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7. 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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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의 군인이 기록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기도문이라기보다는 기도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장애인협회의 한쪽 벽에 약 30년 동안 걸려 있었는데, 그 글귀가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만한 기도입니다. 이 글의 저자는 말씀드린 것처럼 알려져 있지 않고, 어느 무명의 군인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I asked God)입니다. 

나는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드셔서,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허약하게 만드셔서,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재물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가난하게 만드셔서,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연약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명의 군인은 자신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나의 무언의 기도는 응답 받았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하나의 기도 제목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여기에서 “이것”은 위의 7절에 등장하는 “육체의 가시”입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안질이었다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시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큰 고통 속에서 선교를 감당해야 했던 바울이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듯, 바울을 괴롭혔던 육체의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울의 몸에 선교 사역은 물론이요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매우 치명적인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겪었던 질병이 아니라 바울의 삶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만성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8절에서 바울은 이 질병이 떠나가도록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어요. 

이 사실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신약성경의 또 다른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그날 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리고 신약성경은 그날 밤 예수님도 세 번에 걸쳐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도의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이 잔,’ 곧 십자가의 고통이 자신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만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규정한다면, 어느 무명의 군인이 드렸던 기도만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바울의 기도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도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느 무명의 군인이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질병이 사라지기를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과정에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뜻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세번에 걸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성부 하나님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 – 심지어 그것이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신지고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기도가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전락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작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때가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군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사도 바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있으니, 우리는 기도를 통해 더 깊고 더 풍성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여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과대평가와 자만이라는 질병

바울의 기도는 그의 질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바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 12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은 사도 바울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절) 

고린도후서 12장은 바울이 체험한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리고 본문 6절에 이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6a절) 

바울이 1절부터 지금까지 말한 환상과 계시는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참된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 곧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서 그와 관련하여 매우 강조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6b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그만 두겠다’고 말하네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바울 자신을 바라보거나 바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바울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 곧 그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서 자신의 경험을 다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바울이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바울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에도 과대평가, 곧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 

사도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고 하여 바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환상과 계시를 보기 이전에도 바울은 바울의 삶을 살았고요, 환상과 계시를 본 이후에도 바울은 바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어요. 만일 바울이 보았던 환상과 계시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라면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 환상과 계시의 내용을 전해주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물론이고 바울의 서신 그 어디에도 그가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한 내용은 단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지요. 바울이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변에서 바울이 어떤 특별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인 것처럼 과대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앙 인품이나 자신의 성품은 그 이전과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이 특별하고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자만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 때문이든, 바울이 이룬 선교의 위대한 열매 때문이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된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울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믿음은 파선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 때문이든, 바울이 이룩한 선교의 위대한 열매 때문이든, 바울의 가문이나 학벌 때문이든 바울 자신이 스스로 자만하게 된다면 바울은 교만이라는 무서운 덫에 걸리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주님의 일꾼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을 망쳐버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자만이라는 질병, 곧 교만이라는 뿌리 깊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에요. 하나님은 바울에 대한 사람들의 과대평가, 바울 자신에 대한 바울의 자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육체에 가시를 넣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의도입니다. 

이쯤 되어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과 교만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이란 지금 내가 처해있는 위치보다 나 자신을 더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의 위치에 있다면 스스로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지독한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나 자신을 원래의 위치보다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위치, 우리 인간의 형편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니 나 스스로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해도 내려갈 곳이 없는 거예요. 이러한 나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나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더 낮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교만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생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러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의 덕목을 갖추셨나요? 아니면 겉모습은 겸손하지만, 교만이라는 질병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으세요? 우리는 우리의 몸에 질병이 찾아오면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심지어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질병을 미리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질병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질병이 있다면, 그리하여 그 질병의 치유를 위해 우리가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할 마음의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과대평가하여 하나님이 아닌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요,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만하여 교만해지는 태도입니다.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던 질병을 치유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있어 그의 육체에 가시를 박아두셨으니 바울의 이 기도만큼은 들어주시지 않으시네요. 그 대신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a절)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만이라는, 교만이라는 더욱 치명적이고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바울을 지켜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원리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9b절) 

하나님은 ‘나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진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처음부터 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태초의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온전해진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온전히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약함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라 당연히 인간의 약함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 보다 정확히 묘사하면 우리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의 육체에 박혀 있던 가시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가시로 말미암아 과대평가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게 된다면,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인식하는 겸손의 사람이 된다면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선언하셨던 것이요,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선포하는 ‘약함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곧 약함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의 반응이 이제 본문의 마지막인 10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10절) 

