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주제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있었으니 곧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른바 고넬료의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9) 이 말씀이 소개하는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도 보여주시고 보고, 음성도 들려주셨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이방인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재차 강권하여 등을 떠밀듯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12). 이로써 베드로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주십니다. , 이전에는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였다면, 이제는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을 위한 사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이웃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고넬료를 비롯한 모든 집안 식구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며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웃에 대한 생각,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생각이 바뀝니다(18).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이라는 생각. 이방인들도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형제와 자매라는 생각. 이방인들도 그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내 곁에 있는 이웃에 대한 초대교회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자라나야 하며,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관도 성경의 관점으로 조금씩 변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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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교회를 빗대어 설명하는 여러 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진리의 기둥과 터 등이지요. 오늘 본문은 교회를 비유로 설명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신령한 집이라고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5a)

 

베드로가 신령한 집을 이야기할 때 그는 유대인들이 신앙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전서가 6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쓰여졌다면[1]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새롭게 시작된 기독교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보여주며 그들이 주장하는 유대교를 더욱 힘있게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봐라,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가? 이처럼 유대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반면, 건물도 없이 이번 주에는 이 집에서 다음 주에는 저 집에서 예배드리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볼 때마다 그 위엄과 웅장함에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르지요. 마치 상가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대단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를 보면 그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야말로 신령한 집, 곧 살아있는 성전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제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은 생명력이 하나도 없는 돌과 바위로 쌓은 죽어 있는 건물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는 비록 외적인 화려함도 웅장한 건물도 없지만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풍부한 재정이나 성도들의 사회적인 위치나 교회가 소유한 건물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우리들의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우리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자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Scene One. 성막

 

구약의 역사에서 성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핵심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놓여 있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제사를 드렸던 성전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그 성전이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역할도 하였다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며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전,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약 1년 정도를 머무는데, 하나님은 그곳에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을 진행하시지요. 첫번째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곧 성막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장소가 되었고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들의 눈으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를 출애굽기가 묘사합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4)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장소가 되었고, 그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교제하고 만나는 영광스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였던 성막도 시간이 지나자 그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그들의 눈 앞에 세워져있는 성막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렸고 성막만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실한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여러가지 이방인들의 우상을 함께 섬기고 있었지요. 이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은 블레셋을 통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레셋의 침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회개하는 것, 모든 우상 숭배를 벗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군대가 침공하는 그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 그들의 손에 있었던 성막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며 기도하기보다 그들의 수중에 있었던 성막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아가기로 결정하지요.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군대에 크게 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던 성막은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날의 패배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큰 슬픔의 소식이었고,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위기의 순간 눈에 보이는 성막만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Scene Two. 예루살렘 성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의 시대를 지나며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자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건축사업을 진행합니다. , 수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7년 동안의 대공사가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시고 솔로몬 왕을 필두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안에 임재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역대하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대하 7:1)

 

처음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 그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바라보았을 뿐,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조금씩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전을 출입하는 것에 만족하며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사사시대 눈에 보이는 성막만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에게서 성막을 빼앗아 이방 나라 블레셋에게 넘겨 주셨던 하나님은 이제 이방 민족 바벨론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죽어 버린 돌이나 흙으로 쌓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신령한 집, 곧 살아있는 성전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본문 6절이 인용하는 구절이지요.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시온 산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성전은 하나님께서 무너트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을 세워주실 것인데 그 중심에는 이미 죽어 버린 돌이나 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잇돌, 곧 살아있는 돌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Scene Three. 신령한 집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건축하실 살아있는 성전의 모퉁잇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4)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살아있는 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살아있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께 든든하게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4b)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5a). 예수님은 저 멀리 계신데 성도들만 많이 모여 있다고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살아있는 성전, 곧 신령한 집은 그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분명히 세워두는 것입니다.[2]

 

우리가 살아있는 돌이요,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건물, 예산, 성도들의 구성 등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성전이, 그리고 교회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어 주시고 성전을 만들어 주시니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에 더욱 집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반드시 깨어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부딧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8)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든든히 서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살아있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분은 딛고 일어 설 수 있는 모퉁잇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부딧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교회의 외형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교회의 외형을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죽어 있는 돌과 죽어 있는 흙으로 쌓은 성전 건물은 결코 우리의 믿음을 바르게 세워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령한 집이요,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죽어버린 돌이나 흙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교회의 든든한 모퉁이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이야기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매우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시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아름다운 땅을 다스리며 가꾸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인간이 죄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맙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죄와 사망과 어둠의 권세가 인간들을 다스리기 시작하였지요.

