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0. 4. 2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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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소망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언듯 보면 소망은 힘이 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소망이란 지금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지금은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성취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이루고 미래에는 성취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니 우리 마음에 소망을 가지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나의 손에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더욱 우리 가정의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 반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은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소유가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소망입니다. 

 

 

한 사람은 있고, 다른 사람은 없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한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불임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으셨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원인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의 또 다른 아내였던 브닌나라는 여인이 자식을 낳았고 그것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한나와 브닌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사무엘상 1장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그 다음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한 사람은 자식을 가졌고, 다른 사람은 아직 자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손에 쥔 것만 가지고 본다면 브닌나는 가졌고, 한나는 못 가졌습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누가 더 행복해야 할까요? 만일 우리 가정의 행복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면, 만일 우리 가정의 행복이 지금 나의 손에 무엇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다면 한나와 브닌나 가운데 누가 더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브닌나가 더 풍성하고 행복해야 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브닌나가 자녀를 가졌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나를 괴롭혔을 때 한나의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한나를 괴롭히는 브닌나의 마음에도 기쁨이나 감사나 행복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한나가 소망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지를 보여줍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무엇하지요? 기도합니다. 지금 한나가 하나님께 통곡하면서까지 간절히 아뢰었던 기도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아이 낳게 해 달라는 거죠. '나도 다른 여인과 같이 자녀를 출산하게 해 주세요.' 그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한나의 기도는 간절했지만 큰 소리로 기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뭐 그리 대단한 기도의 제목이 아니잖아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도 아니고 그저 아이를 낳게 해 달라는 기도이니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음으로만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나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면 안 되니까 소리도 못 내고 기도하였는데요. 그 옆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해줍니다.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하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술에 취한 것으로 알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엘리 제사장과 한나가 대화를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을 해준다니까요.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17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대화를 아무리 많이 읽어보아도 한나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엘리 제사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힌트가 하나도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한나의 기도는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혼자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 엘리는 한나가 어떠한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하는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그 다음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한나의 대답입니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18절)

한나의 대답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볼까요? 한나가 "아멘"한 거예요. 

우리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축복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아멘"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평강이 임하시고, 여러분이 어떠한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든 가정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가 사실 여러분이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잘 몰라요.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기도제목을 알려주신 분들의 기도 제목은 알지만, 더 많은 성도님들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제목은 제가 알 수가 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근심 빛이 없더라


엘리의 축복에 대해 한나가 "아멘"으로 반응했어요. 그러자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8절 말씀을 우리 함께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대해 "아멘"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근심 빛이 사라졌어요. 아직 아이를 잉태한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를 낳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아멘"으로 반응하자 그 마음에 소망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잘 먹습니다. 편히 잠듭니다. 다시는 얼굴에 근심 빛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근심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가정에 돌아갔을 때, 한나의 가정은 그 이전 같았을까요? 브닌나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한나를 괴롭혔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브닌나의 마음에 만족이 없기 기쁨이 없기 때문이지, 그것 때문에 한나의 마음은 요동치 않아요. 비록 한나의 품에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어요. 그러니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먹는 음식이 맛이 납니다. 밤마다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잡니다. 그의 얼굴에 근심 빛이 사라지고, 그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생깁니다.  

브닌나는 아이를 이미 출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었어요. 그러니 자신의 품에 자녀가 있으면 무엇합니까? 여전히 그 마음에 평강이 없는데요. 그러나 한나는 아직 아이를 잉태하지도 못했고 아이를 낳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생기니 삶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나아가, 그 마음에 소망을 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은 천국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한나의 가정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사무엘이라는 아들이 아니라 
한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의 소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소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향한 소망을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여러분의 손안에 움켜잡은 것이 적을 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다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은 천국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달] "믿음의 가정" / 여호수아 24장 14-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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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4. 2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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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정에 대한 시리즈 설교의 주제는 다섯 가지입니다. 믿음의 가정, 소망의 가정, 사랑의 가정, 축복의 가정, 그리고 행복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정이기를 원하고 또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정, 축복과 행복의 가정을 이루는 그 첫 번째 단계는 믿음의 가정이 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가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망의 가정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가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의 가정도 어렵습니다. 믿음의 가정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행복의 가정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가정의 다양한 모습은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가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첫 관문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24장입니다. 모세 시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였던 출애굽에 이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과연 가나안 땅에서 펼쳐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요? 과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어떠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수많은 꿈과 비전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헤매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새로운 열겠다고 자부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온갖 기대와 전망이 쏟아지고 있을 바로 그때.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생명과 행복의 길인지, 아니면 사망과 불행의 길인지를 결정하는 첫 번째 관문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지적하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14절)

