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설교2020. 5. 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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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길을 떠났지요. 그러나 아직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아요. 한 마디로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그렇게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 아브라함은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지만, 모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철저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는 바로 그 순간,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립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 역시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하였던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합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을 목동으로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양 떼를 몰며 이곳저곳을 다녔겠지요. 그리고 하루의 일과가 마치면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찬양하지 않았을까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다윗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자신을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였던 것이지요. 

다윗이 목동으로 있을 때는 그래도 평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인생 전체를 살펴본다면, 가장 평안하게 살았던 시절은 아무래도 그의 어린 시절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다윗은 목동의 자리에서 한 나라의 왕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의 자리로 옮겨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후 다윗의 삶에는 평안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사울의 칼날이 다윗의 목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다윗은 이스라엘의 쥐구멍이라는 쥐구멍은 다 찾아다니며 도망자로 살아갔고,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편 57편에는 이와 같은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또 다시 시간이 흘러 다윗의 목숨을 노리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남 유다의 왕으로 7년 6개월을 다스리고, 그 이후로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국가를 통치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도망자 신세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찾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궁에서 잠시 평안한 삶을 살 때 다윗은 또다시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소서(삼하 7:25-26) 

다윗은 이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여 그에게 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가장 큰 죄악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이었죠. 기도하는 사람도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모든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는 사람 다윗은 자신이 죄를 범한 바로 그때에도 기도합니다. 


시편 51편의 제목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시 51:1) 

오늘의 성경 본문은 시편 3편입니다. 그런데 시편 3편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 자신의 죽이려는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곳 저곳 도망쳐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젊은 시절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다윗의 양심은 당당했습니다. 다윗 자신이 죄를 지었거나, 다윗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는 다릅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다윗의 잘못을 징계하시는 하나의 방편으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대상으로 반역을 꿈꾸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인생 말년에 다윗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고난과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당당할 때,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때만이 아니라,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안 할 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 심지어 나의 죄악과 나의 잘못된 행동이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져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무엇인가 아픔을 겪고 계십니까? 그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못을 저질러 그 대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붙잡는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황

오늘 본문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3편 1절과 2절은 다윗이 어떠한 처지에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다윗은 자신의 대적이 많다고 기도합니다. 자신을 치는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하면 그곳에는 평안이 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면서 다윗을 위험한 인물로 여겨 그를 죽이려 합니다. 사울을 피하니 아기스가 있고요, 아기스를 피하자니 다시 사울의 통치권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에는 다윗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힘겹고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어요. 다윗 입장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대적이 사라졌으니 이제 평안이 찾아올 만도 하지요. 다윗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 그의 목숨을 노릴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그런데 여러분, 대적이 많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합니다. 기도하는 사람 다윗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다윗을 대적하며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죽였어요. 그리고 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지금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고 있어요. 


다윗이 압살롬의 칼을 피해 도망가는 바로 그때 사울 왕의 친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다윗 네가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너무도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하셨다’는 거에요.(삼상 16:7-8)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이 언제일까요? 한 고비를 힘들게 넘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내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도 힘이 들지요. 다윗의 표현대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현실은 나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인식이 아닐까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내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지만 내가 범죄 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둔감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선택을 했을 때 우리는 절망 가운데 빠져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피는 다윗의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비록 나의 삶에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4절) 

다윗은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 났나요? 아니요. 조금도 그렇지 못합니다. 다윗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아요. 그리고 누가 보아도, 다윗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죄악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빼앗아 가실 만한 죄악이 맞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믿음으로 선언합니다.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열심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한두 번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늦어지면 믿음이 점점 약해져요. 나의 기도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자신의 과거 모습이 자꾸 생각납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내가 뭔가 죄를 지어서 지금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인가? 과연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는가? 이런 의심이 생기지요. 


