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1. 2. 7. 20:47
반응형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 교사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참된 권위가 예수님께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도 고쳐주셨지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참된 권위를 가지고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시니 귀신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에게 참된 권위가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권위 있는 새 교훈”)


예수님께서 이처럼 참된 권위를 가지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뒤, 예수님은 곧 이어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지요.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축귀 사건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곧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에서 읽으면,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치유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가 겪고 있었던 문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아픔이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는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열병이라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던 것이지요. 또 하나의 대조점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사람은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사람의 성별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은 여러 언어들이 그런 것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에 성별 구분이 명확하거든요. 그래서 영어 성경만 보아도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귀신 들린 사람을 남성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한 사람은 시몬의 장모였으니 당연히 여자입니다. 이처럼,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축귀와 오늘 본문인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보면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 곧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에 사로잡혔던 사람도 치유하시고 열병 들린 사람, 곧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도 치유하시고 여자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의 결론으로 마가복음 1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마가복음 1장 34a절) 

여기에 각종 병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은 각종 병, 곧 육신의 아픔이든 마음의 상처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그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곧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많은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모든 질병은 다 치유받아도 내가 겪고 있는 이 아픔만큼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은 다 치유하셔도 나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드세요? 아닙니다. 각종 병으로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던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아픔도 넉넉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공적 장소에서 사적 장소로

귀신들린 남자를 고쳐주신 사건과 열병으로 앓아누웠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마가복음 1장 29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공적 활동이 행해지는 회당에서 개인의 공간인 가정으로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되어있으니, 한 형제였던 시몬과 안드레는 이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그들만의 사적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본문 29절은 예수님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가버나움 회당이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셨던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도 병자를 고치며 말씀을 가르치셨겠지요. 그러나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나의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 사이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친밀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회당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있겠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그들이 주님과 나누었을 그날의 식탁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신 그 식탁에는 시몬과 안드레가 주님을 마주 보았고 그 곁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겠지요. 그렇게 네다섯 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친밀함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회당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 것보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함께 둘러앉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친밀함을 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이 생전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었던 자신의 아들과 나누었던 편지가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는데 책의 제목이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한번은 멀리 이사를 가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는 성도를 유진 피터슨이 상담했나 봅니다. 유진 피터슨이 여러 가지로 권유했음에도 그들은 무조건 큰 교회, 잘 짜인 교회 프로그램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유진 피터슨이 평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한 문장만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는 아마 절대 갖지 못할 것이다.”(p. 133) 이 문장에서 제 마음에 참 오래 각인되어 있는 표현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 성도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목회자’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한편, 목회자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성도’들과 친밀히 교제하며 목양하는 일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래서 이 축복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던 유진 피터슨은 규모가 큰 교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장점들을 다 포기하더라도 이 ‘친밀함’만큼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값진 보물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회당에서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돼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지금도 나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회당에서만 예수님을 만났던 무리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아시는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오는 용기

예수님은 회당을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들의 집에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 있는지라 (마가복음 1장 30a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온몸에 열이 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현대의 의학적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체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증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의학 지식이 없었기에 열이 나는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와 같은 모든 증상을 그저 열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열제나 항생제가 있을 리 없으니 열이 펄펄 끓어오르면 그 원인도 모른 채 그 큰 괴로움이 다행히 모두 지나가기까지 그저 견디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우리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증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너무도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사적인 장소인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회당에서는 불가능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나누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에 모시니 예수님의 눈에 열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식구가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사적인 장소, 나의 가정으로 모시며, 그분과 친밀함을 나누려 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 가정의 가장 연약한 장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예수님께 보여드릴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자,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목격하는 것은 별로 불편한 일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하였지만, 회당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일은 놀라운 일, 깜짝 놀랄 일은 되어도 나의 문제나 우리 가정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집으로,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삶의 공간으로 모셔들이면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어요. 나의 치부가 드러납니다. 나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마침내 나의 죄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주님께 드러내지 않으면 주님을 나의 개인 공간에 모실 수도 없고,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원한다면 우리 가정에 병자가 있어도, 나에게 큰 문제 거리가 있어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심각한 죄악이 도사리고 있어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 나의 문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죄에 대해 예수님께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마가복음 1장 30절)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상황 파악을 하셨겠지요. 모르실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을 주목해보세요. 사람들이, 곧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그 여자에 대해 곧 예수님께 다 아룁니다.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가정으로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아픈 상처가 있으시나요?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로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여러분의 과거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여러분의 영혼을 옥죄어 오는 습관적인 죄악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바로 그 자리에 모셔들이고 주님께 여쭈십시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깊은 내면의 모습과 우리 가정의 오랜 상처를 주님께 내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예수님을 여러분의 사적인 공간으로,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모실 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치유의 역사는 단지 회당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분 인생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가정

