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0. 6. 2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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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한국의 교회는 얼마나 성도가 줄었으며, 헌금액은 어떻게 변했을까? 최근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나왔다.[각주:1] 그리고 그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배 출석과 헌금의 변화에 대한 교회의 통념을 검증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배의 출석 인원은 얼마나 줄었을까? 기존의 출석인원을 기준으로 코로나가 급증하던 시기(3-4월)에는 42.4%, 설문조사 직전 주일인 5월 24일에는 61.8%가 출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 규모에 따라 세분해보면, 성도 499명 이하 교회의 출석률이 69.8%인데 반하여 성도 500명 이상 교회는 56.3%에 머무른다. 중형교회가 대형교회보다 예배 출석률이 높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익명성이 높은 대형교회가 코로나의 위기에 더 취약하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예배 출석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에 퍼져있는 또 하나의 가설이 있다. 현장예배를 온라인예배로 전환하면, 이후 현장예배를 재개해도 성도들의 현장예배 참석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도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통계를 조금 더 살펴보자. 코로나가 급증하던 3-4월,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한 교회는 평균 참석률이 24.5%로 그렇지 않은 교회에 비해 확연히 낮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를 다시 오프라인 예배로 전환한 5월 24일 주일예배에는 그 차이가 사라졌다. 3-4월에 현장예배만 고수하거나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한 교회가 5월 24일 예배에서는 각각 60.9%와 61.5%의 참석률을 보인 반면, 3-4월에 현장예배를 포기하고 온라인 예배와 가정예배로 전환했던 교회는 5월 24일 예배에서 각각 62.4%와 63.1%로 참석률이 더 높았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 성도들이 장기적으로 현장예배 출석을 안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우려였으며, 현장예배를 고수한다고 예배 참석률을 더 높일 수도 없었다. 

코로나19의 종식 후 교회 출석인원은 얼마나 줄어들까? 이것은 교회 출석에 대한 핵심 질문이지만, 아직 누구도 정확히 답할 수 없다. "설문조사 보고서"에는 위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다수의 예측이 개인의 예측보다 정확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에 목회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설문조사로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어느 정도 답할 수 있는 설문은 있다. 지난 4월 교인 천명(유효표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2.5%의 응답자가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및 방송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응답했다. 성도들에게 직접 물어본 설문이니 이후 현실로 나타날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정확한 예측인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직한 대답이다. 


코로나 시대의 헌금

출석인원이 줄어드니 헌금도 줄어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68.8%의 교회가 헌금이 줄었으며, 30.1%의 교회만 변화가 없었다. 헌금이 줄었다고 대답한 교회 가운데 20~40% 줄었다고 응답한 교회가 53.0%로 가장 많았으며, 평균적으로는 28.7%의 헌금이 준 것으로 나타났다. 

헌금의 감소와 관련한 몇 가지 가설을 살펴보자. 현장 예배를 포기하고 온라인예배 및 가정예배로 전환하면 헌금이 더욱 감소할 것인가? 온라인 헌금을 유도하면 헌금의 감소를 줄일 수 있는가? 이번 통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위의 두 가지 가설도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3-4월 주일예배의 형태와 헌금의 증감, 그리고 온라인 헌금의 운영과 헌금의 증감 사이에는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코로나를 계기로 온라인 헌금을 운영한 교회에서 헌금이 줄어든 비율(75.0%)이 온라인 헌금을 운영하지 않은 교회에서 헌금이 줄어든 비율(65.%)보다 높았고, 온라인 헌금을 운영하지 않는 교회에서 헌금이 감소하지 않은 비율(33.7%)이 코로나를 계기로 온라인 헌금을 운영한 교회에서 헌금 감소가 일어나지 않은 비율(24.6%)보다 높았다. 결론적으로,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것이나 온라인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헌금의 감소를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배 출석 및 헌금액은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한 두 가지 원인으로 출석인원과 헌금액의 변화 과정을 다 설명할 수도 없고, 한 두 가지 처방으로 출석 인원을 늘리거나 헌금액을 높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면 현 상황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신중하게 대안을 내어놓기 어렵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검증되지 않은 방법에 얽매이는 우를 범하기 쉽다. 출석인원의 감소가 두려워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도 현장예배를 강행하거나, 헌금의 감소가 두려워 온라인 헌금을 강조하는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통계 자료를 분석해보니 조급한 마음에 시도하는 이러한 노력은 열매가 없었다. 

