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4. 2. 2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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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팰럼시스트”(Palimpses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복기지”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양피지에 글씨를 써서 그 내용을 후대에 남겨주곤 했습니다. 글을 쓸 수 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후대에 정보와 지혜를 남겨주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 양피지가 그 시대에 얼마나 귀하였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그 양피지를 재활용하곤 했습니다. 한번 글씨를 쓰고 난 뒤에 사람들은 그 글씨를 최대한 깨끗하게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방식이지요. 여러분 중에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종이가 귀했던 시절에 노트를 재활용하였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노트에 연필로 글씨를 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노트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기존의 글씨를 깨끗하게 지우고 그 위에 또 다시 글씨를 쓰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글씨를 지워도 글씨의 자국은 남게 되거든요. 그 옛날 양피지에 쓴 글씨를 아무리 열심히 지워도 자국이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피지를 몇차례 재활용하고 나면, 또렷한 글씨 아래에 글씨를 수차례 쓰고 지웠던 연한 자국이 남아 있게 되는 데, 그것을 팰럼시스트 곧 복기지라고 부릅니다. 

“팰럼시스트”라는 개념은 여러 분야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건축학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이 현대적 건물로 모두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간과 배치 안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흐릿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국가나 문화의 흔적을 현대 도시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에도 팰럼시스트는 존재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은 과거의 생각이나 과거의 관습을 버리고 현대적 문화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자세히 관찰하면 말끔하게 지워낼 수 없는 오랜 역사와 관습이 팰럼시스트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생각에서 벗어나고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가봇에서 미스바로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팰럼시스트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에게 깊이 새겨진 팰럼시스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팰럼시스트 가운데 마지막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20)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죄성이라는 팰럼시스트가 깊이 새겨져 있어서 그것을 씻어내고 그것을 지워내기 너무도 힘겹고 버거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민족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다 보니,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노예근성이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팰럼시스트가 새겨졌습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현재]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직업 언약을 맺었고, [미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비전인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은 포기하고 애굽 사람을 섬기는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노예근성의 팰럼시스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보다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들, 곧 바알이나 아세라 등을 섬기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주변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민족의 고난을 허락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마음은 그때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잠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시면, 그들은 언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느냐는 듯이 우상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사는 동안 이번에는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숭배라는 뿌리깊은 죄성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침내 언약궤는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루에 죽고, 이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로 이가봇이라고 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마음에 우상숭배의 습성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으니, 그러한 사사시대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마음에 우상숭배의 팰럼시스트가 제 아무리 뿌리 깊게 박혀 있더라도, 그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두운 이가봇의 시대가 지속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으로부터 우상숭배의 뿌리깊은 죄성을 제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무엘을 마치 사사의 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 의해 크게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사무엘이라는 사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쳐 주시고 그들에게 다시 평화를 주십니다. 이 동일한 사건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구약성경 사사기의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사사기에서 지루하게 반복되었던 이야기들과 전혀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미스바의 회개를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사무엘이 다스리던 시대는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의 시대를 지나, 다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악습을 철저하게 끊어냅니다.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과 함께 그들의 우상을 데려오기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상 숭배라는 깊은 죄성에 빠진 시대를 이가봇의 시대라 부른다면, 오늘 본문은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이 최소한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은 더 이상 섬기지 않는 미스바의 시대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참으로 위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우리의 모든 죄악 된 습관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마침내 모두 제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죄악이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모든 죄악을 깨끗이 제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죄악이 가득 넘치고 있는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가봇의 시대를 종결하시고 미스바의 시대를 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펼치실 것을 믿기에,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소망 가운데 기도해야 할 수 있습니다. 