여러분, 혹 이러한 마음이 올라온다 할지라도, 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의심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에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떠한 죄악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바로 이 믿음을 가슴에 품고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기도 응답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 너의 죄악이 너무도 커서 더 이상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비아냥 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사람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그러자 기도의 응답이 임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러분, 매일 밤 편안히 주무실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다윗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당연하지요. 자신의 아들이 반역을 꾀하여 다윗 자신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군대를 이끌고 쫓아오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윗은 비로소 밤에 눈을 붙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6절도 다시 보십시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죠. 처음부터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필요가 없잖아요. 다윗은 두려웠습니다. 제 아무리 골리앗 앞에 용기를 내어 달려갔던 다윗이었지만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는 고난 가운데 다윗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언제까지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부르짖기 이전까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오랜 세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게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면서 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어요. 때로는 나의 죄악, 나의 잘못,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만 같은 나의 과거 행동 때문에 나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라고 믿음으로 선언하며 기도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성산에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선언하며 기도하세요.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히 잠들 수 있는 밤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두려움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다윗에게 그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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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1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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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두 명을 꼽으라면 여러분은 누구를 지명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분들은 아마도 모세와 다윗을 꼽게 될 것입니다. 모세,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다윗에게는 매우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란 그들의 일생을 두고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간절한 소원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결코 이룩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그의 일생을 통해 가장 성취하고 싶은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가나안 정복이지요. 그러나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직접 들어가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떤가요? 다윗에게 있어서, 그의 일생을 통해 가장 성취하고 싶은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그 소원을 나단 선지자에게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건축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이 소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대답하십니다. 다윗 시대에는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최고의 지도자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모세와 다윗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성취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소원은 얼마나 성경적입니까? 가나안 정복이라는 모세의 꿈과 비전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한 소원과 비전이냐고요. 다윗도 마찬가지죠. 그의 소원은 거대한 제국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죠.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소원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다윗의 계획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과연 모세와 다윗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입니까? 


모세의 인간 이해 - 덧없는 인생 

오늘 본문 시편 90편에는 제목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그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성경이 모세에 대하여 평가하는 장면 하나를 먼저 소개하고 싶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나와 있는 모세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신 34:10-12) 

모세 이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모든 권능과 위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위대했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는 한 사람의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에 대한 철저한 자기인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90편 3절부터 6절까지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1절과 2절입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토록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그 영원하심에 비하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습니다. 120세면 장수한 거죠. 심지어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를 보면 900세가 넘도록 살았던 분들도 계세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120년을 산 모세나, 900년 이상을 살았던 분들이나 모두 오랜 세월 장수하신 분들이죠.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인간의 연수가 길다고 해 봐야 하나님의 과점에서는 ‘밤의 한 순간’입니다. 

5절도 보십시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아침에 풀이 돋아요. 화려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찬란합니다. 그러나 6절을 보세요.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어떻게 됩니까?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철저하게 깨달았던 하나의 교훈이었던 거죠.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에서 자랐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그의 나이 40세까지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족으로 살았습니다. 모세가 누렸을 풍요로움, 모세가 누렸을 화려함을 우리가 어떻게 다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나이 40세까지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실제로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모세는 나이 40세까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모든 종과 신하들이 복종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모세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풍요롭고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나이 40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기 민족 유대인이 이집트 사람에게 학대 받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래서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이죠. 그런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모세는 졸지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화려한 궁궐의 왕족’에서 졸지에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경험을 했던 모세가 시편 90편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궁궐에 있을 때는 대단했지요, 잘 나갔지요. 그러나 한 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인간 이해 - 죄악 된 인생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우리 삶이 한 순간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풀과 같아서, 아침에는 꽃이 피고 자라지만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른다고 말하죠. 이렇게 우리의 삶은 짧고 덧없는데, 그러한 우리의 삶을 더욱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90편 8절부터 11절까지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어요. 그 결과가 바로 9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갑니다. 결론적으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덧없어요?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빨리 지나가버립니까? 하나님의 앞에 우리의 죄악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가 되자 하나님은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출애굽이라는 대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빠져나와 홍해 바다를 건너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모세는 이제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4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모세는 급기야 그 땅을 밟기 전에 생명이 다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그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40년의 세월을 허송해야 했습니까? 그들의 죄악이에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며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쏟아놓았던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의 나이 80세로부터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120세의 나이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합니다. 바로 그 40년 동안, 모세는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명을 제외하고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고라 자손과 같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악을 저지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을 40년의 세월 동안 지켜본 모세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 그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직접 지켜본 거죠.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인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모세는 11절과 같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모세의 기도 -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면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았던 모세,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직접 행해보았던 모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 모세는 그의 기도 가운데 자신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죄악 된 인간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오늘 본문 시편 90편에서 제일 먼저 이렇게 간구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러분, 우리 모두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오늘 아침, 간절히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였지만 직장에서 예상치 못했던 암초가 얼마든지 있지요.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역에 투자하였지만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릴 수도 있다고요.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그 자녀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는 경우도 있어요. 

