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0. 6. 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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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산문은 한글이라는 모국어의 맛을 느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 시대의 크고 작은 실체를 모국어로 그 촉감까지 전달하는 것이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장점이다. 

"별을 별이라고 부를 때, 
별은 내 가슴에 박히고 
나는 모국어의 자식임을 스스로 안다."(p. 240)

유학 시절, 나의 설교 언어는 대한민국의 표준어라는 점을 깨달았다. 영어로 설교문을 작성하고, 그것으로 설교할 수는 있지만 선포하는 나도, 듣는 청중도 말하고자 하는 실체와 언어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울에서 초, 중, 고를 졸업했으니 이 언어를 사용하고 이 언어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공유하는 이들이 내 목회의 대상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지구의 반대편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기독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달한다.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정해졌고 이미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성경의 메시지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회중에게 전달해야 하기에 언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설교 언어를 가다듬고 연마해야 하는 이유다. 설교자도, 회중도 모두 모국어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김훈은 '말의 더러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정치인들이 행하는 이른바 정치공세를 말의 물타기로 표현하는데 언어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는 목회자에게 흥미로운 글이었다. 

"이 연금술은 .... 오염된 물의 수량이 풍부해야만 시술을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 국회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p. 334)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웃어넘길 위의 문장은 설교자들에게는 성찰의 문장이다. 

 

70을 넘어선 작가의 글에는 인생의 경륜이 배어나온다.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 글은 단연코 "늙기와 죽기"다. 이제는 조부나 부친을 떠나보낸 지인을 조문하던 때가 지나 이제는 친구의 장례를 조문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작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차례가 다가옴을 느끼며 죽음을 생각한다.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p. 71) 

목회자들은 수없이 장례식을 다닌다. 그만큼 죽음을 생각할 기회가 많다. 그러나 늘어가는 지식은 장례 절차와 시설에 대한 것일뿐, 죽음이라는 주제가 아닐 수 있다.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는 사후 세계가 있고 기독교 신앙은 고인을 천국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목사는 그 믿음으로 성도를 교훈하고, 유가족을 위로한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죽음 이후를 설파하고 목회자로서 장례식에 집례하며 유가족을 위로하지만, '죽음'이라는 명백한 실체는 미지의 세계로 남는다면, 장례식 설교만큼 공허한 언어도 없으리라. 

목회자는 설교의 언어로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며, 책망도 한다. 그러니 설교 언어가 기독교가 믿는 영적인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면 목회자의 역할은 사상누각이 되지만, 설교 언어가 영적 실체를 향해 성도들을 조금이라도 이끈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영광이 된다. 지워지기 쉬운 연필이지만 심혈을 담아 한 글자씩 써내려간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 시대의 목회자로 살아가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야 할 설교 언어를 생각한다. 

[프리미엄북] 연필로 쓰기 - 육필에디션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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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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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