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강해2020. 6. 7. 15:24
반응형

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계획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즉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감성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보면,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님들 사이에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처럼 새벽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어떤 분들은 새벽시간에는 도저히 일어나기 힘든 반면, 밤늦은 시간에 철야 기도를 좋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기도를 해도 어떤 분들은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뭔가 기도한 것 같은데, 어떤 분들은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더 경건하게 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 안에, 특별히 성도들 안에 존재하는 이 다양성, 이 다양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 – 곧 통일성 – 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의 몸 안에, 다시 말해 하나의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몸의 지체가 많으나” 몸은 몇 개입니까? ‘한 개의 몸’입니다. 


13절도 보십시오.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고, 어떤 사람은 헬라인입니다. 인종이 달라요. 또 어떤 사람은 종이고, 어떤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신분이 완전히 달라요.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출신이 다 다르지만, 누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까? “한 성령”으로, 한 분이신 성령님, 동일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13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분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한 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앉아 계신 분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여러분과 다릅니다. 똑같이 생긴 분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이곳에 나와 있지만, 우리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지요, 우리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한 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을 누리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구역에 나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함께 신앙생활하기가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계세요? 우리 교회 안에 여러분과 모든 점이 달라서 도저히 함께 신앙생활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계신가요? 바로 그분도 여러분과 동일하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임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도 임하셨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근거를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몇 개입니까? “여럿이니”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다양한 지체에 무엇들이 있는지 나열하지요. 그것이 15절부터의 말씀입니다. 한 몸에 발이 있고, 손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그 안에는 다양한 지체가 붙어 있다는 비유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20절까지의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 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한 분 성령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시간에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은 생김새가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방식이 다릅니다. 각자가 처해 있는 형편과 기도제목이 다 다릅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 사이에 다름,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오늘 본문 14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18절입니다. 우리 1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자, 한 몸인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 곧 다양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교회 안에 다양한 성도들을 배치해 놓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18절을 말씀을 보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다음 구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무엇에 따라서? “그 원하시는 대로” 각각 지체를 두셨습니다. 

여러분, 왜 나와 이렇게 다른, 나와 이렇게 잘 안 맞는 사람이 내 옆에 있을까? 왜 하필 내 구역일까? 왜 하필 나와 같은 부서에서 봉사하나? 라는 생각이 드세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잘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혹은 남편, 혹은 아내, 혹은 교회 내의 어떤 성도들과 여러분이 함께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배치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1절의 말슴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눈이 손에게 너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는 우리 교회에 필요 없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그러한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오늘 우리 교회에, 내 곁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사람을 오늘 내 곁에 두셨기 때문이다. 


반응형
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