모세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거룩한 비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취하지 못해요.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라는 위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모세나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 모세는 자신의 계획이 좌절되고 멈추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가지 귀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밤의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의 삶에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세요?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과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기에 앞서 기도하는 사람들인 여러분들은 이렇게 기도하시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우리의 살아갈 날들을 계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버리는 풀과 같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의 기도 내용 - 우리를 만족하게 하소서 

모세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니,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계속해서 인간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에서 모든 것을 소유해보았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는 이집트의 최고급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기도하는 가운데 놀라운 진리 한가지를 깨닫습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도 아닙니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우리의 일생을 기쁘고 즐겁게 만드는 것은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저는 설교 초두에 여러분들에게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모세와 다윗은 그들의 일생에서 반드시 성취하고 싶었던 최대의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모세는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다윗은 그토록 원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과연 모세와 다윗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입니까? 만일 우리가 모세에게 이 질문을 물어본다면 모세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자신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즐겁고 기쁜 삶이 되는 것, 모세 자신의 삶을 만족할 수 있는 근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매일 아침 경험하는 것이었다고 모세는 말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기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의 모든 소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런 효과도 의미도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기도하는 가운데 나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나에게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기에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가를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아침, 매일 아침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담고 있는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이 쉽게 성취되지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어떠한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세요. 여러분은 모세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모세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획이 실패하고, 여러분의 목표한 바가 멀게만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매일 아침 여러분의 삶 안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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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0. 5. 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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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리즈 설교의 제목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붙이며, 구약 성경의 인물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죠. 처음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이후, 크리스천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가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립니다. 슬프고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우리의 상한 마음을 올려드리는 통곡의 기도를 드립니다.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 지나온 삶을 인도해 주심에 대해 감사하며,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크리스천이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크리스천의 삶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다양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성경의 인물들이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으며 어떠한 상황, 곧 어떠한 형편과 어떠한 처지에서 기도하였는지를 먼저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였는지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그리고 앞으로 처하게 될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단서들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인물을 너무도 쉽게 우상으로, 혹은 영웅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기도, 굉장하지요. 위대하지요. 그러나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고, 그에게도 죄악이 있었습니다. 성경 인물들의 기도를 살펴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기도가 모범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가나안 정복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여호수아의 믿음과 기도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기도가 언제나 모범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에 순종하여 여리고 성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아간이라는 사람이 탈취물의 일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탈취한 그 어떠한 물건도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 말씀을 어겼고 그 결과 가나안 땅에서 치러진 두 번째 전투인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크게 패배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매우 적절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여호수아 8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수 8:7) 지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스스로 반성하지 못한 채, 하나님은 왜 요단 강 서편 땅으로 우리를 이끌어서 여기서 멸망시키고 계시냐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언제나 모범적인 기도만 하시나요? 믿음의 정도(定道)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범적인 기도만 하십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속에는 모범적인 기도가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채 하나님을 원망하는 부적절한 기도도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인물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기도를 바라보면서 지금 내가 처해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배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상황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아브라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대표적인 기도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죄악으로 가득했던 소돔 성,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소돔 성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묵상하기에 앞서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어떠한 내용이 나오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오늘 본문 앞에 등장하는 창세기 17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아들에 대한 약속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매우 구체화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이 살고 있던 하란이라는 지역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옮겨갔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창 12: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고 약속하시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지금 자녀가 있어요 없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2절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자신은 자녀가 없으니 다메섹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각을 교정해 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됩니다. ‘너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너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어요. 