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1. 3. 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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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눈의 띄는 변화는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코로나로 인한 교회 활동의 변화를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코로나의 대유행 시기를 보내면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던 교회의 활동은 단연코 예배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면할 수 없으니 비대면으로 진행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활동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지요.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가 그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는 이 다섯 가지 영역이 모두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친교와 봉사 그리고 선교의 활동이 주로 멈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을 다 포기하면서도 단 한 주도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던 것이 바로 예배요, 교회의 모든 역량이 집결되었던 영역도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은 교회의 예배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협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코로나의 대유행은 교회와 성도들이 예배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를 이야기하다보면, 대면 예배와 비대면, 특별히 온라인 예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코로나 이전까지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 TV나 모바일의 영상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생각했습니다. 몸이 아파 교회에 갈 수 없는 경우나, 근처에 교회가 없는 선교지가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 속에서 예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상을 통해 참여하는 온라인 예배의 부정적인 점이 많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이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의 ‘시청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올려드리는 예배자의 자리를 떠나 영상의 단순한 시청자로 머물러 있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예배자인가? 아니면 시청자인가? 이것은 영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가 일상이 된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예배자와 시청자의 구분은 온라인 예배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배자인가? 아니면 예배의 관람자인가? 


성전 정화 _ 예배자의 자리를 회복하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던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는데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던 로마의 화폐가 아닌 수리아의 화폐로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로마 화폐를 수리아 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지요. 본문 14절이 이와 같은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이들은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요한복음 2장 14절)
[이들은 성전세를 납부하는데 필요한 수리아의 화폐를 환전해주는 사람들이었지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잘 알기에, 이들의 행동이 옳지 못했다는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유월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듭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성전까지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끌고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바쳐야 했는데, 먼 여행길에 짐승을 끌고 오다가 특정 부위가 상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닙니까? 그러니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 제물인 소와 양과 비둘기를 딱 준비해 두었다가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요? 당시는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당연히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성전세는 수리아 화폐로 납부하라고 하니 성전에 환전상이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요? 그러면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역정을 내며 그들을 책망하셨을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요한복음 2장 15a절)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성전에서 성전 밖으로 내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내쫓았을 때 그것들을 판매하던 장사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양과 소를 관리하기 위해 성전 밖으로 따라 나갔겠지요.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요한복음 16장 a절) 

예수님께서 소와 양은 직접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지만, 비둘기는 직접 날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보내면, 그 주인들은 비둘기를 다시 잡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가지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물로 사용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제물을 파는 상행위 자체를 멈추라기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 2장 16b절) 

기는 성전이잖아요.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라고요. 예수님께는 “장소”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장사하는 시장으로 만들었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장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안에서 환전하는 장면을 보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대상은 상인과 환전상들이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제물로 쓰려고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샀겠지요. 그들이 성전세를 내려고 환전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망이 본문에는 없어요. 그들이 제물을 구입하기도 하고 환전도 했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성전 안에서 예배자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는 상인으로 있으면 안돼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는 환전상이 되면 안돼요. 성전 밖에서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농부가 될 수도 있고 어부가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핸드폰만 열면 예배의 영상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 어떠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든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한 가지 전제가 있어요. 우리의 자세가 예배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는 있지만, 혹은 우리의 눈 앞에 예배 영상이 송출되고는 있지만 예배자가 아니라 시청자, 예배자가 아니라 관람자, 예배자가 아니라 관리자의 자리에 있으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치지 않으실까요? 

‘너의 그 관심사를 가지고 이곳을 나가라’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 속에서 오늘도 예배에 함께 참여하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만큼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진실한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제물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상점이나, 성전세에 필요한 화폐를 구할 수 있는 환전소라면 그 정도의 불편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예배는 제물을 판매하는 상인도 없고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온전한 예배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임을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쫓아내시자, 성전을 관리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 곧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시는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이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장 19절)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기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그들이 요구하는 신비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크고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윤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한복음 2장 20절)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이라고 가리키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세 번째 성전입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매우 아름다운 성전이었지요. 그래서 그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후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다시 세웠고, 이것이 두 번째 성전으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재건하였으니 규모도 작고 그 모습이 초라했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흘러오다가 기원전 약 20년, 이방인이면서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던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크고 웅장하게 재건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성전이요,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헤롯 성전을 자랑하듯 이야기합니다. 46년이나 걸쳐서 세워진 성전인데, 지금 보는 것처럼 이렇게 크고 멋진 성전인데 이 성전을 헐라니 그리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어처구니없는 허풍으로 들렸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6일 만에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3일 만에 성전 하나를 세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각이나 상상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진심이었고 예수님은 이 위대한 일을 친히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장 21절) 

이 구절을 열쇠로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해석하면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헌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무너지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에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건축하는 그런 성전이 아니라,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상인들과 환전상들만 보일 뿐 참된 예배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그런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가득한 새로운 성전을 완성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셨지요. 비록 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건축한 성전이지만 하나님의 집을 시장으로 바꾼 상인들과 환전상을 책망하며 모두 쫓아내셨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인간들이 건축한 성전을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코로나 시대, 예배가 많이 위축되었다고 말합니다. 딱 보아도 한국교회의 예배 참석자의 숫자가 지난 1년 동안 급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는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는 수많은 예배의 영상이 쏟아져 나오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교회와 예배를 비방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를 일구어갈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헤롯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여전히 자랑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자를 위한 제물을 보다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많은 성전세를 걷기 위해 환전의 편리성을 주장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이 오답이라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는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고, 오늘 우리의 모임이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감당하셔야 했던 십자가의 죽음,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감당하셔야 했던 십자가의 죽음,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한지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흘러 넘칠 때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모임은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을 들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장소에서만이라도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고정하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여전히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참된 예배자로 만드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오늘 우리의 모임을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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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