바울은 약함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을 약하게 하는 요소들, 곧 자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바울은 질병으로 약해졌습니다. 그는 능욕을 받으며 약해졌고, 궁핍하여 약해졌습니다. 박해와 곤고는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고 그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깨닫게 되니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고 약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큰 질병을 비롯한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인 10절 말씀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시겠어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 원했어요. 그는 사도요, 선교사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온전히 헌신했고 자신의 사명에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10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표현에는 한 평생 하나님의 사명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던 바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은 그가 진정한 사도, 신실한 선교사,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음 전도자, 곧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숨겨진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겠어요? 과연 무엇이 바울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만들었을까요?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입니까?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그의 빛나는 학력입니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그의 출신 성분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유창한 헬라어 능력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의 장점은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되는데 결코 핵심적인 원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의 여러 가지 장점은 스스로 자만하게 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무서운 질병을 넣어두어야 했던 걸림돌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과연 무엇이 바울을 그토록 위대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의 육체적 가시, 그가 떨쳐버리고 싶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그 몹쓸 질병이요, 본문 10절에서 바울이 자랑하는 약함, 능욕, 궁핍, 박해와 곤고입니다. 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께 작은 역할이라도 쓰임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을 위해 봉사하며 살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의 장점, 여러분의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만한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의 아픔, 여러분의 슬픔,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은 여러분의 그 약점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원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약함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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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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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바울의 편지, 특별히 고린도후서에는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바울이 어떻게 사역했는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온전히 바쳤지요. 그의 선교사역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으로 이어졌고 그의 노년에는 로마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울의 삶은 전도와 선교의 인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후서를 비롯하여 바울 서신을 연구하다 보면 그의 선교 사역에서 바울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하나의 사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구제 사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큰 기근으로 말미암아 재정적으로 매우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상대적으로 조금은 여유가 있었던 안디옥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거든요. 그런데 사도행전은 안디옥 교회가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으로 전달해주었던 사람이 이제 막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였던 바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1:27-30). 

이후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지요. 사도 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는 각지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매우 중요한 회의를 합니다. 이후 학자들은 그 모임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러요.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그날의 회의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에게 공식적으로 부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사업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 이전부터 자신이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갈라디아서에 덧붙이지요(갈 2:10). 그러므로 바울은 선교여행을 시작한 1차 전도여행 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바울의 모금활동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요? 마지막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곧바로 로마로 직행할 수가 없었고, 예루살렘을 반드시 방문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자신이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1차 전도여행부터 시작된 바울의 구제활동은 3차 전도여행이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모금운동을 펼쳤던 시기가 1차 전도여행부터 3차 전도여행까지, 곧 그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이어졌다면 그가 모금운동을 펼쳤던 지역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이 1차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지역은 갈라디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거두었다는 말이 나옵니다(고전 16:1)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던 지역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 1절부터 4절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곧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빌립보 교회가 기쁨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동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고린도인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아가야 지역의 교회 등 자신이 선교하고 개척한 거의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동참하도록 매우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구제헌금을 강조한 이유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천천히 조사해보면 그는 자신이 선교하고 개척하여 세운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한 거의 모든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동참할 것을 매우 강력하게 독려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모금활동은 그에 대한 오해를 일으켜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적대하는 대적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바울의 모금활동은 딱 좋은 비난 거리를 제공했지요. 바울이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는 자비량으로 선교한다고 말은 하지만, 뒤에서는 헌금을 강요하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하지요. 이러한 오해와 이러한 갈등을 초래하면서까지 바울은 자신의 선교기간 내내 자신의 모든 선교지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강행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연스럽게 질문이 하나 떠오르지 않으세요? 바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왜 바울은 교회 안에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구제헌금을 위한 모금운동에 그토록 열심을 내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신이 전도한 거의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오늘 본문 10절에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고후 8:10a) 

이 말씀에서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바울은 ‘이 구제헌금에 관하여 자신의 뜻, 곧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고 말씀하네요. 그러면 바울이 피력하는 그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모으는 그 일이 고린도교회 성도들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구제헌금을 전달받으면 기근에 시달리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하겠지요. 그러나 바울의 중요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곧, 헌금을 모으고 그 헌금을 전달하는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이 직접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고,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아가야 지역의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헌금을 많이 하시면 교회를 운영하는데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겠지요. 성도님들이 헌금을 많이 하여 교회가 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교회의 섬김을 받는 분들에게 더 많은 유익이 돌아가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그 정도의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생활,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제활동은 다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네요.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고후 8:7a)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은사가 가득했습니다. 믿음이 있었고 지식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풍성한 신앙의 모습에서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어요. 그들의 신앙이 더욱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이 모든 면에서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7절의 뒷부분이죠. 

이 은혜에도 (여기서 이 은혜는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입니다)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 8:7b) 

기도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지죠. 말씀 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모습으로 봉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면 우리의 믿음 생활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드리는 헌금생활이 풍성해지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헌금 안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 안에 우리의 신앙이 풍성해지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의 원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이 예루살렘 교회를 유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고린도교회에도 더 큰 유익이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본문 9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묘사하는 바울의 표현이 참 멋있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이미 우리는 다 알고 믿고 있어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이미 알고 믿고 감사하고 있잖아요.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런 소유도 없이, 아무런 권한도 없이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가지신 가장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신 거예요. 그런데 가장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난해지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거예요. 

바울은 계속해서 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우리는 물질적으로 가난했고, 정서적으로 빈곤했으며, 영적으로 극빈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cf 고후 6:10). 이처럼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다면, 우리도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가지고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선언한 이 복음의 은혜에는 헌금에 대한 더욱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가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그 은혜를 나누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깊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이제 바울은 그 유익에 대해 설명합니다)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고후 8:10-11) 

여기에서 바울은 성취 그리고 완성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성취와 완성의 일차적인 의미는 처음에 계획하고 작정했던 금액의 헌금을 모두 완료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을 기록했던 지금 시점으로부터 약 일년 전부터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시작했는데, 그것을 이제 완성하라는 촉구입니다. 그러나 본문 11절은 우리 신앙의 시작과 우리 신앙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구절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부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어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신앙의 시작점이에요. 신앙생활에서 시작점은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그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신앙의 시작점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면 완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받은 풍성한 은혜를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베풀 때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신앙은 완성을 향해 더욱 전진하게 됩니다. 