 

바로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펼쳐진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좌우할 첫 번째 관문입니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들은 모든 우상을 치워버리고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여호수아의 뒤를 이어 누가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인가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 과제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살면서 어떻게 농사를 짓고 어떻게 목축을 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면서 어떻게 국가의 조직을 구성하고 어떻게 국방을 튼튼하게 해서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펼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다짐, 백성의 결단 

 

그래서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자신의 분명한 다짐을 선포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15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습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것을 경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길지라도 "나와 내 집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것이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한 여호수아의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가정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면,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행복한 자녀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도 여호수아의 결단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노라" "나와 내 집은 믿음의 가정이 되겠노라" 이 놀라운 결단이 우리 모두의 결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선언하자 참 놀랍게도 온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16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마음의 결단을 선언하자 백성들도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18절)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데요.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겠다고 백성들도 결단하며 나아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고 지금 이 장면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하는 민족의 지도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먼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배우자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하시지 말고 먼저 여러분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그의 가정을 믿음의 가정 삼아주시고, 여호수아와 그의 가정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믿음의 공동체로 변화시켜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도 믿음의 가정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의 가정의 소망의 가정과 사랑의 가정을 위한 첫걸음을 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의 믿음의 가정이 될 때, 하나님을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과 행복의 가정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가정의달] "소망의 가정" / 사무엘상 1장 10-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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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사랑의 가정" / 룻기 1장 15-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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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행복의 가정" / 시편 128편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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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4. 2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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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TV 드라마 가운데 <동백꽃필무렵>이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도 작년 말 열심히 이 드라마를 챙겨 보신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고백하자면, 마땅히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야 하는 목사인 저도 이 드라마를 참 열심히 챙겨 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설교는 TV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내용을 언급하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 드라마의 여 주인공 동백이는 7살 나이에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고 보육원에 맡겨진 것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드라마의 초반부에는 주인공 동백이의 엄마는 딸을 버린 무정한 엄마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드라마의 후반부로 가면 동백이 엄마의 입장에서 지난 34년의 이야기가 새롭게 구성됩니다. 여기 34년이라는 것은 현재 여자 주인공인 동백이의 나이입니다. 자, 동백이의 엄마는 술주정뱅이 남자를 만나 딸을 출산하였지만, 그 남자의 폭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갓난 아이를 데리고 거리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7살 먹은 딸을 보육원에 버리기까지의 여러 가슴 아픈 사연들이 등장하죠. 엄마는 7살 동백이에게 딱 일녀만 기다리라고, 일년 동안 돈을 벌어서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엄마는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딸을 버린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딸을 되찾기 위해 보육원으로 돌아가지요. 그런데 문제는 일년만 기다리라는 엄마의 부탁을 잊어버린 이 동백이는 이미 멀리 입양이 되었고 엄마는 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주인공 동백이는 입양되었던 가정에서 파양되어 다시금 고아의 신세가 되었는데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동백이의 엄마는 다시금 딸을 찾아나서죠. 그리고 엄마는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 그 순간까지 딸에게 못다한 사랑을 베풀어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동백이의 입장에서 7살 이후, 34살이 되어버린 지금까지 엄마는 자신을 버린 무정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며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편지를 통해 딸을 보육원에 버리는 한 순간의 실수는 범했을 지라도 딸에 대한 엄마의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주인공 동백이에게 남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7년 3개월이 아니라
지난 34년 내내
엄마는 너를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했어.

바로 이 장면을 보면서 저의 마음에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지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시온성, 곧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시온성,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구나.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의 하나님이 되기 싫어 우리를 버리셨기에 우리 유대인들이 이방민족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의 초반부에 여주인공이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과 동일하죠. 7살된 딸을 보육원에 버리는 무정한 엄마의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읽어드린 이사야서 말씀의 바로 다음 구절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생각을 교정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장 15절의 말씀입니다.

