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6. 1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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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일이 되면 설날이 찾아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또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옵니다. 이처럼 사연스럽게 흘러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을 연대기적인 시간 ,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 특별히 오늘의 설교본문인 스바냐서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표현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온다는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압도하는 그때, 바로 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는 바로 그때,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한해 한해 연대기적인 시간, 곧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살아가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시간 외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새해가 여러분에게 단지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위해 준비하신 위대한 사건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 

오늘 본문 스바냐서는 바로 크로노스의 시대에 카이로스를 선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스바냐서의 시간적인 배경을 소개하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에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의 이름에 세명이나 등장합니다.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처음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몬”입니다. 아몬이라는 이름 뒤에 ‘왕’이라는 표시가 없지만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은 남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자, 그리고 아몬 이후에 또 다른 왕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누구입니까?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스바냐 1장 1절에서 “요시야” 다음에 등장하는 남 유다를 다스렸던 어느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까? 스바냐는 누구의 현손이죠?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자, 다시 정리를 하죠.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를 밝혀주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에는 세 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간대로 정리하면, 히스기야, 아몬,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히스기야와 아몬 사이에 한 명의 왕이 더 있는데, 그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다시 말해, 스바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남 유다를 네 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곧,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그리고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임재가 눈에 띄지 않는 크로노스의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네 명의 왕 가운데 두 명의 왕은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곧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아 사이에 놓여있는 므낫세와 아몬은 성경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선한 왕의 시대와 악한 왕의 시대, 하나님을 섬기는 왕과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왕의 시대가 서로 섞여 있는 시대입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든 하나님을 섬기게 하든, 한 나라 전체가 왕의 영향력 아래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든 이방 우상을 함께 섬기든 사람들의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손길은 보이지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면 지금 당장 나라가 망해야 할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지금 당장 모든 이방의 우상을 제거하고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섰으면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축복이 막 눈에 보여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도 바뀌고 국가의 권력을 뒤흔드는 사람들도 바뀝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를 지라도, 아무리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대로 선을 행합니다. 제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러도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고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올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지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여주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제 아무리 흘러도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만같습니다. 새해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덕담을 나누어보지만, 경제는 위축되고 정치는 변화가 없으며 우리네 삶은 크게 변화가 없으리라는 낙심이 우리 사이에 퍼져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해가 찾아왔지만 새로운 희망이 없고 새로운 기대가 없습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 여호와의 날 

바로 이때, 사람들이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갈 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가 바로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스뱌나 1장 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익숙한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곧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곧 임할 것이기에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침묵하라고,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1장 14절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습니다. 가깝고도 빠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곧 여호와의 날이 가깝게 다가왔으니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임하면 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용사들, 권력자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죠?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 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의 계획인 인간의 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1장 18절의 상반절만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의 날,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바로 그 날이 임하면 제 아무리 강한 힘을 갖춘 용사라도, 제 아무리 “은과 금”을 그득히 쌓아놓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심판의 날, 곧 여호와의 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로 그 날,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그때까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쌓아놓은 권세와 부귀가 모두 무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남유다를 다스리던 시기부터,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때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용사와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 권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쥐고 있는 힘과 권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금과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뢰가 아니라 자신의 재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되어도 힘이 있는 장수들과 용사들은 여전히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금이나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오늘이든 내일이든 변함없이 풍족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한 이후, 다시 말해 남 유다를 다스리던 요시야 왕의 사망한 지 30년도 되지 않아서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 성은 앗수르의 뒤를 이어 전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에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무너트리니 그동안 은과 금을 풍성하게 쌓아놓고 재력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권세로 세상을 호령하던 용사들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것이 바로 스바냐 선지자가 선언했던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연대기적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오는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건 상관없이 세계 역사의 주관자 되시며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기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 개인의 인생 시간표에 여러분의 각 가정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특한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이르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이 여러분을 압도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새해를 축하하며 기념하는 오늘, 매년 찾아오는 날짜의 반복을 넘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때, 인류의 역사를 종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카이로스를 위한 준비 

스바냐 선지자는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남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스바냐 2장 1절에서 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바로 그 때가 임하기 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에서는 그저 한해 한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는 은과 금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힘을 길러 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을 압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이 모아두었던 은과 금은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갖추어놓았던 힘과 권세는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아요. 그 대신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 겸손하게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나타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구하고 겸신히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바냐 3장 17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이 기쁨은 모든 유대인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기쁨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기쁨은 연대기적인 시간, 한 해가 흐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은 연대기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는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겸손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더 없는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하나님의 기쁨의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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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5.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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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우찌무라 간조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평가는 뒤로하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오늘, 저는 그분의 일기 가운데 한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쓴 것은 우찌무라 간조가 뉴 잉글랜드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아직 밀린 학비를 다 납입하지 못하였고, 뉴 잉글랜드의 그 추운 겨울을 난로 하나 없이 보내고 있던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통곡의 소리 and 기쁨의 소리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지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윗과 솔로몬의 왕좌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 남아 있는 성전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회파 될 대로 회파 되었으며 그렇게 70년 동안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돌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년 둘째 달에” 그들은 분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돌아왔다고 서술하지요. 왜냐하면 여전히 예루살렘에는 성전의 터가 남아있었고, 성전의 돌무더기가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전으로 기능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다시금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성전 재건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에 그 옛날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재건하였던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자,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는 오늘 본문에서 함께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할 때 그 현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2절의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다시금 고향 땅에 돌아오게 하셨다는 커다란 기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쟁취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니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을 친히 만나주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어질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성전이 재건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많은 유대인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어 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12절에는 기쁨의 소리도 들렸지만 정반대의 소리도 매우 크게 들립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특별히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 – 곧 솔로몬 성전 – 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합니다.’ 이들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기 전 그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약 70년 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이 다 불타는 장면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7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들은 70년이 흐른 뒤 스룹바벨이 재건하는 성전이 그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기에 그 장면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합니다. 

