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번역 자료2018. 11. 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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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G. Oden, God’s Welcome: Hospitality for a Gospel-Hungry Worl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8), 22-24를 저자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게재함. 

 

복음 환대는 일상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 곧 변화와 변경 으로 특징 지워진다. 낯선 사람을 환영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삶에 새로운 도전이 된다. 성경은 이러한 새로운 삶을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로 묘사하는데, 여기서 회개란 오늘날 후회하는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안좋은 감정이나 유감의 뜻이 아니다.

회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보다 활동적이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 혹은 선회, 곧 문자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약속의 자녀를 기다리며 수십년 간 절망 중에 있었다. 사실, 소망했던 아이를 포기하면서 사라는 여종 하갈이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를 가지도록 허락했다( 16:1 ff). 창세기 18장에서 낯선 이들이 가져온 소식은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길, 곧 희망의 길로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 물론, 사라가 웃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처음에 그와 같은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에서 기대로 방향을 바꾸며 전환, 곧 위대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은 이방인을 만난 후 그 자신이 방향을 바꾸고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만나 그저 사교적인 언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표면적 환영은 잊어라. 그러한 표면적 환영으로는 그 누구도 변화되지 않으며, 사실 다른 사람의 응답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그와 같은 환영을 생각해보라. 다른 사람을 환영하였던 당신의 경험을 돌아보라. 다른 사람을 만나 당신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회개가 의미하는 바이다. 우리는 한걸음씩 낯선 세상의 경계선에 접근하기도 하고 가로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예비하신 삶으로 받아주시며 나아가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납할 때,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 있든 손님의 자리에 있든 상관 없이 새로운 무언가와 마주치게 된다. 이와 같은 방향전환을 경험할 때 우리는 복음 환대의 도상 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라는 이름의 대학 교수는 외국인 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그는 파키스탄 출신의 아흐메드의 미국인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를 여러 가족 모임에 아흐메드를 초대하여 미국문화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양한 의상을 입은 어린이들이 돈의 집을 찾아와 과자 안주면 장난칠 거에요라고 이야기할 때 아흐메드에게 할로윈 문화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1년 동안 돈은 자신이 기독교 환대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방인을 환영하는 주인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911 사건이 있은 다음해, 아흐메드는 유학을 계속하기 위해 허가된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야 했다. 젊은 파키스탄 남성으로서 아흐메드는 어디를 가든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허가된 명단에 올라가기 전에는 가족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고 아흐메드는 돈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곤 했다. 돈은 아흐메드와 동행하며 정부 기관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 이곳 저곳을 반복해서 돌아다녔다. 아흐메드와 함께 했던 돈의 경험은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돈은 이제 동일한 뉴스도 예전과 다르게 시청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흐메드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세계관이 확장되었다. 이처럼 복음 환대는 우리의 관점을 확대하며 우리의 삶에 방향전환을 경험하게 한다. 만일 우리의 삶이 변화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복음 환대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보았던 방식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을 촉구한다. 만일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예전의 관점으로 쉽게 돌아올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그 동안 자신의 관점만을 고수하였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 결국 회개로 나아간다. 그동안 익숙했던 생각들이 새로운 관점으로 뒤흔들리며, 더 이상 예전의 방식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은 과거의 시선보다 훨씬 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환영할 때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가 제공하는 환영으로 우리 자신은 변화된다. 바로 이와 같은 확대와 재구성이 신약성경이 메타노이아’ – 전환, 일반적으로 회개로 번역되는 단어 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전환과 회개는 개인의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외면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체의 환영하는 마음이 더해질수록 그들 역시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회개라는 특징은 우리가 복음 환대의 과정에 있음을 확신케 한다.

 

Q. 새가족 사역자로서, 기존 신자의 관점이 아닌 새가족의 관점으로 나 자신이나 교회 혹은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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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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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번역 자료2018. 11.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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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 G. Oden, God’s Welcome: Hospitality for a Gospel-Hungry Worl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8), 17-19를 저자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게재함. 