반면, 499명 이하의 중형 교회가 500명 이상의 대형 교회보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률이 더 높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형 교회일수록 온라인을 통한 다양한 프로그램 및 콘텐츠를 제공하며 보다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했으리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대형 교회의 목회적, 행정력 역량보다 중형교회이기에 가능한 보다 밀착된 목회적 돌봄이 출석 관리에 더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니 
위기일수록, 더욱 침착해야 하며 
불안할수록, 더욱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이와같은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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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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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0. 5. 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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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요인이 있다면, 단연코 코로나 바이러스일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교회도 올해 상반기 약 두 달여 동안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였습니다. 몇 주 전부터 주일예배를 성도님들이 함께 예배하고, 이번주부터 새벽예배와 수요예배도 성도님들에게 예배당을 개방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예배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던 중 저의 눈에 크게 들어왔던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 있는 말씀인데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렘 32:42) 

이 구절에 제 시선이 고정되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큰 재앙”이라는 단어가 먼저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허락한 모든 복’을 내려 주시겠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재앙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지나간 후에는 허락한 모든 복을 내리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큰 재앙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지금, 이 땅의 모든 국민들, 특별히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선포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모든 재앙이 미치게 하였으나,
이제 내가 이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베풀어 주겠다.

약속하신 모든 복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셨지만, 그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단연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욥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욥은 큰 재앙을 만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일곱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그런데 사탄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욥의 몸을 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한 종기가 일어나게 합니다. 재산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니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재앙이 그의 삶에 닥쳐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점차 지나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욥의 큰 재앙이 모두 지난 후, 하나님은 욥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부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욥의 재산 목록이 등장합니다. 양이 만사천 마리, 낙타가 육천 마리, 소가 천 겨리, 암나귀가 천 마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욥의 재산은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 곧 욥기 1장에 등장하는 욥의 재산과 비교하면 정확히 두 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욥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은 단지 재물의 축복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계속해서 14절에는 세 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미마와 긋시아와 게렌합북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딸들에게도 풍성한 기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딸들에게만 기업을 주었겠습니까?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열명의 자녀들에게 풍성한 기업을 나누어 주며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큰 재앙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물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은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자, 욥기 1장은 욥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가 부자였고 많은 자녀들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제사를 드리는 의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욥기의 마지막장인 42장에는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이 잃어버렸던 재물도, 잃어버렸던 자녀도, 잃어버렸던 건강도 다시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겉모습은 큰 재앙을 만나기 이전이나 큰 재앙을 만난 이후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욥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정말로 큰 재앙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은 별로 큰 차이가 없었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16절과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서술처럼 보입니다. 큰 재앙이 지나고 140년이라는 긴 세월 장수하였고, 이후 늙고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내용에 친숙하신 분들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며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구절은 큰 재앙의 터널을 지나온 욥의 후반기 삶은 고난을 당하기 이전의 삶과 겉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욥은 큰 재앙을 만나기 전에도 많은 재물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욥은 큰 재난을 겪기 전에도 이미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욥은 큰 아픔을 겪기 전에도 때를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도, 이러한 행복도 사탄이 마음먹고 달려들자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이렇듯 허무하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이 욥기 1장이 묘사하는 욥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큰 재앙을 인내하였고, 마침내 그 모든 재앙이 물러가자 욥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도, 자녀도,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가 있었으니 욥의 세계는 더 이상 사탄의 유혹에 쉽게 붕괴되지 않는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큰 재앙을 지난 후 14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욥의 인생은 거대한 풍파가 몰려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창세기의 족장들이 그러하였듯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삶에 있어 고난은 더욱 견고한 믿음의 반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욥의 변화 – 하나님 체험

