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18. 11.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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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이 지우는 짐을,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우는 짐을 지고 살아가지요. 가정에서 살림하시는 분들도 그 나름의 인생의 무게를 좁은 어깨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에는 너무도 젊고 어린 나이에 삶의 무게를 미리부터 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하는 약 60만 명의 학생들의 어깨에도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입시경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짐의 무게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학력고사의 상위권 학생들이 혼자서 교과서만 공부했다고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내신을 챙기기 위해 학원을 가야 하고, 생활기록부를 관리하기 위해 교내 활동도 해야 하며,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회에 참가하여 입상도 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수학능력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외국어 인증시험에 응시해서 등급도 받아내야 합니다. 그만큼 어린 학생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점차 많아지고 또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어린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의 현실을 보면 안타까움이 밀려오고, 많은 부모는 그들의 어깨에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지요. 마치 부모가 열심히 노력하면 자녀의 어깨에 실려 있는 무거운 짐의 일부라도 대신 질 수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어깨에 놓여 있는 짐은 그 누구도,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대신 질 수 없고 대신 지어서도 안 됩니다.

 

예레미야라는 구약성경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던 시절, 유대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이미 유다 영토를 침공하였고, 대부분의 성읍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유다를 다스리던 시드기야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에게 바벨론 군대는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들의 어깨를 억누르는 거대한 멍에로 작용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장면을 눈에 보이는 하나의 동작으로 표현하였는데, 나무로 만든 멍에를 자신의 어깨에 채워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유대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멍에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그의 어깨에 놓여있던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언하죠.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바벨론 군대를 물러가게 하실 것이다. 하나냐의 예언은 모든 백성에게 은혜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백성은 바벨론 군대가 하루빨리 물러가고 그들의 어깨를 억누르던 멍에가 하루빨리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모든 백성들의 소망을 담아서 하나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어깨에 있던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바로 그 일이 있은 직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렘 28:13b)

 

나무 멍에를 어깨에 매는 것이 싫다고 그것을 끊어버렸는데, 오히려 쇠로 만든 멍에를 어깨에 지우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어깨에 무거운 짐과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내 어깨에 있는 짐과 멍에를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지요. 할 수만 있다면 자녀들의 어깨에서 짐을 제거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의 어깨에 있는 나무 멍에를 벗어버리면 그 자리에 쇠로 만든 멍에가 지워진다는 사실, 어린 자녀들에게 수학능력시험은 거대한 멍에가 틀림없지만 이 과정을 넘어선다고 하여 그들의 어깨가 가벼워지고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많은 부모가 내 자녀는 고생을 안 하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요 또 그것이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도 아닙니다.[1]

 

예수님도 인생의 멍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예수님 역시 우리 어깨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자유로운 어깨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깨의 멍에를 내려놓는 방법이 아니라, 나의 어깨에 어떠한 멍에를 올려놓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멍에를 메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지어야 할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요, 곧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입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우리는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과 안식은 어깨의 모든 짐을 내려놓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멍에, 곧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로 말미암아 우리는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소에게 메운 멍에는 소 한 마리에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 – 곧 한 겨리 – 에 메우는 멍에입니다. 하나의 멍에를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지고 가는 형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하나의 멍에를 메었기에 예수님께서 가시면 우리도 가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멈추시면 우리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예수님의 발걸음과 엇박자가 되면 그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데 내가 멈춘다든지, 예수님께서 멈추셨는데 내가 가려고 하면 그 멍에만큼 무거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내가 그 발걸음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멍에는 너무도 쉬운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멍에를 벗어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어 예수님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쉼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먼저 부모인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과 함께 짊어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가 예수님과 발걸음을 맞추어 걷기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의 자녀들이 이 험하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멍에를 벗어버리려 하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워서 인생의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그 마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Cf. 조선미, “고통, 아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값진 선물”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 (서울: 북하우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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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