아직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생각하기를 사라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아브라함에게 하갈이라는 여종을 붙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나도록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잖아요.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아브라함의 마음에 자신의 아들은 이스마엘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17장 1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너의 아내 사라가, 너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자녀에 대한 약속이 점점 구체화되는 흐름이 보이십니까? 처음에는 ‘너의 자손’, 그 다음에는 ‘너의 몸에서 날 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낳을 아들’이라고 계속해서 구체화돼요. 그리고 이제 일 년만 지나면 하나님의 약속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내 사라가 낳은 아들이 생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되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 17절부터 19절까지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차츰차츰 구체화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려는 것,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신의 약속을 집요하게 실현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한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직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아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배가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됩니다. 어떻게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친밀한 대화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곧 하나님과의 기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삭이 눈에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선물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직 눈에 보이는 이삭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빚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치 아브라함의 기도와 같아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의 몸에서’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하갈에게서’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이처럼 우리의 기도가 불완전하고요,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결점 많은 기도라 할지라도, 그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나의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모든 염려는 던져 버리십시오. 기도의 오발탄을 쏘아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불완전할 수도 있어요. 아브라함도 그랬고, 여호수아도 그랬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민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면 오랜 시간을 놓고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참된 크리스천의 삶으로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삶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어요. 어디 아브라함뿐인가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까지도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가운데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요? 아브라함이 살던 바로 그 시대에 소돔이라는 지역은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없다고요. 이것이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놓인 삶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 20절과 21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연약하고 부적절한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하시죠.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는 거에요. 그런데 주변을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세요. 기도하는 가운데 나의 인생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친밀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또 한 가지 사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소돔 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죠. 바로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기도합니까? 그 도시를 위한 중보기도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 22절부터 25절까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2절을 다시 보시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앞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방문하였던 천사입니다. 이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주었어요. 내년이 되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전해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갑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일은 이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같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자신만이, 혹은 나와 우리 가정만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정으로 이끌어가시는 은혜를 경험했다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고 그것으로 기도를 멈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죠.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 2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32절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소돔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 성은 유황과 불로 멸망하지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죠. 여러분, 그러면 소돔 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였던 아브라함의 이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건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돔 성을 위한 아브라함이 기도가 어떠한 실제적인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창세기 19장에 등장합니다. 창세기 19장 29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은 소돔 성 전체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조차 없었던 소돔 성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기도는 헛된 기도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돔 성에 유황과 불을 비처럼 쏟아 부으시는 바로 그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특별히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를 기억하셔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해주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아니, 구체적으로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들 가운데 아직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계십니까? 아브라함 곁에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섬기는 그 하나님, 아브라함의 가정을 축복의 가문으로 만들어가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던 롯과 같이, 여러분 자신을 비롯하여 기도하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 계십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없이,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을 다 구원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그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한 생명 한 생명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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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18. 12. 2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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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30장은 히스기야 왕의 업적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5절)