TV드라마에서 엄마는 자신의 딸 동백이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7년 3개월이 아니라
지난 34년 내내
엄마는 너를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했어.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0절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께서 온 몸을 물에 흠벅 적신 상태에서 땅으로 올라오고 계셨어요. 바로 그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십시오. 10절을 다시 보세요.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그 다음,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여기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마치 극장에서 무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좌우로 갈려지면 커튼 뒤에 있는 장면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처럼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천상의 모습이 드디어 드러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 예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말씀하시고 인간의 행동을 하시는 그 겉모습만을 바라볼 때는 결코 드러나지 않았던 영적인 세계가 활짝 열리는 장면이지요. 오늘 본문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그 다음에 무엇이라 말씀하시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예수님의 겉모습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자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영적 실체를 바라본다면 그분은 언제나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임하기 이전에요.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으신 분, 구체적으로 이 장면에서는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할 구세주, 곧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자,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먼저는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임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분의 영적인 실체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온 세상의 구원자, 곧 메시아를 인치시는 분이요 성부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가라는 분이 예수님의 일생을 기록하면서 그 첫번째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그분의 영적인 실체가 드러나는 이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 – 특별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며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이 장면을 –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체를 다 뒤로하고 그저 겉모습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한 거에요.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딱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시는지 잘 모르겠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이죠. 마치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버려진 이후, ‘고아’라는 낙인이 찍힌체 살아갔던 어느 TV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모습만을 본다면 너무도 초라해요. 바로 그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의 장면을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그 장면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겉모습은 그저 이 땅을 살았던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영적인 실체가 드러나기만 한다면 그분은 성령께서 임하시는 온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부르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적인 실체가 너무도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모습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별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길을 뒤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하늘이 열리고 영적인 실체가 드러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딸이여’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실체가 너무도 분명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기는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이 장면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개인을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시지 않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향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딸이여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성령의 인도하심 그리고 천사의 수종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임재하셨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향하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시는 메시아,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지금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 이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그 다음에 무엇이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이 쉽게 수긍이 되세요?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셨고 성령께서 친히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는데, 그 장소는 광야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영적인 실체, 곧 성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성령께서 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영적인 실체는 시험이나 위기나 아픔을 조금도 겪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갈보리로 걸어가시는 그 길은 막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셨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성령이”,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리하여 13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여기서 멈추지 낳고 너무도 의미 있는 장면을 묘사해줍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그 다음이 뭐죠?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성부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성자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는 것을 내버려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갈보리의 십자가 길을 걷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그 모든 순간에 성자 예수님과 함께 하시며 천사로 하여금 예수님을 수종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한체 자신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기며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험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다고요? 여러분의 삶에 시험이 찾아온다고요?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를 지는 듯한 아픔이 있다고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장면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눈을 열어 영적인 실체를 바라보며 다시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이십시오. 성자 예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안에 함께 거하시며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딸이여,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이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마음에 간직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험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으며, 마침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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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13절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은 이제부터 서술하는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마치 제목을 붙이듯 표제어로 시작한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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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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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4. 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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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이었지만 이제는 겟세마네 동산의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꼭 그와 같았기 때문이겠지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3b-34a절) 

이때부터 육신의 고난보다 더욱더 끔찍했던 영혼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채찍을 맞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급기야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육신의 아픔도 괴로웠지만 온 인류의 죄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성부 하나님의 외면 속에서 죄악의 저주를 받아야 했던 그 길이 우리 주님께는 가장 큰 괴로움이요, 최고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되었던 영혼의 고난,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반드시 겪으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통받으며  번민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은 기독교의 독특한 진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리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절규 어린 기도를 깊이 묵상했던 고대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명할 필요가 없다. 정말이지 나는 그의 놀라운 신앙과 위엄을 빼놓고 다른 것을 여기서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가 나의 고통을 견디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나에 대한 그의 메시아적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문제로는 아무것도 슬퍼할 일이 없는데도 나 때문에 슬퍼하신 것은 내 죄성의 무거운 짐을 몸소 체험하시려는 뜻이었다. 내가 예수님의 고통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전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성육신은 허깨비가 아니라 실체다. 그가 슬픔을 당하신 것은 슬픔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상처를 입고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용맹스럽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각주:1]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영혼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지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은 끔찍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사명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깊은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지만 그 마음의 아픔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 차례에 걸쳐 기도할수록 지금 겪는 영혼의 고난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만 우리 주님께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마침내 모든 기도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담담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1-42절) 

