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3-11절, “시작하신 하나님, 이루시는 하나님”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이름을 여러분들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자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기적인 곡선과 독특한 구조로 유명한 건축가이지요. 그가 남겨놓은 많은 건축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단연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될 것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이지만, 사람들이 그 성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 건물을 설계한 가우디가 이미 사망한 지 1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축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이 성당을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언제나 높은 기중기를 통해 여전히 공사 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이 쉽지, 가우디가 착공하여 건축을 주도한 세월이 43년 그리고 그의 사망 후 100년의 세월이라니 그 오랫동안 건축을 하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실제로 건축 기간 스페인은 내전을 겪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재정부족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최근 파밀리아 대성당이 가우디가 사망한지 100주기가 되는 2026년(내년이네요)에 드디어 완공하게 될 것이라고 기사가 국내외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성당을 설계한 천재 건축가는 약 100년 전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을 기다리면서 완공이 임박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세계의 여러 언론이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 건물의 설계자가 안토니오 가우디이기 때문이겠지요. 비록 가우니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가우디가 설계한 대성당이라면 그리고 가우디가 설계한 대로 건축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분명히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삶과 인생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군가 처음부처 계획을 가지고 설계를 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지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인생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설계자는 누구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이시지요. 한 사람의 천재 건축가가 설계한 그대로 건물 하나가 세워져도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하게 되리라 충분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각자의 인생과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셨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인생길을 이끌어 가신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삶이 앞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게 될 것을 확신하며 기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Move One. 감사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는 여러 가지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쁨의 서신”입니다. 이 별명을 듣기만 해도, 여러분은 빌립보서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서신 안에 기쁨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면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까요? 실제로 빌립보서가 시작하는 오늘 본문부터 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절)
바울의 마음에는 언제나 빌립보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였는지 살펴보았지요. 그 모진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체험했던 바울이 그렇게 시작된 빌립보 교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은 몸으로 빌립보를 떠났지만 언제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렇게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절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때마다 ‘너희 무리’, 곧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로 말미암은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바로 ‘기쁨’이지요. 이렇게 바울 자신의 마음에 있던 큰 기쁨을 이야기하며 시작한 빌립보서는 마지막 4장에 이르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빌 4:4). 그러니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에 대해 노래하는 기쁨의 서신이 맞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빌립보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그의 처지는 마냥 감사하고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얼마나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지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빌립보서에 따라다니는 별명이 있지요? 그것은 ‘옥중서신’이라는 명칭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썼던 장소가 감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이제 교회 안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바울이 참으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라면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화위복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왜 바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고통을 당하며 더 괴로운 현실에 빠지느냐고. 아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니 바울이 이처럼 감옥에 갇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 아니겠느냐고. 어쩐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던데 바울에게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바울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빌립보서를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이 편지 안에는 바울의 기쁨도 들어 있지만 바울의 슬픔, 곧 바울의 눈물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의 장면이 빌립보서 3장 18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빌 3:18a)
여기서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닙니다. 철저한 슬픔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b) 여기에 빌립보서의 또 다른 별명이 등장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눈물의 서신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바울은 지금 자유의 몸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그러한 바울을 향해 비아냥 거리는 현실 속에서 바울은 어떻게 빌립보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자, 오늘 본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본문 5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본문 5절을 함께 봉독해보겠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5절)
물론 바울에게는 슬픔도 있습니다. 눈물도 흘립니다. 마음에 큰 슬픔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전히 살아 있으니 기쁘고,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있으니 즐겁고, 바울 자신을 통해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땅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시니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쁨입니다. 물론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상황을 보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할 때도 많지요. ‘내가 지금도 눈물로 말한다’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 우리도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마음 한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되니 우리의 마음은 기쁨이 찾아오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으니 우리 마음은 또다시 기쁘고, 모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 마음은 언제나 기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노래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놀라운 은혜만큼은 결코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주시는 하늘의 기쁨, 천국의 기쁨만큼은 항상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4a)
사도 바울의 권면 그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에 늘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Move Two. 확신
바울의 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바울의 마음은 지금 천국의 기쁨 하늘의 행복으로 가득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던 하나의 확신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기도 한데요. 본문 6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절)
본문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시네요.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복음의 그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시작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였지요.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관점에서는 사도 바울 자신이 복음을 믿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관점에서는 빌립보에 살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관점에서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관점 세상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모든 과정을 믿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세워 주셨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셨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빌립보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시간은 참으로 유수와 같지요. 2025년을 시작한 것이 정말 엇그제같은데, 벌써 일 년의 절반이 지나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이 열심히 예배 자리에 참여하셨지요.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이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셨지요.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신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착한 일을 지금도 완성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우리의 신앙생활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선한 일, 좋은 일을 시작하신 것이 어디 한 두 가지뿐입니까? 아직 완성된 모습으로 풍성한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 뿐이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좋은 일 선한 일을 풍성하게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도 여러분, 참 놀랍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난 좋은 일 선한 일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순간, 바울의 마음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6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친히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복음의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침내 완성하실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그대로 시작하신 하나님, 곧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나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 많지요. 당연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 문제도 많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많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아직 우리의 신앙 경주는 지금도 진행 중이니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장애물이 너무 많고 그 과정이 너무 힘겹고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지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고난과 역경과 사단의 방해가 없었던 일이 단 하나라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던가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복음으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이미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Move Three. 기도
사도 바울은 비록 그 몸이 감옥에 갇혀 있고 사람들은 그러한 바울의 형편을 보면서 비아냥거렸지만, 그의 마음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이었지요. 바울은 이제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보시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가 기도하노라” 그럼요.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 아니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은 시작에 불과해요. 앞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그 믿음과 그 확신이 있는 사람은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6개월 여러분도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받으신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모든 것은 시작이지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욱 크고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시니, 이제 시작하는 2025년의 하반기에도 더욱 힘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제목이 길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도 제목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곧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를 위해 행하시는 그 좋은 일 선한 일의 마지막 최종 목적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본문 11절을 함께 봉독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1절)
바울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힘 있게 기도하는 마지막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11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해지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가정과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마침내 그 모든 열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아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반년 열심히 달려왔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으신가요? 지난 6개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초라하신가요? 바로 지금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시작하신 일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것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 뿐, 지난 6개월의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선한 일 좋은 일의 작은 씨앗 하나만 심어 놓으셨어도 충분합니다. 선한 일의 씨앗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니, 여러분의 삶은 마침내 혹 30배 혹 60배 혹 100배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