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17. 12.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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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당혹감이 찾아오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장면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똑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약 3년 정도의 공생애 사건이 있은 이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건이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당혹감은 비단 성경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당혹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 더욱 성숙하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이죠.

 

 

거리감 -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두 귀로 들었으며 예수님의 삶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있어요.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쩌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 3절과 4절이 묘사하고 있지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잡은 것이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겉모습이에요. 요한복음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매우 문학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지요. 9절을 보시면 그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배에 올라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죠? 바닷가에 서계십니다.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배와 예수님께서 계신 바닷가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 거리가 약 50칸쯤 되었다고 말하는데(8),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00m가 조금 못되는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약 100m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죠. 한 때는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였고, 한 때는 한 방에서 잠을 자고, 한 때는 그분의 품에 안겨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약 100m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바다까지 찾아오신 거에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긴 거리가 있어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 요한복음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의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4절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이지요. “날이 새어갈 때에이것은 빛 줄기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밝은 새벽 빛이 비추었다는 의미도 아니죠. 어두움과 빛이 서로 섞여있는 상황, 빛이 비추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광명이 드러나지는 않아 그 영광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 곧 우리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삶에 열매가 없다고 느껴지세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세요. 그것은 그저 우리의 겉모습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예수님을 만났던 경험도 있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에 대한 체험도 분명히 있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의 사랑의 음성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과거의 경험일 뿐 지금 나의 마음에는 예수님과 약 100m에 이르는 거리가 있어 내가 사모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며 바닷가에 서 계시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이 아직 걷히지 않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난 지 1년이 더 지나간들, 3년이 지나간들, 아니 10년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 각성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조금도 성숙하지 않은 채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깨우침 주님이시라

 

어두움과 빛이 섞여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그때. 어디선가 베드로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한 마디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이 먼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베드로를 향해 외치죠.


주님이시라


어떻게 베드로보다, 혹은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았는지는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가 아직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제자들에게 소리쳤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시라

주님이 여기 계신다

 

베드로의 영혼을 깨우는 이 외침에 베드로는 급하게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을 향해 수영하기 시작하지요.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8절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예수님께서 계신 육지로 올라오는 거에요. 드디어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약 100m 정도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놓여있었던 100m 는 제자들이 수영을 하든, 배를 타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는 거리였던 것이죠. 사도 요한의 그 한마디 주님이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라는 그 외침이 제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100m를 이동하게 말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전도자들이 감당하고자 했던 역할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보좌에서 이 땅으로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 어떠한 전도자의 선언도 공허한 울림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 전도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이시라,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다, “우리 인생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분이시라고 소리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외침은 사실 우리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전도훈련까지 받는다고 박수를 받지만 우리 스스로가 내 모습을 가장 잘 알죠. 여전히 주님과의 거리가 있어요. 여전히 바닷가에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을 못 본 척 내버려두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해 소리를 치고 싶은 거에요.


주님이 여기 계신데, 왜 그물만 붙잡고 있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바다로 뛰어들지 않고 있느냐?”

 

여러분께서 참으로 예수님을 발견하셨다면, 여러분께서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사도 요한과 같이 소리 치십시오. “주님이 여기에 있다, “주님이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소리 치십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어두움을 뚫고 여러분의 귓가에 분명한 외침이 들린다면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이 여러분의 귓가에 분명히 들린다면 용기를 내어 바다로 뛰어 내리십시오. 어두움과 추위를 무릅써야 하겠지만, 그 바다 저편에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식사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100m 정도의 거리를 베드로는 수영을 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이동을 기록하고 있는 8절과 그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육지에 도착한 9절 사이에는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시간의 흐름이 숨어있겠지요. 그렇게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육지에 도착하자 잘 준비된 식탁을 발견합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9)

 

여러분도 숯불에 음식을 구워보신 적 있으시죠? 특별히 야외에서 숯불로 음식을 구우려면 인내가 필요해요. 숯불이 막 피어오를 때, 열기가 화로에 가득할 때는 음식을 잘 구워낼  수 없어요. 불이 활활 타오르다가 어느 정도 잦아들어서 불길이 아니라 열기가 화로에서 흘러나올 때 그 열기로 음식을 구웠을 때 가장 맛이 좋은 숯불 구이가 되는 것이지요. 제자들에 육지에 올라와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막 불이 타오른 것이 아닙니다. 숯불을 피우고 어느 정도 불길이 잦아든 후 그 위에 생선도 굽고 떡도 굽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누가 불을 피우고 누가 제자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10절에 그 답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준비하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하신 것 같아요. 준비하신 숯불에 생선 한 두 마리를 더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막 잡은 생선을 얼마나 가져오라고 말씀하시죠? “조금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실제로 필요한 물고기는 그저 예수님과 본문에 등장하는 7명의 제자들이 아침식사로 나눌 수 있는 두세 마리의 물고기면 충분한 거에요.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모여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생선과 떡도 굽고 그날 새벽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한두 마리 더 놓고 이제 요리가 시작됩니다. 지난 밤 바닷가에서 추위를 견디어야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피워 두신 숯불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기 시작하지요.

 

, 이제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12a)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아침식사를 가져다 주시죠.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3)

 

그날 아침 식사 당번은 예수님이셨나봐요. 제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요리하신 음식을 직접 가져다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여 지쳤있던 제자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멀리만 계셔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의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아침 식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날의 따뜻한 아침식사를 묘사하면서 요한복음은 매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삽입해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12b)

 

저 멀리 바닷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도 그들의 심령을 일으켜 깨우는 외침 주님이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던져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그곳에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따뜻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비로서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따뜻한 식사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비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둔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주님은 찾아오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그물에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님과의 식탁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큰 물고기 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저 주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생선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생선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내어 놓는 그 작은 생선을 주님의 숯불 위에 올려주시며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따뜻한 아침식사에 여러분을 불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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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