땀이 핏방울이 될만큼 간절히 기도했지만(눅 22:44), 예수님께 임한 영혼의 고난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잔을 예수님에게서 거두어주지 않으셨고, 예수님의 깊은 번민 속에서도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셨던 주님은 이제 일어나 영혼의 고난을 간직한 채, 십자가를 지시는 육신의 고난을 향하여 당당히 걸어가십니다. 


인간의 기도 

본문에는 영혼의 고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십자가의 길에 따라가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했던 제자입니다(마 14:31).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랑스럽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던 제자들입니다(마 10:38-39).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이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떠나고 부인하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절)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지난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서 언제나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의 마음이야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결코 부인하거나 배신하지 않겠다던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십자가라는 거대한 영혼의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도 놀라며 괴로워하셨던 그 장면을 직면했을 때 그들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들의 현존입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원수됨이 드러나는 곳이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각주:2] 

십자가 앞에 선 우리는 예수님을 못박은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난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다면, 
바로 그 장소는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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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Calvin, Commentary, Matthew 26:37. [본문으로]
  2.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울: IVP, 2007), 16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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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3. 3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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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2020년 부활절은 많은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부활절 예배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2020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큰 기쁨의 소식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대유행이 되어(pandemic) 인류를 위협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종식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어울려 예배하는 기쁨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2020년의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기쁨과 슬픔이 서로 섞일 수 없는 감정인 줄 알았습니다. 기쁨이 넘치면 슬픔이 사라지고, 슬픔이 압도하면 기쁨이 물러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살다보니 기쁨과 슬픔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다양한 감정이 좁은 우리의 가슴에 공존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2020년의 부활절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찾아온 부활절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안치되신 무덤을 다시 살펴보기 위하여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지요. 갑자기 큰 지진으로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던 기초가 흔들리니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지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막아두었던 거대한 돌을 옮겼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이 장면을 함께 목격하였던 로마 군대의 경비병들도 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지키던 자들이 [천사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4절)고 묘사합니다. 땅이 흔들리는 지진에 무장을 하고 있던 군인들의 마음까지도 흔들렸으니, 그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연약한 여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더 떨리고 두려웠겠습니까? 

여인들이 얼마나 큰 두려움에 압도되었는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5절) 그리고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6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사를 통해 가장 기쁜 소식, 무덤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설 때부터 가장 기다렸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한순간에 기쁨의 감정으로 바뀌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은 그들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8절) 

8절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할 수록, 이 구절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첫 번째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인들의 마음이 2020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비춰줍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지금,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그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없으며 부활의 그 소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떠한 현실의 아픔 속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여전히 큰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종식되지 않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질병에 대한 걱정, 교회에 대한 걱정, 생계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걱정과 불안 두려움의 감정이 뒤섞여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기쁨의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특권도 그 마음에 깊이 뿌리 잡은 두려움, 곧 걱정과 근심을 온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있을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천사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7절). 이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천사의 음성을 들었던 여인들도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친히 하신 말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절).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갈릴리라는 약속 장소가 아니었던 바로 여기, 여인들이 큰 기쁨과 함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바로 이곳으로 찾아오셔서 여인들을 만나주셨던 것이죠. 우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큰 기쁨과 더불어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의 약속 장소인 갈릴리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 분주하게 달려가는 그들의 앞에 나타나 친히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혹, 부활절을 맞이하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믿지만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에 두려움이 자리잡고 계십니까? 부활절은 되었지만 여전히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니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베풀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사모한다면, 부활의 은총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처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그 옛날 분주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여인들을 찾아가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도 찾아와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의 "평안하냐"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평안을 기원하는 인사말로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하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가 됩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에 부활의 기쁨과 함께 두려움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 새벽 주님을 찾아 나섰던 마리아처럼 여러분도 부활의 주님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친히 찾아가셔서 여러분의 복잡한 마음을 향하여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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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3. 3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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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약함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 

우리는 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관념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매년 사순절을 보내고 부활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삶에는 조금도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닌가요? 

