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선교2017. 1.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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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빌레몬서를 바울의 새가족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빌레몬서는 짧은 한 장의 편지이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의 새가족 사역이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동시에 빌레몬서에는 체계화된 어떤 조직이나 프로그램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이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교회에 새가족을 환대하는 어떤 조직이나 프로그램을 의도했다는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1] 그저 오네시모 한 사람을 환대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열정이 있었고, 오네시모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라는 빌레몬을 향한 간곡한 부탁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가 소개하는 새가족 사역의 주체는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라는 새가족 사역자다.


돌이켜보면 사도 바울은 불신자였으며, 복음을 적대하는 박해자였다. 바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가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다. 바로 그때 바울의 발걸음을 예수님께서 직접 막아 서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예수님은 복음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고통과 아픔을 읽으며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으로 묘사하셨고, 예수님의 따듯한 환대와 권면 속에서 바울은 박해자의 길에서 전도자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전도자가 되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회심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 장면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9:26) 복음은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교회에 정착할 수 없었던 바울의 모습은 이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옛 주인 빌레몬을 찾아갈 수 없는 오네시모의 모습과 흡사했다. 바울은 그때 예루살렘 교회의 새가족 환영회나 성경공부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바울의 새가족 사역자가 되기로 자처한 바나바를 통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정착할 수 있었고, 나아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cf. 9:27; 11:25-26). 바울이 새가족 사역자가 되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 훨씬 이전에, 바울은 바나바로부터 새가족 사역의 수혜를 받았으며 그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개인의 따뜻한 환대와 섬김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새가족 사역의 실체는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사역자와 새가족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실행되는 전도, 정착, 양육이 새가족 사역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가족 사역은 누가 만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으며 바나바와 같은 새가족 사역자의 도움을 받았던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위에 누군가의 따뜻한 환대를 받아보았던 사람들이 새가족 사역자로 세워질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새가족 사역은 실체를 갖게 된다.




[1] 빌레몬서에는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 전반에 대한 바울의 입장도 드러나지 않는다. 빌레몬서는 오직 오네시모 사람의 경우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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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