미스바의 시대를 위한 조건

오늘 본문은 이가봇의 시대가 미스바의 시대로 전환하는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미스바에서 일어난 회개의 사건이 그 이전의 사건과 다른 결과를 맺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미스바에서의 회개 사건은 사사시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펼치게 되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중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2절)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이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언약궤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늘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성도 여러분, 20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 빼앗겼던 언약궤는 분명히 이스라엘 영토 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택하셔서 선지자로 세워주셨고, 사무엘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라는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가봇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도,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어도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떻게 이가봇의 시대가 끝나고 미스바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까? 비로소 온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자,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 그 두번째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자,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3절)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모든 이방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는 우상숭배라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바른 길로 그들의 삶을 돌이키라는 요구입니다. 곧 회개에 대한 촉구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한 백성들이 사무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4절)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고 다시 한번 철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리하여 미스바의 대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6절)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어서 하나님 앞에 쏟아 부었지요. 지금 그들의 마음이 꼭 그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자신들의 깨어진 마음 상한 마음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 쏟는 행동에는 그들 자신의 마음도 이처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으로 깊이 통회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한 마음을 내어드리는 철저한 회개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게 하였습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에 들어왔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위에 우상숭배를 비롯한 뿌리깊은 죄악을 진심으로 회개하니 비로소 이가봇의 시대는 끝나는 것이요 미스바의 시대는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가봇의 시간을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들이 어떻게 이가봇의 시간을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는 이가봇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는 새로운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요, 또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철저히 통회하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 그리고 나 안에 깊이 뿌리 박힌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순절이 마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 이가봇의 시대가 끝나고 미스바의 시대를 맞이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새로운 미스바의 시대를 활짝 펼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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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4. 2. 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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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표어는 “주여, 치유하게 하소서”입니다. 이 표어에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담겨 있지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주제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은 헨리 나우웬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의 주제가 바로 치유와 회복, 그리고 사명입니다. 이 책에서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의 정체성으로 책의 제목인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를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사역자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온몸과 마음이 튼튼하여 상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온몸이 상처로 가득하여 그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헨리 나우웬이 서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해줍니다. 그 고정관념이 무엇일까요? 지금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상처가 모두 치유되어야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나의 질병이 치유되어야, 그 이후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이지요. 나는 여전히 몸이 병약하고 마음에도 큰 상처가 남아 있기에 아직은 다른 사람을 아픔을 보듬는 치유자가 될 수 없다는 자기변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몸이 여전히 병들어 아프다 하더라도, 아니 나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큰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참된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사역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루의 사역,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안식일 하루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1) 

아마도 안식일의 오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에 깜짝 놀라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그 회당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나오라” 명령하시니 그 즉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며 회당에 있었던 가버나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되지요. 

같은 날이었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회당에서 나와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을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그 집에도 병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자 그토록 심했던 열병이 그 즉시 나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아주셨던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고쳐주신 사람은 여자였지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던 사람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곧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던 시몬의 장모는 열병, 곧 몸에 발생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장소는 회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공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장소는 그의 개인 집으로 사적인 공간이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같은 날에 행하신 두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사건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남자든 여자든 구별 없이, 귀신이 들려 마음과 영혼에 큰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든 몸에 병이 들어 아파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당이라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공적 장소는 물론이요 안식일에도 회당을 찾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병상에 누워있는 개인의 가정집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치유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도 고쳐주시고, 같은 날 시몬의 장모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해가 저물자, 가버나움에 있는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2절) 

이 구절에서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오네요. 어떤 질병이든 누구의 아픔이든 상관없이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본문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34a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치유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과 영혼에 큰 상처와 아픔이 있어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지금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만이 아니라, 주일이 되었음에도 몸이 너무도 아파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어제의 치유와 오늘의 사명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곳에서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후 시몬의 집에 들어가서 또다시 병자를 치유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는데,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들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병자를 치유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5절) 

예수님께서 새벽부터 기도하시네요.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부터 기도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7절)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 곧 지금 예수님을 찾고 있는 그 “모든 사람”은 어제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치유를 경험했던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지금 또다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전해주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의 질병도 돌보아 달라는 요청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십니다. 본문 3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8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전도”라는 단어가 우리의 시선을 이끕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거나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라고 표현하지 전도하셨다고는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에서 전도라는 단어는 제자들 혹은 이후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활동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전도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전도의 여정에 초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시지요. “그곳에서도 전도하자”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무엇을 권하시죠?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도 전도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안식일이었던 “어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경험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이었던 “어제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치유와 회복의 사건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전도하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명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언급한 헨리 나우웬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참된 사역자의 모습을 매우 인상적으로 비유로 묘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잠이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참된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한 번에 한 군데씩 풀었다가 
다시 싸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해”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한 번에 다 풀어놓고 “하나님 나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우리를 치유해주셔서 우리의 아픔과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치유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명자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나의 상처를 한 번에 한 곳만 풀어서 치료합니다. 그런데 아직 나의 몸에서 많은 상처가 남아있거든요. 그러나 어제 예수님께서 나의 상처 한 곳을 치료해 주었으니, 오늘은 주님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향해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의 남은 상처를 모두 싸매어 두는 사람이지요.

자신의 장모님이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과 모든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우리를 치유해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아 달하는 요청입니다. “어제”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또다시 들려달라는 요청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비유를 인용하면, 그들은 자신의 모든 상처를 다 풀어놓고 그 모든 아픔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치유해 주셔야 주님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이미 치유를 경험하지 않았느냐고, 어제 이미 권위 있는 새 교훈을 듣지 않았느냐고, 언제까지 나에게는 더 큰 은혜와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전도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외면하겠느냐고.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치유하는 손길을 경험하였으니 그 정도는 다시 싸매어두고 나와 함께 사명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자는 제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말씀을 정말 믿으시나요? 여러분은 모든 아픔과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질병과 아픔도 치유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남은 상처를 이제는 싸매고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십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괴롭지만, 어제의 은혜를 오늘도 요청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마시고, 어제의 은혜를 받았으니 오늘은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사명을 위해 전진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월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는 시간이지요. 나아가 성만찬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늘의 풍성한 양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온갖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던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이처럼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만찬에는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넘어, 이제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는 ‘전도’의 의미 곧 사명의 의미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나요? 성만찬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 모두가 치유의 은혜를 누리고, “내일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위해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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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3. 12. 1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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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은혜”가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너무도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까닥 없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여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아무런 이유나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반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니, 사랑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지금, 제가 드린 이 질문은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우스 땅에 욥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성심성의껏 섬겼던 분이지요. 그런데 욥에 대해 사단은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장 9절) 