그러니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분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소리, 곧 대성 통곡과 기쁨의 탄성이 어찌나 컸는지 그 장면을 오늘 본문 1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그만큼 한쪽에서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성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 두 가지 소리를 조금만 멀리서 들으면 이 커다란 소리가 즐거움의 함성 소리인지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소리인지 도무지 분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인생은 슬픔의 조각과 기쁨의 조각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자이크를 만들지요. 어떠한 조각은 기쁨의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어떠한 조각은 통곡의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게 기쁨의 조각과 슬픔의 조각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한 개인의 삶을 그 누가 기쁨의 인생이라고, 혹은 슬픔의 인생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단 하나의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장면이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통곡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사건 중에는 과연 이것이 기쁨의 장면인지 혹은 슬픔의 장면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에 가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이유만 되던가요? 슬픔의 이유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어느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소리만 들리던가요? 자녀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고 나아가 통곡해야 했던 순간이 우리의 삶에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젊은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들을 축하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라도 우리에게 기쁨의 소리만 들려주는 곳은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이라는 장소는 기쁨의 소리와 더불어 슬픔의 소리도 함께 들리는 공간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그 안에 기쁨의 함성 소리도 들리고 동시에 슬픔과 통곡의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것처럼 조금만 거리를 두고 들어 보면 이것이 슬픔의 소리인지 통곡의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 소리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그 현장에는 기쁨의 함성 소리와 슬픔의 탄식 소리가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바로 이 장면에는 기쁨의 소리와 통곡의 소리라는 두 가지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쪽 편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너무도 우렁찼고, 다른 한쪽에서는 슬픔의 통곡이 너무도 요란하여 사람들의 귓전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이 장면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제 3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계속 이어지는 11절 앞부분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편에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다른 한편에서는 슬픔에 싸여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 찬양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었다고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 곧 그들이 노래했던 감사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통곡과 슬픔의 소리는 잦아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현실 속에서 기쁨의 요소는 더욱 풍성해지고 탄식과 슬픔의 이유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쁨의 소리와 함께 통곡과 슬픔의 소리도 크고 웅장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작은 소리였지만, 그리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유유히 울려 퍼지는 찬양의 가사, 곧 감사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바로 그 장면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찬양은 언제부터, 과연 언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까요? 

자,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곧, 솔로몬 성전이지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시는 장면을 그려주는 여대하 5장은 바로 그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역대하 5장 13절은 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여기에도 감사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는 감사의 찬양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역대하 5장 1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이제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히 있도다’ 이 찬양의 가사는 놀랍게도 오늘 본문 에스라 3장에서 들리는 감사의 찬양과 그 가사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왕국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지요. 급기야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70년,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그 순간까지 예루살렘에서 펼쳐진 수많은 역사적 현장들은 기쁨의 조각과 슬픔과 통곡의 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웅장한 모자이크였으며, 어떠한 조각은 그 자체가 기쁨의 조각인지 슬픔의 조각인지조차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간 삶의 여러 단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들을 관통하여 솔로몬의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의 성전에 이르기까지 그 500년에 걸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감사의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우리는 기쁨의 소식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슬픔의 소식에 그 무엇보다 빨리 반응합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 없이 번갈아 가며 기쁨과 슬픔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정작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여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불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감사의 찬양 소리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가득 찬 슬픔과 통곡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밀어넣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기쁨의 함성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있는 기쁨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놓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모든 과정이 기쁨의 장면이었는지 슬픔의 장면이었는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슬픔의 그 순간순간마다 그리도 격렬하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기쁨의 함성 소리를 조금만 잠재울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슬픔의 통곡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우찌무라 간조의 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과 그 영원한 인자하심을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며 살아간다면 제 아무리 시간이 흐를 지라도, 그 어떠한 사건이 우리를 휘몰아치더라도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거룩한 성소가 되는 것이요,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천국을 변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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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2.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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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가하는 사람이 나와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 지구상에 많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그들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 우리가 살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만날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곁에 있고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나의 직장 상사가 기독교인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우리의 가정 안에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고 적대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불신 남편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 

베드로전서를 읽는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가정 안에, 특별히 자신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믿는 않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오늘 본문은 아내들에게 명령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늘 기도하는 사람이고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그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불신자이고 때로는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때에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그 이유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말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 남편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가족 전도’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 특별히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까운 사람에게는, 특별히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어려울까요?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복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멀리 있는 사람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언어와 우리의 말만 듣게 되지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특별히 우리의 가족들은 우리의 행동을 바라본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아내들에게, 특별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입술로만 예수님을 전한다고 우리의 남편이나 우리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꾸미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보다 아름답게 다듬어 가는 노력으로부터 우리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가 자라난 가정도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청년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 친구는 자신의 삶으로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어요. 최근 우리 교회를 등록한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더라도 자신의 친구는 그 마음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친구는 저에게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었지요.’ 그렇게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작은 계기 하나에도 이 청년의 마음에 ‘나도 내 친구와 같이 신앙을 갖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기기 되었고 스스로 자원하여 가까이에 있는 우리 교회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과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자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의 남편과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자녀들이 변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오늘 우리의 삶이 먼저 변화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남편과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변화된 마음과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교훈 

오늘 본문은 아내에게 주는 명령에 이어 남편들에게 주는 명령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아내라면 마땅히 그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안든지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남편이라면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들에게 주는 권면과 동일하게 남편에게도 언어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라고 명령합니다. 나아가 단순한 한 두 가지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남편을 존경하고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는 마음으로부터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7절을 다시 보시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리라” 이렇게 명령하고는 계속해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아내와 나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믿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을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믿음을 방해하는 박해자인지 상관 없이 나의 배우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면, 제 아무리 우리의 가정 안에 믿지 않는 식구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기도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반복되는 권면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의 식구들이, 여러분의 배우자가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회방할지라도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의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 남편, 불신자 아내, 불신자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나의 믿음과 나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어떻게 할까요?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강조를 하여도 성도들이 악을 악으로 갚고, 믿지 않는 배우자와 식구들에게 악한 말과 행동을 할까봐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악에서 따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울이시되 주의 얼굴을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비록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회방꾼들이 여러분 주변에 가득할지라도, 여러분은 악에서 떠나시고 선을 행하시며 무엇보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의 길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면 12절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눈은 여러분을 향하시고, 하나님의 귀는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에 기울여주십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의 모든 가정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복된 가정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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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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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아래의 설교에 이은 감사절 시리즈 설교입니다>

