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 가운데 토마스 아 킴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에 대해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 단락에는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 성도들이 한 번쯤 귀를 기울여야 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그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1. 1, 3.
이처럼 토마스 아 킴퍼스는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과 함께 금식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탄하였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래전 토마스 아 킴퍼스가 지적한 그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천국은 좋아하고 위로도 좋아하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만찬 자리도 사모하지만, 그곳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는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이 오늘 우리의 마음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외면한 사람들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는 멀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만을 원했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그들의 행태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등장하네요. 육체의 모양은 겉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겉모습을 자꾸 꾸미려는 사람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자신을 뽐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여야 하는 교회에서 조차도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지요.
12절 말씀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 곧 자신의 겉모습으로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네요. 당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 사회에서는 별로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면 할례를 받는 것이 어디에서 자랑거리가 될까요? 교회죠. 교회 안에서만, 성도들 사이에서만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나는 정통 유대인이라고, 조상적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러니 갑자가 예수님을 믿어서 교회에 입교한 성도들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고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2절에 겉모습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 정작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나 십자가는 다 뒷전이고 자기 자신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기 자신이 칭찬을 받고 자기 자신이 박수를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킴퍼스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천국,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천국의 잔치는 좋아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사람들이지요.
십자가는 멀리하고 자신의 겉모습을 자랑하던 사람들, 곧 사도 바울이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점점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멀리하도록 부추기는데요. 본문 13절입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13a절)
당연하지요. 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강요합니까?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3b절)
자기 자신만 겉모습을 자랑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 시대에 할례를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언급하는 ‘육체의 모양’이 사회적 지위와 평판 등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면, 우리시대에도 교회 안에서 겉모습을 꾸며대며 다른 사람에게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지 않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겉모습을 자랑하도록 부추기는 사단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서,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감당하려는 성도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영광의 자리, 칭찬받는 자리, 박수받는 자리에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수치가 없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십자가
사도 바울의 시대, 곧 신약성경의 시대에도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뽐내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는 멀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지적하고 그들의 행동과 신앙을 정확히 꼬집었지요. 그러면 성도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따라야 하는 바른 신앙의 길은 무엇일까요? 본문 14절에 등장하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4절)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학력을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업적과 성과를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휘두르는 권세와 재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내게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이 선언이지요.
여기에 ‘자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말하면서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마음에 쏙 드는 새 옷을 구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지금 무엇이 가득 자리 잡고 있을까요? 새로 구입한 그 옷이지요.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옷을 입고 외출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그 옷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자랑은 무엇이 됩니까? 새로 산 옷이 되겠지요.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볼까요?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손자들이 시험에서든 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니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좋은 대학에 입학을 했거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기업에 입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자녀들과 손자들의 기쁜 소식으로 가득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지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자랑입니까? 그 자녀의 성공과 형통이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고 싶어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자랑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지요. 과연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득한 사람이지요. 그 마음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가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선언 그대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하는데요. 본문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5절)
사도 바울이 무엇을 선언합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용어로 말해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는지,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는지 직분을 받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서 십일조를 많이 드리는 사람인지 적게 드리는 사람인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15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 내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새로 지어진 피조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렇게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무엇보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 사람은 할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십일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직분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오직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강물과 같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목천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담대히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14a절)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세상 사람들은 서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경쟁하지요.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천국과 잔치와 위로는 좋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예수님과 함께 지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십자가 안에 사실은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 있는데요. 바로 그 비밀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6절)
본문 16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여기에서 ‘이 규례’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문맥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귀한 줄 깨달아 예수님의 십자가만 사랑하리라는 그러한 규례지요. 그러한 규례를 행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그러한 규례를 지키는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로 ‘평강’과 ‘긍휼’이네요.
먼저, 평강은 평화 혹은 화평을 말하지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세상의 자랑으로 자기 자신을 뽐내려고 하면 결국 그 안에는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랑을 다 뒤로하고 오직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샬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때 주어지는 첫번째 축복은 평강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이지요. 인간의 모든 부족함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경이 말하는 긍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는 언제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부정하고 겉모습을 자랑하라고 부축이지만, 그러한 삶에는 언제나 갈등만 있고 모든 것이 늘 부족합니다. 오히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나뉘었던 마음이 다시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을 넉넉히 채우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곧 주변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는 멀리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묵묵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평강도 주시고 긍휼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봉헌 찬양으로 부를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의 후렴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찬양의 후렴구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두 가지 믿음을 노래합니다. 먼저는 최후 승리를 얻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어 빛난 면류관을 받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최후 승리의 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빛난 면류관을 받는 그 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찬양의 후렴구는 또 하나의 진리도 노래하지요. 곧,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빛난 면류관을 받아쓰려면 험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씌워주시는 빛난 면류관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귀한 줄 알고,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최후 승리를 주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빛난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험한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끝까지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 모두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시고 부활의 빛난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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