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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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능력, 곧 교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1장은 부활 이후 승천까지 예수께서 하셨던 두 가지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 첫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4)는 말씀이다. 또 하나의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정지해 있으라는 것과 나아가 선포하라는 것, 두 가지였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받은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또 ‘흩어져’ 전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시작되었다. 이 모임과 흩어짐의 연속이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교회의 시작이요, 교회의 역사이다. 교회는 이와 같이 모이는 힘과 흩어지는 힘, 곧 구심력과 원심력이 균형 있게 강화될 때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의 구심력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에 예배가 있다. 이미 앞장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예배를 언급했다. 예배는 참된 교회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흩어짐’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기독교 교육을 신앙공동체적 차원에서 이해한 기독교 교육학자 John H. Westerhoff Ⅲ는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1)

주일의 예전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인생의 이해와 선택된 삶의 방식을 그 자리에서 집약함으로 공동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포기는 신앙의 소실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다음 세대를 공동체의 모든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자로 들이며 끌어들이는 일이다.

물론 예배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필요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그리고 예배가 드려진다고 해서 그곳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일 수는 더더욱 없다. 크리스천들은 단지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희망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이 세상을 사랑했듯이 오늘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에 반하여 그의 사역에 뒤따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주장하실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교회를 포기할 수 없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크리스천으로서 예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교회의 구심력, 그 두 번째는 기독교교육이다. 예배가 동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을 다시 일이키는 힘이 된다면 기독교교육은 세대가 바뀌어도 교회의 신앙이 지속되는 능력이다. 이러한 기독교교육의 능력은 비단 언어로 전달되는 몇 가지 지식을 넘어 교회 공동체로서의 경험에서 나타난다. John H. Westerhoff Ⅲ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2)

우리는 타자와의 상호 관련된 활동을 통해서 신앙을 경험하고 표현한다. 신앙이라는 어휘의 의미는 그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해지는 언어와 함께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을 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며, 또한 그 사람들이 동일한 양식으로 그 신앙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신앙을 서로 나누며 또 응답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함께 서로 나누며 상호관련 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는 일이다. 크리스천 부모들의 책임은 자기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천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일이며, 또한 모든 크리스천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만드는 핵심에 예배가 있다면, 기독교교육에 있어서도 예배교육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예배의 장소, 시간, 복장 등의 비본질적 내용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 말씀에 응답하는 전 과정으로서의 예배를 교육해야 한다. 이 교육은 비단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습득된다. 다시 말해 유치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 아동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 중고등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가 곧 그 학생들의 이후 예배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의 능력은 모이는 힘, 곧 구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구심력을 원심력으로 바꿔내는 힘, 곧 ‘모임’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능력을 교회 밖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이끌어낼 때 나타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각각의 역할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4:11-12).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많은 윤리적 덕목들을 나열하고 있다( 4-6).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 된 풍조를 따라 살며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사람을 불러 그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그들을 모아 교회를 만드셨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매주 확인하는 크리스천들은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원심력으로서의 능력이다. 곧 크리스천 개인의 삶과 크리스천 공동체인 교회의 사회참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원심력이 약한 구심력도, 구심력 약한 원심력도 지속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이른바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급격한 교회의 성장, 곧 교회의 모이는 힘이 강해졌지만, 그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원심력은 현재 교회의 구심력까지 약화시키고 있다. 반면 한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의 교회들은 역사적 현실에 따라 교회의 원심력을 강화했지만 상대적으로 모이는 교회로서의 구심력은 약했다. 그 결과 그들이 말하는 원심력까지도 그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의 구심력으로서의 예배와 교회의 원심력으로서의 기독교 윤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영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D. Forrester의 설명을 들어보자.3)

기독교인들의 삶의 전부는 따로 나누어진 시간, 즉 예배의 시간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만약 예배와 기독교인의 삶 사이에 날카로운 분열이 생긴다면, 이것은 예배와 삶 모두를 왜곡하는 것이다. (중략) … 예배는 우리의 전 삶을 거룩하게 하고, 밝게 비출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빵 덩어밝게안에 있는 효모와 같으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교회를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정도로, 그래서 윤리적인 과제를 피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예배는 세상 안에서의 삶의 풍요함과 인간화를 위한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일 어떤 크리스천이 교회 밖에서 크리스천의 윤리적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의 교회 안에서의 예배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어떤 크리스천이 교회 안에서 진실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과연 그가 교회 밖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1. John H. Westerhoff , 정웅섭 역, 『교회의 신앙교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83, p. 108

2. Ibid., p. 163

3. D. Forrester, 김동선역, 『참된 교회와 윤리: 교회론과 윤리학에 대한 재고』,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p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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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