 

[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1장 3-4절 “성장하는 믿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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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연설을 하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그 연설은 온 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의 연설은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그 연설과 책의 제목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입니다. 그 제목에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러셀은 그의 강연과 이 책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러셀의 연설과 그의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그에 대한 기독교 내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표적인 영국 복음주의 사상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Why I Am A Christian)라는 책에서 자신의 회심 과정을 소개합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루터교 교인으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매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로 제일 먼저 그의 기독교적 배경을 꼽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존 스토트는 바로 덧붙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 곧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하나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두 번째 이유로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어느 날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기독교적 배경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던 어느 날 존 스토트는 성서유니온이 주관하는 집회에서 한 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하셨던 배쉬라는 분은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든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이 선포가 젊은 스토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존 스토트는 배쉬라는 분을 바로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배쉬는 다시 한번 존 스토트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권면했다고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이 말씀을 들은 존 스토트는 그날 밤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존 스토트는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이날의 사건을 서술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신이 배쉬라는 분의 말씀과 그의 권면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지만, 그날 저녁 들었던 말씀과 권면, 혹은 자신의 결단이 존 스토트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존 스토트의 글을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도 아니라, 
제가 원하는 길로 도망할 때조차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에 믿음을 포기해버릴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분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나는 모태신앙이요,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웠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저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혹은 가족의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으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나는 내 스스로의 결단으로, 그 누구의 권면이나 충고가 아니라 내 스스로 기독교를 선택하였습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러한 분들이 모두 여러분과 같이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과정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금까지도 신앙생활을 하는 그 결정적인 이유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존 스토트와 같이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기도 하였고, 물론 친구와 가족의 전도를 받기도 하였고, 물론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던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요,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나하만 장군

여러분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큰 용사’였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서기만 하면 승리 소식을 가져오는 당시 아람 나라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그에 대해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묘사할 만큼 그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권세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그에게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문제가 있었으니 곧, 그 자신이 나병 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나아만 장군이 몸에 질병, 그것도 나병이라는 당시로서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에 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까? 그저 나아만이 운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에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아람 나라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람 나라로 잡혀온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지요. 아람 나라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아람에 포로로 끌려오면서 이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미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아만의 집에서 나아만 아내의 심부름을 하던 이스라엘 소녀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어요. 비록 아람 나라에 끌려와 있지만 그 마음에는 아직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거침없이 주인에게 말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시키던 종이 이스라엘 소녀였고, 또 그 소녀가 하나님과 엘리사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확고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우연이었을까요? 이번만큼은 나아만이 너무도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에 이번에도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 장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온 여종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이르렀을 때,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종을 보내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선지자가 직접 나온 것도 아니고, 선지자가 자신의 환부를 붙잡고 기도해준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너무 화가 난 나아만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로 그때 곁을 지키고 있던 나아만의 부하들이 나아만을 말리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손해 볼 일 없으니 그저 한 번 해보자고 설득하지요. 
여러분, 이 장면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바로 그 시점에 나아만을 수행했던 부하들이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장군을 설득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저 장군의 눈치만 보면서 같이 엘리사에게 욕을 해대며 아람으로 돌아올만한 부하들이 그 자리에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나아만의 곁에는 지혜로운 부하들, 그래서 장군을 설득하는 부하들이 있었단 말이죠. 여러분,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도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그저 나아만이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나아만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아만 장군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7번 씻고 나병에서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 5:15) 

아람 사람 나아만이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병에 들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아만은 지금까지 자신이 아람에서 섬겼던 모든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다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거북한 포장지

하나님의 선물 특별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은 때로 초라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포장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그 위대한 선물을 지금 당장이라도 받을 텐데, 문제는 포장이 초라하단 말이에요. 나아만의 경우가 그렇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선물을 무엇으로 포장하셨습니까? 나병, 한센병으로 포장하셨다고요. 

나아만의 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나오미와 룻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에게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들을 통하여 다윗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물의 포장지가 뭡니까? 그 위대한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지는 바로 남편의 죽음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도, 며느리인 룻도 모두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잖아요. 그러니 나오미와 룻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저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으로부터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또다시 요셉이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도 정말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출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하여 7년의 극심한 흉년을 지나는 동안 그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요, 이집트 지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명,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을까요? 형제들로부터 받은 배신, 그리고 누명과 감옥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잖아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초라한 포장지,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병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을지라도 그 안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비록 남편의 죽임이라는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 안에 다윗 가문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선물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형들로부터의 배신이라는 결코 받고 싶지 않은 포장지 안에는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위대한 선물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비록 우리에게 건네시는 선물의 포장지가 너무도 초라하고 때로는 너무도 거북할 지라도 그 안에 감겨 있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어느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곤 하셨지요. 선교사님이 후원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지에 도착하였을 때도 동일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많은 현지 사람들이 그 선교사님을 미워하고 적대감을 표출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선교지에 도착한 지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나고 맙니다. 여러분, 십 년이나 일 년을 제가 한 달이라고 잘못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일 년도 아니고, 육 개월도 아니고,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아서 그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야반도주를 하고 맙니다. 

