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교2024. 12. 16. 15:33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소망이 있다면 인내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지금의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을 넘어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 하루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과 낙관은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며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의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1-2절)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희망, 곧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 어디를 보아도 미래에 대한 낙관이 철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소망과 희망을 선포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먼저 본문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이 어떤지 찾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전에 고통받던 자들”이라고 말씀하네요. 네, 이스라엘은 지금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현실을 묘사하는 첫 번째 단어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본문 2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시작하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두움, 곧 흑암 가운데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곧 고통과 흑암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밝은 전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큰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더라도, 그 고통의 끝에는 밝은 빛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과 2절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통이고 둘째는 흑암입니다. 현실도 고통스러운데 지금의 모습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밝은 전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고통과 흑암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여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한 나라가 거대한 제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완벽하게 정복되었으니 그 국가적 재난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이것이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죠. 한 나라가 이미 국가의 운명이 다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과연 이스라엘 열 지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나 긍정적인 전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북 이스라엘의 현실은 먼저 고통이고 또한 흑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의 소망이 무엇이라고요? 지금 나의 모습,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불가능한 바로 그때. 나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과도 같은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너희들의 삶에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너희의 미래에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비췰 것이다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본문 2절 말씀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을 앞뒤좌우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지금도 큰 고통 가운데 있지만,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새해도 어둡게만 느껴지십니까? 그리하여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보다는 체념과 낙심에 빠져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여러분에게 선포하시는 소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전에 고통받던 여러분에게 모든 흑암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터널을 지난 여러분에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밝은 광명의 날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고 계실지라도, 
이제 하나님께서 복음의 밝은 광명으로 여러분의 삶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시니, 여러분의 현실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회복의 말씀을 듣고 절망과 낙심이 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슬픔 대신 찬양을 (3-5절)

북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3절)

우리가 함께 읽은 개역개정성경에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본문 3절부터 5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찬양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직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멸망을 당한 처참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3절의 “창성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소망과 희망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지금 이스라엘 열 지파는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은 철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선포해 주셨으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에 소망과 희망이 생겨나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뒷부분도 보세요.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 등장하는 ‘추수’와 ‘탈취물’이라는 단어는 각각 하나의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지요. ‘추수’라는 단어에는 어떠한 비유가 담겨 있습니까? 농사의 비유가 담겨 있지요. 농부가 지난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을 때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저 수고하고 노동을 할 뿐이지요.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그 힘겨운 농사의 수고가 다 보상을 받게 되잖아요. ‘탈취물’이라는 단어도 전쟁이라는 비유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적군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괴롭고 피 말리는 과정일까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지난 후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 곧 전리품을 얻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셨을 때, 북 이스라엘의 형편은 먼저 고통이었고 또한 흑암 곧 내일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희복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시니 지금은 고통이고, 지금은 농사를 짓는 수고의 시간이고, 지금은 전쟁을 치르는 피 말리는 시간일지라도. 그들의 내일은 소망과 희망을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추수의 기쁨,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에 오실 때에는 비록 우리의 마음이 흑암이어서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을지라도,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시작되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어디에 계시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날들이 계속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6-7절)

고통과 흑암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소망과 희망의 자리로 초대해 주시는가라는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6절과 7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6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6절)

큰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깊은 흑암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6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이는,” 그 이유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어주신 그분이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은 현재의 고통을 넘어 내일에 대한 흑암이 되어, 내일에 대한 절망으로 내일에 대한 낙심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렇게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를 소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고통 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7b절) 

그러나 여러분,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역사적 사실이 된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7절의 마지막 구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를 이렇게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이미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나의 상황이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내일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 안에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니 이제 그 보상을 받을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 주변의 환경과 조건이 좋아 이제는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나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나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현실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도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이유, 그것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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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