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0. 11. 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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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성경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봄철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맙니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의 육신에 힘이 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고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풀이 마르듯 젊음은 사라지고 건강했던 육신은 질병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더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의 육신도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성경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간이 더 흐르면 마침내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으니 주님의 말씀이요, 곧 세세토록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복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복음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날 다시 오시어 고인은 물론이요 유가족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유가족 여러분, 비록 고인의 육신이 마르고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지금의 장면으로 말미암아 큰 아픔과 괴로움이 엄습할지라도 세세토록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고인에게 영생을 선물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시어 고인과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비록 고인의 육신,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시간이 지나 한줌의 재로 돌아가겠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영원한 복음의 말씀과 같이 고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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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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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0. 11. 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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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13절)

여기에 등장하는 ‘자는 자들’은 곧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진리란 한번 태어난 인생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죽음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죽음을  경험하셨지만, 돌아가신 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넘어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당시에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의 내용, 곧  죽음의 원인과 죽음을 극복하는 복음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cf 살전  1:9-10).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우리처럼 복음의 내용을 알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마음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던  교회의 형제자매가 원치 않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그의 인생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큰 슬픔 속에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마치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cf. 살전 4:13b)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저 영원한 천국에 있다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같이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아픔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만 같은 큰 아픔이 찾아오면 우리의 신앙도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 오늘 나의 눈 앞에 펼쳐지는 희로애락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 곧 성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소망의 근거 – 예수님의 부활

죽음의 문제, 곧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인 죽음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이라는  뜻이지요. 네, 이것이 죽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떠한 대답도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존에 대해 성경이 내어놓는 모든 대답은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켜 주셔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도 믿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사도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삼켜진 성도들이라도 그 마음에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잠자는 성도들을 먼저 일으켜 주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당한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 공중에 올려진다는 이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이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나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b)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살아남은 성도들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과 마지막 죽음까지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과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 앞에  당한 고통과 아픔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인 죽음을 당한  성도들까지도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고 일으키신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먼저 앞세워 일으켜주시고 그들을 먼저  만나주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형통과 번영을 누리는 성도들만  보호하여 주시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는 여러분들은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과 같은 아픔을 겪는 순간이라도 소망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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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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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0. 10. 1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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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레미야 46장부터 시작된 이방민족에 대한 예언의 일부입니다. 46장 1절은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시작합니다. 이에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에 이르기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받았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예레미야 49장은 유대 민족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은 다메섹, 게달, 하솔 그리고 엘람에 대한 예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 46장부터 이어지는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과 큰 흐름이 동일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대 민족과 그 주변 나라들을 모두 심판하고 멸망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 

 

태초부터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바로 그와 같은 때였습니다. 과거에 애굽이라는 거대한 제국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앗수르라는 거대한 침략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새롭게 조성하시면서 바벨론이라는 신흥 강대국을 통해 가나안 땅을 포함한 모든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느냐고요? 무엇을 위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느냐고요? 무엇이 다른 나라가 아닌 바벨론을 선택하게 하셨느냐고요? 인간이 이와 같은 질문을 제 아무리 하나님께 던진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 답변을 하나님께 받아낼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역사는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도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여러 민족이 왜 멸망해야 하는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 우상을 숭배했다거나, 사회적으로 불의를 행했다거나, 개인적으로 음란의 죄를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가 본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본문에 등장하는 민족이 죄가 없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유무보다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그렇게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020년는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코로나 바이러스를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전 세계가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태를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역사의 큰 물줄기를 역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새로운 소망의 근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오리엔트 전체를 점령하도록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민족은 물론이요,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운명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23절에는 재앙의 소식을 듣고 그 마음이 평안이 사라지고 낙심이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메섹에 대한 말씀이라

하맛과 아르밧이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흉한 소문을 듣고 낙담함이니라

바닷가에서 비틀거리며 평안이 없도다 

 

바벨론 군대가 몰려오자 마음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나라마다 자신들의 강점으로 여기던 것들이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맙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을 꺾을 것이요 

 

엘람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았던 민족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엘람의 힘의 으뜸가는 활"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위기의 시대가 찾아오자 그들의 활은 엘람이라는 나라를 그 위기로부터 구해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대로 바벨론 군대가 몰려오는데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니 궁수부대를 이용해서 바벨론 군대를 막아보겠노라 달려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창이나 활은 잘 쏘지 못하니 과거에 위세를 떨치던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 군대를 막아보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물줄기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으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이든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이든 상관없이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저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기만 해야 할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섭리에 대한 교훈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력한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포기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9절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힌트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말일에 이르러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 당장은 엘람이든, 다메섹이든, 게달이든, 하솔이든 모두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민족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엘람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020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으니, 그 모든 아픔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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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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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0. 9. 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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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율법을 듣다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들 가운데 요시야 왕은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유명합니다. 요시야 왕은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여러 우상 신상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등 남유다에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약 10년의 세월이 흘러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지 18년 되던 해, 그의 종교개혁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던 중 제사장 힐기야가 하나의 책을 발견하였고, 그는 이 책이 모세의 율법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힐기야 제사장은 그 책을 궁궐의 높은 관료였던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하였는데 서기관 사반은 또 다시 그 책을 요시야 왕에게 가져가 그 책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율법책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 왕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왕하 22:11) 

여기에서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찢었다는 의미요, 곧 회개의 표현입니다. 요시야 왕은 그의 마음을 찢듯 그의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13) 

이때로부터 요시야 왕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종교개혁을 더욱 힘있게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야김, 예언을 듣다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남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직접 붓을 들고 기록한 것은 아니고, 선지자가 불러주는 예언의 말씀을 바룩이라는 분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습니다. 