자, 이쯤되니 설교를 시작하며 품게 되었던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서, 자신이 선교한 지역과 자신이 개척한 교회와 자신이 직접 전도한 성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선교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지역과 교회에서 왜 그토록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강조했던 것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이웃을 위한 구제야 말로 성도들의 신앙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첩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과 여러분의 신앙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균등의 은혜

자, 이제 바울은 헌금과 구제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균등’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3-14)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면서까지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평안하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넉넉하지만 다른 사람은 곤고하고 다른 사람은 궁핍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균등의 은혜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승자 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은 –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 그곳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어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으로 강조하는 균등의 원리는 구약성경에서 차용해온 개념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이제부터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5) 

바울이 인용하는 출애굽기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사건의 일부입니다. 광야 어디에서도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몸도 건강하고 부지런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거둔 사람도 있었겠지요. 또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몸이 약하거나 멀리 걸어갈 수가 없어서 조금 거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는 많이 거두었다고 하여 남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그러니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한쪽에 자신만을 위해 쌓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재산을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있지요. 쌓아 놓으면 나의 마음이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선뜻 이웃과 나누지 못하도록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나누다 보면 한쪽에 쌓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경험이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나요? 한쪽에 쌓아 두려고 아무리 열심히 거두어도 참 신기하게 그것은 남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아요. 본문 15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나가서 많이 거두었어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조금 늦게 나갔더니 진영 가까이에 있던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거두어 갔어요. 만나를 찾아 멀리 나가보았지만 그날은 조금밖에 거둘 수가 없었네요.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매일 많이 거둘 수는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많이 거두던 사람도 어느 날은 적게 거두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의 은혜, 하나님께 베풀어 주시는 균등의 은혜는 너무도 놀랍습니다. 광야에서 살았던 40년 동안, 어느 날은 많이 거두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적게 거두기도 했는데 단 한 번도, 단 하루도 양식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을 넘어 신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동참하여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풍성한 은혜를 내 곁에 있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성숙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만나의 은혜요, 균등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이 거두어도, 많이 모아도 그 무엇도 남지 않고 그래서 쌓아 둘 수 없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나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섬김과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균등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요, 
여러분이 적게 거두는 그날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하시는 균등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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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6.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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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명, 북한군 전사자는 약 52만 명,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사자는 약 30만 7천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만 해도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런데 625 전쟁은 군인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죠. 625 전쟁으로 사망한 민간인의 숫자는 약 24만 4천 명이요, 그 외에도 실종자나 부상자는 더욱 많으며 그 과정에서 부모를 잃고 버려진 전쟁고아도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은 인명피해만 입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서 남북한의 경제는 사실상 초기화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남한 제조업의 약 42%, 북한 공업의 약 60%가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의 파괴와 도로, 교량, 철도 등의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625 전쟁은 예배당을 비롯한 기독교 시설을 무너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그 마음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해졌습니다. 이처럼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며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우리 모두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주관자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는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을 허락해 주시기를, 나아가 하루속히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의 시대, 평화의 시대

모세의 시대,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큰 전쟁을 치렀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요단 동편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고,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40년 간 광야에서 생활했던 시대에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은 성인이 되어 모세의 지위 아래 요단 동편을 점령하였고, 나아가 여호수아의 지위를 받으며 요단 서편을 점령하였습니다. 가히 그들의 일생은 전쟁의 삶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 여호수아 22장에 이르면 전쟁의 시대가 마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수 22:1-2) 

여기에서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다는 듯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수 22:3) 

지금 여호수아가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이라는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안정의 시대, 정착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수 22:4)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완벽한 평화는 아닙니다.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국지전은 계속되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모세의 시대, 나아가 여호수아의 시대에 펼쳤던 전면전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정착의 시대요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사람이 어느 시점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요단 동편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또한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반면, 그들의 다음 세대는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야기하는 그 전쟁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한 지역에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평화로운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지 답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약 7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625 전쟁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기보다는 평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남과 북은 전쟁을 끝낸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쉬고 있는 휴전이지요. 그래서 625 전쟁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과 국지전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약 70여 년 전 이 땅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교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분명 평화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 전쟁의 시대를 지나 안정과 평화의 시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

이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이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스라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가장 큰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시대, 곧 이스라엘 12지파가 함께 힘을 합해 적군을 상대할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그들에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 문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은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이스라엘은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히 나뉘어 있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단 동쪽에는 두 지파와 반지파가 정착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와 반지 파는 요단 서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강이나 바다가 있어도 그 위에 다리를 놓고 차도나 철도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왕래할 수 있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요단강과 사해를 건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여러분, 여호수아 3장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으로 요단강의 물이 멈추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에요. 그런데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정착의 시대, 평화의 시대에 요단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서편으로 건너올 일도 없거니와 요단 서편에 정착한 아홉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건너갈 일도 없겠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이 서로 왕래를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리되지 않겠어요? 이러한 위험이 지금 평화의 때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앞에 놓인 위험성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약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입니까?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었지만 온 한반도를 뒤덮었던 625 전쟁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평화의 시대를 보낸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서로 왕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분들이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정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분단이 고착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이 서로 나뉘어 있는 문제는 단지 정서적으로 나뉘고, 문화적으로 괴리감이 생긴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직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 안에 그 위험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수 22:24-25) 