선교지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결신자도 별로 없었습니다. 결신자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들었던 대부분의 현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선교사님이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현지인들이 자신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기독교에 대해, 선교사님이 전해준 복음에 대해 아주 강력한 반감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선교 실패한 거죠? 아니, 선교지에서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났고 선교사님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몇 명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 기독교에 대해, 복음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가득해졌으니 그 선교는 당연히 실패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선교사님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선교지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고작 3주간만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유대인들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깊은 밤 어두움을 틈타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야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철저한 실패 아닌가요? 이 정도면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는 성도도 없고, 교회도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워요. 지난주에 함께 묵상하였던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과연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이처럼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모두가 순종적이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떠한 인간적인 설명도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가 일어나며,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사도 바울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어떻게 하여 주셨습니까? ‘택하여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그다음에 ‘너희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성도로 부른 것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교회로 부른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선교사 바울이 그들을 불렀기에 그들이 응답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어요. 그러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10개월 동안 어떠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처럼 실패를 경험하셨습니까? 나아만 장군처럼 못쓸 질병이 여러분의 발목을 붙잡았나요? 나오미와 룻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셨습니까? 혹 요셉과 같이 가족 간의 관계가 불화를 넘어 비극으로 치닫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으로 선택하셨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불러 생명이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는 포장지는 초라하고, 아니 너무도 거북하여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그 안에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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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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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2,600년이라고 하니 제 아무리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제너럴셔먼트리의 연수를 가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2,600년 된 제너럴셔먼트리는 높이가 83m, 나무 밑동의 둘레가 31m에 이릅니다. 제너럴셔먼트리와 거의 동시대의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제너럴셔먼트리 역시 지금까지 여든세 번의 큰 화재를 겪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6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든세 번이나 거대한 화재를 이겨내고도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제부터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안내문에 의하면 제너럴셔면트리는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 가운데 동물들은 태어나고 성장하여 성체가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러나 나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고 제너럴셔먼트리처럼 2,600년 동안 여든세 번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성장하는 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두 가지 형태의 성장 곡선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의 믿음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라나는 경향과 동일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듯, 어린 동물이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믿음이 성장하고 나면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믿음이나 신앙이 그 상태로 머무거나 혹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은 동물의 성장 곡선이 아니라 나무의 성장 곡선과 유사합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안내문처럼 나무는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혼도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며 쇠약해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오늘도, 내일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믿음과 사랑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이 쇠약해지더라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통해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3절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치지 않는 감사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이제 그 이유가 등장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여기에 ‘더욱’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그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랐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더욱 자라났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나니, 그 믿음과 더불어 풍성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곧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성장하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데살로니가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정체되어 있거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과거에 자라나셨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오늘도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과거에 성장하였습니까? 오늘도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성도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도 더욱 풍성히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데살로니가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성도들 서로 간에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사랑이 풍성해진 것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데살로니가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그곳을 떠나 있지만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하였던 사도 바울의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는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 나타납니다. 우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을 찾아서 1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3:10)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주야로, 밤과 낮으로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를 다시금 방문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여전히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한절 내려오셔서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절에도 사도 바울의 기도제목이 등장합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살전 3:11)

그런데 이번에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었어요. 그러나 바울의 보다 궁극적인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것이요,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게 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셔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과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날수록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만들며, 과연 무엇이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단 하나의 단어로 대답한다면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요,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참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이 더욱 자라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사랑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더욱 풍성해지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본받아 여러분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을 위하여, 여러분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풍성한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밤과 낮으로 기도하시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의 믿음은 반드시 성장할 것이요, 여러분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박해와 환난 가운데 더욱 빛나는 믿음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지나치고 싶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두 가지로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고 싶다는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지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는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기도제목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 제목이 하나 남았네요. 과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도한 것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방문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후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려는 사도 바울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막혔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계속 막히자 자신의 발로 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하여 자신의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물론 선교지의 바쁜 일정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데살로니가에는 사도 바울을 내어 쫓았던, 그리고 여전히 바울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데살로니가를 결코 방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사도 바울을 공격하였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은 그들이 처한 환경을 ‘박해’, 그리고 ‘환란’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동일하게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의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달라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이처럼 박해를 계속 받으면 그들의 믿음이 약해질 텐데, 이처럼 계속하여 환난을 당하면 그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 같은데, 하루빨리 사도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여야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더욱 성장하고 더욱 풍성해질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간절한 바울과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고 계셨단 말이에요.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믿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 사람들은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 그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그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오히려 너희의 인내가 빛이 나고, 오히려 너희의 믿음이 자라나 너희의 믿음과, 너희의 사랑과, 너희의 인내가 하나님의 여러 교회 앞에 자랑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도 하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지금 당장 우리를 그 모든 괴로움에서 건져내기보다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힘이 들죠. 물론 그 과정이 어렵죠.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그 과정을 벗어나고 싶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너무도 쉽게 벗어나면 삶의 모진 풍파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어떡하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아픔과 역경을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며 우리의 인내가 더욱 강건해진다면, 그리하여 인생의 수많은 고비와 난관 앞에서 신앙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거목이 된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2,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여든 번이 넘는 거대한 산불의 화마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지금까지도 성장하는 제너럴셔먼트리처럼, 아니 여든 번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산불의 화마를 온몸으로 맞이하였기에 모든 병충해를 다 이겨내고 더욱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 이제는 그 어떠한 산물도, 그 어떠한 비바람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고목이 되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모든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기도의 줄을 놓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날마다 새 힘을 주신다면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멈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장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더욱 풍성해져 삶의 모든 풍파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아래의 설교로 이어지는 감사절 시리즈 설교입니다>

 

[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마땅한 감사”

