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11-20a절 “스스로 돌이켜”
기독교 고전 가운데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모두 아실 줄 압니다. 이 책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먼저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손에 들고 있던 이 책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갑니다. 자신의 양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죄의 짐이 자신의 삶을 억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나의 삶을 억누르는 죄의 짐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에게 했던 대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큼 죄인이었는지 깨닫게 되지요.
오늘 설교의 본문은 이른바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말씀으로, 한 번의 설교로는 그 내용을 충분히 다루기 어려울 듯하여 오늘부터 두 세 주에 걸쳐 함께 묵상하려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단연코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향해 변함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 곧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내가 얼마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는 절망적인 존재인 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떠난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는 나를 다시 맞아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초대하여 주시는 복음의 풍성한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Scene. 아버지를 떠남
자, 오늘의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 당돌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1-12a절)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12절의 말씀 그대로 “나에게 돌아올 분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 곧 지금이 아니라 때가 되어야 나에게 돌아오게 될 분깃, 곧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자신이 받게 될 바로 그 유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나 아버지와의 교제나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그의 관심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아버지의 재산을 원했어요. 그 재산을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당장 달라는 요청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던 둘째 아들의 마음은 그 다음 구절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13a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은 후, “며칠이 안 되어”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 지 아버지의 재산을 받자마자 짐을 싸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그 아들이 그동안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좋아서인가요? 아버지와 친밀한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단 한가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 그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유산을 미리 받았을 때 미련 없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받게 되는 유산을 요청한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특별히 고대 중동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청하는 것은 ‘나는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죽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한 매우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아들이 저지른 큰 잘못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한 행동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옳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으면 근면하고 성실하게 그것을 잘 관리해야 했지만 그는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아버지의 생명과도 같은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하는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아들의 가장 큰 실수, 이 아들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멀리하면서, 그 마음으로는 아버지와 어떠한 교제나 교류를 원하지 않으면서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힘들고 지치고 괴로웠으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위로해주시기를 원합니까? 지난 한 주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궁핍하고 부족하여 괴로웠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도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시고 우리 가정의 살림도 좀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셨나요? 어쩌면 육신의 질병과 아픔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를 찾아오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저는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여러분이 드리는 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에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응답해주시기를 바래요.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의 축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유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어떠한 친밀함도, 하나님과의 어떠한 깊은 교제도, 하나님과의 어떤 깊은 만남도 바라지 않은 채, 하나님을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의 몸이 지금 예배당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과 같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버린 탕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마음으로 떠났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 결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4절이 그 결말이지요.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4절)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는 상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만 있으면 호의호식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영원히 살 수 있을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더 아버지를 떠나면 비로소 궁핍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을 잃어 버리면,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지금 내 손에 움켜진 재물도 모래알처럼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내 몸이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병들게 되어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사라지는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나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죄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유혹의 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바로 이곳이 바로 축복의 장소입니다.
Scene Two. 돌이킴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자마자, 아버지의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재물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의 형편을 본문 15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나라 백성 중” 여기에서 그 나라 백성이라는 표현은 이방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5절을 계속보시면, 이방 나라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붙여”삽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자유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악독한 주인의 폭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어요. 15절을 계속 보시면, 이 사람은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 유대인들 가증하게 여겼던 돼지를 치는 일을 시킵니다. 돼지를 돌보는 일을 시키면서도 제대로 보상을 하지도 않지요.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시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하고 하지만 그조차도 이 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처지에 처하게 되자, 드디어 이 둘째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구절이겠네요. 본문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절)
본문 17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돌이키는 데 있어요.
둘째 아들이 드디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습니까? 17절을 계속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어찌 양식만 풍족했겠습니까?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양식만 아니라 은혜도 풍성합니다. 용서와 관용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풍성합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17절의 뒷부분이지요. “나는 여기서”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도 풍부하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데, 나는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으니 지금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문제였구나, 아버지의 품을 떠나니 모든 것이 궁핍해졌구나, 내가 예전에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이 놀라운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단 하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뿐이지요. 그래서 본문 18절로 이어집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18a절)
여기에서 핵심 단어가 무엇일까요? “아버지께 가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아버지를 떠난 자리입니다. 여기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곳에서는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제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절망입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예요.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야겠다.’
우리 가운데,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이대로는 안되겠으니,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말씀을 듣는 자리,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8절을 계속 보시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저지른 잘못때문에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아들을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9절을 계속보세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간청하잖아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 가는 발걸음이 자꾸 무거워지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체면입니다, 체면. 내가 지금까지 나 스스로를 자랑하면서 강한 척, 괜찮은 척, 아무 문제 없는 척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겠다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나의 체면이 구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이 옳다고, 나의 말이 옳고 나의 행동이 다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스스로 돌이키려니 괜히 부끄러워 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돌이키지 않으면 – 스스로 돌이키지 않으면 –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어요. 지금 하나님을 떠난 그 자리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가 없다고요.
반면, 우리는 본문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요. 그러자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저 멀리서 뛰어나와 아들을 맞아주시잖아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자격이 없어도, 나에게 면목이 없어도, 나의 체면이 좀 깎여도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 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이지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 지금 우리의 형편을 “스스로 돌이켜” 되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라면, 지금 나의 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왔다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그 결단이 여러분 마음 속에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결심으로부터 여러분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Scene Three. 세리와 죄인의 돌이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하나의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장면도 묘사해주고 있어요. 누가복음 15장이 시작하는 1절 말씀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세리와 죄인들이, 그것도 그 시대의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마침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사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세리들과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셨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아버지의 집을 떠난 수많은 아들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사건, 우리 교회 안에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오는 사건, 비록 몸은 예배당 안에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멀리 떠나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에게만 참된 소망이 있는 줄 깨달아.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결단하며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역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스스로 돌이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그 넓은 품으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를 안아 주시고, 우리 모두를 천국의 잔치로 이끌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