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3장과 14장은 제사장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역할 하나를 소개해줍니다. 곧, 나병 환자를 진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암’이라는 병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건강검진 결과 몸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사람 마음이 걱정부터 앞서지요. 정밀검사,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죽음을 생각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처럼 절망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에는 암이 무서운 질병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암은 그렇게 두려운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암세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나병이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습니다. 나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의학 지식이 전무했던 그때에 나병은 민족이나 종교를 초월하여 신의 진노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두려웠던 질병이 나병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몸에 나병으로 의심이 가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수군거리며 그를 멀리했습니다.
제사장의 진찰
바로 그러한 시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레위기 13장 2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사람들이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 사회에서 나병이 가장 무서운 질병이고, 전염되는 질병이고, 신의 저주를 받은 질병이기에 나병 환자는 격리하고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만큼은 그 처리 방식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 백성의 최고 어른인 제사장이 그 환자를 직접 보고, 그 환자를 직접 진찰합니다. 진찰하려면 가장 증상이 심한 부위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가까이 봐야 하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필요에 따라서는 환처를 잘 관찰하기 위해 손으로 만져봐야 되잖아요. 율법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을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직접 하게 되어 있어요.
어디 그 뿐인지 아세요? 레위기 13장에 의하면 제사장이 환처를 주의 깁게 관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병인지, 나병이 아닌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칠일 후에 그 사람을 다시 진찰하게 되어 있어요. 4절을 보십시오.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피부가 우묵하고 그 털이 흰색이면 나병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환자는 증상은 나병과 비슷한데 피부가 우묵하지도 않고 털도 흰색이 아니어서 좀 애매한 상황인 거에요.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계속 보십시오.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 둘 것이며” 7일 동안 입원입니다. 그렇게 7일을 입원시킨 뒤에, 5절로 이어지지요.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 지니” 곧, 두번째 진찰을 합니다. 두번째 진찰을 했을 때 결과가 나오면 거기에서 끝입니다. 그런데 5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곧, 여전히 불문명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 둘 것이며” 입원이 일주일 연장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주를 입원한 환자를 제사장이 또 찾아갑니다. 6절입니다.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러면 이 사람은 제사장이 몇번째 진찰하는 것이죠? 세번째 진찰입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한다고요?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직접 합니다.
모든 사람이 멀리하고 싶어하는 나병환자, 혹은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환자를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진찰합니다. 한번 해서 안되면 두 번 하고, 두 번 해서 안되면 세번 진찰합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환자를 직접 만나 진찰하라고 율법으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제사장이 환자를 만나 병의 경과를 보고 진찰만 하라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나병이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환자를 제사장이 직접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따스하게 보살펴주기를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신 것은 아닐까요?
모세가 활동하던 시대, 곧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이 아니라면 과연 어느 사회에서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나병환자를 찾아가겠습니까? 과연 어느 사회가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직접 나병환자를 진찰하고 환처를 살펴보겠나고요. 그러나 레위기가 꿈꾸며 바라던 사회는 바로 이런 사회입니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요, 모든 백성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제사장이 당시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생각했던 나병환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가며 진찰하는 사회. 한 번으로 안되면 두번 만나고, 두번으로 안되면 세번 만나서 진찰하고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회. 바로 그러한 사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요, 레위기를 비롯하여 모세의 율법이 추구하였던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Purity and Impurity
제사장이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환자를 진찰하면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첫째는 나병이 아닌 경우입니다. 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지금 이 환자는 증상이 있어서 제사장에게 온 사람입니다. 아무런 증상도 없이 건강했다면 제사장을 만날 이유도 없었겠지요. 몸에 여러 가지 증상이 있었고 그 증상은 당시의 최고로 무서운 질병이었던 나병으로 의심이 되는 증상이었어요. 자신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가족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등장하는 사람은 실제로 나병이 아니라, 그저 피부병 환자거든요. 피부병으로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난 거지 그 무서운 나병은 아니라고요. 바로 이때 제사장이 직접 율법을 기준으로 진찰합니다. 한번으로 정확히 진찰 할 수 없어, 두번하고, 세번합니다. 그렇게 정성으로, 최선으로 진찰하여 이 사람은 나병이 아니라고 선언하면 그 사람도 억울하게 나병환자 취급을 받지 않아도 되고 주변 사람도 그를 더 이상 외면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레위기의 율법입니다.