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연설을 하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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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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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5. 1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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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여러 나라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우리나라는 태평양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새해를 맞이하고 약 2시간 정도가 흘러야 동남아의 나라들이 새해를 맞이하고, 우리나라가 새해를 맞이한지 약 8시간 정도가 더 흘러야 서유럽에 있는 나라들이 새해를 맞이하죠. 우리 나라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가 새해를 맞이하고 약 15시간 정도가 지나야 비로소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이 다른 것처럼,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우리 나라의 보신각 타종 행사처럼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기도 하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열두번의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열 두 개 먹는데, 그렇게 하면 새해의 열 두 달 동안 행운이 찾아온다는 풍습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매운 음식을 먹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빨간색 옷을 입으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계의 다양한 나라와 문화에 따라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다르고, 새해를 맞이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그 모든 풍습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인류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잘못과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모두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소망을 향하여 다시금 시작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이야말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야곱,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지금 야곱은 모든 것이 귀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장인 창세기 34장이 그러한 분위기를 너무도 잘 그려주고 있지요. 창세기 34장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 족속 가운데 하나인 히위 족속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디나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들 곧,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칼로 도륙하는 일이 발생하죠. 이때 시므온과 레위라는 두 형제가 히위 족속의 모든 남성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할례’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상징을 이용하여 히위 족속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34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가정에는 거룩이나 선이나 정의나, 선과 같은 덕복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창세기 34장의 분위기를 로날드라는 구약학자가 생생하게 표현해주었는데, 한번 들어 보시죠. “창세기 34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 장은 강간, 분노, 속임, 탐욕, 살인, 폭력,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로날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34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고,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처럼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볼 수 없었던 야곱의 삶, 그리하여 그 어느 때보다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이 간절히 필요했던 야곱에게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5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야곱에게 매우 중요한 명령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창세기 35장 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새로운 출발이 간절히 필요했던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벧엘로 가서,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진정으로 새로운 출발을 원하십니까? 과거의 모든 잘못과 회한을 모두 던져버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야곱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예배, 하나님만을 향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바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출발선이 되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야곱에게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새롭게 출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제단을 쌓으라고, 곧 예배의 장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 1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배의 장소로 ‘벧엘’이라는 지명을 정확히 집어 말씀하시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자, 이제 벧엘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하신 이유가 등장합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등장하죠? ‘바로 거기에서 제단을 쌓으라.’ 

창세기 35장을 기준으로 약 30년 전의 사건입니다. 풍족한 아버지의 집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생활하던 야곱이 예상치 못했던 형 에서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집을 하루 아침에 떠나야 했습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야곱은 하루 종일 달렸겠지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야곱은 그 자리에 멈추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핸드폰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하나 없었습니다. 여기는 어디인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앞으로 나의 삶에 어떠한 일이 펼쳐질지 그 모든 것이 미궁 속에 빠진 채 야곱은 손에 잡히는 대로 돌멩이 하나를 베개삼아 길거리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미궁 속에 빠져들었던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고 야곱은 비로소 아버지 이삭이 섬기는 하나님이 아닌 야곱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미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였던 바로 그 장소, 야곱에게 있어 벧엘은 모든 것이 실타레처럼 엉켜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믿음의 영정, 신앙의 여정을 시작했던 인생의 진정한 출발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참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약 30년의 세월을 지내며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맞이하였고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거대한 재산도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정처없이 떠나왔던 철부지가 아니라 많은 자녀들과, 많은 종들과 많은 가축을 이끄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경륜은 쌓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쌓였지만 약 30년 전 그 어두운 밤 거리에서 자신을 만나 주셨던 하나님은 어느덧 그의 삶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지금, 약 30년 전 벧엘에서 흘렸던 그 뜨거운 눈물, 약 30년 전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 텅 빈 손으로 자신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하여 꽉 부여잡았던 그 순수한 믿음만이 야곱의 삶을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선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한 해를 흘려보내고 또 다시 한 해를 맞이하며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저 한 해가 지난다고, 그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한해 더 늘어난다고 하여 우리의 속사람이 더욱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요, 그저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고 하여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새해를 맞이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며, 우리의 믿음이 다시금 새로워지고, 우리의 영혼이 다시금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곧,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벧엘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어떤 분들에게는 벧엘의 경험이 최근의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10년 전, 20년전, 혹은 야곱과 같이 30년 전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던 어느 날. 그 어디에서도 새로운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와 주시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며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셨던 바로 그 경험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새해를 맞이하고 있지만 다시금 우리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시는 참된 의미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그 곳에서의 뜨거운 눈물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예배를 드리십시오. 바로 그 자리만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출발선이 되는 것입니다.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

하나님은 새로운 전기가 간절히 필요했던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야곱은 온 가족과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을 내리며 다시금 믿음의 출발선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선행조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고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저 벧엘에 올라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 곧 예배를 인생의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방신상을 버리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모든 우상을 버리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여기에 이방 신상과 더불어 귀고리가 등장하죠? 당시 귀고리는 우리 시대의 부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고리를 장식을 위하기보다는 액운을 쫓아내고 복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하고 다녔다고 해요. 그러므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자기 손에 있는 이방 신상과 귀에 있는 귀고리를 모두 세겜 땅에 묻어버렸다는 것은 벧엘로 가는 그들의 발걸음에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소지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단이었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야곱과 그 가족이 내린 믿음의 결단은 칭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칭찬에 앞서 야곱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요동칠 수 있는지를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자, 약 30년 전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장면에는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서원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을 고향 땅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서원입니다. 두번째는 야곱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 곧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는 것이죠. 곧 벧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십일조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야곱을 무사히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은 물론이요 그에게 많은 자녀들과 풍성한 재물도 주셨어요. 그러면 서원을 지켜야 하잖아요.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벧엘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고 물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고향 땅으로 돌아인 지 약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야곱은 자신의 서원을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들은 손에 우상을 쥐고 있었고, 그들의 귀에는 오늘날의 부적에 해당하는 귀고리가 걸려 있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러한 야곱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가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알라가자” 그 다음에 야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묘사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여기서 말하는 환난 날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의 사건을 말하죠. 곧, 벧엘에서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내용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그 다음,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단지 30년 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약 30년 전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주셨던 하나님은 지금까지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야곱 자신이 가는 길에서 자신과 함께 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약 10년 전 하나님은 야곱을 고향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셨어요. 그리고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약속했던 서원을 단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야곱 자신이 환난을 당할 때는 물론이요, 무사히 고향 땅에 돌아온 이후 야곱 자신이 여전히 서원을 지키지 않고 있던 그 10년의 세월 동안도 하나님은 변함 없이(X2) 야곱 자신이 가는 길에 함께 하여 주셨다는 눈물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야곱의 삶이 뒤죽박죽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서원을 지키지 않는 야곱에게 벌을 내리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야곱을 기다리고 계세요. 문제는 야곱이 세속의 도시 세겜에서 하루하루를 너무도 바쁘게 살아가는 나머지 벧엘의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원하신다면 세겜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손에 있는 모든 신상과 귀에 걸려있는 모든 귀고리를 땅에 묻어버린 채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의 결단이 여러분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고, 기도와 찬양과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그 예배의 자리에 최우선순위를 두십시오. 바로 그때, 새롭게 시작한 신년, 우리는 믿음의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우리 모두가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과 다시금 깊이 교제하며 우리의 믿음이 새롭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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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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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5. 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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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면,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특별히 한반도의 국제 정세가 시시각각 변할수록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던 느헤미야의 기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이제 종이” 여기에 등장하는 ‘종’은 느헤미야 자신을 가리킵니다.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곧 느헤미야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보문 느헤미야 1장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 시간 느헤미야의 기도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느헤미야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우리의 기도 역시 느헤미야의 기도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바른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민족의 형편을 살피다 