시몬과 그 주변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열병으로 앓아 누운 여인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녀를 치유해 주십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마가복음 1장 31a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모셔들이며 예수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입니다. 본문 31절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1장 31b절)

그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선 정도가 아니라, 온몸에 활력이 넘쳐서 자신의 역할을 힘 있게 감당하고 손님을 즐겁게 접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서술은 단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육신을 완벽하게 치유하셨다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결혼을 했어요.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아내도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가정을 돌보기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늘 동행해야 해요. 만일 시몬이 식구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식구들이 시몬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사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사건 외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하고 지원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아요.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그의 가정은 완벽하지 않았지요.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도 있었지요.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장소까지 모셔들였고, 그 가정의 가장 아픈 부위를 주님께 아뢰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회당을 나와 여러분의 가정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회당이라면 예수님께서 언제든 들어가 가르치실 수 있지만,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초대하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해야 우리 주님께서 들어가실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 우리 가정에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지요. 우리의 마음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죄악이 있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가정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시고, 
예수님께서 여러분 영혼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죄악을 치유하시며 
예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은 
주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축복의 가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설교문2021. 1. 31. 16:46
반응형

기독교 심리학자였던 잭 볼스윅(Jack Balswick)은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위의 세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가정의 모습이지요. 가정의 모든 일은 아버지가 결정하고 그 외의 식구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을 강요받습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말하는 첫 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의 형태로 권위가 부재한 가정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상실하였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가정은 혼란스럽고 때로는 서로 갈등합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가정의 형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인데, 가정의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지면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자,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정, 권위를 잃어버린 현대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적인 가정.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권위 있는 새 교훈

오늘 본문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행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르치시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마가복음 1장 21절) 그러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귄위있는 자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장 22절) 

그날 회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이 두 가지였다고 말씀드렸죠. 첫 번째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두 번째 일, 곧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 이후에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장 27절)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랍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권위 있는 새 교훈에 귀신들도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이 목격하고 체험하였던 예수님의 권위,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권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뭇사람이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어서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율법 교사, 서기관, 랍비 등 율법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권위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 “위대한 랍비가 말하기를 ….”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없기에 모세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를 인용할 필요가 없고, 위대한 랍비를 인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그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안에는 인간들이 소유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7절도 다시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이야기합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그다음에 등장합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당시 예수님 외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이른바 축귀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귀신들을 결박할 권위가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물도 바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면서 뭔가 요란하게 행위를 해도 그들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위가 없으니 오랜 시간 귀신과 씨름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바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던 예수님의 모습에는 권위가 있었어요. 제물, 주문, 특별한 도구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귀신하고 무슨 거래를 하는 것처럼 밀고 땅기는 일 없어요. 예수님은 그저 권위를 가지고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마가복음 1장 25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니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면 귀신은 나가야 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이 권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 권위는 어떠한 인간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만이 가지신 고유한 권위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저와 같은 설교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어요. 그래서 말할 때마다 ‘성경이 말하기를…,’ ‘본문이 말하기를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하고 성경을 인용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모든 인간 설교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몸과 마음과 영혼에 큰 질병이 들어 괴로워하는 분들을 위해 우리가 서로 기도할 때도,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권위가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권위가 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그 교훈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온전한 권위와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지난주부터 우리는 주일5부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매주 주일5부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저에게 여러 가지 걱정이 찾아왔어요. 물론 매주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주일 5부예배가 이제 막 신설된 예배이기에 아직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아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찬양대나 찬양팀도 없고요, 별도의 예배인도자도 없어요. 봉헌위원도 지금은 전도사님들이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장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최대한 위축되어 있는 코로나의 제3차 대유행 중에 새롭게 시작된 예배이므로 성도님들이 얼마나 참여하실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가장 켰습니다. 이렇게 주일5부예배에 대해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어요. 찬양팀, 찬양대, 안내위원과 봉헌위원을 비롯한 예배 스텝, 그리고 그 무엇보다 온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회중들이 다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그 안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 예배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버나움 회당에는 예수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여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기 이전에도 매주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했어요.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가버나움 회당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매주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일5부예배를 준비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준비하여 갖춰놓더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모든 준비는 허사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일5부예배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진정으로 걱정하고 근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제 막 신설되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여러 요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들만 열심히 준비하다 정작 모든 권위와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데 실패할 위험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건강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재물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성공의 기회를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가버나움의 회당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전에 수많은 안식일을 보내며 그곳에서는 회당 예배가 시행되었습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회당장과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지요. 마을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어김없이 회당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도,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도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안식일이나 그 바로 전주의 안식일이나 가버나움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가르치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가버나움 회당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치유를 얻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에 전파되면서(마가복음 1장 28절) 가버나움 동네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면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가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막 신설된 주일5부예배가 이러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찬양대요? 찬양팀이요? 예배 스텝이요? 더 많은 참석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시작된 주일5부예배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시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 시간과 이 장소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행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며, 모든 아픔을 고치시며,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자리에 펼치질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으로 가정 내에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형태를 말하죠.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가정으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 가지 유형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 먼저 첫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아버지에게 모든 권위가 부여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해보면 어떤 힘 있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양도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죠.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참된 권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노래하잖아요(시편 146편 2절). 