여러분, 지금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걱정은 결코 괜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에는 요단강을 건너 서로 왕래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어요. 그런데 당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장소로 가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임재하시니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는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 곧 성소에 가야 제사를 드릴 수 있고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는 요단 동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단 서편에 있거든요. 그러니 요단 동편에 정착해야 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야 요단 동편에 정착을 해도 한평생 전쟁의 시대를 보내며 하나님을 섬겨왔으니 그 믿음이 변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22장을 읽고 묵상하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했던 그 걱정이 실제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서 현실이 된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휴전선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왕래가 멈추었지요. 이산가족이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도 크고 시간은 흐르는데 그리운 고향 땅을 찾아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슬픔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쟁 후 70여년이 흐르면서, 남과 북은 문화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며 살아가는 모습도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민족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자유롭게 교제하며 함께 모여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남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 가득 차 있어요. 서울의 밤하늘은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휴전선 이북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요단의 서편이든, 요단의 동편이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38선 이북이든 38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휴전선 이남이든 상관없이 우리 민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단 서편의 아홉지파와 반지파가 아무리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더라도 요단 동편의 두 지파와 반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만 아름다운 예배당에 함께 모여 마음껏 예배하고, 북녘의 동포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깊은 지하 교회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면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어찌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요단 동편에 정착하였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자신들의 후손이 너무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단 동편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요단강 가에 제단을 하나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엣이라고 불렀지요. 여호수아 22장 마지막절은 그 제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수 22:34) 

본문이 설명하듯이 ‘엣’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34절은 그 앞에 매우 중요한 표현을 첨가하고 있네요. “우리 사이에”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할까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와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를 모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엣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지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뿐만 아니라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625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휴전선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휴전선 북쪽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그들의 후손이 요단 동편에 거주하든지 요단 서편에 거주하든지 상관없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엣이라는 이름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625 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지파들이 ‘엣’이라는 제단을 쌓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 마음으로 오늘 우리도 우리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휴전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이 땅 한반도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넘치며 이 땅 한반도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이 넘쳐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마침내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는 그날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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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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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성도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성도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가깝게 지내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고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들이지요. 그 친구들 중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교회를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친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친구들은 삶이 그렇게 고달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성적이 잘 안 나오거나,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준비를 하지만 직장을 얻기가 어렵다거나, 심지어 결혼하여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까지 뭐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답니다. 그런데 친구들 가운데 교회를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친구들은 그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없더랍니다. 늘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삶이 형통하데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삶에 고난이 많고,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은 삶이 형통한 현실을 말하면서 그 성도님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너무 좋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예수님을 실제로 믿는 가까운 친구들의 처지와 형편을 너무도 잘 아는 사이에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심지어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뜻이 다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롬 8:28).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에 원치 않는 질병이 찾아오고, 목표하였던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그동안 공을 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믿음의 대해, 신앙에 대해 회의감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였을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우리의 믿음과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며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우리의 분명한 현실이 상충할 때, 그것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고백] 지금이 은혜의 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그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비판했던 논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신실한 일꾼이라면 저렇게 가는 곳마다 고난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이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역자라면 어디를 가든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명성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은 툭하면 감옥에 갇히고, 툭하면 매를 맞고, 툭하면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쫓기고 있으니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그 문제에 대해 대답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대답은 그가 경험하는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 결코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믿음의 고백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여기에서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구절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인용하는 구절인 이사야 49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 구절에서 핵심 개념은 ‘은혜의 때,’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49장 8절의 앞부분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언제를 말씀하시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 뒷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내가 장차)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사 49:8)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는 이사야서의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때,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그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49장 8절이 구약시대의 예언이었다는 사실, 곧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하였을 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사야 말씀의 앞부분만 인용하고는 그 뒤에 이렇게 설명을 붙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장차’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지금’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성경의 ‘장차’라는 단어를 ‘지금’이라는 단어로 바꾸었던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더 이상 장차가 아닙니다. 구원의 날은 오늘이요, 은혜의 때는 지금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소유한 기독교 신앙은 지금은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다 보면 장차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게 되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바로 지금이 은혜의 날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에게 이 믿음을 흔들고 싶었어요. 너의 현실을 보아라, 지금 너에게 찾아온 아픔과 고난을 보아라. 그러고서도 너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공격했어요. 그리고 성도 여러분, 동일한 공격이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 몰려옵니다. 아니 당신의 현실을 정확히 보라고, 당신의 삶에 질병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오고, 궁핍이 찾아오고, 염려와 걱정거리가 하루도 떠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느냐, 당신에게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이 공격을 받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더욱 큰 확신을 가지고 선언합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역설의 진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빌미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현실의 고통에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충성을 다하는 바울 자신의 삶에 극심한 고난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든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고린도후서 6장 4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여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이 겪는 일이 무엇인지 서술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한 가운데서도 (고후 6:4-5)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진리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아요. 그래서 많이 견디어야 합니다. 환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궁핍을 견뎌야 합니다.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을 겪어야 합니다. 자지 못할 때도 있고 먹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고린도후서 6장 8절) 