 

여기에 기록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에서 오랫동안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역대기를 계속 읽어보면 요시야 왕의 시절 유월절을 지키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그 대목에서 선지자 사무엘의 시대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35:18). 그러므로 사무엘 선지자 이후, 사울이 다스리던 시대에도,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시대에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수많은 왕들이 등장했던 그 시대에도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유월절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었지만 자신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유월절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사건, 곧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들은 잊어버리고 망각하며 살았던 것이지요.

히스기야의 개혁은 유월절을 부활시켜 다시금 시행하는 것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유월절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유월절의 참석자로 초청한 사람은 남 유다 백성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1절)

 

, 이제 왕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남 유다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에도 히스기야의 편지를 전달합니다.

 

보발꾼들이 왕과 방백들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왕의 명령을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6a절)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있는 남 유다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히스기야는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너희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아니냐? 우리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러고보니, 히스기야 왕과 그의 편지를 전달하는 보발꾼들이 꼭 우리 시대 전도자들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주셨던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 ‘당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보발꾼들이 전해주었던 히스기야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보십시오.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10절)

 

사람들은 오랜 세월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히스기야와 보발꾼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열심히 전도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어버립니다. 마치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비슷하지요. 요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요 1:9-11)

 

히스기야의 편지가 보발꾼의 손에 들려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들은 히스기야의 초대를 비웃어버립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세상의 빛 되시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다니셨지만, 그들 역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이 히스기야의 편지를 비웃고 넘겨버린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11-12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스기야의 초대를 비웃고 거부하였지만, 11절에 등장하는 몇 사람’ –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지파는 북 이스라엘에 속한 지파인데 그 지역에서 몇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온 것입니다. 12절은 남 유다에 속한 사람들이 등장하지요. 그렇게 남 유다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유월절을 지키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땅에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히스기야가 보낸 편지를 보고 비웃으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지라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만큼은 마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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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18. 12.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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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28장의 주인공은 아하스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섬겼던 악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아하스 왕의 시대에 국가는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에돔이라는 나라와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변 국가가 군대를 일으켜 침략하고 공격하니 나라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아하스는 어떻게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려 했는지 역대하 28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에게 괴로움을 당하던 아하스의 눈에는 저 멀리 동편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힘이 센 사람에게 줄을 대려고 하는 것이죠. 누군가 나의 괴로움을 도와줄 수 있는 힘 있는 사람,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의 왕이 보였어요. 그런데 앗수르 군대와 유대 나라와 와서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보십시오. 20절입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아하스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디글랏빌레셀은 남 유다를 괴롭히는 에돔과 블레셋만을 혼내준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들보다 더 힘이 강력한 앗수르 군대가 남 유다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그래서 앗수르가 자신의 편이 되어 대적을 무찔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21절)

 

그 옛날 유다의 왕 아하스와 앗수르의 왕 디글랏빌레셀의 이야기를 읽는데, 오늘날 바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조그마한 어려움을 당해서 주변에 도움을 받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보았더니, 그 사람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거에요.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소용이 없어요. 이것이 사람들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 없고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 마음 같은 사람 없어요. 그러니 누가 누구를 의지하고, 누가 누구를 원망합니까?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시 146:3)

 

그러면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때로는 내 삶을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때로는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귀를 막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해답이 되어 주십니다.

 

남 유다를 다스리던 아하스 왕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마음이 곤고해졌습니다. 그때의 장면을 오늘 본문 22절이 묘사합니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아하스 왕이 마음이 곤고해지자 하나님께 더욱 범죄하였습니다. 마음이 곤고해지면 많은 신앙인들이 더욱 하나님을 구하고 찾을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하스 왕이 마음이 곤고해질 때 하나님께 더욱 악을 행했던 모습이 구체적으로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아하스 시대, 아람이라는 나라가 남 유다를 공격하여 작은 승리를 거둔 역사가 있거든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아하스에게 부러운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늘 작은 나라들에게 치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래서 힘있는 강대국 앗수르를 불러왔더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아하스의 마음에는 비록 작은 승리라도 거두는 아람 나라가 부러웠던 것이죠. 그래서 232절을 다시 보시면, 아하스는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는 생각으로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있는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람 나라가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이 섬기는 다메섹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때로는 이방 우상을 섬기는 아람 나라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알려져있는 남 유다에게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아하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아람 나라를 너무도 부러워한 나머지, 그들의 성공비결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 장면을 무엇이라고 평가하십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그러므로 여러분, 비록 고난을 당하고 여기 저기에서 치이더라도 결코 믿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귀인을 의지하지도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의지할 분이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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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17. 5. 5.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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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미해결 과제

 

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교회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꼭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인물, 곧 자신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어떤 모델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은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니엘 당시 바벨론 제국은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 한 후 각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만 선발해서 국가의 지원으로 바벨론에서 조기 유학을 시켰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식민지였던 유대인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바벨론에서 조기유학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1장은 그렇게 각 지역에서 최고로 머리 좋다고 하여 뽑혀온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가장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반에서 1등하는 것도 쉽지 않고,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데, 다니엘은 유대 나라 전국에서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수제들이 모인 바벨론 황제 직속의 최고 명문학교에서 전 세계 1등을 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를 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학생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또한, 다니엘은 공부도 잘하면서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흔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공부한다고 주일 예배도 빠지고, 신앙생활은 뒷전인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다니엘은 늘 학교 공부에서 1등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했던 학생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성경을 읽으라고 큐티를 하라고 기도하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데, 다니엘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같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잖아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장면도 등장해요.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왕이 주는 음식까지도 거절하지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도 다니엘과 같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예쁘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먼저 공부를 잘했어요. 신앙생활도 참 잘합니다. 거기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까지도 참 좋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친구는 다니엘보다 공부를 쪼~~ 끔 못해서 전 세계에서 2, 3, 4등합니다. 1등은 다니엘이지요.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다니엘이 중요한 신앙의 기로점에 서 있을 때 다니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는 친구였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만나러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친구는 한 사람도 안보여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이 공부도 잘하고 믿음도 좋은 최고의 친구들과 늘 교제하고 사귄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모든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닮기를 원하는 모델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청소년 시기, 청년 시기, 나아가 장년의 시기를 보냈던 다니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그 앞에 있는 모든 문제가 하나도 남김이 없이 해결되었을까요?

