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3.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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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인 위치만 니라는 분이 자신의 책에서 어느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중국 남부 구릉지대에서 벼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지역 교회의 일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벼가 한창 자라는 시기, 어느 날 아침에 자기 논에 나가 보니까, 자기 이웃 사람이 자기 논두렁에 구멍을 내서 그리스도인의 논의 물을 모두 빼내어 자기 논에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대로 물을 다시 복구해 놓았지만 물을 도둑맞는 일은 며칠을 두고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에 와서 기도 제목을 내고, 교회 지도자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의를 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놓고 교회 지도자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이지요. 그때 묵묵히 기도하던 교회 지도자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는 것은 아닌지 기도해 보시기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옳은 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옳은 일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실까요?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이 땅의 왕으로 개선행진을 하시기에 마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통치자로, 주권자로 오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마땅히 자신이 누릴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는 마땅한 권한을 포기하셨습니다. 그 대신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급기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감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옳은 일을 행했다고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 곧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나의 것을 내어 놓는 위대한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리의 자리에서 제자의 자리로 

산상보훈의 말씀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이 말씀을 누구에게 들려주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연, 산상보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주신 말씀일까요? 그 대답은 마태복음 4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부터 보시면, 예수님의 소문이 온 수리아 지역에 펴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리릴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누가요?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사람들입니까?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혹은 그러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죠. 그러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곁을 에워쌉니다. 바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마태복음 5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여기서 무리는 4장 25절에 등장하는 바로 그 무리들입니다.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몰려오는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1절 뒷부분을 보시면,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그러자 그 수많은 무리가 다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오지는 못하고, 다만 누가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까? ‘제자들이 나아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제자들에게 드디어 입을 열어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산상보훈의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그 가운데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던 열두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산상보훈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는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초신자라면 무리의 자리에 참여만 하여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나의 육신도 치유되고 나의 영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을 처음 믿은 초신자라면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포도주에 취하고,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떡과 물고기에 배부르면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신앙의 경력이 수십년에 이르는 분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의 섞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수많은 무리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도를 실천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기만 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른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자의 삶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이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은 어떠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대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한 목소리로 13절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수많은 무리들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제자입니까?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원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 포도주나 떡이나 물고기를 받아먹는 은혜를 누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4절을 다시 보시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 성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주변지역에 비해 고도가 높거든요.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른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밤중에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 성에서 빛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그 빛을 보고 ‘저기가 예루살렘이구나’라고 알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리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의 자리로 나아가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받아 누리기만 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향해 나아가면, 이 세상은 우리를 알아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15절도 보십시오. 사람이 등불을 켜면 그 등불을 어디에 놓습니까? 그릇과 같이 음식을 담아두는 말 아래에 두나요? 아니면, 등불을 걸어놓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등경 위에 두나요? 당연히 등경 위에 둡니다. 등불을 켜 놓고는 그 위에 밥그릇을 엎어 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처럼,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산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만 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무리의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는 제자의 삶을 산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희야말로 세상의 소금’이라고, ‘너희야 말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신 뒤에,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요? 16절 중간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로,” 곧 세상으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혜, 포도주와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시는 은혜만을 받아 누리는 자리에서 벗어나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서 우리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제자의 삶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땅한 권리와 마땅한 자격으로 요구하수 있지만,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던 중국의 한 기독교인 형제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교회 지도자에게 자신의 걱정거리를 이야기하고 상담을 하니, 교회 지도자 한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지는 않을지 기도해 보기를 바라오.” 

이 이야기를 들은 중국의 기독교인 형제가 집으로 돌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혹시 오늘 그 형제가 들려준 말이 주의 뜻이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올바른 일보다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날 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던 이 형제가 다음 날 새벽 집을 나서 자신의 논으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논두렁에 구멍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 형제의 논에 있던 물은 당연히 이웃의 논으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그 형제는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몇날이 못되어 그의 이웃이 그 형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이웃은 더 당황해하며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니, 나는 당신이 이 논의 주인인줄 알았는데, 그러면 당신은 소작농이었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형제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이 논의 주인이 저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요,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시작된 형제의 간증을 듣고 그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위치만 니는 이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형제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하였다.” 

여러분, 우리가 그 어디에서 이와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 어디에서 이 형제가 누렸던 충만한 성령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치유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도 큰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를 마시며 떡과 물고기를 받아 먹는 것도 큰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면 옳은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내가 손해보는 것같고, 지금은 내가 바보처럼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나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 수만 있다면, 그 안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의 그 어디에도 없는 참된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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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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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016. 2. 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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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어느 조직이든, 혹은 어느 종교든 그 모임이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롤 모델(role model)이 필수적입니다.

기독교가 매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과 비슷하게, 불교 역시 매년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지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 곧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나의 주인이 탄생하신 날이기에 기념하고 또 기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나 혹은 이슬람과 같은 유일신에 대한 개념이 없지요. 불교에서 석가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듯, 불교도 석가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 있어서 롤 모델입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그들이 지속적으로 본받으려는 어떤 모델이 있어야 그 모델을 중심으로 그 종교가 하나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이르러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다운 삶을 강조하지요. 예전의 이방인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에 이르러 바울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원리 하나를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5:1-2)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본받고 따르라고 제시되는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만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세상을 닮으라고, 세상의 가치관을 본받으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지적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5:3-7)

 

우리에게 본을 받으라고 보여주는 모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분의 은자 하심, 그분의 그 깊은 사랑,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갈 수 있다면, 그분만 닮아갈 수 있다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유혹의 손길이 교회 안에 존재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에베소교회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너희를 유혹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빛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세상이 보여주는 가치관, 세상이 보여주는 삶의 모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관과 삶의 모델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넘어, 이제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천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5:8-13)

 

우리 크리스천은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아름다운 행동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책망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세상의 어두운 세력이 더욱 강력할수록, 여러분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교회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빛이 이 땅에 비췰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 자는 자여 일어나라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저는 두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크리스천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모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어두움을 책망하는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 두 가지를 강조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5:14)

 

여기서 ‘잠자는 자’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먼저는 에베소교회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와 우리 교회를 의미하죠. 그러면 ‘죽은 자들’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바로 세상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과 잠자는 사람은 외관상 비슷합니다.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에 세상 속에서 더러움과 방탕과 탐욕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에 비슷해요. 그러나 여러분, 겉보기가 비슷하다고 모든 것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비록 빛의 자녀와 같이 살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잠 자는 사람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지 못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는 죽은 자들이 아니라 잠자는 자들입니다. 언제라도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잠자고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잠자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잠자고 있는 것이지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을 간직했으며, 그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잠자던 교회가 깨어날 것입니다. 잠자던 교회가 일어나 하나님의 빛을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비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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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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