여기에서 그러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광과 아름다운 이름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광과 욕됨이 함께 있어요.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의 길도 있어요.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가지가 모순처럼 들리시나요?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은 안 계세요?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형통하게 된다는 겁니까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겁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둘 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하면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까?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그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 사도 바울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모순과 역설의 차이를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순과 역설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모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입니다.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사안은 결코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역설은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만 보면 서로 상충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진리를 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엇듯 보기에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명제를 늘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역설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고운 정 미운 정’ 곱다라는 말과 밉다는 말은 서로 상충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만 선택하여 ‘고운 정’이라고만 하거나 ‘미운 정’이라고만 하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듯 보기에는 상충되는 개념이지만, 그 두 가지 개념이 모두 담겨 있어야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이에요. 

우리의 신앙에는 역설의 진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말도 안 되는 모순이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가 없어요. 이 두가지 명제가 함께 있어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균형 있게 묘사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자, 모순과 역설의 차이에 대해 말씀을 드렸으니 이제 다시 본문이 말씀하는 두 가지 진리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 진리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거든요. 이제 사도 바울은 그 역설의 진리를 멋진 필치로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속이는 자 같습니다.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신앙의 진리는 언듯 보면 모순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니 말장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순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역설의 진리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도 참되고, 우리의 신앙도 참되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명한 자와 같아요. 누가 우리에게 주목합니까? 이 세상에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둡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하나님께서 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무명한 자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천국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 같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10절도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하는 자 같아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걱정과 근심이 멈추지를 않아요. 그러니 근심하는 자의 모습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서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거든요. 걱정과 근심의 거리가 가득하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흘러넘치잖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같아요. 통장 계좌를 보면 잔액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말했잖아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같아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선언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듯 수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에요.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그룹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친구는 많은 고난을 받고, 오히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는 삶이 형통하여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였던 성도님이 계셨지요? 저는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우리는 예수님 믿고 형통하였다는 것으로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복을 받았다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불신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나의 삶에 아픔이 찾아올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아픔을 넉넉히 이겨내는 모습이요,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조차 우리 마음에 기쁨이 멈추지 않는 모습이며, 세상의 온갖 불의로 말미암아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안에도 우리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보여주기 원하는 모습이고,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들을 예수님의 은혜로 초대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큰 아픔과 고통이 늘 찾아오고 있지요? 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맞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과 아픔이 있어요. 그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많지요.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하나의 분명한 진리가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여러분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여러분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여러분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여러분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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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6. 1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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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와 맞닿아 있는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등잔대가 서로 마주 보게 놓여있었다. 그 외에도 성소에는 또 하나의 성물을 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분향단이다.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 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출애굽기 30장 6절) 

하나님은 지성소에 위치한 속죄소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cf. 출애굽기 25장 21-22절). 그곳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재하여 그들을 만나는 장소다. 오늘 본문에서 분향단의 위치는 속죄소를 기준으로 말씀하신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밖에 두라는 명령이다. 아론은 그곳에서 향을 피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간적 연약함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표자 아론 사이에는 휘장과 향이 놓여 있지만, 이러한 조건이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친히 만나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매일 그리고 대대로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씻어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치 제사장들이 성막의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물두멍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성소에 들어오는 길목에 물두멍을 두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제사장들이 스스로를 씻게 하셨다. 나아가 지성소에 임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향단에 향을 피워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정결의 과정은 수시로 반복되어야 하며, 영원토록 계속되어야 한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 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출애굽기 30장 8-9절) 

아론은 매일 두 번씩 향을 피워야 했다. 등잔대의 등불을 매일 밝혀야 하듯, 분향단의 향도 끊어져서는 안 된다. 매일 두 번이라는 횟수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향을 피우는 일이 대대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명령도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은 물론이요,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며 살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이러한 노력은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성도의 기도와 향연

지성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소에 들어오는 제사장 사이에는 휘장과 함께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필요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휘장이나 분향단의 향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며 당당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향단의 역할이 신약시대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요한계시록 8장 3-4절) 

금 향로는 구약성경의 분향단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에는 금 향로 안에 많은 향이 담겨 있었는데 거기에는 성도들의 기도가 함께 담겨 있었다. 이 장면에서 향로에서 피어나는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거룩하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상달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분향단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거룩하게 이끄시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합당한 기도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장 26절). 


토의 질문. 

1.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나 자신을 정결하게 가꾸기 위해 내가 기울여야 할 노력은 무엇일까요? 
2. 나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한 경험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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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1. 6.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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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교회에서 자주 불렀던 찬양 가운데, 이러한 가사로 시작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기에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평화를 더욱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이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더욱 기도하면서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굳이 민족적/국가적 차원의 거대담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기도 하지요. 그때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그리고 또 직장을 비롯한 사회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화롭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한국 여행객들이 꼭 한 번은 찾는 장소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입니다. 저 멀리 한국에서 일어난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나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은 워싱턴 D.C. 로부터 차로 약 4시간 정도 떨어진 린치버그라는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장소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조그마한 전쟁 기념탑이 있었는데, 한쪽 벽에 그곳 린치버그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헨리 포드의 명언이 기록되어 있었지요. 

