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2021. 12. 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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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지요.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서신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편지를 보낸 바울과 편지를 받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애틋하고 정서적으로 깊은 교류가 있었던 교회를 꼽으라면 빌립보 교회가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그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가 되었으니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소중한 교회이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많은 교회 가운데 빌립보 교회가 그의 마음에 특별하게 각인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다녔지요. 그때마다 바울을 물질로 도움을 주었던 교회는 오직 한 곳 빌립보교회였거든요. 바울은 기본적으로 자비량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 자신이 스스로 일하여 수업을 얻었고, 그것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진행하였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한 곳,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다른 선교지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에 빌립보 교회에 대한 더욱 깊은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서는 바울의 다른 어떤 서신들보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감정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 1장을 통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정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 두 가지는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곧 감사와 확신입니다.

 

 

바울의 감사

 

자, 첫번째로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은 감사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절)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그의 처지와 상황은 마냥 감사하고 마냥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얼마나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지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빌립보서에 따라다니는 별명이 있지요? 그것은 옥중서신이라는 명칭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가 있었던 곳은 감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이제 교회 안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바울이 참으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라면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화위복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왜 바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고통을 당하며 더 괴로운 현실에 빠지느냐고. 아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니 바울이 이처럼 감옥에 갇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 아니겠느냐고. 어쩐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던데 바울에게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바울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빌립보서를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이 편지 안에는 바울의 기쁨도 들어 있지만 바울의 슬픔, 곧 바울의 눈물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의 대목이 빌립보서 3장에 등장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기서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닙니다. 철저한 슬픔의 눈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8) 그러니 지금 바울의 처지는 마냥 기뻐하고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그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가득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감사, 그 실체가 본문 5절에 등장합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5절)

 

바울이 크게 기뻐하고 감사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복음에 참여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기쁨과 감사의 이유는 복음에 참여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표현하는 기쁨의 참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넘어 이제는 복음을 위한 일, 곧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참여하는 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도 큰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풍성한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있다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7절)

 

오늘도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 옛날 바울의 마음에 가득 찼던 그 기쁨과 그 감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상황을 보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할 때도 많지요. ‘내가 지금도 눈물로 말한다’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 우리도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놀라운 은혜만큼은 날마다 누리십시오. 나아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 감사와 그 은혜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기쁨과 감사의 샘물이 날마다 풍성히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확신

 

빌립보서 1장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울의 감정, 그 첫번째는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의 마음은 두 번째 감정인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절)

 

바로 앞의 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로 넘어오면 갑자기 주어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 6절에서 주어는 누구입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라고 되어 있네요. 이분이 누구이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장면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의 시간을 들여 봉사하였습니다. 내가 나의 물질을 들여 봉사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고, 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의 주체는 실상 누구라는 말씀일까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바울은 그 마음에 큰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의 이 확신은 사실 빌립보교회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통한 확신이었습니다. 자,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바울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라는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충돌이 일어나더니 결국에는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또한, 1차전도여행의 중심지였던 아시아 지역을 2차전도여행에서도 다시 방문하는 것이 바울의 처음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해서 바울이 가려고 하는 길이 계속 막히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고 묘사합니다(16:6-7). 그러니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처음에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빌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치며 주인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바라보며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오히려 선한 일을 한 바울을 고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빌립보 도시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하게 매질을 하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어디 그 뿐인지 아세요? 바울에게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었던 관리들이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한 행동으로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바울에게 제발 이 성 빌립보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쫓겨나듯 빌립보를 나와야 했어요. 여기까지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2차전도여행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 놀랍지요. 바울이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바로 그날 밤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쫓겨나듯 빌립보 성을 떠나왔지만 간수장과 그의 가족, 그리고 강가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었던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을 시작으로 빌립보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할 때 오직 그 빌립보 교회만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지원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은 분명히 깨달았지요. 빌립보에서 자신의 사역은 완벽한 실패였지만, 빌립보에서 자신의 사역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교회들 안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펼치고 계십니다. 코로나의 상황으로 한국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무엇보다 교회학교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의 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과 같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가 맞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확신만큼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우리는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확신이지요. 그리고 본문이 말씀하는 감사와 확신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거나, 바울과 같이 위대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본문이 이야기하는 감사와 확신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 가운데 그러한 감사와 확신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노래하는 바울의 감사와 확신은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인 바울 자신을 향한 감사와 확신이 아닙니다. 본문이 이야기하는 감사와 확신은 바울이 아닌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감사와 확신이었어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울을 따라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함께 김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행한 일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한 것뿐이에요.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자신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겠지요. 그들은 저 멀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리자, 있는 자리에서 바울을 위해 기도했겠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선교헌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통해 행하실 일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울과 같이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처럼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가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등의 고난을 감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로 동참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가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와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는 업을지라도 오늘 나의 삶을 통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확신이 가득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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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