 오늘의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 한쪽이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배당에 함께 모여 성탄절을 축하하며 기쁨의 예배에 참여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리하여 이 세상은 지난 2000년의 긴 세월 언제나 그러하였듯 우리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 넘치는 것이요,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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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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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6 “칼 바르트”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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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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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에게 성경 퀴즈를 하나 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기적의 종교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혹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과 기적이 무더기로 – 한 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 무더기로 떼로 나타나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의 시대는 과연 언제일까요? 

첫 번째는 모세의 시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하나님은 기적을 한 두 번 행하신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기적을 행하셨지요. 바로 모세의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습니다. 자, 그럼 모세의 시대 이후에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는 또 언제였을까요? 바로, 엘리야-엘리사의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멜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도 내려주시고, 온갖 신기한 기적과 이적을 무더기로 베풀어주셨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을 드리지요.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시대,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무더기로 다발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을 무더기로 떼로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그 어떠한 시대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했나요? 하나님의 기적을 그토록 많이 보았으니,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과 신앙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나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열 가지 기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애굽 사람들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 말 없이 보내줄 만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열 가지 재앙으로 나라가 다 망해버린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잡아가겠다고 그들을 따라오잖아요. 그러다가 모두가 홍해에서 수장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과 표적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 생길 만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그 땅을 점령해라 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잖아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도 생각해볼까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요. 갈멜산에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데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십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바알 신, 아세라 신, 그 외의 모든 우상들을 다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 나아올 만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더 이상 어떠한 기적을 보여줘야 하나님을 믿겠어요? 그런데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위대한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잖아요.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했다고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이적과 기사를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이적과 표적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이적이든, 표적이든, 기적이든 제 아무리 많은 이적과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믿음과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이적과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나의 매일매일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려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과 그 사람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요구와 예수님의 거절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짧은 대화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표적을 구합니다. 이적을 구합니다.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십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아예 다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 행동은 바리새인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적이나 기적을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기적이나 이적을 베풀어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마음에 결심을 했어요. 예수님을 힐난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적과 표적을 구했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리 큰 이적과 기적을 그들의 눈에 보여주어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퀴즈를 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적이 한 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가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는가 라는 퀴즈였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그 답을 아시죠? 모세의 시대와 엘리야-엘리사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퀴즈도 가능합니다. 신약 시대에 – 구약 시대가 아니라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 –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곧 기적이 무더기로 다발로 나타났던 시대는 언제였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몇 개 되지 않는 빵과 물고기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 얼마나 많은 기적과 표적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목격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주목해야 할 단어, 곧 이 말씀의 키워드는 바로 “이 세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 세대”라는 구절이 두 번 등장하죠?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세요, 기적을 보여주세요 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세대가 어떻게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 곧 그 세대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시대에도 주어지지 않았던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정도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 곧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성육신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기적이 더 필요합니까? 더 이상 무슨 기적을 보여주어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을 너무도 괴롭히던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물질의 문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함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 어디에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 가정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우리 가정에도 평안과 행복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 그것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한 기적이 있어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에 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시골에 여러 자녀를 둔 젊은 아기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여럿 나은 두었는데, 그만 남편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시골에서 남편 없이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것만 해도 참 수고로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자분 자신의 몸에 중풍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소진하고 본인은 한쪽 몸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채, 집안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자녀들은 키워야 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괴로움만 깊어지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께서 그분에게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교회 가면 병 낫는데.” 그 말을 들은 젊은 애기 엄마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다음 날부터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를 끌고 매일 아침 언덕을 넘어서 시골교회의 새벽기도에 출석하였습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심이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회에서 서리집사의 직분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여집사님이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 단 하나, 뭘까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지요. 그 여집사님은 풍을 앓으신 이후 날아계신 날 동안에는 몸의 한쪽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못하셨습니다. 교회에 아무리 출석하고 새벽기도시간에 아무리 기도하였을 지라도 병이 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교회를 출석한 지 약 7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그 여집사님께서 큰 자신의 딸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출석한 지 7년 만에 자신의 속 마음을 큰딸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병 낫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중풍병이 나아야 기적이지요. 마비되었던 몸이 다시 힘을 얻어서 열심히 일하며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어야 기적이잖아요. 그러나 이 여집사님은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 여집사님은 하나님의 기적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 여집사님은 비록 자신의 몸이 치유되는 기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분과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났어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이것이 그 여집사님이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까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기적이 여러분의 믿음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경험한 기적과 이적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여러분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선사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시키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 우리 가운데 별다른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 괜찮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더욱더 우리의 일상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을 다시 한번 맞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하는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 새로운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은 무의미한 시간의 반복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성탄절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십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거예요. 매년 반복되는 성탄절이지만 지금도 내 마음속에 찾아와 나와 함께 거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말구유가 아닌, 나의 마음에 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생애 최고의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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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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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한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예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온 세상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의 말씀은 현실은 그 반대였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주인이시요,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였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날을 상상해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그 어느 민족보다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 가나안에 오셨습니다. 구약 성경 미가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장소가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가 언제인지를 또한 정확하게 기록하셨습니다. 이 정도이면, 당시 모든 백성들이 나아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분을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서 전체를 아무리 샅샅이 살펴보아도, 우리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영접하였던 사람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만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으로 누구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먼저 세례 요한을 꼽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탄생하지 않으셨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간 적이 있지요. 바로 그때, 엘리사벨의 태 안에 있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온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어머니의 태 안에 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뛰놀았다고 합니다(눅 1:41).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났고 그의 삶 전체를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일에 헌신하였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 가운데, 저는 세례 요한을 그 첫째로 꼽고 싶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 외에, 또 누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까? 네,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구약의 말씀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별을 따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방으로부터 준비하여 온 귀한 선물들,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우리 주님께 바치며, 성탄을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세례 요한,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 외에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기다리며 준비하였던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네, 불행히도 그 이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자 그분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당시 유대 땅 베들레헴에는 세례 요한과 동방의 박사 외에는 사람들이 한 명도 안 살았지요?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몰려왔는지 여관에 머물 곳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복음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으로 정확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시요,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헤롯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기까지 하였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0-11절)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성탄을 기다리셨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뻐 뛰며 성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여러분은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준비하셨습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세례 요한과 같이,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미리 준비하셨던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매년 성탄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도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여전히 진리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매년 찾아오지만,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탄생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그 숫자가 적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난주일 유난희 집사님께서 헌금 특송으로 부르신 ‘당신 보다 못해요’의 가사 일부분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제 마음을 맴도는 가사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는 게 바빠 마음에 틈이 생겨 처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져다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게 너무 바빠 마음에 틈이 생겨’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천사의 메시지, 천군의 찬양 