I Now Know That 
Wars Do Not End Wars – Henry Ford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전쟁으로는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그때 저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의 분명한 교훈을 이역만리 타지에서 새롭게 확인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그로 인한 적대적인 태도는 결코 평화와 화목을 도모할 수 없다 매우 단순한 교훈이었지요. 


겉모습에 따른 판단

성경에 등장하는 고린도교회는 성도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극심했습니다. 이른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갈등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 바울을 적대시하여 바울을 공격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그들의 몇 가지 특징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 12절)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했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아니라 외모나 겉모습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다른 구절을 참고하면, 그들은 추천서를 들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이적을 행하거나 눈에 보이는 어떤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사도 바울을 공격하면서 바울은 추천서도 없지 않으냐고, 바울은 눈에 보이는 능력이나 재능이 없지 않으냐고 비난했던 것이죠. 그들이 내세우는 평가 기준은 족보나 혈통, 출신지나 학력, 혹은 눈에 보이는 업적과 같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흔히 자랑하는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데 ‘육신을 따른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장 16a절) 

여기에서 ‘육신을 따라 안다’는 표현은 육신을 따라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여러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평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우리도 육신을 따라 사람들을 평가했지요.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그가 많이 배운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그가 크게 출세한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나에게 도움만 받을 사람인지. 이 모든 것이 육신을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본문 16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육신, 곧 겉모습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있지요?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분의 성별이나 나이나 출신 배경이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지금 내 곁에서 함께 예배하는 그분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 중요해요. 그래서 동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우리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만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한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복음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했던 사람들처럼 육신을 따라 누군가를 평가하면, 그 안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믿음의 공동체에 화해가 일어나고 화평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주변 사람들과 갈등하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육신의 관점이 벗어지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육신의 관점으로 나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은 결코 종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화평하고, 우리의 가정이 화목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샬롬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육신의 기준을 버려야 합니다. 나아가 복음이라는 새로운 평가 기준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야 합니다. 


화평의 복음

바울의 대적자들은 육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의 관점에서 성도들을 바라보았지요. 그러자 바울은 모든 성도들 안에 일어난 위대한 사건 하나를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거듭남이지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세력에 억눌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죄악 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해 버리지요. 나아가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을 향해 육신을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게 만듭니다. 마침내 내 곁에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옛 모습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전 모습은 모두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용서를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모습은 과거와 별로 다르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을 따라 평가하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일 뿐, 복음의 관점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된 소식, 곧 복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또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곧 ‘화목’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 18a절) 

모든 선한 것,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곧,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화목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바로 다음 절에도 등장해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장 19a절) 

위의 18절과 동일한 내용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8절과 19절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어요. 발견하셨나요?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고린도교회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19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상은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19절의 세상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합니다(요한복음 1장 9-11절).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 당신과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는 말로 소개하였던 것입니다(행 10:36).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사건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아요. 사도 바울이 경탄하며 찬양하는 내용, 곧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위대한 선언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시듯, 내 곁에 있는 우리의 가족, 우리 교회의 교우, 나아가 나의 직장동료까지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신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찬양을 부르며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이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여러분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실 수 있으세요? 실수도 많이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몰라 이곳 저곳을 헤매기도 하시잖아요. 믿음이 흔들려 세상의 풍조에 휩쓸릴 때도 있지 않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정말로 믿으세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복음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도 육신의 기준이 아닌 복음의 렌즈로 바라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여전히 흠도 많고 실수도 많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면, 내 곁에 있는 식구들과 친구들과 이웃들도 여러 가지 단점이 존재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아름답게 재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가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화목의 직분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가득했던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은 화평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화평의 복음 안에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도 있는데, 곧 화목의 직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 18a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화평의 복음이지요.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린도후서 5장 18b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입니까? 화목의 직분입니다. 여기에 직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아코니아’입니다. 주로 봉사와 섬김이라는 의미로 알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은 화목하게 하는 봉사, 화평을 실천하는 섬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화목의 직분, 곧 화목하게 하는 봉사와 화평을 실천하는 섬김의 사명이 화평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이 있지요?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데 이 기도문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는, 신뢰를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나의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기를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가 받는 것은 주는 일에 있고,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용서하는 일에 있으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습니다. 육신을 따른 판단은 미움과 다툼을 결코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갈등과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직 화평의 복음만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미움을 제거할 수 있고,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과 섬김을 실천하는 화목의 직분만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샬롬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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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03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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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6. 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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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에서 언약을 채결한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막의 용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할 장소’(출애굽기 25장 8절)이다. 마치 결혼의 언약을 맺은 부부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신방을 마련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제작하라고 명령하신다. 

성막의 구조는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막의 내전은 또다시 성소와 지성소로 나눌 수 있는데, 지성소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라면, 성소는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장소다. 오늘 본문은 성소에 놓일 진설병 상과 등잔대를 만드는 규정이다. 