느헤미야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린지 20년째 되는 해 기슬르월입니다. ‘기슬르월’은 양력으로 하면 11월에서 12월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매우 추운 겨울이지요. 그때 느헤미야는 수산 궁에 있었습니다. 수산 궁은 페르시아 황제들이 사용하던 겨울 궁전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기에 아닥사스다 왕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수산 궁에 있었던 것이지요. 느헤미야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나라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가 되어서 아닥사스다 왕을 보좌하는 고위 공무원으로 황제와 함께 수산 궁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직업의 종류가 무수히 다양해진 지금 시대에도 한 나라의 고위 관료가 된다는 것은 높은 지위와 명예를 거머쥐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물며, 직업군이 단순했던 고대사회에서, 그것도 전 오리엔트 지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고위 공무원이 되어 황제와 함께 겨울 궁인 수산 궁에 있었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누리고 있었던 명예와 권력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느헤미야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2절을 보시면 “내 형제들”, 곧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대에서 수산 궁으로 왔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질문을 하죠.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물어봤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3절입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3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 지방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는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 전해 들은 지금은 이미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이후입니다. 스룹바벨을 필두로 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그곳에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었다고 그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이 있고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었던 것이죠. 그 이유가 3절 뒤쪽에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성벽이나 성문은 성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탔으니 예루살렘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어 수단이 그 무엇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소수의 무리들이 침입을 해도 막아낼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주변 나라들도 예루살렘의 이와 같은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약탈해갔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전해 들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형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의 형편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이 4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4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립니다. 한시간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수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진실한 기도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요? 우리의 귀를 열어 주변 사람들의 통곡 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역사의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 곧 기도의 사람에 대해 바르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도 막고 오직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은 채, 영적인 일에만 집중하고 신비한 체험만을 추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막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에는 눈을 감으면 우리의 기도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 소망만을 간구하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기적인 기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더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기에 실체가 없는 공허한 기도가 되기 쉽지요.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갑과 을의 관계에서 눈물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립니다. 눈을 열어 그들의 눈물을 볼 수 있어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더욱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울러,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20대 청년들의 정신질환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곧 나의 아픔이요, 우리 가족의 현실로 받아들일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우리의 마음으로는 멀리 있는 듯 하지만 실상은 너무도 가까이 거주하는 북한의 주민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그들이 당하는 그 거대한 환난과 아픔을 마음으로부터 공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마음으로 이 땅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5절부터 등장합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5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형편을 직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제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느헤미야는 절망하기보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붙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첫째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입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느헤미야는 자신의 민족에게 큰 문제가 있고 환난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소식으로 말미암아 수일 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만 그 문제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개인에게도 수많은 문제들이 있으시지요? 여러분의 가정에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하시지요? 우리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바라볼 때 도저히 해법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가득해 보이시지 않나요? 북한의 핵 위협이 사라지고 적대관계에 있던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을 이루는 그 날이 묘연하게만 여겨지지 않으세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랜 시간 슬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든 문제보다 크십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기 민족 유대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똑똑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첫번째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두 번째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모세가 활동하던 시대,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되겠다는 약속, 곧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에게 있었죠. 곧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7절)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저질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자기 백성 이스라엘, 자기 민족 유대인들의 모습만 본다면 느헤미야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어요. 그러나 느헤미야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 사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늘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9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9절)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확신하는 성경 구절들이 한두 구절 이상은 다 있으시지요? 비록 그 말씀이 아직은 현실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유대민족을 향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오늘 우리 민족과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고 있지만 언제라도 돌이켜 주님을 섬기는 민족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 나라를 삼아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첫번째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었지요. 마지막으로 느헤미야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세 번째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성경은 인간을 긍휼히,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지요. 이스라엘은 민족은 있었지만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애굽이라는 강대국의 노예였습니다. 정치 조직도 없었고, 경제력도 없었고, 교육받은 인재도 거의 전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저 긍휼히 여기셔서, 불쌍히 여기셔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출애굽의 사건을 상기합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0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340년간 종살이를 하였다면 우리 민족은 일제치하 36년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정치 조직, 경제력, 독립을 위한 전략. 그 어떤 것도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을 주셨잖아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민족상잔이라는 거대한 슬픔과 아픔의 시련이 찾아왔지만 긍휼히 풍성한 하나님은 민족상잔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고 이토록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 민족을 계속하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이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 위에 흘러넘치기만 한다면, 지금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와 행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느헤미야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였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였지만, 큰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느니라 (11절) 

11절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가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장과 비슷한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느헤미야는 술관원의 자리를 발판 삼아 유대 땅의 총리로 임명을 받습니다. 유대 총리로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에서 예루살렘의 성벽이 재건되고 백성들의 환난과 능욕이 평화와 기쁨으로 변하는 역사의 여명이 이제 시작하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 개인의 문제, 가정을 위한 기도에 머무르지 마시고 우리 나라와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것을 삼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 땅 한반도에 참된 평화를 베풀어 주시며,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열방을 축복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반드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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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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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4. 2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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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행복의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등장하는 시편 127편과 함께 시편에서 가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시편 128편은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가정

본문 시편 128편이 묘사해주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 그 첫번째는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복의 구체적인 내용이 2절이지요. 네가 너의 손으로 수고한 그대로 보상을 받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복입니다. 