 

창세기 18장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서 있었다. ,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누가, 언제 올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목하라. 아브라함은 길에서 왔다갔다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전한 장막 안에 숨어있지도 않았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장막 문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의 이 사건을 읽으면서 손님이든 주인이든 우리가 준비 영접을 위한 준비, 다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준비 - 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러한 준비는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윤리적 대담성과도 유사하다. 그것은 확신 환영할 수 있는 기회가 가까이 왔다는 확신, 다른 사람을 환영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환대에 참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확신 - 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준비는 단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준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과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마므레에서 낯선 사람을 영접하는 사건 이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마음을 활짝 열어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장소로 이동한다. 준비하는 자세가 그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 환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는 삶의 시간들로부터 오기 마련이다.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 길의 하나이기에, 낯선 사람이 등장했을 때 준비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복음 환대를 실천하는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행해야 하는 기초작업이 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환영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더 주의를 기울일 수록, 우리는 복음 환대에 참여할 수 있는 더 많은 준비를 갖추게 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환영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공동체는 환대를 위한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며,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열린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없다면, 우리의 환대는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아서 실망과 거절의 첫번째 파도에도 휩쓸려 나간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환대는 오히려 악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지 몇번의 방문 때만 환영하고 더 이상의 환대를 멈추기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나아가 준비되지 않은 환영으로 말미암아 복음 역시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제안하는 준비된 마음이란 우리가 구체적인 결과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리라는 사실에 대한 신념이다. 그러한 준비는 용기, 감사, 그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환영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준비된 마음은 예배를 인도하고 싶어하는 청년에게 보이는 예배팀의 열린 자세, 혹은 젊은 아빠가 자신이 코치하는 축구팀에서 활동하는 편부모가정의 아빠와 아들을 교회에 초대하는 모습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준비된 마음이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여 새로운 사람을 보지 못하거나 간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준비된 마음은 의도적이면서도 동시에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준비된 마음은 교회 문 앞에 서 있는 안내자가 마음으로부터 진실하게 환영하는 모습 속에서 표현된다.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을 거리에서 장막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안내자들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주차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준비된 마음은 낯선 사람에게 우리의 필요를 승인하거나 받아들이도록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의 환영이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준비된 마음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환영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Q. 당신이 환영을 받았던 경험, 혹은 새가족 사역자로 누군가를 환영하였던 경험을 나누어주세요. 특별히,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고백하게 되는 경험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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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6. 11. 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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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꼭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그것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 좋은 일이죠? 구약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죠? 그래서 유대 출신 교사나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겠지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할 것은 해야지!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확신 속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모습은 없을까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요. 그래서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을 위한 목적이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 사도가 드디어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베드로와 동고동락하셨지요.

여러분, 인류역사에서 베드로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했어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3년 동안 풍성히 받아 누렸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와 목적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여러분, 오랜 시간 교회를 출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간증이 풍성하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교회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 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 수록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이제 베드로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선언을 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수긍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난 수천년 동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고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여러 가지 기도회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신다고요? 그것이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아직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과의 차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지라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

 

신앙생활을 10, 20, 30년을 하신 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대단히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나 이제 막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이나 이제 등록한 새가족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울러,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와 충성을 다 바쳤던 분이나 이제 교회에 막 등록한 분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하게 권면 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나 새가족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신앙의 경륜 등을 가지고 새가족과 불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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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선교2016. 1. 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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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족부’라는 이름은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새로운 가족이 되신 분들이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새가족부’라는 단어의 영어식 표현인 ‘Hospitality Ministry’는 새가족부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새가족부 사역자의 역할은 바로 “환대”(hospitality)입니다.


환대(hospitality)는 병원이라는 단어의 hospital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병원을 찾은 환자를 정성껏 받아들이고 돌봐야 하듯, 새가족부 사역자는 우리 교회를 처음 찾은 분들을 환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에게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재정상태, 도덕적 자질 등에 따라 환자를 취급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병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를 상실한 것이겠지요. 새가족부 사역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온 분들이라면 그들의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 없이 우리는 그 모든 분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행정 처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 관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을 바라보며 그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바로 그 분을 환대하는 것, 이것이 새가족부 사역자로 세워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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