욥은 자신의 삶에서 커다란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지난 후 욥의 삶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했지요,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겪는 동안 욥의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과연 욥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기에 큰 재앙이 지난 후 욥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삶,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큰 재앙을 겪으며 경험했던 욥의 변화를 욥기 전체에서 찾아본다면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 체험’입니다. 

자, 욥은 큰 재앙을 만나기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욥은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은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을 것입니다. 욥 자신도 이만하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삶에 큰 재앙이 찾아오니 그 모든 것이 헛된 자랑이었습니다. 고난의 순간이 찾아오자 그제서야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채 그저 풍월로 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실체가 없고 그저 입술의 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급기야 욥은 이렇게 탄식하지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8-9)

그런데 여러분, 큰 재앙을 만난 욥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풍월로만 하나님을 알았던 욥인데, 그저 입술로만 하나님에 대해 떠들어댔던 욥인데 큰 재앙을 지나며 욥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 5절에 등장합니다. 욥기 42장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몇 달 전만하더라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심지어 주일예배까지도 온라인 예배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성도님들이 이 기간을 통해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경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코로나 이전에는 교회 활동이 바빴어요. 교회 모임에 참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러나 이제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주일예배, 새벽예배, 수요예배 등 한주에 10개 가까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예배 영상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영상을 시청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열심히 성경도 읽고,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의 활동이 위축된 이 시기에 오히려 개인의 믿음과 신앙이 더 깊어지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멈추지 않은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여러 활동이 멈추었지만 여러분의 개인 경건의 시간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아니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십시오. 이 기회를 통해 가정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와 가정 예배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러 갈 것입니다. 마침내, 이 큰 재앙도 지나갈 것입니다. 이 모든 재앙이 지난 후 우리도 욥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변화 – 우정의 회복

큰 재앙을 겪으며 경험했던 욥의 변화, 그 두번째는 ‘우정의 회복’입니다. 

큰 재앙을 만나기 전, 욥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재앙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지요. 욥이 평안하고 부유하고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았을 때 그의 곁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정작 욥에게 큰 재앙이 찾아오자 친구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이것이 욥기 전체에서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할수록 그들로부터 위로받기보다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표현하는 욥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 16:2)

욥의 주변에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들은 욥의 마음을 위로하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큰 재앙을 겪으면서 욥과 친구들의 관계가 변했습니다. 욥의 마지막 장인 42장 10절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큰 재앙을 겪으며 먼저 욥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욥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1절도 보십시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먼저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욥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와서 욥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욥을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욥은 큰 재앙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를 얻었고, 형제와 자매들을 얻었으며, 마침내 이웃을 얻었던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적게 만나다 보니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지 않으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를 보내며 그 누구보다도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여 더욱 그리운 우리 교회 교우분들을 서로 돌아보십시오. 여전히 멈추지 않은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와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보다 깊이 체험할 뿐만 아니라, 참된 우정을 회복하십시오. 

마침내 이 모든 재앙이 지난간 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모든 재앙이 미치게 하였으나,
이제 내가 이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베풀어 주겠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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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20. 4. 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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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목회적 변화와 준비

포스트 코비드(Post-COVID).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된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식인이 포스트 코로나, 곧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예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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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전 세계적 유행은 목회 활동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곧, 교회의 친교와 전도 활동은 위축됐지만 예배와 교육에 목회 역량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설교자의 역할 가운데 설교와 강의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대두되고 있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의 목회적 변화와 준비"라는 글의 핵심 내용이다. 그렇다면 목회적 관점이 아닌 성도의 관점에서 코로나 시대의 변화는 무엇이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코로나 시대, 신앙생활의 변화 