사단의 논리는 맹백합니다. 욥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이유는 딱 한가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만일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사단의 표현 그대로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외면하셔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의 복을 빼앗아 가셔도, 하나님께서 내 몸에서 건강의 복을 가져가시더라도 여러분은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시겠습니까?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범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조금만 나에게 주신 복을 가져 가시더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지요. 그러니 욥과 같이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찬양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관점 - 사랑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점이 달랐습니다. 먼저 한 사람은 남성이고 또 한 사람은 여성이었지요. 그들을 성별부터 달랐네요. 그런데 본문에서 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의인과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바리새인이” 그렇습니다. 이 남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남자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 남자의 집에 들어온 여자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묘사합니까?  37절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죄에 대해 옹호하려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구조 때문에 이 여인이 죄를 범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단 한 마디로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백하게 말씀하지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이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이 여자가 많은 죄를 – 적은 죄가 아닙니다 –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cf. 47절). 이렇게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자와 이 여자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하나있지요. 하나님, 혹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섬기는 신적인 존재는 인간을 바라볼 때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가는 의인은 하나님께 호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벌이 임합니다. 이것이 어느 사회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교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의인이냐 죄인이냐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 42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떠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지 찾아보며 본문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누가 더 사랑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의 ‘바리새인’으로 불리던 남자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여인’이라 불렸던 사람보다 훨씬 의롭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은 죄를 지은 여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남성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그리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평가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본문 44절부터 보십시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44a절)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4b절)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당연히 바리새인 남자가 아니라 이 여자입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5절)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의롭게 사는 남자가 아니라, 많은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56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남자와 죄인이라 불리던 여자 가운데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이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변하지 않는 기준입니다. 

우리 중에는 경건의 바른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거나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경건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다양한 봉사를 실천하기도 하고, 언제나 바르고 정직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을 경건하게 가꾸어가려는 노력은 너무도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평가함에 있어 ‘누가 더 의로운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욥을 고소했던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까닭없이 이유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비록 기도 응답이 더딜지라도, 바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의 복과 재물의 복과 자녀의 복을 잠시 가져가실 지라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욥이 그러했고, 신약시대에 본문이 묘사하는 죄 지은 여자가 그러했지요.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한결같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죄용서의 관계 

죄를 지은 여자는 비록 바리새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를 보시며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선포하시네요. 바로 여기에 사랑과 죄 용서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죄용서를 누리는 깊이는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시잖아요. 

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오천 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오백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지요. 그런데 오백만원을 빌려쓴 사람이든 오천만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낼 형편입니다. 그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천만원을 빌린 사람에게 그 오천만원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오백만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그 오백만원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명백합니다. 내가 죄를 적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나의 죄가 용서받았지만 그 은혜가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저 적당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태산보다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신 죄 용서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요? 본문의 여인처럼 뜨겁게 사랑합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47a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b절) 

자,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적당히, 그저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로만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왜 죄인이었던 그 여자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을까요? 이제 우리는 그 대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를 많이 지었던 그 여자는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여인의 마음에는 자신의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였기 때문이지요. 

사단은 여전히 우리를 고소합니다. “너희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건강을 빼앗아가셔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을 복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셔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이 제 아무리 강력할 지라도 우리는 사단의 모든 공격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까닭 없이, 심지어 우리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장 11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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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12. 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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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여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요.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은 낙관과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는 낙관을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0”에 가까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그 누구도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바로 이 소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낙관적 전망이 어려운 환경 (1-8절)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한 현실을 묘사합니다. 구약성경에 조금만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사무엘상 앞에 사사기와 룻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와 룻기가 그려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두운 사사시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던 혼돈의 시대였지요.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본문에서도 여전히 시대의 깊은 어두움이 계속되는 사사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이 그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3절) 

이 사람, 곧 엘가나가 매년 절기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던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엘가나의 믿음은 순수하고 아름답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올라가는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매우 악한 제사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장 12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실로에 올라가면 무엇합니까? 그곳에서 버젓이 제사장으로 있는 사람들은 행실이 나쁘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홉니와 비느하스였으니 무슨 내일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가능하겠어요? 

