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가 한 번은 이야기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일을 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마더 테레사가 했다는 이 이야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옳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일까요? 큰 업적을 남기고 역사에 길이 기록될 일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주목을 받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일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의 가정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라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이나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는 배우자는 자랑스러울 수 있겠지요. 가정을 위해 큰 일을 해주면 지금 당장 식구들이 좋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가정을 지속적으로 따뜻하고 행복하게 가꾸는 방법은 매일 소소하고 작은 일들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식구들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주고, 따뜻한 말로 대답해 주는 것. 식구들이 불편하지 않게 서로를 배려하는 조그마한 사랑의 행동들이 쌓여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게 아름다운 가정이 되는 것이겠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우리 교회가 따뜻하고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 한 두 사람이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면 우리 교회가 발전할까요? 온 교회 성도들이 크고 위대한 일, 그리하여 한국 교회의 역사에 길이 기록될 일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힘쓰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될까요?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큰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믿음도 있어야 하고 소망도 있어야 하고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중의 제일은 무엇입니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니라”(고전 13:13)
예수님의 관점 - 사랑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지요.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본문 36절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할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네요. 그만큼 동료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셨을 때, 그 집에 불청객이 한 명 찾아오지요. 본문 37절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그녀는 예수님께서 계신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해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곁에 있는 이 두 사람을 매우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점이 달랐습니다. 먼저 한 사람은 남성이고 또 한 사람은 여성이었지요. 그들을 성별부터 달랐네요. 그런데 본문에서 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의인과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이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한 바리새인이” 네, 이 남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남자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 남자의 집에 들어온 여자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묘사합니까? 37절을 다시 보시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죄에 대해 옹호하려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구조 때문에 이 여인이 죄를 범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단 한 마디로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백하게 말씀하지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이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이 여자가 많은 죄를 – 적은 죄가 아닙니다 –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cf. 47절). 그러니 그녀의 죄에 대해 변명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자와 이 여자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하나있지요. 하나님, 혹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섬기는 여러 신적인 존재는 인간을 바라볼 때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가는 의인은 하나님께 호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벌이 임합니다. 이것이 어느 사회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여 주시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 42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지 찾아보며 본문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누가 더 사랑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의 ‘바리새인’으로 불리던 남자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여인’이라 불렸던 여인보다 훨씬 의롭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은 죄를 지은 여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남성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그리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평가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본문 44절부터 보십시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44a절)
이 바리새인의 이름도 시몬이었던 것같지요? 자, 이제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4b절)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바리새인 남자입니까? 아니면 죄 많은 여인입니까? 당연히 바리새인 남자가 아니라 죄 많은 이 여인입니다. 45절도 보십시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5절)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의롭게 살면서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의 바리새인이라 불렸던 남자입니까? 아니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죄를 많이 지은 여자입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동일하지요. 의롭게 산다고 평가받던 바리새인 남자가 아니라 죄인아라고 손가락질 당했던 여자입니다. 46절도 보십시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6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남자와 죄인이라 불리던 여자 가운데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남자가 아니라 죄인이었던 여자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이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변하지 않는 기준입니다.
우리 중에는 경건의 바른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며 경건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다양한 봉사를 실천하기도 하고, 언제나 바르고 정직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반면, 말씀생활, 기도생활, 봉사생활을 하고 싶지만 도저히 형편이 되지 않아 마음뿐인 성도들도 계시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실 때 어떠한 기준으로 평가하신다고요? ‘누가 더 의로운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온 마음을 다하고 여러분의 온 뜻을 다하고 여러분의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늘 찬송하는 것처럼,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고 시간이 흐를 수록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보다 능력은 부족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 성도들처럼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만큼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펴 보시는 주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기뻐하시며, 여러분 모두를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천국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과 죄용서의 비밀
죄를 지은 여자는 비록 바리새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를 보시며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47a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선포하시네요. 바로 여기에 사랑과 죄 용서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죄용서의 깊이가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오천 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오백만 원 정도를 빌려주었지요. 그런데 오백만 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오천만 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 낼 형편입니다. 그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천만 원을 빌린 사람에게 그 오천만 원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백만 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그 오백만 원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여러분,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명백합니다. 내가 죄를 적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나의 죄가 용서받았지만 그 은혜가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저 적당히 사랑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알지요. 믿지요.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지요. 그러나 실제로 그의 마음은 마치 돈 500만 원을 탕감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는 크지만 그 은혜가 내 삶에 그렇게 결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적당히 사랑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그는 분명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반대하거나 비방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존경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더 깊은 사랑의 마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요. 내가 큰 죄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기는데, 예수님의 죄 용서가 어떻게 크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만하며 다른 사람에 비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반면, 자신이 지은 죄를 태산보다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신 죄 용서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요? 본문의 여인처럼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가 돈 5000만원 정도가 아니라 5억, 50억, 혹은 100억 이상의 큰돈을 빚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모든 빚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탕갑받은 것처럼, 우리의 그 많은 죄악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다 용서를 받았으니 어떻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크나큰 죄가 예수님의 시바가 은혜로 용서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작은 일들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은혜에 대한 감격. 나의 모든 죄를 대신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분명한 확신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요,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5장 11-20a절 “스스로 돌이켜” (2) | 2024.09.30 |
---|---|
누가복음 16장 1-9절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2) | 2024.03.28 |
누가복음 14장 25-33절 “마음의 첫자리” (0) | 2022.09.04 |
누가복음 14장 7-14절 “너를 위한 자리 (0) | 2022.08.28 |
누가복음 13장 10-17절 “믿음의 관점” (0) | 2022.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