권위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던 가정의 유형, 그 두번째는 가정 내의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현대적 가정이었지요.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면 그 누구에게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요. 이러한 삶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에게 모든 권위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권위도 없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세도 없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에게 실망해 보아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구분할 때, 마지막 유형은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두는 성경적인 가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유형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은 나 자신에게도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참된 권위와 권세가 있음을 알기에 그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삶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삶의 작은 성취도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의 권위 아래 위치시키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에 역사하시니,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는 참된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참된 권세가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오직 주님의 권위 아래에 두십시오. 
그 옛날 가버나움의 회당을 찾아가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던 주님께서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찾아와주시고,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셔서 
여러분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설교문2021. 1. 24. 19:11
반응형

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흥분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데이빗 왓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교회 공동체에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우리 교회를 비롯하여 이 땅의 교회는 예배당을 교인들에게 개방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가 종결된 후에도 성도들이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교회의 출석인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아우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는데, 코로나로 말미암아 더욱더 성도들의 예배 출석이 크게 위축되면서 이러한 걱정은 이제 더 큰 위기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우리 시대 교회가 더 이상 부흥하지 않는 이유도, 우리 시대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삶을 바르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자꾸 쇠퇴한다고 눈에 보이는 출석 인원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 없음을 더욱 근심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변함없는 일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가복음 1장 16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마가복음 1장 19절)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며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조금 더 걸어가시니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신 장면은 당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어부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부라는 직업은 몇 세대를 이어 가업이 되었죠. 그래서 본문에는 서로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래,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어부의 일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으니 그들 모두는 어부를 가업으로 잇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해변에서 함께 살아가던 여러 이웃과 마찬가지로, 어부라는 가업을 이으며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매우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장 5절). 지금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참 성실한 사람들이죠. 네, 그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업을 잇는 것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갈지라도 그들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사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로 열심히 사는 것에 만족하는 듯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여 아직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수 없었던 갈릴리 어부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밤을 새워서 열심히 그물을 던집니다. 성실하지요. 날이 새어 그물을 깁으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그의 가족들이 바라볼 때 든든한 아버지, 듬직한 남편,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어요. 거기에는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제자도가 없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러한 열정과 성실함 속에도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참된 제자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밤을 새우면서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마가복음 1장 17-18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가복음 1장 20절) 