지극히 상식적인 측면에서 시작하자. 코로나의 확산은 성도들의 교회 활동을 위축시켰다. 이는 성도들의 '참여'가 급감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동안 성도들의 관점에서 급증한 것이 있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코로나가 확산되던 시기, 교회의 문은 닫혀있었지만 교회의 모든 활동이 멈춘 것은 아니다. 목회자들은 여전히 교회를 지켰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찾았다. 매주 예배 영상을 제작하고, 가정 예배 순서지를 배포하며 신앙생활을 위한 다양한 비대면 자료를 쏟아내고 있다. 유튜브에서 '예배'나 '성경 공부'를 검색해보라. 끝을 알 수 없는 콘텐츠 목록이 등장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 목회 활동은 예배와 교육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성도들의 관점에서 신앙의 '참여'는 줄었지만, 신앙의 '자료'는 넘쳐난다. 

코로나 시대는 목회자에게 설교와 강의 역량을 요구한다. 목회 활동이 예배와 교육에 집중되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는 성도에게도 나름의 역량을 요구한다. 무한 공급되는 신앙의 자료를 자신만의 시간과 자신만의 장소에서 스스로 활용하여 믿음을 유지하거나 성장할 수 있는 역량이다. 한 마디로, '개인의 경건'이다.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개인의 경건 생활은 성도에게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경건 생활이 부족하더라도 이를 보충할 방법이 있었다. 교회 활동의 '참여'다. 그런데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코로나 시대는 개인의 경건이 신앙의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를 보내며 자신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성도들이 있다. 신앙의 '참여'는 줄고 그 대신 신앙의 '자료'가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신앙생활이 나태해진다는 성도들도 있다. 신앙의 '자료'만 풍성해졌지 신앙의 '참여'가 없기 때문이다. 마주친 현실이 같은데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다. 개인 경건의 차이다. 

 


코로나 시대, 교회의 역할 

코로나 시대는 성도의 참여가 불가능하여 신앙생활이 개인 경건에 좌우된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는 교회가 미래를 걱정하거나 기대하는 이유다. 코로나 이후 교회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이들은 개인 경건의 강조가 성도의 영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가 폭증하고 성도 개인의 영적 갈망이 이를 수용한다면 미래의 기독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다. 반면, 코로나 이후 교회를 부정적으로 예측하는 이들은 성도의 개인 경건을 의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자료'만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교회 출석의 급감을 우려한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교회의 미래에 대한 섣부른 기대도, 때 이른 걱정도 잠시 미뤄두자. 다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한국 교회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성도의 '개인 경건'이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안타깝지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지금은 교회가 개인 영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다. 그래서 교회와 목회자들은 '자료'를 쏟아놓는다. 코로나 시대에는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 자료를 제작하고 배부하면서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 자료만으로는 성도의 개인 경건이 고양되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자료 제작에만 온 힘을 쏟지 말고, 코로나 이전의 목회를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성도 개인의 경건이라는 관점에서 기존의 목회 활동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그 평가에 근거하여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는 동안 교회는 변화를 꾀해야 한다. 지향점은 뚜렷하다. 목회자에게는 설교와 강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요, 성도에게는 개인 경건을 함양할 수 있는 목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목표가 정해졌고 지금까지의 목회 활동을 철저히 평가했다면, 이제는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20세기 후반,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기술이라는 것이 TV와 인터넷 정도였지만 교회는 온라인 예배가 기존의 예배를 대체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영국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하나님께서 친히 디자인하신 최고의 시청각 자료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회중 앞에 서 있는 목회자요, 둘째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다. 아무리 매스미디어의 흐름이 거세더라도 이 두 가지가 복음을 전파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각주:1]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교회는 또다시 온라인 예배를 고민한다. 수많은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여 게시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 무한 공급되는 '자료'는 하나님께서 계발하신 도구를 결코 뛰어넘을 수도, 대체할 수도 없다. 코로나 시대의 교회가 목회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성도 개인의 경건을 고양하기 위해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 및 헌금 - 일반적 통념을 검증한다 -