이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소망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 곧 복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바로 이 복음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 안에는 언제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성도들의 만남 속에서 언제나 복음이 들려야 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남선교회, 여전도회, 구역모임, 큐티나눔방. 그 외의 모든 모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실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복음의 이야기가 다시금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든든히 선다는 참된 의미입니다.

 

바로 그때,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이 비로서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교회 안에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들은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게 되실 것입니다. 나아가 여러분을 어두운 곳에서 불러 내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바로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1] 베드로전서의 저술 시기는 저자에 대한 논의와 엮여 있다. 만일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라면 저술시기는 주후 60~65년 사이가 될 것이지만, 베드로의 제자가 이 서신의 저자라면 저술 연대는 70년 이후가 된다. 최원준, “거룩한 나그네들을 위한 서신” <야고보서 베전후 유다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개정판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203.

[2]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다마 서로 연결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0b-21)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기독교 신앙 여정과 성경의 자리

 

누군가 기독교 신앙을 시작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외관적인 특징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정한 지역 교회에 등록을 하거나, 자신의 신상명세서에 기독교인이라고 기록하거나, 혹은 음식을 앞에 두고 식사 기도를 하거나,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특징이 한 사람의 내면에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규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해볼 수 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

 

신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여 기독교의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인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 없이, 신구약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재,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을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으며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의 길에 접어 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그 안의 다양한 교단과 종파를 모두 포괄한 의미다. 다양한 교단과 종파들 사이에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기독교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성경의 핵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1]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과 관련한 예배, 기도, 말씀 생활, 봉사 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삶에 등장하는 가정, 고난, 소명, 재물 등의 주제를 담고 있으며 나아가 인류 공동체와 관련된 주제들, 곧 정의, 평화, 민족, 생태계 등의 주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분명한 핵심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성경에 대한 단순화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분명한 주제로 수렴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함께 다를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성경은 인간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예배는 신적 존재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참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기독교인이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인간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답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과정은 자신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과제와 주제들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출발점이지만, 삶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과제와 주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기독교인들 개개인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어떠한 기독교인도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으며 그들이 마주치는 과제 역시 다양하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모습의 신앙 여정을 지나온 성도들이라도 그 모든 과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동일한 고백에 이르게 된다.

 

인생의 모든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1]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선입관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인데, 야고보서는 믿음을 부정하고 행위만을 강조하는 서신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복음의 핵심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 서신들 예를 들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에 비해 그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적지 않은 분들이 야고보서의 대표적인 암송구절인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바른 복음의 진리로부터 그 마음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지요. 실제로, 야고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무리 읽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리, 인간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선포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고보서는 기독교의 신앙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곧 복음의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누구이며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 지를 설명하는 서신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전제입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지만,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의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상충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진리를 대전제로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말씀이지요.


많은 분들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나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나 행위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선물입니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대표적인 신약성경의 책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경건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쌓아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잖아요.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고 싶은 것이지요. 그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곧 경건한 삶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의 말씀을 순차적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경건한 삶의 모습을 깨닫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한 삶을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시련: 경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에 대한 첫번째 가르침, 곧 야고보서의 첫번째 주제는 바로 고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1:2)

 

말씀 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미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고난의 주제를 언급합니다. 만일 누군가 기독교의 진리, 곧 복음의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난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하는데 당신은 교회에 나오면 수입의 10%를 꼬박꼬박 교회에 헌금하게 될 것이라고,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도 헌신을 해야 한다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무수한 고난을 당하게 될 거라고. 이렇게 전도하시는 분은 없지요. 그 대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서 복음을 전하겠지요. 그러나 야고보서는 이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이미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아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16:24)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우리가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우리의 눈 앞에는 고난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3절은 너희 믿음의 시련”, 곧 믿음의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건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 한다면, 그 과정에는 거센 바람도 맞아야 하고, 비에 온 몸을 적시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시인이 봄 날에 피는 아름다운 꽃은 한결같이 바람과 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고 노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믿음의 길,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때로는 바람이 불어 흔들리고, 때로는 비가 내려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3-4)