홉니와 비느하스만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감각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지요.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3절) 

민족의 최고 지도자라는 엘리는 그가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4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4장 18b절) 행실이 매우 나쁜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비대하여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실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시대이니, 여러분 과연 어디에서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묘사하는 한나 개인의 처지를 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불가능합니다. 한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불임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으셨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살았던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있고 없고는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 하나가 장수라면 또 하나는 바로 많은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유무는 당시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요소였지요. 그래서 본문은 한나의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지만 그것이 한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지요. 그러니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여인 한나에게는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합니다. 한나에게 내일에 대한 낙관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6a절)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본문 6절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막으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지금 현재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도 그리고 한나라는 한 여인의 인생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 곧 낙관이 불가능합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우리 주변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참 많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분들의 걱정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을 자세히 관찰해 볼 때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참 많이 들려옵니다. 코로나 이후에 급격히 감소한 예배 출석인원이나 교회의 재정이나, 고령화에 따른 교회학교의 붕괴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과연 지금의 한국 교회 안에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낙관의 이유가 조금이라도 내재되어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개인과 가정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지만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모든 긍정적인 낙관을 차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긍정적인 전망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소망과 기쁨 (9-18절) 

모든 낙관이 사라지고 절망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선물로 주시는 소망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본문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무엇하지요?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여인과 같이 자녀를 출산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옆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해 줍니다.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하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술에 취한 것으로 알았잖아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과 한나가 대화를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대화를 아무리 많이 읽어보아도 한나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엘리 제사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힌트가 하나도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한나의 기도는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혼자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 엘리는 한나가 어떠한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하는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그다음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한나의 대답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한나의 대답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볼까요? 한나가 “아멘”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축복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아멘”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마다 평강이 임하시고, 여러분이 어떠한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든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가 사실 여러분이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기도제목을 알려주신 분들의 기도 제목은 알지만, 더 많은 성도님들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제목은 제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엘리의 축복에 대해 한나가 “아멘”으로 반응했어요. 그러자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8절 말씀을 우리 함께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대해 “아멘”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근심빛이 사라졌어요. 아직 아이를 잉태한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를 낳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믿고 “아멘”으로 반응하자 그 마음에 소망이 생긴거에요.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잘 먹습니다. 평안히 잠듭니다. 다시는 얼굴에 근심 빛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한나의 삶은 그 이전 같았을까요? 브닌나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한나를 괴롭혔겠지요.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일어나기 전에는 브닌나의 괴롭힘에 마음이 요동하고 분노가 치밀어 일어나곤 했지요. 그런데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고 나니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더 이상 한나의 마음이 요동치 않게 되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한나의 품에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사무엘이라는 아들이 아닙니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소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다시 말씀드려 볼까요?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주어지는 재물도 성공도 기도의 응답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삶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없을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허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을 품으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손 안에 움켜잡은 것이 적을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은 천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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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23. 8. 2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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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왜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며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지만, 오늘 저는 이렇게 대답해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 곧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입니다. 이 두 가지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셔서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간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기와 물과 햇빛을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큰 재물을 얻게 하시고, 세상적인 명성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반 은총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구별 없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반면, 특별 은총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영혼의 구원이겠지요.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 등은 모두 신자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곧 특별 은총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교회라는 범위를 넘어 온 세상을 통치하시지요. 하나님은 교회의 영역을 뛰어넘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실 수도 있고 어느 개인에게 건강과 풍요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은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베풀기 원하시는 특별한 은총 - 곧 영혼의 구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의 기쁨,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풍성한 행복 – 은 지금도 우리가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이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에베소서는 성경전체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대한 정의가 등장하는 성경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마지막 절이 교회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엡 1:23).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정의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을 찬양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3절)

여기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늘의 축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가 바로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의 축복 One. “하나님의 선택” (4-6절)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4절) 

본문 4절 말씀에서 ‘선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네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지요. 표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내용이 본문 5절에도 반복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5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지요. 영국 복음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선언합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인생을 믿음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여 성도가 되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의지나 결단에 좌우된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믿음의 길에서 탈선하여 하늘의 신령한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의지와 나의 결단은 너무도 쉽게 변하기 때문이지요.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의지력이 강하고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기에 믿음의 시련과 유혹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는 위선자이거나 자신의 참모습을 전혀 알지 못하여 그 마음이 교만해진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폭로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마지막까지 신앙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복음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는 무수히 하나님의 손을 놓쳐버린다 해도, 세상의 유혹에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고 우리의 믿음이 수없이 흔들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손을 붙잡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부터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하늘의 축복 Two. “예수님의 속량” (7-12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첫번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주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이지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두 번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로 성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예수님의 속량’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7절) 

창세 전, 곧 세상을 창조하시기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하늘의 축복이었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예수님은 하늘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며 우리에게 속량, 곧 죄 용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 인간들이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우리가 살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운명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죄인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심판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의지도, 그러한 능력도, 그러한 가능성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선언 그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 3:23). 

