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신학적 교회론2018. 11. 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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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를 믿는가? 과연 교회는 신앙의 대상인가? 248년부터 258년까지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은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했다.[1] 종교개혁자 칼뱅은 키프리안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장차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어머니로서의 교회에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뱅은 이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2]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연합된 교회에 확실히 접붙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선택받은 무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장차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칼뱅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헌법은 교리편 제1부에 사도신경을 기록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에 따라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공회”, 곧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위에서 인용한 키프리안은 동일한 논리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교회란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감독이 있는 교회, 곧 정통 가톨릭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는 키프리안의 주장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감독의 지도를 받는 가톨릭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거부당한다. 종교개혁가들이 말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의 모임이지, 베드로의 사도성을 이어받은 감독들에 의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믿는다고 했을 때, 분명히 특정한 사람, 곧 감독 혹은 목회자의 지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 동일한 이유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교회가 정한 절차에 따라 기독교라는 종교단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만을 지칭하는 것일 뿐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여기에 제외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견적인 교회도 복음 아래 있는 보편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율법시대와 같이 한 민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하여 참종교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손들로서 구성된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권속이다. 이곳을 떠나서는 구원의 정상적 가능성은 없다. 이 교회를 통하여 사람은 보통 구원을 받으며 그것과의 결합은 그들의 최선의 성장과 봉사에 가장 요긴한 것이다.

 

다시 사도신경으로 돌아가자. 사도신경은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리고 둘째로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을 믿는다. 셋째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이로써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이 교회에 대한 신앙이다. 다시 말해 사도신경을 외우며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가 곧 성도의 교통, 죄사함과 부활 그리고 영생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믿는다. 여기서 교회는 비록 결점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불러주신 성도들의 모임, 곧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보이는 교회’이다. 물론 교회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잘못이나 오류가 전혀 없는 언제나 거룩한 곳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믿는 것은 죄인인 인간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임하듯,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사역을 교회를 통해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구원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시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을 전파하시려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도자는 아니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3]

 

나는 한분이신 성부 하나님과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분이신 성령을 믿기 때문에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한 교회를 믿는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죄 많고 연약하고 분열된 공동체 속에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공동체가 지닌 어떤 능력이나 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이 공동체를 그분의 선물을 전하는 자로 부르고 또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정의한다( 1:23).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충만이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기보다는 사단의 세력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2).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충만,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미 종결된 것이 아니다. 바울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 3:7-9).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그의 기도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에베소 교회의 충만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3:14-21).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란 하나님의 풍성함,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부어주시는 풍성한 구원의 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나타나는 곳이다.

 

“교회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일을 위해 나를 헌신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부탁한 기도제목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셔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복음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고, 이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 6:19-20) 이것이 “교회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교회를 믿는가? 그렇다면 바울과 같이 우리도 교회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교회를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이다.

 

 



[1] Cyprian, De Unitate, 『공교회의 단일성에 대하여』, p. 6, 재인용, E. G. Jay, 주재용 역,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1, 2.

[3]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서울: 복있는사람, 2012), 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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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