올해 상반기, 한국의 교회는 얼마나 성도가 줄었으며, 헌금액은 어떻게 변했을까? 최근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그리고 그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배 출석과 헌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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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 "탄식"

거대한 재앙을 맞이할 때 기독교인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하나의 신학적 응답이다. 쉽게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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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Stott,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 (Grand Rapids: Eerdmans 1982), 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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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20. 4. 1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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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비드(Post-COVID).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된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식인이 포스트 코로나, 곧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예측하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떤 이들은 교회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예측을, 어떤 이들은 보다 긍정적인 예측을 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코로나19의 확산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에 이와 관련된 미래 예측이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측이 많으니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후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 그 가운데 무엇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인지는 지금 시점에서 판단할 수 없다. 구약의 전도자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전 7:14) 

포스트 코비드 혹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와 목회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한두 달의 경험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코로나19의 확산이 목회 현장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였는지는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미래에 대한 예측보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두었다. 


코로나로 인한 목회 변화 

전통적으로 교회의 역할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한다. 예배, 교육, 봉사, 전도, 친교. 이 가운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두 가지 영역으로, 곧 친교와 전도다. 지역교회의 부목사 가운데 친교와 전도 관련 사역을 담당하는 이들은 2020년 상반기 대부분의 사역에서 손을 놓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 해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친교와 전도를 시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회의 활동 가운데 봉사는 친교와 전도에 비해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기존의 방식은 아니다. 어르신,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은 많이 위축되었지만, 코로나 피해가 가장 큰 대구 지역에 방역 물품을 제공하는 등의 봉사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과 방식이 변했지만 봉사 활동 자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의 다섯 가지 역할 가운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교회의 목회 역량이 오히려 집중되는 영역이 있다. 곧, 예배와 교육이다. 코로나의 집단 감염과 관련하여 교회의 예배가 중요한 이슈를 형성하고, 오프라인 혹은 집합 예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으니, 이러한 시기에 여러 분야의 사역에 흩어졌던 목회 역량이 먼저는 예배에, 그리고 교육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오프라인 예배가 불가능한 시기에도 모든 교회가 - 결코 예외가 없을 것이다 -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를 시행하고 있다. 

친교 및 전도 활동이 멈춰선 가운데, 예배는 새로운 형태로 진행되어야 하기에 교회의 모든 역량은 예배에 집중된다. 온라인 예배는 예배 현장을 영상으로 편집하여 송출하는 과정이 필수다. 많은 교회는 예배 영상을 제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더라도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도들이 오프라인 예배에 참여하고, 이를 영상으로 촬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예배 준비에 있어 참석자에 대한 사전 확인, 예배 참여 전 발열검사 및 손 소독, 전교인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예배 안내 등 예배준비는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온라인 예배가 점차 익숙해지면서 교회는 온라인을 통한 교육 활동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 학교가 온라인으로 개학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교회의 새로운 교육 활동을 자극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덮은 지난 한두 달, 가장 크게 위축된 교회의 목회 영역은 친교와 전도다. 반면, 교회의 역량은 예배와 교육에 집중되고 있다. 