바로 이때,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량, 곧 죄 용서의 은혜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속량의 사건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심으로 우리의 잘못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상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온전한 치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속량 곧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하늘의 축복 Three. “성령님의 보증” (13-14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속량, 곧 죄 용서의 위대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오늘도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우리의 마음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유혹도 많고 고통과 슬픔도 넘쳐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보증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13-14a절) 

본문 13절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인’은 도장을 말하지요. 중요한 문서나 계약서에 그 내용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도장을 찍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도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도장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정하여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도장,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모든 죄가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도장입니다. 본문 14절은 이것이 그 무엇으로도 의심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 된다고 말씀하시네요. 

여러분,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이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나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지금 당장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며 살아간다고 세상적인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서운 질병이 찾아올 수 있고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며 이 세상의 온갖 슬픔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인치심, 곧 성령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너는 천국의 시민이라고, 너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분명히 보장해 주시는 성령의 도장이 있잖아요. 지금도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가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장해 주시니, 우리는 어떠한 현실을 마주치든 바로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찬송하리로다”(3절) 바울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설명한 뒤에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6절 말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허락하신 예수님의 속량을 선포한 뒤에도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의 12절,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성령님의 보증을 말씀한 뒤에도 사도 바울의 입술에는 찬양이 터져나옵니다. 본문의 마지막 14절이지요.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아니 이 세상은 알 수도 없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오직 교회를 통해 베푸시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장소 역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힘겹고 고단할수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는 이 교회, 우리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바로 이 교회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근심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찬송가 438장 1절) 

바로 이 교회에서 하늘의 축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며 날마다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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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3. 7. 2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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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전국을 강타한 기록적인 호우로 우리나라는 50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는 2011년 서울 우면산에서 발생한 산사태 이후 호우로 인한 최대규모의 인명 피해였습니다. 특히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에서 14명이 사망한 사건은 전 국민을 큰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소연이 있습니다. 이번 피해는 단지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하소연입니다. 여러분, 천재는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앙입니다. 짧은 시간에 기록적인 강수량을 기록하다 보니 큰 홍수가 일어나고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번 재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집중호우라는 자연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해가 단지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매우 단순하지요. 비가 내리는 것,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한 것, 지진이나 가뭄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 인간에게도 재해의 큰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인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재앙, 곧 천재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재앙, 곧 인재가 되는 것은 단지 국가적 차원에서만 발생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기록적인 장맛비가 쏟아지듯, 우리의 삶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나 질병 등이 발생할 수 있지요. 태평양 바다에서 태풍이 만들어져 한반도를 강타하듯, 나는 성실하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요인으로부터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큰 충격을 받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쳐 나의 몸과 마음이 흠뻑 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인생의 비바람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우리의 가정에 태풍이 몰려오고 지진이 일어나 우리 가정이 크게 흔들린다 할지라도 날마다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낼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가르침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전하신 보배로운 말씀, 곧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애매한 것이 전혀 없고 모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앞에 두고 이것이 옳은 지 저것이 옳은 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지 저것이 하나님의 뜻인 지 고민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러한 애매한 지점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특별히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산상보훈의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너무도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러한 행동은 큰 죄악이 되겠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을 최대한 억눌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폭력을 가하지도 않았고 살인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나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다른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만 들어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욕하고 저주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게 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내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볼까요?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하였습니다. 나는 적법한 절차를 지켰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가정에서도 부모가 더 이상 자녀에게 무엇이 옳은 행동이고 무엇이 그른 행동인지 바르게 지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반듯한 언어와 바른 행동을 훈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잖아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성경 말씀에 따라 성도들에게 무엇이 바른 믿음의 행동인지 정확하게 선포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는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리 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주변 사람이 우리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바른 교훈을 분명히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기준으로 타협 없이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상보훈의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금까지 전하셨던 산상보훈의 말씀을 단지 듣는 데서 끝나지 말고 반드시 실천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건축자의 비유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4절)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등장하네요.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 곧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본문에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대비되는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26절)

예수님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교하며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강조점은 이 두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의 차이점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공통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두 사람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를 언급하시고는 곧이어 그들에게 집이 필요한 상황을 언급하십니다. 25절을 보시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27절도 동일합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러므로 본문이 묘사하는 집이란 날씨가 맑고 따뜻할 때가 아니라,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까지 심하게 부는 바로 그때 그 인생의 모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건축자만이 아니라, 어리석은 건축자도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씨가 아직 맑을 때 건축을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두 번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풍랑이 몰려오는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집을 건축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건축자를 묘사하는 24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지혜로운 건축자도 좋은 집을 짓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건축자를 설명하는 26절도 동일하게 시작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여기까지는 똑같습니다. 집을 짓는 행위,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행위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배에 참여하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라고,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고 유혹하지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말씀을 통해 무엇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진리의 길인지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를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집을 건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가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날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핵심 교훈이 무엇입니까?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 집을 짓는 모든 사람들은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를 준비할 생각조차 못하고 집을 건축하지 않았던 사람보다 훨씬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정반대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비바람을 대비하여 집을 지어도 그 건물이 모래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면, 그리하여 인생의 풍랑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질 건물이라면 그 사람의 운명은 전혀 집을 짓지 않았던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핵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평안할 때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지, 아니면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행하지 않았는지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어찌 따뜻한 햇빛이 비취는 봄날만 계속되겠습니까? 나의 삶에도, 우리 가정에도,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교회에도 비와 홍수와 바람의 한여름 장마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바로 그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그 모든 비바람을 넉넉히 이기는 것이요, 말씀을 들었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크게 무너지고 맙니다. 