여러분은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셨다면,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에게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미리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8절과 9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 밤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8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 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기대도 없습니다. 목자들은 그저 자신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목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는 것이 너무 바빠,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서는 미쳐 마음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지 못했던 목자들에게 하나님은 천사의 메시지와 천군의 찬양을 통해 구세주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10절부터 14절까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가 먼저 목자들에게 말을 하지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제 수많은 천군이 나타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러분, 천사가 기쁨의 소식을 전합니다. 수많은 천군이 내려와서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합니다. 목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 곧 양 떼를 지키는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 우리가 성탄절 아침 예배에 참여하는 지금까지, 사는 것이 너무 바빠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지 못하였다면, 지금 이 시간에 천사의 음성과 천군의 찬양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탄절 예배에 참여하는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일정에 쫓겨 다녔던 우리의 마음이 이 시간만큼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게 하옵소서.’ 저는 이와 같은 기도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자들의 경배 

천사들이 목자들을 찾아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습니다. 천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찬양하는 장면을 목자들이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찾아 나섭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15절부터 15절과 1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천군과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천군과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들이 직접 목자들을 끌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자리로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천군과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는 하늘로 올라가지요. 이제 목자들이 직접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이제 목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 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6절에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마지막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지요.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여러분,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 예수님의 탄생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 이 세상의 구세주가 오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군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목자들은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을 영접하는 위대한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과 같이,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성탄을 미리 준비하나요? 여러분은 세례 요한이나,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성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할지라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의 자리에는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 아침 성탄을 축하하는 이 예배에 참여하는 순간까지도, 사는 것이 너무 바빠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지 못하셨다면, 이 자리에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을 통해 말씀해주시는 성탄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천군도 함께 찬양하는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그분을 우리의 마음으로 영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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