고난을 바라보는 복음의 관점


그러데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그 뒤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그 이유를 3절이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5:3-4)


그러고 보면 이와 같은 말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쁨게 여기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이나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와 같은 로마서의 말씀은 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세상의 관점에서는 결코 있을 수도 없는 교훈이지요. 도저히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또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2] 그러면서 제 마음에 한 가지 참 중요한 교훈이 떠오르는 겁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1 2절의 말씀은 도저희 납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하면 가능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믿음의 길, 순종의 길, 경건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극심한 고난을 받은 믿음의 시련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여 이겨내셨기에 그 뒤에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고 만민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실 수가 있었잖아요.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하는 로마서와 인간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야고보서가 그 내용에 있어 서로 상충한다는 주장은 틀렸습니다. 로마서 역시 복음의 능력으로 어떠한 환란 속에서도 기뻐한다고 선언하고, 야고보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기초로 하여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여도 온전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가 있느냐구요?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기어졌기에 그 복음이 아름다운 경건의 꽃과 경건의 열매로 이어지기 위해 때로는 강풍과 비바람을 맞을 지라도 그 모든 것을 우리 가슴에 새겨진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가르치고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 경건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경건은 고난이 찾아왔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입어 그 고난을 이겨내는 삶입니다.[3]



지혜를 후히 주시는 하나님


야고보서는 믿음의 시련이 찾아올 때 온전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죠. 다시 말해, 고난의 현장까지도 복음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곧 복음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복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누가 주시나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만을 이야기한다고요?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야고보서는 고난 중에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은혜로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고 선언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연약함을 꾸짖으시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살수 있도록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늘의 지혜를 넉넉히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변함이 없어요. 언제나 넉넉히 주시는 분이시고,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만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이 심하고 믿을 수 없는지를 오늘 본문 6절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6)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바닷가에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람이 불어 올 때는 파도가 높이 솟구쳐올라갑니다. 그러나 곧 아래쪽으로 푹빠지고 말지요. 이렇게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으로 푹 내려가는 파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니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잠시 잠깐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 같으면 마음이 교만해져서 높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지요. 그러면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마치 파도가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한층 고양되었다가 금방 가라앉고 마는 모습이지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1:8)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로 고난까지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곳 저곳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을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줄 수 있는 믿음의 항구는 오직 우리에게 풍성한 하늘의 지혜를 예비하신 우리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James Choung. True Story: A Christianity Worth Believing in

한국어로는 <냅킨 전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는 저자가 미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면서 발생한 문제제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제임스 정(James Choung)의 문제 제기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과연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인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복음은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이 책의 안나라는 등장인물로 대표되는 현대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복음 제시를 참된 의미의 ‘복된 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복음은 지나치게 개인적(personal)이며 동시에 근시안적(myopic)이다. 

제임스 정은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하는 복음제시의 방향은 크게 3가지다. (1) 결정(decision)에서 변화(transformation)로, (2) 개인(individual)에서 공동체(community)로, (3) 죽음이후(afterlife)로부터 선교적 삶(mission life)으로. 그는 이와 같은 방향성 안에서 (1) 선을 위한 창조(design for good), (2) 타락한 세상(damaged by evil), (3) 선을 위한 회복 (restored for better), 그리고 (4) 치유를 위한 파송(sent together to heal)이라는 네 단계의 복음제시를 제안한다. 그리고 각 단계는 개인적(personal) 측면, 관계적(relational) 측면, 조직적(systemic) 측면에서 내용을 설명하도록 구성하였다. 한국어 번역은 이와 같은 복음제시가 노트에 간단한 그림을 그리며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냅킨 전도”라고 제목을 붙인 듯 하지만, 그것이 제임스 정이 제안하는 복음제시의 핵심은 아니다. 