 

사실 다니엘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문제 해결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다니엘 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해결되곤 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다니엘 이전에 눈의 띄는 문제 해결사는 단연코 요셉이었던 것 같아요.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이지요.

예를 들어,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바로가 하루는 꿈을 꿉니다. 살진 소 일곱이 등장하였다가 그 뒤에 여윈 소 일곱이 나타나서 살진 소 일곱을 모두 먹어버리는 꿈이었지요. 바로가 곧 이어 또 하나의 꿈을 꿉니다. 매우 충실하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나왔는데 그 뒤에 아주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꿈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모든 지식인들 박사들이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꿈을 해석하죠? 바로 요셉입니다. 바로의 그 꿈은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예고한 꿈이라는 사실을 요셉이 해석해내요.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요셉은 7년 풍년 뒤에 올 7년 흉년을 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그 방법으로 각 지역에 감독관을 세워 7년 풍년의 기간에 소출의 1/5을 바로의 이름으로 각 성에 쌓아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확한 해석이요 탁월한 해법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주었던 요셉의 탁월한 실력이 인정을 받아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설교의 주인공 다니엘은 바로 그 요셉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죠. 그런데 꿈을 꾼 사람이 말이 없어요. 자신이 어떠한 꿈을 꾸었는지를 맞추고, 그에 대한 해석도 내어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옛날 요셉은 그래도 바로의 꿈을 듣기는 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왕이 꿈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 꿈의 해석도 내어 놓아라고 명령합니다. 아니, 어젯 밤에 내가 꾸었던 꿈도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력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옆집 사람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이 어려운 문제를 누가 맞추지요? 다니엘이 맞추는 거에요. 여러분, 이처럼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데 달인이었어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릴께요. 다니엘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해결을 하는 사람이니 그의 앞에는 어떠한 문제든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해결되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떠한 문제든 그것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 문제가 그 즉시 다 해결되었을까요?

 

다니엘은 학생 시절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도 그 문제의 정답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사람이었어요. 다니엘은 성인이 되어 바벨론 제국의 관료가 되어 다양한 제국의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그 마음에 있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 다니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어요.

 

다니엘의 청소년 시절, 다니엘의 학창시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도 다니엘에게는 답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

 

질문을 바꿔볼까요?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거에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아무리 전 세계에서 1등을 해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 답을 찾으려는 하나의 몸부림이 바벨론 황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는 장면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다니엘이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당시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던 바벨론 제국의 고위 관료로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질문, “나는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 ,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미결과제로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 풀리지 않았던 문제는 다니엘 개인의 문제를 넘어 자기 민족 유대인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되지요. 그 질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 민족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 제국에 멸망하였는가?”

 

이 질문도 다시 풀어볼까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무리 공부를 하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제 아무리 기도하여도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다니엘의 겉모습만 바라보면, 그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니엘은 어떤 문제든 열심히 기도하면 다 해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지요. 다니엘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제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보니 모든 문제가 척척 해결되던가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도 우리 앞에는 언제나 남모르는 아픔과 숙제와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고요.

