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가르침, 곧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주신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지요. 나는 죄인인데, 나는 용서받을 방법이 없는데,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입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바로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세리를 부르신 예수님
우리는 지난 주에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7절)
예수님께서 이번에 제자로 부르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레위라는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그 이름이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이름을 마태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는 우리가 흔히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 본문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은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셨지요. 이번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어부들이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는 장면과 세리가 세관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장면은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느낀 감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칭찬받을만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직을 당하고 지탄을 받을만한 장면이었지요. 왜 그렇습니까? 당시는 로마 제국이 유대인을 지배하던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라는 직업은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로마 제국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직업이었으니,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요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배신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은 세리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맡기면서 각 지역마다 세금으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총액만 정해두었습니다. 세리들은 현대적 개념의 월급과 같은 수입이 없었고, 로마제국으로부터 양도받은 세금을 걷는 권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세금을 최대한 많이 거둬 로마제국이 정해둔 금액만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가 자신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세금을 과도하게 걷거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온갖 불의를 행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를 읽다 보면 그 시대 가장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두 개의 직업군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자들에게 해당하는 직업이 ‘창녀’였다면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당연히 경건한 유대인이라 자청하던 사람들은 세리들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이 회당,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지금 세관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남성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죄악을 바로 지금 행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이라고요? 죄인을 위한 복음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세관에 있던 레위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그 죄인을 자신의 제자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일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8절)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으니, 그 세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사람들에게 걷은 세금, 돈이 가득했겠지요. 여러분, 그 시대는 지금처럼 세금을 계좌로 송금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실물 화폐로 모든 거래가 진행되던 시대였지요. 그러니 세금을 걷으면 다 실물 화폐로 거두었을 것이고, 그 모든 세금을 당연히 세관에 보관해 두었겠지요. 그런데 세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한평생 물고기를 따라다녔던 어부가 두 배를 가득 채운 만선의 축복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한평생 돈을 추구했던 세리, 자신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방하였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까지도 다 참아내며 오직 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세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그 모든 돈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본문 28절의 말씀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일어나”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지요. 여전히 레위는 신앙도 민족도 다 버리고 오직 돈만 쫓아가는 ‘죄의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으니, 이제 그 죄악 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변화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돈만 좇았던 사람이, 이제는 돈을 등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악에 물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회개의 사건이요,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난 레위의 삶에 이제 천국의 잔치가 펼쳐지게 됩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29절)
레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여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잔치를 베풀고 있네요. 오직 돈을 좇아 살아갔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며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만 당하던 레위의 집에 먼저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면서 천국의 잔치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천국의 잔치를 맛보며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불러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실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돈만 쫓아가던 세리도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됩니다. 하물며, 오늘 거룩한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에 앉아계신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지 못하시겠냐고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회개하여 죄악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님의 말씀만 따라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예수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셔서, 예수님을 모시며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으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세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회개하고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0절)
이 장면에서 누가 비방합니까?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네요.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 곧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향해 비방합니까? “그 제자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네요. 어떻게 비방합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서 어떻게 세리 –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라고 말씀드렸지요 –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교제하느냐고 비방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사람들의 출신, 특별히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었던 레위의 출신을 몰라서 이렇게 비방하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요. 다 알지요. 다 알면서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너희가 어떻게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느냐’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비아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아, 맞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너희가 원래 죄인이었지. 너희가 원래 세리였지. 너희가 원래 제자가 될 자격도 없었던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였지. 그러니 너희들이 여전히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있구나.’ 뭐~ 그런 식의 조롱이었어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의 마음에 뿌리 깊게 박힌 마음이 무엇입니까? 자만심이지요, 자만심. 너희 같은 죄인들이 무슨 제자냐? 너희 같은 출신들이 무슨 제자가 될 수 있느냐? 적어도 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배우고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한평생 예루살렘에서 율법의 법도를 정통으로 배운 사람이나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철저한 교만의 마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 설교의 제목을 떠올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입니까? 바로 죄인을 위한 복음이지요.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너희들은 다 죄인이지만, 나야말로 의인이라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복음의 은혜가 머물만한 조그마한 자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과 세리는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저 구별된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들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제자들이 자신을 향한 비방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신하여 대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1절)
예수님께서 먼저 비유로 대답하시네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시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주의하실 것이 하나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의 사람들을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의 관점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다 병들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아니, 다 죽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23절)
네,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과 심판의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두 가지고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먼저, 자신이 신앙의 관점에서 심하게 병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그 서기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해요. 온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죄악이 가득해요. 특별히 그들은 교만의 죄, 위선의 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조금 안다고 율법을 조금 지켰다고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자신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인 척,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의인인 척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중한 질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확신하니, 그들에게 최고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반면, 예수님은 또 하나의 분류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 그리하여 자신이 영적으로 중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들이지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시라고 예수님께 무릎으로 기도했던 베드로,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스스로도 혐오하였던 세리 마태와 같은 이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곧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결론을 내리십니다. 본문 32절이지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2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곧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생의 은혜.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은혜, 과연 누가 받아 누리게 됩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지 못할 죄인도 없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복음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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