제임스 정의 복음제시는 전통적인 복음전도방법(사영리, 다리예화, 전도폭발 등)의 개인적이고 사후 세계에 초점을 맞춘 전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보다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전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이 책의 표현대로 "성경에 대한 전체적 조망”(the entire scope of the Bible, p. 168), 곧 “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the basics of a Christian worldview, p. 200)을 최대한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복음제시의 형태로 구성한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정이 제시하는 성경의 '진정한 이야기’(true story)를 전도 현장에서 활용한다면 복음 전도자 역시 복음에 대한 보다 넓은 관점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전도 대상자는 복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등장인물들이 있다. 이 책은 갈렙(Caleb)이라는 한 대학생이 복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넓어지는 과정, 나아가 그러한 생각의 변화를 자신의 친구 안나(Anna)에게 전하는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한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두 명의 중요한 멘토[스승]가 있다. 곧, 갈렙이 섬기는 예배팀의 책임자인 제프(Jeff Corbin) 목사와 갈렙이 다니는 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살렌드라(Shalandra) 교수다. 제프는 존경받는 목회자이지만 여전히 개인적이고 타세중심적인 복음전도에 집중하는 전형으로 등장한다. 반면, 살렌드라는 갈렙에게 보다 넓은 복음의 의미를 전해준 사람으로 등장한다. 갈렙으로 대표되는 기독 청년에게 제프와 같은 목회자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느냐, 아니면 살렌드라와 같은 멘토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느냐에 따라 그의 복음 이해는 달라지는 것이다. 곧, 목회자의 복음 이해는 그가 양성하는 전도자의 복음제시 내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제임스 정의 복음제시는 전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지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제임스 정은 전통적인 복음제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죽음이후(afterlife)에 대한 강조보다는 선교적 삶(mission life)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복음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경향을 복음에 대한 왜곡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왜곡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무엇을 줄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받을 것인가에 크게 집중하게 되었다”(p. 197)고 진단한다. 만일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전도 대상자에게 사후 세계에 얻게 되는 천국보다는 이 땅에서의 선교적 사명에 집중하여 복음을 전한다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과제가 있다. 곧, 전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들어오게될 교회 공동체를 받는 것에 익숙한 수동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선교적 사명에 민감한 능동적인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채 복음 제시에만 사명, 선교, 제자도 등을 강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전통적인 복음제시가 그토록 선교적 삶보다는 죽음 이후의 천국에 집중하는 이유 가운데 받는 것에만 익숙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

세대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교육학자인 존 웨스터호프 3(John H. Westerhoff ) 1976년 기독교교육학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주목받고 있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존 웨스터호프 3세는 이 책의 제목에서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질문하고는 그 책의 제 1장 제목을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잡았습니다. 1970년대 당시, 미국 기독교교육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삼스럽게 존 웨스터호프 3세의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기 원하는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신앙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던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넘치는 현장, 바로 그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며, 동시에 교회란 예전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2: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사도 바울은 단순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한 세대만이 아니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자녀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대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가득한 교회, 바로 그러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가정, 바로 그 가정이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복음의 핵심 3가지

 

그렇다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였지만, 그 은혜를 한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언 어떻게 우리의 교회는, 그리고 우리의 가정은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크게 3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1-3)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일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끊임 없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4)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까?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셧다는 구절 앞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여러분,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긍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허물로 죄로 죽었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휼히 여기셔서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깊이, 이 사랑의 넓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사랑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둘째로 또한 함께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1:20).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하늘에 앉히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실감이 나십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듯이, 지금 우리의 삶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단어나,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는 단어나 원문을 보면 분명한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3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끊임없이 되새길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반복하여 되뇔 때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은 제가 이 땅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진리만큼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진리만큼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만큼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가득 부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복음의 진리가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여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고, 나아가 우리를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 그 충만하심을 날마다 되새기며 복음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삶이 여러분의 전 생애는 물론이요,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를 축복합니다.

 

 

Posted by Rev. Hanjin 웃음과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