 

실상, 우리의 삶을 가장 괴롭게 만들고 힘이 빠지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일했는데, 열심히 노력했는데,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없을 때, 그에 따른 열매가 없을 때, 그때만큼 허무하고 힘이 빠지는 때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그와 같은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납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명예퇴직일 때가 있어요. 학생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고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주부가 가족 식구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을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못하고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이처럼 수고에 따른 열매가 없을 때 우리의 삶은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수고에 따른 열매가 없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결과라는 것을 아시나요?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일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사람을 두어 "그것을 경작하게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2:15).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경작하는 일을 시키셨어요.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는 그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왜지요? 수고한 만큼 열매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벌을 주시죠. 그 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벌입니다(창 3:18). 곧 아담이 수고한만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시편 127편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1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2절) 

 

그러므로 오늘 본문 2절이 이야기하는 수고한 대로 열매를 거두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입니다. 남편이 작정에서 수고한 만큼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온 가족이 그 열매를 누리고, 아내가 가정을 위해 노력한 모든 수고가 열매를 맺어 온 가족이 또 함께 기뻐하고, 자녀들이 열심히 노력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수고의 열매를 맺어 온 식구들이 기뻐하는 것. 바로 이와 같은 축복, 이와 같은 행복이 이 새벽에도 하나님을 향해 가정과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의 가정마다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가정

오늘 본문 시편 128편이 묘사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 그 두 번째는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오늘 본문은 안방에 있는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라고 이야기합니다. 포도는 열매가 송이로 열리잖아요. 아내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태어나는 모습을 포도 열매로 묘사한 것입니다. 아울러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자식들은 감람나무로 비유합니다. 감람나무의 중요한 특징은 수명이 길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천년도 넘게 산다고 해요. 그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이죠. 특별히 자녀들을 어린 감람나무에 비유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감람나무가 다 자라러면 15년 이상이 걸린답니다. 그만큼 자녀들이 자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감람나무가 다 자라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매년 0.5톤의 올리브 열매를 맺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 올리브는 모든 생활에 꼭 필요한 재료가 됩니다. 요리하는 데 사용하기는 것은 물론이고, 불을 밝히는 데에도 사용하고,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가구를 만드는 목재로도 사용하고, 가정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만들기도 했고, 심지어는 상처를 치료하는 약으로도 사용을 했습니다. [각주:1] 이처럼 우리의 자녀들은 장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데 성장하고, 성장한 이후에는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귀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현장도 가정이요, 어린 자녀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는 현장도 가정입니다. 이렇게 탄생과 성장이라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가정. 곧,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가정"이 오늘 본문 3절이 묘사해주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묘사하는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가정은 단지 자녀들을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만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가정이라고 할 때, 그것의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태어나고 자라나듯이, 우리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믿음의 성장, 영적인 성숙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비록 인생을 오래 살아온 부모이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의 성숙과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부모님이 계신 가정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가정이 되겠습니까? 지속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계속해서 변화되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이야 말로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가정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행복의 가정을 묘사하면서 이러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명시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행복의 가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정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기도한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정의 행복, 교회의 번영

시편 128편은 여기에서 멈추어도 될 것 같아요. 4절에서 멈추어도 글의 완성도에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시편 128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정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 곧 시온성 - 을 이야기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로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시온성이 있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정이 된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된다면 우리의 가정들이 모여 있는 우리 교회가 번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된다면, 바로 이 땅 한반도가 하나님의 번영을 누리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정이 되어 우리 교회가 번영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으로 회복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가 번영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정이 되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되는 것이 곧 우리 교회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한 교회가 되는 길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번영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달] "믿음의 가정" / 여호수아 24장 14-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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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제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지난 이틀에 걸쳐 함께 생각해본 믿음과 소망과 함께 기독교의 3대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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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성훈, "시 128편: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3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8), 3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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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4. 2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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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제는 축복의 가정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6장을 보면, 제사장의 축복문이 등장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들은 민수기 6장에 등장하는 축복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축복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4-26절)

 

그런데 민수기 6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제사장의 축복문을 서술한 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그 다음을 주목하여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직집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을 통해 백성을 축복하기를 원하셨고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하나님은 너희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을 열어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을 열어 여러분의 자녀들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를 축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사랑 하는 자 VS 으뜸되기 좋아하는 자

 

신약 성경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좋아하는 축복의 구절이 있다면 오늘 본문 요한삼서 2절일 것입니다. 너의 영혼이 잘되는 것처럼 범사, 곧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기를 축복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요한삼서 2절의 말씀이 이번주 가정과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먼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은혜가 바로 이 자리에서 가정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요한삼서 2절에서 너무도 쉽게 지나치고 너무도 쉽게 오해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삼서 2절 말씀의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자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자여"라는 구절을 이해하려면 요한삼서 전체의 내용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실 제가 요한삼서 전체라고 말씀드렸지만, 요한삼서는 한 장으로 구성된 매우 짧은 서신이어서 전체를 다 합쳐도 열다섯절 밖에는 되지 않지요. 그러나 저의 추축이 맞다면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님들이 요한삼서 2절의 말씀은 거의 암기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지만, 요한삼서 전체를 꼼꼼하게 읽어본 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열다섯 구절밖에 안되는 요한삼서를 천천히 읽어보면 두 사람의 인물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곧, "가이오"라는 인물이고, 또 "디오드레베"라는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익숙하지 않다면, 내가 아직 요한삼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셔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자, 가이오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또 한 사람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신앙신활을 했던 사람인 듯합니다. 한 사람은 믿음이 있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교회를 출석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활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삼서의 말씀은 가이오라는 이름과, 디오드레베라는 이름 앞에 그들의 삶을 묘사하는 별명을 붙입니다. 먼저 가이오라는 이름 앞에 붙은 별명부터 확인을 하지요. 요한삼서 1절입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가이오라는 이름 앞에 붙은 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자", 곧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네. 요한삼서 2절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른 것은 바로 가이오의 별명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에는 어떠한 별명이 붙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요한삼서 9절입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드오드레베가 

 

