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9. 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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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교회의 지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농사를 짓는 그리스도인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교회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인 논에서도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제는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논에 물길을 내고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논에 나가보니, 누군가 자신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터트려 이 형제의 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논에 물이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분노가 있었지만, 이 형제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수로를 복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형제의 기도제목을 다 들은 어느 교회 지도자 한 분이 크리스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님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신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는 건 아닌지 기도해 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소.” 

이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로 제가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의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이 주변의 논에 흘러가도록 물길을 터놓았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워치만 니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형제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했다.”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25a절)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그러한 예수님을 좋아하여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주님 곁을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게 되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둘러보시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나요? 곧, 무리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큰 은혜를 받고 그 주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며 은혜의 말씀을 듣고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며 하루하루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곁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나의 시간을 바치고 나의 물질을 드리며 나의 정성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주변에 몰려있는 무리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첫번째 조건이 본문 26절에 등장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6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을 말씀하시는데, 본문 27절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먼저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향한 사랑이나 나 자신을 향한 애정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심지어 올바른 일이 아닌가요?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를 감내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 힘겹고 고단한 길을 비켜 지나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우리 모두에게는 가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수 있는 권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의 길을 돌아가며 회피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이 불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행동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의 말씀을 듣고 병을 치유받고 배가 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는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마땅한 권리, 그 자연스러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중국 교회의 어느 지도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일을 행하였다고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올바른 일을 넘어 더 위대한 일을 요구하십니다. 한마디로, 무리의 자리에서 벗어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자양교회를 세우신 월리스 앤더슨(Wallace J. Anderson)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그의 아내 릴리안 앤더슨(Lillian E. Anderson)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신은 아직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양화진에 묻혀 있지요. 자양교회에서 항존직으로  피택받아 훈련을 받으시는 분들은 다 함께 양화진을 방문하여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님의 묘역을 찾아가곤 합니다. 일반 성도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의 일꾼이 되는 항존직으로 선택을 받으면, 우리는 왜 양화진을 찾고 특별히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님의 묘역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지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머너먼 타지로 선교를 오셨고,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쳤던 분들의 ‘희생정신’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나아가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올해 항존직으로 피택되신 분들과 또다시 양화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날 함께 참여하셨던 어느 분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거나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신앙을 위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질문은 항존직으로 피택되어 교회의 일꾼이 되려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에게 던져진 질문이었고, 나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희생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나의 마땅한 권리와 나의 합당한 권한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올바른 일을 넘어 더 위대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주변에 모여있던 무리는 될 수 있을 지라도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비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치러야 하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동일한 주제를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8절) 

망대를 건축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재력이 공사를 모두 마칠 수 있는 정도인지 여부를 사전에 따져 보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만일 이러한 과정을 생략해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공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완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큰 손길이 그들에게 입혀질까요?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29-30절) 

자, 예수님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또 하나의 비유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전쟁을 결정하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1절) 

전쟁이라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만 의존할 수 없지요. 냉철하게 양국의 군사력을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군대를 우리의 군대가 이길 수 있는지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승산이 있을 때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이죠.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2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비유에는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마지막까지 승리하지 못하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망대를 세우기 위해 기초를 놓았습니다. 약 절반 정도의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자본이 없어 거기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약 절반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다고 그 사람에게 망대를 완공하였을 때와 비교하여 절반 정도의 유익이 돌아가나요? 아닙니다. 아무리 절반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더라도 완공하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들인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뿐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군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승기를 잡았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적군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면 그 임금에게는 전쟁을 수행한 유익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전쟁을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더 큰 피해가 그 나라와 그 왕에게 돌아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모든 소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끝까지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첫자리

오늘 본문은 모두 열 절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참으로 다양한 조건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나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 십자가의 길, 제자가 되기 위한 비용, 중도에 멈추었을 때의 위험성, 제자도를 미리 생각해볼 것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마음의 첫자리”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내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던 중국의 어느 그리스도인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농부의 논에 나누어주자,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못되어 주변의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는가?” 그러자 그 형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네.” 그러자 깜짝 놀란 농부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자네가 소작농이었나?.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자 그리스도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나의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네. 그분은 나에게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명령하셨다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라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가요? 혹, 입술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인 듯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께서 참으로 내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 주님께 내 마음의 첫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내 입술의 고백을 넘어 내 마음의 첫자리를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께 내어 드릴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된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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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