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2021. 12. 1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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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기독교의 고전 가운데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었다고 알려진 책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지요.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해석자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해석자가 한 번은 크리스천을 매이 넓은 객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나도 지저분하고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는 방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 그 객실에 들어서자 옆에 있던 해석자가 하인을 불러 청소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방을 쓸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이 깨끗해지기는커녕 바닥에 가득했던 먼지가 일어나 크리스천은 거의 질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해석자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크리스천이 들어가 보았던 넓은 객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마음이지요. 객실에 먼지가 가득하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온갖 죄악과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마음이라는 넓은 방에 가득한 먼지와 더러운 것을 청소하기 위해 빗자루로 쓸어냈던 하인의 이름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빗자루질을 했습니다. 율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율법으로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금지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있던 죄악과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가득히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존 번연을 『천로역정』에서 묘사했던 것입니다. 


먼지가 가득한 마음

빌립보서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이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부르는 하나의 별칭이 ‘기쁨의 서신’입니다. 기쁨의 서신답게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바는 단지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의 삶에는 기쁜 일도 일어나지만 슬프고 짜증 나고 괴로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누군가를 향해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항상 기뻐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더 화를 내고 더 짜증을 내고 더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거든요. 마치 분노라는 먼저, 짜증이라는 먼저, 증오라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방을 깨끗이 하겠다고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는 율법이라는 여종의 행동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옆에서 권면한다고, 혹은 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조절해보겠다고 하여 생각처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계속 이어지는 본문 5절은 관용을 권면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본문 5절도 자세히 보시면 ‘모든’이라는 단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처럼, 본문 6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네요. 우리 주변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요. 작은 것 하나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보아도 지나치게 자신의 것만 챙기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도 우리의 마음이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요? 성경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명령하셨으니, 저 사람에게도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면 우리의 불편한 마음이 변하여 관용의 마음으로 바뀔까요?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천로역정』을 썼던 존 번연의 비유로 돌아가 보죠. 우리 마음에 이기심이라는 먼지가 가득하고 욕심이라는 먼지가 가득한데 그 마음을 깨끗이 치워보겠다고 아무리 비질을 하여도 욕심과 이기심의 마음이 먼지처럼 가득 일어날 뿐 나의 마음은 관용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기쁨과 관용의 비결

그러면 성도들에게 기쁨을 명령하고, 관용을 명령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다시 4절과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너무도 중요한 표현이 4절과 5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이 구절의 가장 처음 나오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면, 주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좋은 음식을 먹고 즐거운 활동을 할 때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 마음이 즐겁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재산이 들어나고 내가 소유한 것이 풍부해지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그러한 기쁨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반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으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재산이 허무하게 사라져 궁핍해지면 마음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그러한 모든 조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만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었는데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 안에서, 그도 그러한 주님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관용에 대해 권면하는 본문 5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고요?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뒤에 무엇이라고 덧붙입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근거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때, 내가 지금 아웅다웅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보일까요? 본문 5절에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말씀은 또 한편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시는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나의 삶에 펼치실 놀라운 역사가 찾아오게 될 것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조그마한 유익에 뭐 그리 집착할 이유가 있겠냐고요. 그러므로 본문 5절이 말씀하는 관용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펼치실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관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관용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보다는 짜증, 불평, 분노의 먼지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관용보다는 이기심, 탐욕, 욕심이라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기뻐하라, 관용을 알게하라는 명령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관용이 가득 차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힘을 써서 내 마음에 비질을 하게 되면 오히려 짜증, 불평, 분노의 먼지가 일어나게 돼요. 오히려 이기심, 탐욕, 욕심이라는 먼지가 내 마음을 더욱 채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의 마음을 기쁨과 관용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 평강

바울은 성도들이 그 마음에 품어야 하는 덕목을 두 가지 제시하였지요. 곧 기쁨과 관용입니다. 이제 본문 6절로 넘어오면 성도들이 그 마음에서 경계해야 하는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염려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절) 

여기에 기도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네요.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가 등장해요. “다만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다음,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구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먼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기 바라는 것, 곧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 6절이 기도에 대해 권면했다면, 바로 다음 절인 7절에는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 등장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겠지요. 실제로 본문 7절에는 기도의 응답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내가 원하는 바,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 

오늘 본문이 약속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화평이 기도 응답의 내용입니다. 7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응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베풀어 주시는 평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평강이야말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기도의 응답, 혹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평강”이 등장하는 장면을 복음서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거의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이제 유월절 식사를 마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시지만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신 것과 그들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어려운 질문으로 공격을 해와도 제자들은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 풍랑이 이는 바다를 항해해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 그들을 따라왔던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도 주님께서 다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제자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고통의 무게는 그만큼 크고 무거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남겨둔 채 그들을 떠나야 하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없이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약속을 한 가지 해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a)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율법이 우리의 마음을 강제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에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충만한 평강이 흘러넘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은 매울 넓은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도 지저분하고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율법이라는 하인이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방을 쓸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방은 깨끗해지기는커녕 바닥에 가득했던 먼지가 일어날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서 그 방에 물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 안에 가득했던 먼지가 가라앉았고 그 소녀는 방을 말끔히 청소할 수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방에 물을 뿌려 온갖 더러운 먼지를 말끔히 치워버린 소녀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변 사람에게 기쁨이나 관용과 같은 마음의 덕목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마음에 먼지만 일으킬 뿐이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쥐어짜서 기쁨이나 관용의 감정을 일으키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먼지만 일어납니다. 그 대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베풀어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은혜가 뿌려질 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은혜가 뿌려질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흘러 넘칠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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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