디오드레베의 별명을 찾으셨어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 가이오는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가이오입니다. 반면에 디오드레베는 교회에서 스스로 으뜸이 되고 싶어해요. 자기 스스로 인정을 받으려고 해요. 그러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면서 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 가이오라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만들었고,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스스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요한삼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자, 먼저 가이오는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요한삼서는 그를 향하여 "사랑받는 가이오"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를 위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축복했던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단 대답을 찾아보며 요한삼서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우리 8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8절 말씀도 가이오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5절에 '형제, 곧 나그네 된 사람들'이 등장하지요. 이들은 그 시대의 순회 전도자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던 사람들, 한국교회의 역사에 등장했던 권서인들 같은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표현으로 한다면, 국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 혹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될 것 같습니다. 가이오가 '사랑받는 자'라는 별명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형제요, 나그네된 사람들, 곧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순회전도자들에게 신실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대해 마음으로 동참하였고, 기도로 동참하였고, 물질로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그 행동을 보면서 요한삼서는 '사랑받는 가이오'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디오드레베는 순회전도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십시오. 요한삼서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요한삼서 말씀이 디오드레베를 그토록 통렬하게 비판하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 순회전도자들을 오히려 비방했습니다. 자신들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놓고 있는 이들을 비방했습니다.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니 요한삼서에서 디오드레베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만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삼서의 주제는 디오드레베처럼 형제들에게 인색하게 굴고 그들을 외면하는 악한 행동에서 벗어나 가이오와 같이 형제를 따뜻하게 영접하며 그들을 마음과 기도와 물질로 섬길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사람

 

요한삼서 전체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요한삼서가 가이오를 축복하였던 2절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런데 가이오를 향한 이 축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3절입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여러분, 참된 축복이 무엇인지 아세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를 알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실천의 사람이 참으로 축복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삼서 4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4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우리 가정과 우리 자녀를 위한 가장 큰 축복, 최고의 축복은 오늘 본문 2절의 축복이 아니라 바로 4절의 축복입니다. 2절이 말씀하는 것처럼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나의 자녀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도 많습니다.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큰 돈을 버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는 일마다 성공하여 마이더스의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복과는 비교도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풍족한 줄 알고 그것을 내 주변의 형제들과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는 축복입니다. 오늘도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같은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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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2020. 4. 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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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제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지난 이틀에 걸쳐 함께 생각해본 믿음과 소망과 함께 기독교의 3대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먼저,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되기를 소원한다면, 우리 가정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곧,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 소망의 가정, 사랑의 가정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행복의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은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나를 마라라 부르라

 

오늘 본문은 나오미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가정은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배짱 좋게 고향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인 모압 땅으로 온 가족이 이주를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혹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믿음의 결단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했지요. 두 아들은 모압 땅에서 결혼을 하고 번듯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거기까지였습니다. 먼저는 나오미의 남편이 죽더니, 그 다음에는 첫 번째 아들도 죽고, 결국 둘째 아들도 죽었습니다. 

 

남편이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두 아들이 살아있으니 그래도 소망을 가지며 인내해보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첫째 아들도 먼저 떠나고 둘째 아들도 먼저 떠납니다. 제 아무리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보려 해도 남는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떠나가고 맙니다. 그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초라하게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나오미의 가정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19절은 믿음의 역사도 없고, 소망의 인내도 더 이상 힘을 잃어가는 나오미의 가정이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이미 모압 땅에서 남편도 잃어버렸고, 첫째 아들도 잃어버렸고, 둘째 아들까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고향 땅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니 주변 사람들이 놀려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기쁨이라는 사람 맞아? 그러자 나오미가 대답하지요. 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나를 괴로움이라고 불러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절 말씀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사람들이 나오미를 향해 놀려댑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요. 그저 수긍이에요. 그래 내가 나오미라는 이름이 안 맞지. 내가 무슨 기쁨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가? 그저 나를 괴로움이라고 불러라.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그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의 기적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결단하며 가정을 변화시켜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인내하며 소망을 가져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지속되는 환란 속에서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잃어버리고, 소망도 사라져 버린 나오미의 가정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룻기에서 너무나도 유명하고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 룻기 1장 16절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라는 덕목은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졌을 때 더욱 빛나기 시작합니다. 재물이 있을 때는 사랑이 보이지 않아요. 힘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가득할 때는 사랑이 보이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가정에는 사랑이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해요. 그러나 나오미의 가정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재물도 없어졌고, 남편도 없어졌고, 첫째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도 없어졌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사라진 지 오래고, 소망의 인내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남아 있는 끈끈한 애정이에요. 서로를 향한 사랑입니다. 비록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가도 농사를 지을 만한 밭 한 평 없지만 그 어머니의 곁을 지키며 다른 사람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랑. 바로 그 사랑이 마라 - 곧 괴로움 - 의 가정을 - 나오미 - 곧 희락의 가정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 겹줄

 

사랑의 가정을 생각할 때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성경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인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구절이다 보니 심방을 할 때면 자주 나누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전도서 4장 12절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12절 말씀에 한 사람이면 어떻다고 말씀하죠? 패합니다. 여기서 이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능력이 많은 사람이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든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이 학식이 높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한 사람이면 패합니다. 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한 사람이면 패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사랑의 관계로 묶여 있으면 능히 맞설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오미와 룻이 그 모진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는 비결이 아니었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패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오미 개인으로 보아도 그렇고, 룻 개인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이 서로 사랑으로 함께 묶여 있으니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 4장 12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두 사람 곁에 한 사람이 더 사랑으로 연합하면 든든한 세 겹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을 일구어가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으로 변화시키는 도구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의 가정이요, 둘째는 소망의 가정이요, 마지막 셋째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우리 식구들이 한 사람씩 각각 마음이 나뉜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 가정과 우리의 자녀는 반드시 패합니다. 그러나 먼저 부부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두 사람이 된다면 어떠한 역경이 찾아와도 우리는 맞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녀들까지 사랑으로 묶여 있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이 사랑의 가정이 된다면 그 어떠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는 든든한 세 겹줄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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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