예수님께서 지켜 보셨던 장면, 곧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거나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모습은 당시 갈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구절은 당시 갈릴리 해변은 물론이고 유대 나라 전체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당시 스승으로 불리던 많은 랍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제자를 직접 찾아가서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은 엘리트들이 아니 모여있는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의 어부들을 스승이 직접 찾아가 제자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직접 갈릴리의 어부를 찾아가 그들을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러분,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찾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셔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찾아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다가 우리의 인생을 허무로 끝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찾아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시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셨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75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 열방을 축복하는 복의 통로로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비로소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세상을 축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나이 80세에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삶을 부러워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었을 뿐,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40년의 세월도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주시지 않으니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40년의 세월이나,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생활하였던 40년의 세월은 겉모습은 너무도 다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두 번이나 보내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가 그를 부르시잖아요.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이 모세의 삶을 압도한 뒤에야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아브라함은 75년의 세월을 살았고, 모세는 80년의 세월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새롭게 맞이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일상을 뚫고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는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연수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셔서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어부였던 그들이 그물을 버렸습니다. 품꾼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시한 비전, 곧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소망만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겠지요.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계속 읽어보면 그들의 모습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마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씨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마가복음 4장 11절) 

무슨 뜻입니까? 외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풍성해 깨달아야 마땅해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열심히 비유로 말씀해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세요.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마가복음 4장 13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면 뭐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들에게 떠 먹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요. 

그뿐이 아닙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 사건이지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cf. 마가복음 8장 1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었어요. 바로 얼마 전에 오병이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번에도 음식을 먹여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신앙의 건망증이 걸린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마가복음 8장 4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해주셔도 이해하지 못해요. 예수님께서 위대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그 기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거 동락하였지만 예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계획도, 예수님의 구원 사역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의 세월을 보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지 못했던 결정적인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라고, 그러나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시잖아요. 예수님을 향해서 항변하면서 말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라니요,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셔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바로 그 순간,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립니다. 마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0절) 

이 짧은 한 문장에서 ‘제자들’라는 단어,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다’라는 한글자 단어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것이 단지 저 한 사람만은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물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품꾼들도 버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자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걸어가시는 그 중요한 순간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렸고 제자들은 다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가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제자들의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넘어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약속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너무도 많이 실패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주님을 떠나가셨습니까? 그리하여 다시금 나 자신만을 위하고, 우리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이십시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비록 실패하였고, 비록 낙심하였고, 비록 주저앉아 있었을 지라도 
다시금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일어서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을 
세상을 축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설교문2020. 11. 6. 14:51
반응형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성경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봄철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맙니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의 육신에 힘이 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고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풀이 마르듯 젊음은 사라지고 건강했던 육신은 질병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더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의 육신도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성경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간이 더 흐르면 마침내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으니 주님의 말씀이요, 곧 세세토록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복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복음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날 다시 오시어 고인은 물론이요 유가족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유가족 여러분, 비록 고인의 육신이 마르고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지금의 장면으로 말미암아 큰 아픔과 괴로움이 엄습할지라도 세세토록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고인에게 영생을 선물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시어 고인과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비록 고인의 육신,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시간이 지나 한줌의 재로 돌아가겠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영원한 복음의 말씀과 같이 고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설교문2020. 11. 5. 17:23
반응형

죽음의 문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13절)

여기에 등장하는 ‘자는 자들’은 곧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진리란 한번 태어난 인생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죽음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죽음을  경험하셨지만, 돌아가신 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넘어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당시에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의 내용, 곧  죽음의 원인과 죽음을 극복하는 복음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cf 살전  1:9-10).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우리처럼 복음의 내용을 알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마음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던  교회의 형제자매가 원치 않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그의 인생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큰 슬픔 속에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마치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cf. 살전 4:13b)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저 영원한 천국에 있다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같이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아픔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만 같은 큰 아픔이 찾아오면 우리의 신앙도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 오늘 나의 눈 앞에 펼쳐지는 희로애락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 곧 성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소망의 근거 – 예수님의 부활

죽음의 문제, 곧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인 죽음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이라는  뜻이지요. 네, 이것이 죽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떠한 대답도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존에 대해 성경이 내어놓는 모든 대답은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켜 주셔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도 믿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사도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삼켜진 성도들이라도 그 마음에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잠자는 성도들을 먼저 일으켜 주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당한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 공중에 올려진다는 이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이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나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b)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살아남은 성도들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과 마지막 죽음까지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과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 앞에  당한 고통과 아픔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인 죽음을 당한  성도들까지도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고 일으키신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먼저 앞세워 일으켜주시고 그들을 먼저  만나주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형통과 번영을 누리는 성도들만  보호하여 주시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는 여러분들은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과 같은 아픔을 겪는 순간이라도 소망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