바룩은 그 예언의 말씀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 백성에게 낭독하였습니다. 그 소식이 유대 나라의 고관들에게 들리자, 여러 고관들은 바룩을 불러 다시 한번 그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게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을 여호야김 왕에게 보고하였고, 여호야김 왕 앞에서 바룩이 기록한 예레미야의 말씀이 낭독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전해들인 여호야김의 반응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렘 36:22-23) 

성경은 계속해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여호야김 왕과 그 신하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렘 36:24)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께서 전하신 예언의 말씀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예언의 말씀, 곧 심판의 말씀은 모두 남유다의 현실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두 장면을 통해 너무도 분명한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그의 옷을 찢었다면 우리도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의 말씀을 따라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겼듯이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악을 내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들었다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을 지켜 행 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김 왕도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모세의 율법책이 있었고, 여호야김 왕에게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 적은 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낭독자입니다. 요시야 왕에게는 서기관 사반이 율법의 말씀을 읽어 주었고, 여호야김 왕에게는 여후디라는 사람이 예언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이나 여호야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방법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문자로 기록된 말씀을 보았고, 그 말씀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기록된 신구약성경이 있으며, 그 말씀을 낭독하고 풀어주는 설교가 있습니다. 비록 꿈이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성경과 성경을 낭독하고 풀어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호야김과 같이 나의 귀에 들려오는 말씀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마십시오. 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나의 귀에 들려온다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으로 받으시고 순종으로 반응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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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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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0. 9. 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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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12장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경주는 주로 육상 경기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귀한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것이요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자이기 때문이지요. 

신앙생활을 달리기 시합에 비유하는 것은 오늘 본문 외에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세월 믿음의 경주에 참여하며 힘써 달려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였든지 아니면 오랜 세월 믿음의 경주를 해오셨든지 상관없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신앙의 마지막 목표점에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바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그 다음 구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다짐은 오늘 우리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허다한 증인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 우리가 여전히 믿음의 경주에 힘쓸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허다한 증인’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기에 등장하는 허다한 증인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들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참으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몇 구절만 인용해볼까요? 

먼저 노아에 대한 서술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7) 

이제 아브라함에 대한 구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을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 11:8) 

이번에는 모세에 대한 구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을 지라도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경주를 계속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헌신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 전쟁의 위협, 재난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들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역경이 찾아와도 무릎 꿇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 성경은 이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을 믿음의 경주를 쉬게 만들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주변 환경에 두지 마시고, 여러분의 시선을 성경에 두어 성경이 기록한 성도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물로 주셨으니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새로운 힘을 얻으시고 새로운 용기를 얻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십시오. 성경의 말씀과 그곳에 기록된 믿음의 행적이 여러분의 삶도 믿음의 경주를 아름답게 완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믿음의 주님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두 번째는 ‘믿음의 주님’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주님이 계십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서 11장에는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 성경과 함께 신약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이 소개하는 신앙의 영웅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값진 보물이 담겨있으니 곧 우리 믿음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2절은 우리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수치,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의 아픔을 친히 받으셨지만 그 모든 것을 또한 친히 참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엇때문에 그 모든 아픔을 참으셨다고 말씀합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기쁨,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기쁨,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 기쁨을 위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처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우리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지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가장 중요한 세번째는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은혜가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본문 3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곳이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현장이요, 십자가는 인간이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현장이니, 바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이 자신을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난 우리에게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용서가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와도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진 복음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다시금 우리 주님께서 참고 인내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십자가에 담겨 있는 복음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복음의 은혜가 가득히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떠한 인생의 장애물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

설교를 시작하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믿음의 경주로 묘사하는 장면을 소개하여 드렸습니다. 빌립보서의 한 구절이었지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처럼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힘써 달렸던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유언과도 같은 서신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제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이 달려왔던 경주의 마지막 골인지점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우리도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작한 믿음의 경주를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비록 처지와 환경이 어려울 지라도,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이 어려울수록 더욱 힘을 내어 믿음의 경주에 매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허다한 증인이 있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주님이 계시며, 우리의 마음에는 복음의 은혜가 흘러넘치니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장애물들을 넉넉히 이겨내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이 행하는 믿음의 경주를 응원하고 계시며, 여러분이 모든 경주를 완주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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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Dr. Hanjin Lee 이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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