신약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의 한결같은 주장 가운데 하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토록 하나님께 헌신적이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강력한 능력을 나타냈던 핵심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를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는 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가운데 성령이 임하여 초대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현장을 만들 수 있었느냐는 거지요. 그 비결이 뭡니까? 부활의 경험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이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저녁 식사를 나눈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잖아요.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뜨겁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셔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름 전만 하더라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실의와 절망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다시 모여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을까요? 바로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제가 여러분 각자의 신앙 상태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의 주님을 진정 만난 사람은 그의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열매가 있고, 그의 삶에 희망이 넘치고, 그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오늘 부활 주일에 부활의 주님을 다시금 만나시기 바랍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오늘 본문은 요셉이 자신의 아내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들어갔다는 기록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만 열심히 읽고 묵상한다면 그다지 은혜가 되는 부분을 찾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쩌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주보에 나와 있는 설교 제목이 어떻게 오늘 본문에서 나올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갈릴리에서 보내셨다는 이 짧은 사건과 ‘부활의 능력’이라는 설교 제목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이 나사렛이라는 사실에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사렛에서는 훌륭한 인물도, 위대한 역사도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렛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사렛은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지요? 나사렛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 아닙니까? 

십자가는 철저한 절망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죄악과 탐욕과 욕심의 결과는 십자가에서 보이는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악이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어요. 그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보이는 모든 절망과 좌절과 불가능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갈릴리는 절망적인 땅입니다. 그 누구도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는 땅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우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가불이라 불리던 땅 

이 시간, 구약 성경에서 갈릴리라는 지명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절망 가운데 희망을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나태내 보이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다윗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윗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뭐지요?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소원을 선지자 나단에게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나단 선지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허락이 아니라 거절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 시대로 연기하고, 그 대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다윗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로 갖춰 놓았습니다. 그런데 건축을 위한 자재를 준비함에 있어서 다윗에게 큰 협력자가 있었으니, 곧 두로의 왕 히람이라는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5장 11절과 12절 말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두롸 왕 히람이 아무런 힘도 없는 다윗에게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난공불락의 성 예루살렘,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그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러자 다윗의 힘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던 두로의 히람 왕이 다윗과 화친을 하기 위해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히람 왕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습니다. 

자, 이제 시간이 흘러 다윗은 죽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꼭 이루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사업, 곧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착수합니다. 바로 이때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서는 두로 왕 히람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히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열왕기상 5장 2절과 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5절과 6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이스라엘에는 벌목을 잘하는 사람도 없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좋은 건축 자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 건축을 위해 도와달라는 거죠. 그랬더니 히람 왕이 대답합니다. 8절부터 보십시오. “이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거니와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 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운반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뗏목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내 원을 이루어 나의 궁정을 위하여 음식물을 주소서 하고” 히람은 솔로몬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습니다. 대신 요구하는 것이 있었죠? 식량입니다. 계속해서 11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히람에게 그의 궁정의 음식물로 밀 이만 고르와 맑은 기름 이십 고르를 주고 해마다 그와 같이 주었더라” 솔로몬은 히람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솔로몬과 히람 사이에 계약이 성사되었고, 그 계약을 양쪽에서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 솔로몬은 이렇게 해서 두로 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두로 왕 히람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두로 왕 히람에게 선물을 줍니다. 

열왕기상 9장 10절과 11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이십 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제공하였음이라

솔로몬이 히람 왕에게 선물을 주죠? 그 선물이 뭡니까? 갈릴리 땅의 성읍 20곳입니다. 여러분, 이미 솔로몬과 히람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히람이 성전 건축에 필요한 인력과 자재를 공급해주고, 솔로몬은 히람에게 식량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 두 사이의 계약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추가로 갈릴리의 성읍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읍을 받은 히람의 반응이 전혀 의외입니다. 

열왕기상 9장 12절과 1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 이르기를 내 형제여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한가 하고

이름을 가불 당이라 하였더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있느니라

여기서 성경 퀴즈, 갈릴리의 또 다른 이름이 뭡니까? 가불입니다. 그런데 가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뭐죠? 뭐 땅이 요 모양이냐는 거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솔로몬이 굳이 갈릴리 성읍을 주지 않아도 되요. 굳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겁니다. 그러면 왠만해서는 가불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죠. 그런데 히람 왕이 보기에 갈릴리 성읍은 웬만하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가불입니다. 