제사장이 진찰하여 내리는 두번째 결론은 환자가 나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환자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사장이 정확한 진단을 통해 환자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 환자는 진영 밖에서 혼자 살게 됩니다. 레위기 13장 45절과 46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던 나병 환자를 격리하도록 규정을 정하시지만, 격리 자체가 최종 목표는 아니었습니다.[1] 레위기 13장이 나병을 진찰하는 규정이라면, 레위기 14장은 나병으로부터 깨끗이 치유된 사람이 이스라엘의 공동체로 복귀하는 과정을 서술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4장 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자, 나병이 치유된 사람 –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병의 증상이 사라진 사람, 그래서 자신이 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 을 누구에게 데려갑니까? 또 다시 제사장에게 데려갑니다. 나병과 관련하여 모든 일은 결국 제사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나병환자를 진찰하는 일은 누구의 역할이지요? 여기서도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스쳐지나가서는 안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진영에서 나가”입니다. 나병환자로 판명이 나면 그 사람은 진영 밖에서 혼자 살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 중에서 내가 몸이 나았다고, 나에게 증상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실제로 치유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찰하기 위해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서 나병환자를 찾아다니며 진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말로, “왕진”이지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나병 환자가 한 두 명이겠어요? 진영 밖에 살면서 자신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제사장은 이곳과 저곳을 계속해서 돌아다니면서 왕진하는 거에요. 고대사회이니 나병환자를 격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백성의 최고 지도자인 제사장이 그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다니며 돌아보는 제도를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된 환자는 언제든지 제사 절차를 통해 이스라엘의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율법에 근거하여 정확히 진찰하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제사를 통해 공식화하니 환자의 주변 사람들, 가족과 친구들이 그 사람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바로 이것이 레위기가 꿈꾸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었습니다. 너무도 멋진 공동체 아닌가요?
의학 지식이 발전하고, 인권에 대한 개념이 강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가장 비참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을 민족의 최고 지도자들이 정기적으로 찾아가 진찰하고 돌아보는 사회는 없습니다. 하물며 모세가 활동하던 고대 사회에서 신의 저주로만 여겨졌던 나병환자를 제사장들이 지속적으로 진찰하며 돌아보고, 억울하게 나병환자로 간주되는 사람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고 나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언제라도 백성의 일원으로 다시금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와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
레위기를 중심으로 한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제사장이 직접 진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다루는 일에는 제사장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역할은 진찰이지 치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진찰하라는 명령만 주어지지, 치료하라는 명령은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레위기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곤든 웬함 박사는 레위기 14장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14장에 묘사된 절차는 치료 절차가 아니라 의식 절차다. 제사장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 제사장은 그를 치료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축사와 마술을 도구로 사용한 이웃 민족들과 달랐다. 이스라엘에서 사람은 의심스러운 민간요법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도움을 기도로 구해야 했다.”
많은 민족들은 나병을 비롯하여 치명적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마술이나 축사나 어떤 신비한 절차를 통해서 병을 치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모든 시도를 배제했어요. 어차피 근대적 의미의 의료시설은 전무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레위기를 비롯한 율법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치료의 영역은 인간이 손을 대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제 아무리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진찰만하고 환자들을 찾아가 돌봐주는 일만 합니다. 인간을 치유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고 약 1,500년이 흐른 후,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여전히 나병은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고, 신의 저주를 받은 질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비로서 치유하기 시작하십니다. 제사장에게는 치유가 아니라 진찰의 역할만 주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나병을 치유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40절 이하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0)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환자에게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어느 부위에 손을 대셨을까요? 당연히 나병이 가장 심한 곳이 아니셨을까요? 천오백년 전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제사장들이 직접 환자들의 환처를 살펴보고, 제사장들이 직접 환자들의 환처를 만져보며, 제사장들이 직접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환처를 살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환처를 어루만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네, 이것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치유되기를 간절히 원하시오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원하신데요.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원하신다고요. 주님께서는 나의 영혼이 더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온갖 종류의 아픔과 슬픔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2절)
우리 주변에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 그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 주변에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을 입고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제사장들이 나병환자를 찾아가 그들의 환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격려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십시오. 우리 주변에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이 병들어 가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권면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 누군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때로는 육신의 질병, 때로는 마음의 아픔, 때로는 영혼의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십니까?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 원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치유를 위하여 다른 것을 찾지 마십시오. 제사장이 나병을 고칠 수 없고, 뛰어난 의학기술을 소유한 의사도 여러분의 치유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를 지금도 간절히 원하시며, 여러분을 능히 치유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여러분의 환처를 내보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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