 

우리 주변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하고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만사가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요. 그러서 우리는 더욱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바로 바로 응답도 받고 만사가 형통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니 내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나? 나의 기도가 부족한가? 내가 무엇인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계속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무런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어보이는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그에게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제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도 척척 해답을 내놓았던 다니엘 조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집사님, 기도하시라기도하면 하나님께 그 문제 해결하신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 집사님께서 기도하게 계십니다. 그토록 마음이 아프고 힘든데 왜 기도를 안하겠어요. 기도를 안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요,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기도생활이나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다고 너무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오늘과 같은 휴일에 수요예배까지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이면 여러분은 충분히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침내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

 

그러면 이제 궁금해지죠? 아니, 다니엘과 같이 믿음이 좋고 실력도 있고 신실한 사람이 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나아가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이 뜻을 묻는 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에 그토록 오래도록 침묵하셨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하고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 왜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미해결과제가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니엘이 그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문제를 해결받는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 9:1)


여기에 다니엘 9장의 시간적 배경을 명확하게 표시해 놓고 있지요. 다니엘은 10대 청소년 시절에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온 것을 제 1차 바벨론 포로의 때라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죠 지금 다니엘 9 1절이 묘사하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첫해는 다니엘이 다니엘이 유대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이주한지 약 6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었습니다. 60년 동안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질문,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 자신의 문제를 넘어 민족의 문제로 바꾸어 본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치열하게 씨름하였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자그마치 60년입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니엘 9 2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 9:2)

 

다니엘의 눈에 드디어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예레미야 29장에서 여전히 유대땅에 머물러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 나와요. 다니엘이 60여년동안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였는데, 바로 이 시점에 드디어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자신이 한 평생 풀지 못했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범죄가 창궐하여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는 사실, 포로생활 70년이 지나면 그들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요, 예루살렘에 참된 회복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이미 계획해 놓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했던 다니엘은 그저 기도하면서 답답해 했던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60년 전에 알려주셨으니 다니엘에게 10대 시절부터 알려주시면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바벨론에서의 포로 기간이 70년이 거의 되어가는 시점, 곧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건너온 지 약 6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 아무리 기도하고,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하고,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나의 삶 속에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 하나님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왜 그 60여년의 세월 동안 다니엘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다니엘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70년의 세월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왜 이렇게 단기적인 응답을 추구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오늘 기도하여 내일 응답받기를 기대합니다. 이번주에 기도하면 다음주에 응답 받기를 원하고요, 이번달에 기도하면 다음달에 응답받기를 원해요. 아무리 늦어도 올해 기도하면 내년에는 응답이 되기를 기대해요. 이러한 우리의 조급한 기도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생각할 때 너무도 초라한 기도가 아닐까요?

 

적어도 10년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적어도 2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기도가 지금 당장의 기도 응답에 붙잡혀 있기보다는 다니엘의 기도와 같이 60, 아니 한 평생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끊임 없이 기도하는 보다 넉넉한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족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은 6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와서 공부를 해야 했는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이 왜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야 했는지, 나아가 하나님은 다니엘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계획을 갖고 계신지 기도하는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지요.

이제 다니엘은 다시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다니엘 9장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다니엘에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소개해주고 있어요.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은 오늘 본문 9 19절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 9:19)

 

60여 년을 기도한 뒤, 다니엘은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통해 유대인들을 새롭게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보니, 이제 70년이 거의 차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뜨겁게 기도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주여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시해하여 주십시오.’

, 주님의 성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주님의 택함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사람들이오니, 주님의 계획과 같이 70년의 포로생활 이후 저 예루사렘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간절히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 유명한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는 놀랍게 응답을 받습니다. 아니, 다니엘이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쯤 이미 하나님은 응답을 예비해주고 계셨어요. 그 내용이 다니엘서 9장 뒷부분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등장해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니엘이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데 다니엘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금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공동체를 재건하는 그 일에 다니엘이 동참할 수 있었습니까?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대열에 함께 했을까요? 구약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오지 못한 것 같아요. 다니엘이 기도했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도 받았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회복되었지요.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다니엘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예수아라는 또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역사를 이끌었고 광야 40년 동안 참으로 기도하며 고난 가운데 인내하였던 모세에게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요. 그렇다고 모세의 충성과 모세의 기도가 헛된 것이 결코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다니엘의 기도는 응답 받았어요. 그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일이지 다니엘의 역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었기에 60여년 동안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신이 직접 앞장설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한 평생 붙잡고 기도하였던 기도의 핵심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내가 주도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기독교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욕구를 관철시키는 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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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