진설병을 두는 상

성소에는 조각목과 순금으로 만든 상을 놓아야 한다. 상에 네 개의 고리를 만들고 그 고리에 꿸 수 있도록 채를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실용적인 목적이다(출애굽기 25장 26-28절).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자손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늘 이동하였다. 성막을 운반할 때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명령하셨는데 성소에 놓아둘 상에 채를 꿸 수 있도록 만들어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는데 용이하도록 하였다. 상 위에는 여러 가지 기구를 놓아야 한다. 대접, 숟가락, 병, 잔이 그것인데 이는 제사장이 사용할 도구였다.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출애굽기 25장 30절) 

성소에 상을 놓아두는 목적은 그 위에 진설병을 놓기 위함이다. 진설병(히. 레헴 파님)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떡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이스라엘이 자신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의미도 가능하다. 12개의 진설병을 6개씩 2열로 놓았는데, 안식일이 돌아오면 새것으로 바꾸어 한주 동안 진설하였다. 12개의 떡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며, 온 이스라엘이 정성을 다한 땀의 결실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진설병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매주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정성이었다. 


등잔대

진설병을 놓아두는 상의 맞은편에는 등잔대를 두어야 한다. 등잔대는 7개의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었다(출애굽기 25장 31-35절). 살구꽃은 이스라엘에서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움이 터서 어떤 경우에는 2월말 이전에 꽃을 피운다. 그런 점에서 살구꽃의 형상은 겨울을 이겨내고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등잔대에도 제사장이 사용하는 도구들이 있었는데, 집게와 그릇이다(출애굽기 25장 38절). 

등잔대의 역할은 그 위에 등불을 켜놓는 것으로 제사장은 상에 진설병을 언제나 놓아두어야 하듯, 등잔대의 불도 꺼지지 않게 관리해야 했다. 등잔대가 언제나 불을 비추고 있으니, 맞은편에 위치한 상과 그 위의 진설병을 밝히 비췄을 것이고 제사장은 그 등불을 이용하여 자신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등잔대의 등불은 이러한 실용적인 용도를 넘어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생명의 빛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에는 정기적으로 관리할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소에 있는 진설병 상과 등잔대는 매일 그리고 매주 제사장의 손길이 필요했다. 이는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날마다 깨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가꾸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토의 질문. 

 

1.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정성의 표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2. 매일 그리고 매주 진설병과 등잔대를 관리하던 제사장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나의 삶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는데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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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6. 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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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교회입니다. 루터는 그 교회에서 3천 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는 이른바 ‘종교개혁 제단화’라 불리는 네 점의 성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대중적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지요.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루카스 크라나흐라는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왼편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도 요한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맞은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저녁, 제자들과 나누셨던 유월절 식탁을 묘사하는 이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림의 오른쪽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식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식탁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잔을 잡고 있는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잔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이 기록한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크라나흐가 이 그림을 드렸던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행하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총은 사도들이나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성만찬의 떡과 잔도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하였고, 그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금기 사항을 깨고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잔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개신교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잔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마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리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성만찬의 잔을 일반 성도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성만찬의 잔을 자신의 뒤에 있는 어느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사람의 얼굴은 당시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곧 마틴 루터입니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마틴 루터 외에도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또 한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6세기 비텐베르크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열 두 제자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실제 얼굴과 제자들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마틴 루터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당시 비텐베르크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루프트인데,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던 출판업자입니다. 한스 루프트는 당연히 사도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사업가였습니다. 크라나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며, 출판업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던 한스 루프트를 사도들만 참여했던 예수님과의 최후 만찬 자리에 당당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라나흐 역시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치가 무엇입니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가르침, 곧 마틴 루터가 생명을 다해 전파하였던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 놓았던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온 성전에 가득했지요. 하나님을 곁에서 섬기는 스랍의 천사들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장 3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의 질문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고 맙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장 5절) 

그런데 여러분, 이사야 선지지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찾아옵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장 6-7절)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특별히 자신의 입술이 가장 부정하게 느껴졌어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부정하고, 그의 언어생활이 죄로 가득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입술, 곧 자신의 언어생활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입술이 그렇게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손이 부정하고 자신의 손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분도 계십니다. 손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해요.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이사야 59장 6b절)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분들은 자신의 손이 그렇게 더럽고 부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느 부분을 정결하게 하실까요? 그의 손을 정결하게 하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너의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발이 너무도 부끄럽게 여겨지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발이 부정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죄악의 길을 걷고 마땅히 피해야 할 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이후 이사야서에는 이런 표현도 등장해요.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이사야 59장 7a절)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의 발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그러한 분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발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계속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가리고 싶은 부분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세요? 어제도 실패하여 오늘만큼은 또다시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은데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지는 지점이 있지는 않으세요? 이사야에게는 그것이 입술이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발이나 또 다른 곳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그 모든 악을 제하시며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명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속죄의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 6장 8a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선지자로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문을 던지며 이사야를 사명의 자리로 초대하시네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라 명령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의향을 질문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답을 합니다.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장 8b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와 사명의 관계인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속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소명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유사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속죄의 은혜가 가득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유익만을 쫓으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속죄의 은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속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이사야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선지자의 사명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장 9절)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세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라니, 이것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한 평생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십니까? 이사야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도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장 10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겨서 마침내 그들의 마음이 둔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요. 백성들에게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싶었겠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이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보내소서’ 헌신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열려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들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이 사명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나에게는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거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저것입니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저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것을 맡기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혜, 대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바로 지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반드시 주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여러분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그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온갖 죄악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징벌과 심판을 선언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동일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회복과 치유의 때도 선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식탁