더욱 중요해진 목회 역량 - 설교와 강의 

코로나19의 여파로 목회 영역에 따라 위축과 집중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목회 역량이 무엇인지는 드러난다. 곧, 설교와 강의다. 코로나 이전에도 목회자에게 설교와 강의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목회라는 활동은 흔히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다각화된 활동이다. 설교와 강의가 중요하지만 행정력, 친화력, 공감능력, 긍휼히 여기는 마음, 운영능력, 전도의 은사, 찬양의 은사 등 목회자의 역할은 참으로 다양하며 교회와 성도들은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목회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는 목회 활동의 양극화를 가져왔고, 그 어느 때보다 설교와 강의가 중요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지속되는 지금, 목회자들은 다시금 자신의 목회 역량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 집중해서 훈련할 목회 역량이 있다면 단연코 설교와 강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지난 한 두 달의 변화와 같이 예배와 교육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쉽게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 교회의 활동 가운데 끝까지 지속될 영역은 예배와 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미래를 예측하기에 앞서 목회자로서 자신의 설교 능력과 강의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준비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의 교회적 변화와 준비

코로나 시대의 목회적 변화와 준비 포스트 코비드(Post-COVID).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된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식인이 포스트 코로나,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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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 및 헌금 - 일반적 통념을 검증한다 -

올해 상반기, 한국의 교회는 얼마나 성도가 줄었으며, 헌금액은 어떻게 변했을까? 최근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그리고 그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배 출석과 헌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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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 "탄식"

거대한 재앙을 맞이할 때 기독교인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하나의 신학적 응답이다. 쉽게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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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2020. 3. 3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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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2020년 부활절은 많은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부활절 예배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2020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큰 기쁨의 소식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대유행이 되어(pandemic) 인류를 위협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종식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어울려 예배하는 기쁨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2020년의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기쁨과 슬픔이 서로 섞일 수 없는 감정인 줄 알았습니다. 기쁨이 넘치면 슬픔이 사라지고, 슬픔이 압도하면 기쁨이 물러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살다보니 기쁨과 슬픔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다양한 감정이 좁은 우리의 가슴에 공존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2020년의 부활절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찾아온 부활절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안치되신 무덤을 다시 살펴보기 위하여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지요. 갑자기 큰 지진으로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던 기초가 흔들리니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지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막아두었던 거대한 돌을 옮겼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이 장면을 함께 목격하였던 로마 군대의 경비병들도 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지키던 자들이 [천사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4절)고 묘사합니다. 땅이 흔들리는 지진에 무장을 하고 있던 군인들의 마음까지도 흔들렸으니, 그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연약한 여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더 떨리고 두려웠겠습니까? 

여인들이 얼마나 큰 두려움에 압도되었는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5절) 그리고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6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사를 통해 가장 기쁜 소식, 무덤을 살펴보기 위해 집을 나설 때부터 가장 기다렸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한순간에 기쁨의 감정으로 바뀌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은 그들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8절) 

8절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할 수록, 이 구절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첫 번째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인들의 마음이 2020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비춰줍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지금,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그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없으며 부활의 그 소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떠한 현실의 아픔 속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여전히 큰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종식되지 않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질병에 대한 걱정, 교회에 대한 걱정, 생계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걱정과 불안 두려움의 감정이 뒤섞여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기쁨의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특권도 그 마음에 깊이 뿌리 잡은 두려움, 곧 걱정과 근심을 온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있을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천사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7절). 이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천사의 음성을 들었던 여인들도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친히 하신 말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절).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갈릴리라는 약속 장소가 아니었던 바로 여기, 여인들이 큰 기쁨과 함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바로 이곳으로 찾아오셔서 여인들을 만나주셨던 것이죠. 우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큰 기쁨과 더불어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의 약속 장소인 갈릴리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 분주하게 달려가는 그들의 앞에 나타나 친히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혹, 부활절을 맞이하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믿지만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에 두려움이 자리잡고 계십니까? 부활절은 되었지만 여전히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니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베풀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사모한다면, 부활의 은총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처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그 옛날 분주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여인들을 찾아가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도 찾아와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의 "평안하냐"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평안을 기원하는 인사말로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하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가 됩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에 부활의 기쁨과 함께 두려움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 새벽 주님을 찾아 나섰던 마리아처럼 여러분도 부활의 주님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친히 찾아가셔서 여러분의 복잡한 마음을 향하여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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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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