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3. 12. 1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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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은혜”가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너무도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까닥 없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여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아무런 이유나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반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니, 사랑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지금, 제가 드린 이 질문은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우스 땅에 욥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성심성의껏 섬겼던 분이지요. 그런데 욥에 대해 사단은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장 9절) 

사단의 논리는 맹백합니다. 욥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이유는 딱 한가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만일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사단의 표현 그대로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외면하셔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의 복을 빼앗아 가셔도, 하나님께서 내 몸에서 건강의 복을 가져가시더라도 여러분은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시겠습니까?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범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조금만 나에게 주신 복을 가져 가시더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지요. 그러니 욥과 같이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찬양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관점 - 사랑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점이 달랐습니다. 먼저 한 사람은 남성이고 또 한 사람은 여성이었지요. 그들을 성별부터 달랐네요. 그런데 본문에서 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의인과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바리새인이” 그렇습니다. 이 남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남자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 남자의 집에 들어온 여자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묘사합니까?  37절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죄에 대해 옹호하려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구조 때문에 이 여인이 죄를 범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단 한 마디로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백하게 말씀하지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이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이 여자가 많은 죄를 – 적은 죄가 아닙니다 –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cf. 47절). 이렇게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자와 이 여자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하나있지요. 하나님, 혹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섬기는 신적인 존재는 인간을 바라볼 때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가는 의인은 하나님께 호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벌이 임합니다. 이것이 어느 사회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교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의인이냐 죄인이냐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 42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떠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지 찾아보며 본문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누가 더 사랑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의 ‘바리새인’으로 불리던 남자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여인’이라 불렸던 사람보다 훨씬 의롭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은 죄를 지은 여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남성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그리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평가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본문 44절부터 보십시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44a절)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4b절)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당연히 바리새인 남자가 아니라 이 여자입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5절)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의롭게 사는 남자가 아니라, 많은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56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남자와 죄인이라 불리던 여자 가운데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이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변하지 않는 기준입니다. 

우리 중에는 경건의 바른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거나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경건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다양한 봉사를 실천하기도 하고, 언제나 바르고 정직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을 경건하게 가꾸어가려는 노력은 너무도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평가함에 있어 ‘누가 더 의로운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욥을 고소했던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까닭없이 이유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비록 기도 응답이 더딜지라도, 바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의 복과 재물의 복과 자녀의 복을 잠시 가져가실 지라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욥이 그러했고, 신약시대에 본문이 묘사하는 죄 지은 여자가 그러했지요.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한결같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죄용서의 관계 

죄를 지은 여자는 비록 바리새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를 보시며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선포하시네요. 바로 여기에 사랑과 죄 용서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죄용서를 누리는 깊이는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시잖아요. 

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오천 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오백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지요. 그런데 오백만원을 빌려쓴 사람이든 오천만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낼 형편입니다. 그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천만원을 빌린 사람에게 그 오천만원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오백만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그 오백만원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명백합니다. 내가 죄를 적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나의 죄가 용서받았지만 그 은혜가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저 적당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태산보다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신 죄 용서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요? 본문의 여인처럼 뜨겁게 사랑합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47a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b절) 

자,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적당히, 그저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로만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왜 죄인이었던 그 여자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을까요? 이제 우리는 그 대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를 많이 지었던 그 여자는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여인의 마음에는 자신의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였기 때문이지요. 

사단은 여전히 우리를 고소합니다. “너희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건강을 빼앗아가셔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을 복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셔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이 제 아무리 강력할 지라도 우리는 사단의 모든 공격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까닭 없이, 심지어 우리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장 11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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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