설교를 시작하며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함께 보았지요? 이 그림에는 오늘 설교의 두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탁을 나누고 계시네요. 그래서 식탁의 한 중앙에는 유월절 어린양이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 그림에 담긴 또 하나의 주제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은 사도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그림에는 마틴 루터와 같은 성직자도 있지만 한스 루프트와 같은 사업가도 있어요.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의 은혜를 누리는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속죄의 은혜 그리고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오늘 설교의 주제가 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보니, 속죄의 은혜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 함께 담겨 있는 장소는 다름이 아닌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며 초대하시는 은혜의 식탁이네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 싶으시나요? 지금도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과거에 실패하셨더라도 괜찮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저지르셨더라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참으로 원하시나요?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식탁으로 오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쓰임 받을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일이 서로 달라 어리둥절하여도 괜찮아요. 주님과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며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그 소명에 응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요, 
여러분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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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5. 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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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장 1절)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높이 머리를 들어야 했을까요? 저 높은 하늘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도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분의 옷자락을 통해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는 의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의복을 통해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청색에 가까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청색으로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청색이 높은 신분을 나타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푸른빛을 내는 염료가 당시로서는 너무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짙은 청색의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한눈에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색깔과 함께 의복을 통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이 또 하나 있었는데, 옷의 길이입니다. 옷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신분이 높다는 뜻이었지요. 그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옷감이 귀했던 시대잖아요. 그런데 많은 옷감을 들여 옷을 길게 지어 입을 수 있다면 당연히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하나님의 모습은 저 높은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의 성전까지 그 옷자락이 이어졌고,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높으시며, 가장 거룩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 6장 2절) 

여기에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가 등장하네요. 우리는 스랍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중요하게 묘사하는 장면은 그들의 날개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6개의 날개가 있었습니다. 두개의 날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렸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랍이라 불리는 천서까지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본문 2절은 스랍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의 의도는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존재를 자세히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랍들조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 위해 분주할 만큼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면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장 3절) 

본문이 묘사하는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곧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땅에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장을 읽으며 우리가 배우게 되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살핌 등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이해가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분문에 등장하는 스랍들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급급하겠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에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으로 우리를 세밀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뚝발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모습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로마서 11장 22절)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은혜만을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면 이후로 그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자세와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6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1절 처음입니다. 본문 1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오늘 우리에게는 이 표현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웃시야 왕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52년이 남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앉아 있을 때 국방은 튼튼했습니다. 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은 융성했습니다. 에시온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여 국제무역을 통해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한 번성과 융성의 시기를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제 나라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에게 찾아온 첫번째 변화는 그의 관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죽음이 초래하는 정치적인 변화도 중요하지요. 그가 이루었던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요. 웃시야의 죽음을 틈타 남유다를 노리는 주변 나라들의 동태도 잘 살펴야겠지요.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도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에 집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삶에 대해 탄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관심사가 바뀌고 나니, 이제는 그의 행동이 하나씩 바뀝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신중하게 내뱉었을까요? 선지자로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거룩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8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이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장 17절)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이 경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도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도 거룩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장면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여러분, 제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영광 중에 이 성전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니 우리 인간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예단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그 장면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보여주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경에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읽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지만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그 장면을 묵상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이라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 _ 거룩하신 씨앗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며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들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 6장 11-12절) 

본문 11절과 12절은 분명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갖 죄악에 빠져있는 유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구절 안에 유대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나요?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죠?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가 묻는 ‘때’는 회복의 때, 치유의 때,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은 죄악이 횡횡한 시대입니다. 지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게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시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어둠과 죄악의 지나가고 새로운 회복의 때가 언제 도래하겠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랍게 하나님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답해 주십니다. 12절의 마지막입니다.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때도 심판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때에 일어날 일을 마지막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6장 13절)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밑동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큰 죄악에 빠져있었던 남 유다를 심판 하셨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지요.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본문 13절이 말씀하는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루터기라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본문 13절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 칼뱅은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한 겨울 살이 베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에서 녹음으로 푸르러지듯,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유대 나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는 그루터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 놓으신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이후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동을 거룩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의 마지막 문장은 드디어 거룩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네요.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거룩한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하였던 사람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도 최선을 다하여 거룩으로 바꾸어 가려는 사람들, 그 몇 명 되지 않는 거룩한 씨가 곧 그루터기가 되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하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외면하고, 그저 나에게 복을 주시고 그저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만을 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도 조금씩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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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5. 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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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 생활에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한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할까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에서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여도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가능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목적 _ 겸손

본문은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의 관심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의 세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관심은 그들에게 공급해주시는 만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장 16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던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은 이스라엘의 겸손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도, 그곳에서 매일 만나를 먹여주신 목적도 그들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들어주시는 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지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상관없이 우리는 쉬지않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 내 삶의 공급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목적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였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일에 무관심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 1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18절)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세월 이스라엘 자손에게 부족함 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한 영혼의 양식도 제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교회는 성찬식에 앞서 주기도문을 드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전통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주기도문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응답 받았음에 대한 확신을 예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하셨고 지금도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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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