저는 왜 하나님께서 이 짧은 에피소드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하였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요? 혹 예수님의 출신 나사렛이 오래 전부터 가불 땅이라고 이방 사람 히람 왕에게 조롱을 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신 게 아닐까요? 사람들의 눈에는 가불 땅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도 없고, 불평과 불만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 아닙니까? 인간의 철저한 절망, 곧 가불이라 불리는 그 땅에서 하나님의 희망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라는 철저한 절망의 현장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십니다. 


흑암에 비취는 빛 

우리 끝으로 마태복음으로 돌아와서 마태복음 4장 15절과 1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어디입니까? 갈릴리여!! 그곳은 흑암의 땅입니다. 사망과 그늘의 땅입니다. 그런데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이 비췹니다. 사망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 임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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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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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3. 2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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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든 활동에 함께 했던 제자들도 이 사실을 믿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을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 분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무덤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무덤에는 천사들만이 있었고, 여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말씀을 듣고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지요. 예수님은 무덤에 한없이 누워계실 분이 아니라,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 글로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어 성전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실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의 기대는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천사들을 만났던 여자들의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몇몇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았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친구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는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시며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고 있는지 일깨워주십니다. 그들은 이미 구약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받아 죽음을 당하고 3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믿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고 그들을 다시 그분의 제자로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사도들 역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함께 했던 이들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여자들이 사도들을 만나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못합니다. 다만 한 사람, 베드로만이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겨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가 보았지만 그 역시 조용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또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34절)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 알고 있었을 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바울을 직접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한 평생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부활을 믿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셔서 믿음을 더하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을 그때, 주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또록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절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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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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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3. 2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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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세례 교육을 받는 한 성도님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으려고 결정하셨습니까? 그 성도님의 대답이 저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요." 그분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짧은 대답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과 단절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출발하고자 하는 그 성도님의 마음이 저에게도 분명하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조금 전 소개해드린 성도님은 참 좋은 선택을 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의례적인 세례가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세례를 받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분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넉넉히 선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기 이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 예수님을 그리워하였던 여인들은 답답한 마음에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 후 첫날 - 곧 주일 - 새벽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 문화는 오늘날 우리의 장례문화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시신을 화장하거나 매장을 하지요.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시신을 동굴 안에 모셨고, 시산을 안치한 후 사흘 안에 다시 방문하여 향유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당시 유대인의 방식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다시 한번 찾은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여인들의 마음은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던 여인들의 모습을 몇 가지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헛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이 여인들이 무엇을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어요. 여러분, 이들의 행동이 필요했나요? 필요하지 않았나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찾아갔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어요. 그저 천사만 만나고 오거든요.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한 여인들은 필요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던 여인들은 
둘째로 헛된 걱정을 했습니다. 3절입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여인들은 그저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가까워오자 마음에 걱정이 생겼지요. 무덤에 큰 돌이 있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그런데 여인들이 모르는 것도 있었어요. 마태복음 본문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무덤을 봉인해버리고, 그 앞에 군인들로 하여금 경비하게 시켰습니다. 여인들은 그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무덤을 막아놓은 커다란 돌만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여인들의 걱정은 헛된 것정이었습니다. 4절을 보시면, "눈을 들어 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던 여인들은 
첫째로 필요 없는 노력을 기울였고, 둘째로 필요 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헛된 장소를 찾아왔습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무덤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천사들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헛된 장소인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한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였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헛된 장소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이후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헛된 노력을 계속하고, 헛된 걱정에 사로잡혀, 결국 헛된 장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 마음에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그 어떠한 새로운 삶도, 새로운 희망도, 새로운 변화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사를 통하여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비로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들의 마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믿음이 생겼지요. 그러자 그들에게 거대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8절입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여기에 "몹시 놀라 떨며 나와"라는 구절은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뛰쳐 나와서" 