산상보훈의 약속 

올해 여름 우리 나라에 발생한 집중호우와 그로 인한 많은 인명 피해로 전 국민이 크게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충청도와 전라북도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피해가 컸지요. 그런데 홍수와 재난의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였던 지난주, 전라북도의 군산이 새롭게 조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산에도 며칠사이에 평균 500mm를 넘어서는 엄청난 집중폭우가 쏟아졌는데 이것은 지난 60년 동안 가장 많은 강수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큰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군산에서는 단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재앙, 곧 천재가 발생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재앙, 곧 인재로 넘어가지 않았던 하나의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상치 못했던 고통과 시련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금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더라도 우리 가정에 찾아오는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비바람이 몰려와 기록적인 강수량을 기록하더라도 그 모든 위기를 이겨낼 수만 있다면, 성도 여러분, 그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약속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4절)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지혜로운 건축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25a절) 

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비가 내립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홍수가 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거친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맑은 날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었다고 홍수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거친 바람이 나를 피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좋든 싫든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거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순종하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쓰러지지 않습니다. 거친 비바람을 맞아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그 어떠한 고난도 반석 위에 지은 든든한 그 집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인생의 기초가 든든합니다. 신앙의 기초가 튼튼합니다. 그러니 그 모든 비바람도 그 사람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삶에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는지 아니면 한여름 장마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오늘도 내 귀에 들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한 말씀이라도 실천하십시오. 잠시 흔들릴 수 있는 있지만,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있다면, 그리하여 내 귀에 들리는 주님의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순종하며 실천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도 든든한 반석 위에 인생의 기초를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6절b "그리스도의 세계" 성경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천지장조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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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6. 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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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경제력을 평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지표는 GDP, 곧 국내총생산이지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의 역사도 국내총생산, 특별히 1인당 GDP가 얼마나 급성장하였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1953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6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이 되었어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254달러에 머물렀지요. 그런데 70년대부터 급격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1977년 드디어 1인당 GDP 1000달러가 넘어서더니, 불과 6년 뒤인 1983년에 2000달러를 넘어서고, 1990년에 들어서는 6000달러를 달성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지요. 1995년에는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하고, IMF 금융위기를 맞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에 2만 달러를 넘어, 현재는 1인당 GDP 3만 달러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GDP가 얼마나 급격히 성장했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재와 국민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현격하게 나아졌는지를 한눈에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지요. 어느 나라의 GDP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내총생산, 곧 GDP의 한계를 지적하는 주장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GDP 안에는 여가활동의 중요성이 외면된다거나,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봉사 활동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등의 한계점입니다. 그리고 GDP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행복지수’입니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부탄은 국내총생산이 매우 작지만 서구유럽의 부유한 국가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라는 사실에 세계인들이 주목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GDP로 나타낼 수 있는 국민총생산, 곧 한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얼마나 많이 소득을 올리는지가 HPI, 곧 국민총행복지수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어느 국가의 삶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GDP는 매우 중요한 지표이고, 국민총행복지수인 HPI 등의 여러 지수에 대해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GDP로 대표되는 생산능력, 곧 국민들의 소득이 반드시 국민들의 행복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전도서 6장도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소유, 곧 나의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것이 반드시 나의 삶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전 6:2)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전도서 6장 2절은 구체적인 목록이 제시되어 있지요. 곧, 재물과 부요와 존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그 사람은 모두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요? 그리고 전도자는 그 모든 축복의 출처가 어디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재물도 주시고, 부요도 주시고 존귀도 주신 인생, 곧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네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소유를 허락해 주셨지만, 한 가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여기에 두 가지 개념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첫번째 개념은 소유입니다. 그리고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두 번째 개념은 누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소유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네요. 우리의 삶 속에도 소유는 했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 있고 우리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그와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지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모두 소유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큰 질병을 맞이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로 단명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형편도 있잖아요.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나님께서 소유는 허락하셨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계속해서 전도자는 또 다른 예를 제시합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전 6:3) 

