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본문의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곤 하지요. 사실, 본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탕자’라는 단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모아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모두 탕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째 아들을 탕자, 곧 방탕하게 생활하면서 재산을 낭비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이 비유의 이름 역시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매우 흥미롭게 풀어낸 기독교의 많은 저술 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은 참 재미있습니다. 탕자라는 단어를 탕부로 바꾸어 그 책의 제목을 <탕부 하나님>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 제목도 이 책의 제목에서 가져왔다는 점을 이미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제목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정한 이유를 그 책에서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탕자라고 했을 때, prodig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윤리적으로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씀씀이가 크다 무모할 정도로 지출이 헤프다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둘째 아들이 prodigal 씀씀이가 무모할 정도로 헤프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욱 prodigal 자신의 재산을 앞뒤 보지 않고 펑펑 사용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바로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라는 설명입니다. 이 책에서 제목을 설명하는 대목을 한 두 문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prodigal하게 모든 것을 주시는 탕부이시다.
SCENE ONE. 나눠주시는 탕부 하나님
둘째 아들이 당돌하게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청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였지요. 지난 주 본문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1-12a절)
지난 주에도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지금 당장 나누어 달라고 요청한 이 당돌한 행동은 고대 중동 사회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의 행동에는 “아버지,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께서 죽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당시 사회에서 상식이 있는 아버지라면 유산을 나눠달라는 아들의 요청은 당연히 거절해야 하고, 오히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당시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2b절)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여기에서 각각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자신에게 유산을 요구한 둘째 아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의 유산도 이 아버지는 미리 다 나눠 주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이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아들의 당돌한 요구,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하고 아버지로서 크게 벌을 주어도 무방한 아들의 당돌한 행동에, 오히려 자기 재산을 유산으로 떼어주고 나머지 모든 재산도 큰 아들에게 넘겨주는 아버지.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녀를 위해서라면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미리 떼어주면 이미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이 이제는 그 몸도 아버지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었을 때, 이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성실하게 관리하기는 커녕 그 귀한 재물을 모두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게 될 것을 몰랐을까요? 물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부 하나님은 아들의 성품, 아들의 인격, 아들의 그 악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산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앞뒤 재지 않고 다 나눠줍니다. 그러니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이러한 탕부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에서도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이 호세아 2장 8절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는 북 이스라엘이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져있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탕부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호세아 2장 8절을 다시 보십시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다 그에게 준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알을 위하여, 곧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말씀이지요.
호세아의 말씀을 계속 보십시오.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하나님께서 곡식과 양식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은도 주시고 금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가지고 바알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성한 은혜를 계속 베푸십니다. 마치 아들의 악한 마음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아들의 부당한 요구까지 다 받아들여 재산을 미리 떼어 주시는 오늘 본문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탕부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데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시고 쓸 것을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낌 없이 베풀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재멋대로 행동해도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나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면 될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에게 돌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한 탕부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SCENE TWO. 받아주시는 탕부 하나님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낭비할 것을 다 아셨지만, 앞뒤재지 않고 그가 요구하는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셨지요. 그런데 탕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처음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본문 20b절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불타올랐지요. 아들을 보고싶은 마음, 그 누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 아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쁜 마음. 이 모든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서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직 거리가 멀었으니 한참을 달렸겠지요. 그리고 드디어 아들에게 다다른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해요. 계속해서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여러분, 지금 아들이 이 대사를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지금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자기에게 입을 맞추고 있잖아요. 목을 끌어안긴 상태에서, 입을 맞추는 상태에서 어떻게 문장을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아들은 자신이 준비해온 대사를 하기는 해야 할텐데, 아버지는 자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떠듬떠듬 이야기했겠지요. ‘아버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거든요 …’ 그렇게 말을 계속 잊기가 어려운 거지요. 여러분, 이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아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언어를 말하는지, 아들이 그동안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아들이 용기를 내어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자 마자 목을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가 종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네요. 첫째로 제일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은 누구의 옷이었을까요? 당연히 그 집의 주인인 아버지의 옷이었겠지요. 아버지는 자신의 옷, 그것도 가장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옷, 그것도 최고의 옷을 입혀주면서 아들의 지위와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둘째로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당시 가락지는 유산을 이어받는 상속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들로서 다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줍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자유인들만 신발을 신었지요. 그러므로 아들에게 다시 신발을 신겨준다는 것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버지는 이 아들이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어야 하는 유산까지 이 아들이 원한다고 하니 다 주었습니다. 할만큼 했고, 충분히 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들에게 베풀어 준 것만으로도 탕부, 곧 아들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아낌 없이 모든 것을 주는 아버지라고 불릴 만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그에게 또 다시 아들의 모든 권한을 다 주고, 자신의 재산을 또 다시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에게만 펑펑 재물을 다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이 얼마나 큰지, 소를 잡어서 온 마을에 잔치를 엽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시는 아버지는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는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탕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으면,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잘못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SCENE THREE.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장면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신 장면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언젠가 한 가정이 교회에 새로 등록하여 제가 그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빠와 엄마 그리고 대학생인 두 딸은 오래전 신앙생활을 매우 열심히 했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안 신앙생활을 멀리하던 중 지인의 권유로 다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오래도록 교회를 멀리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 의외로 아빠나 엄마가 아닌 첫째 딸이 대답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은 교회 봉사라면 가장 우선순위에 두셨고, 자기와 동생도 교회학교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선생님들이 알려주시는 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사고를 당하여 건강을 잃게 되었고, 생계를 위해 엄마가 이곳저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맏딸은 아빠엄마가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운대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더 안 좋아지게 되었지요. 그 장면을 경험하면서 그 딸의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너무하신다는 생각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답니다. 첫째 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도 울고 같이 심방을 받고있던 아빠도 울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딸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날, 그 가정을 심방하며 제가 함께 나누었던 구절이 조금 전 함께 읽었던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이었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권면했던 것 같아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하나님께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만 – 우리 가정에게만 – 해도 너무 하신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가정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실만큼 여러분의 식구들을 사랑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권면했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탕부 하나님, 곧 앞뒤 재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손길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시나요? 성경은 탕부 하나님, 곧 모든 것을 후하게 베풀어주시고 또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지만 나의 삶에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도 보이지 않는다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일어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물론,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한 감정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 한 가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여러분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모두에게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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