헛된 노력으로부터, 헛된 걱정으로부터, 헛된 장소로부터 뛰쳐 나올 수 있는 힘. 그리고 내일 본문부터 시작되는 부활의 증인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 마음에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여러분의 마음이 머물러있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다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헛된 노력과 헛된 걱정과 헛된 장소로부터 뛰쳐나와 새로운 삶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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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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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19. 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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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는 오늘의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동사가 하나있습니다. 바로 넘겨주다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데요.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죠?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5절도 보십시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인들에게 넘겨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넘겨주다는 단어를 묵상해보니, 중요한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물론, 손과 발에 못을 직접 박은 사람은 로마 군인이었어요. 그러나 로마 군인에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일의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가 않지요. 왜냐하면, 명령을 받아 수행한 것이고 로마 군인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이 있었잖아요. 곧 빌라도 총독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빌라도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지요. 그러나 여러분,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 1절이지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당시 최고의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책임을 로마 군인과 빌라도 총독에게만 묻는 것도 적절한 평가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도 있지 않았나요? 대제사장들에게 은을 받고 예수님을 넘겼던 사람, 곧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어 예수님을 붙잡게했던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넘겨주었으니 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들은 여럿이 있었어요. 먼저는 가룟 유다요, 또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요, 나아가 본디오 필라도 총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언급하지 않은 부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누가 등장합니까? 빌라도를 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14절도 보십시오. 빌라도가 다시 말합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그러나 그 무리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았고, 이성적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리지릅니다. “더욱 소리 지르되무엇이라고 소리지르지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러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의 군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유다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사람들은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라고 불렸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사람들은 당시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유대지역을 다스리던 빌라도 총독이요, 나아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소리지르던 무리들입니다. 곧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자를 십자가로 내몰았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여기서도 내어준다‘는 동일한 단어가 등장해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까? 우리는 먼저, 로마 군인을 언급했고, 그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총독 빌리도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쳤던 수많은 무리들, 그 가운데 우리도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은 주체 가운데 아직도 언급하지 않은 대상이 있어요. ‘내어준다‘는 동사를 한번더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는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면, 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왔던 예수님의 지난 공생애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힌 이후부터는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의지가 없으신 것처럼 보여요. 그저 붙잡으면 붙잡히시고, 그저 끌고 가면 끌려 가시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면 넘어가셔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로마 군인의 손에 넘겨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죠.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 과연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주목하면서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이러한 답을 내어 놓았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 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이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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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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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18. 11. 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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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885년이 그 시작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 해 전인 1884년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한국땅을 밟았지만, 알렌은 의사로서 평신도 선교사였습니다. 드디어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들이 인천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해가 바로 1885년이기에, 교회사가들은 이때를 한국 개신교의 출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국 개신교가 시작되었던 역사적 장소에 와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서구인들에게 미지의 땅이요,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1885년 부활절,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인천항을 통해 조선 땅을 밝았지만 그의 앞에는 어둠뿐이었고, 앞길은 어두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그 유명한 언더우드의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나무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있게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백성,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주변의 모든 민족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여호수아는 두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냅니다. 두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처음 가보았습니다.두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서 어떠한 일을 맞이할 지, 과연 이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입니까? 그저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들어간 집의 주인이 라합입니다. 처음 가보았던 가나안 땅,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여리고성에서 라합이라는 믿음의 여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합이라는 여인의 입을 통해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두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가나안 땅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어요.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곧 어디에서도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처음 밟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자리에 계셨고, 그곳에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이 땅은 미지의 땅이요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저 믿음으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하나님이시고,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셔서 조선 땅, 지금의 한국 땅에 복음을 풍성하게 전파하여 주셨잖아요. 그러니 미지의 땅 가나안에서 두 명의 정탐꾼들에게 하늘과 땅의 하나님을 등장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미지의 땅 조선에 발을 들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도 하늘과 땅의 하나님을 나타나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전도하기 위해 교회를 나서지만,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때가 있지요. 과연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까라는 걱정이 앞서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하나님이시고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은 곳에서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찌 전도의 현장뿐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횟수가 한해 두해 늘어가지만, 인생을 살아온 세월이 한해 두해 늘어가지만 여전히 내 삶에 앞으로 펼쳐진 일들에 대해서는 그 누가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앞길, 자녀들과 자손들의 앞길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인천항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제럴와 같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하나님이시고,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게 하여 주시고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여러분을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둠의 땅이요,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믿음이 오늘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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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