이번에는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풍성하게 받은 사람이 등장하네요.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매우 크고 귀한 축복으로 노래하거든요. 십계명에서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장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는 시편 127편은 자녀들을 ‘장사의 수중의 화살’로 비유하잖아요. 이렇듯 성경은 장수의 축복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3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백 명의 자녀를 낳고” - 물론 과장법입지요. 그러나 그만큼 많은 자녀를 낳고 -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반전이 있네요.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이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2절에서는 소유와 누림이라는 개념이 서로 대조적으로 등장했지요?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행복과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을지라도, 성도 여러분, 행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 결론입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여러분, 천년을 살면 뭐합니까?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면 뭐 합니까? 그렇게 장수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풍성한 축복을 받으면 무엇합니까?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전도자의 표현 그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아 소유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유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큰 축복과 큰 소유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만일 큰 축복을 받아 많은 것을 소유했더라도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 조금 작아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소유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부족해 보여도, 지금 나에게 주신 축복과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면서 지금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진정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유를 넘어 행복으로 

전도자는 소유와 그것을 누리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행복한 삶은 다를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지요. 그러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크든지 혹은 작든지 지금 내가 소유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반대로,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는 크든 작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펴본 전도서 6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우리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입니다. 전도서 6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지 못하도록 막으시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쩔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니 우리 인간은 거기에 대해 항의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나에게 있는 그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만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자가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비록 천년을 살아도, 심지어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헛된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소유를 늘리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동분서주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비결 하나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감사하는 인생이지요.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보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다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이들은 조금 풍족하게 살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조금 궁핍하게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떨치며 살아가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아가고 또 어떤 분들은 늘 병약한 육신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더 많은 축복을 소유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여러분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더 많은 축복,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살아가시겠습니까? 그 끝은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자가 분명히 가르쳐 주잖아요. 

물론,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풍족한 분들도 계시고 또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궁핍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신 분이 계시고 다른 사람들보다 허약하신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비록 소유가 적어도, 비록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적어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은 고사하고 앞으로 백 년도 살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오늘 하루 지금 나에게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며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이제 시작된 한 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 그것이 크고 풍성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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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23. 5. 3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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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흥분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데이빗 왓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 공동체에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부흥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성도들의 예배 출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의 종결을 사실상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는 코로나 이전의 출석인원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요. 이처럼 최근 몇년간 교회의 출석인원이 급격히 감소한 데는 코로나 팬데믹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데이빗 왓슨의 주장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우리 시대 교회가 더 이상 부흥하지 않는 이유도, 아니 우리 시대 교회가 오히려 쇠퇴하는 이유도 외부의 어떤 요소보다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삶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자꾸 쇠퇴한다고 눈에 보이는 출석 인원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 없음을 더욱 근심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 성도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사라진다면 
그 교회는 시간이 문제지 반드시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명목상의 제자

사도 바울의 3차전도여행을 묘사하는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초대교회에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명칭이었을 뿐 참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고 알려줍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a절) 

이때 그들의 대답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2b절)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령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답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니 당황스러운 상황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3a절) 

에베소에서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세례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그들이 받은 세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의 대답은 제자라는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3b절) 

여러분,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는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고, 요한의 사역 위에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나아가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 이미 수십 년 이전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세례 요한의 세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자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했고, 단 한 번도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 적도 없는 “이름뿐인 제자”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지금까지 성령 하나님께서 열두명의 사도와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펼치셨는지 웅장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지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그 자리에 있었던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체험하였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들, 일곱 분의 집사님들, 바울과 실라 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데 쓰임 받았던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사도행전은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지 약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니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그 초대교회 안에 이름뿐인 제자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일찍이 데이빗 왓슨이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제자도를 잃어버리면, 그리하여 복음의 능력도 모르고 성령의 역사도 체험하지 못한 이름뿐인 제자들 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인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교회의 조직이나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참된 제자도가 사라진 것이 문제입니다. 


두란노 학당

오순절에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로 시작된 초대교회였지만, 그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지나자 교회 안에는 이름뿐인 제자들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초대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의 역사를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이 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8절) 

바울이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해 가르쳤습니까? 바로 회당입니다. 사도행전을 처음부터 계속 읽어오면, 바울이 이미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여행에서 방문하는 지역의 회당을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그 마을에 세워진 회당에 매주 안식일마다 모였지요. 바울은 1차전도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3차 전도여행을 다니는 지금까지 회당을 전도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안식일이 사역의 중심이 되었고 유대인들이 주된 선교의 대상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9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네요. 9절을 계속 보십시오.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잖아요. 자, 지금까지 바울은 회당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도입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9b절)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던 바울이 이제는 두란논 서원에서 강론을 시작하네요. 우리말 성경에서 “서원”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콜레’인데 학교를 의미라는 School의 어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서원 혹은 학당 정도의 의미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자,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던 지금까지의 방식을 바꾸어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장소가 바뀌자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변화가 따라왔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회당은 사람들이 주로 안식일에 모이던 장소였지요. 그런데 두란노 서원을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니 - 9절의 뒷부분이 말씀하는 것처럼 “두란노 서원에서” 그다음입니다 - “날마다” 복음을 강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본문 9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복음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던 대상입니다. 9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니 어떤 사람들, 곧 회당에 참여하였던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였고 심지어 복음을 비방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그리고 본문 9절을 계속해서 무엇을 말씀하지요?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매일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두란노에서 말씀을 집중적으로, 매일 가르쳤던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주 안식일에 모이는 회당을 포기한 바울은 이제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매일, 곧 집중적으로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온전히 맡기는 참된 제자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바른 제자로 세우는 일에 바울은 자신의 남은 모든 사역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회당을 떠나 두란노에서 사역을 시작한 바울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0절) 

여러분, 이 말씀은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두란노 서원을 찾아와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 10절이 묘사하는 바는,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을 통해 그 제자들이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을 계속 읽다 보면 그 흔적이 여러 가지로 등장하는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골로새교회입니다. 신약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두란노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었던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지요(골 1:7).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지 약 20여년이 흐른 뒤,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초대교회에도 이름뿐인 제자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복음의 능력도, 성령의 역사도 조금씩 잃어버리기 시작했지요.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은 교회가 새롭게 복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비록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성장을 멈추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시대의 교회는 오히려 계속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록 겉모습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을지라도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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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5. 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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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상한 가치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을 더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정의, 사랑, 자유와 같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치보다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재물, 권세, 특권 등에 우리의 마음이 쉽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신앙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바라볼 때도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중요하게 고려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얼마나 화려한지 혹은 교인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등에 더 집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저 천국에 우리의 시민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손해를 감내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오늘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의 자세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절)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내리는 믿음의 정의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나의 삶에 성취된 것처럼 그 말씀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우리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어디 그뿐인가요?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근거로 여러분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들이 아무리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는 때로 질병으로 아파하고, 삶의 여러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나에게 지금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차이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무시해 버리기 일쑤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이 말씀하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바로 지금 하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바로 이곳에서 왕 같은 제사장답게 우리의 사명을 위해 묵묵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현실이 절망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능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 믿음은 마침내 보이지 않던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눈에 보이는 현실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 3절에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절)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본문 3절 하반절의 의미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어떻게 말씀하시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금 우리가 눈으로 분명히 보고 있는 것들이 과거에는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심지어 믿음이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다 보면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강조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구약성경의 수많은 예를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먼저 아브라함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을 주십니다. 너를 통해 큰 자손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땅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통해 바다의 모래와 같은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지금 아들 한 명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 좋은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한평생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믿음이 있기에, 그는 과거의 이름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갑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때가 이르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 주어지잖아요.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믿음의 역사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한 사람은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모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애굽, 이집트의 그 막강한 군사력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민족이었지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리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불가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애굽의 화려한 궁궐을 다 뒤로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자신의 삶을 바치잖아요. 마침내 세월이 흘러 모세의 마음에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가 되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은 내일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면, 오늘과 동일한 내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득한 새로운 내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기 때문이지요.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지금 나의 눈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귀에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약속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절망과 고통과 아픔뿐이라고 가슴 답답해하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의 비전으로 삼아 한 걸음씩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위해 나아가십시오. 바로 그것이 믿음이요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기에, 마침내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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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민수기 성경공부2023. 5. 3.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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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데스를 떠난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을 점령하면서 모압 평지에 진을 친다(1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에돔과 모압은 침략하지 않은 채 그들의 국경을 돌아 이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국경에 진을 친 것이 모압 왕 발락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 (7-14절)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사주하였다. 이에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의 장로들은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갔다(7절). 여기에서 복채라는 단어가 주목을 끈다. 발람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언하던 사람이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12절) 

하나님은 발람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청에 따르지 말고 그들이 보낸 사신들과 함께 동행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 (15-20절)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발락의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발락은 포기하지 않았고, 처음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낸다(15절). 발람은 그들의 청도 거절하지만(18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0절) 

본문을 읽으며 독자들은 어리둥절할지 모른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발람에게 발락의 사신들과 동행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떠날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발락의 청에 응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선지자 발람은 의인인가? 아니면 죄인인가?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를 읽어보면(민 22-24장),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선한 선지자처럼 보인다. 반면 성경의 다른 본문은 발람에 대해 돈에 미혹된 선지자로 묘사한다(cf. 민 31:8; 신 23:4-5; 벧후 2:15; 유 11; 계 2:14). 그러면 성경은 발람을 의인이라고 말씀하는가, 아니면 악인이라고 말씀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기억할 점이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그것이 거룩한 성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때로는 미래의 일을 알아맞추기도 한다(신 13:1-5). 하나님께서 사울을 패위 하기로 결정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예언했다(삼상 19:23-24). 가야바 제사장도 예수님의 죽음을 예언했다(요 11:51-52). 유대인 마술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다(행 19:13-16).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가득했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미성숙을 책망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셨다(마 7:21-23).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수기 본문 역시 발람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복채를 받고(민 22:7) 수시로 점술을 사용하는 사람(민 24:1)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달하는 그의 능력을 그 내면의 거룩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민수기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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