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4. 3. 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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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의 거대한 구축함이 항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3킬로미터 전방에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불빛은 이 거대한 구축함의 항로 위에 정확히 놓여 있었지요. 구축함은 그 불빛을 향해 급히 신호를 보냈습니다. “너희가 우리 항로 위에 놓여 있으니 우로 20도 방향을 바꾸어 항해하라.” 그러자 그 불빛 쪽에서 곧바로 회신이 왔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으니, 너희가 좌로 20도 방향을 바꾸라.” 이에 구축함은 다시 신호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미 국방부의 명령을 받아 항해 중이다. 그리고 여기의 함장은 미해군 중장이다. 그러니 빨리 방향을 바꾸어 항해하라.” 그러자 불빛 쪽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저는 미 해군의 일등병입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등대지기입니다.”여러분, 결국 누가 방향을 바꿔야 합니까? 등대입니까? 아니면 거대한 구축함입니까?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지요. 성도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다르면, 그리하여 성경의 말씀과 나의 가치관이 서로 상충하면 누가 입장을 바꾸어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에, 성경의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다르면 당연히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런데 등대지기에게 방향을 바꾸고 위치를 바꾸라고 명령하는 해군 중장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교정하기를 매우 싫어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리고 오른 본문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됩니다. 


청지기의 직분


자,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청지기라는 용어는 주로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단어이지요. 여러분,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란 주인을 대신해서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재산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관리하는 권한은 청지기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 청지기라는 지위와 그 권한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신약성경은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의 소유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또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다 주었지만 여전히 그 모든 소유권은 주인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 건강 ∙ 재물 ∙ 능력 ∙ 지위 이 모든 것은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많은 것이 주어져 있지만, 나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강조하는 청지기 의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청지기 의식의 반대말은 주인 의식입니다. 

흔히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 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대부분은 칭찬받고 박수 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교회는 회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촌교회를 개척한 이동원 목사님께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우려할 만한 모든 일들은 
청지기 의식에서 떠나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가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우리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청지기에게는 사용권이 있지만 소유권은 없습니다. 주인이 허락한 시간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해야 합니다. 주인이 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나의 것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 나의 것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교회, 우리의 것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저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으로 아름답게 보전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청지기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청지기를 고용했습니다. 그에게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그가 능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는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지 못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해고를 통지합니다. 해고를 통지받은 청지기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의 고민을 들어보십시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3절) 

깊은 고민에 빠졌던 청지기가 마침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청지기의 자리에 있을 때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은 50말로 고쳐주고,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의 행동이 본문 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 

주인이 청지기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칭찬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가 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성경을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본문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난해구절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비유가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 주인의 입장에 있다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 보세요. 우리가 그 주인의 입장이라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주인의 입장에서 이 청지기를 칭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말씀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이해하기 힘들면 이해하기 힘들수록 여러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면 정확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여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우십니까? 신앙생활의 횟수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주인이 그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인의 입장에서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주인이 청지기를 고용한 이유도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청지기로 고용하니 주인의 재산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해고를 통보했더니 빚을 탕감해 주면서 주인의 재산이 더 줄어들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손해만 입혔으니 어떻게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 청지기를 칭찬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인의 재산이 늘어났느냐 줄어들었느냐에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 인간이 좀 손해를 보게 한들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소유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강조점은 주인의 재산이 줄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청지기가 해고 통지를 받았고, 청지기로서의 지위를 모두 잃어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청지기는 주인이 아닙니다. 청지기로 있을 때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청지기의 직분만 빼앗으면,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남지 않지요. 이것이 청지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재물이 많든 적든, 우리는 내 손에 있는 재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많든 적든 언젠가 내 손에 있던 모든 재물이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그때가 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때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내 손에 있는 모든 재물이 사라지는 그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9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永住)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9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네,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마음껏 사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권한을 가지고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청지기로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재물을 주인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재물의 바른 용도는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의 바른 용도는 내일에 더 큰 부를 이루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의 바른 용도는 지금 나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재물의 바른 용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에게 내가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기름과 포도주를 허비하고 여관비를 지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택해야 하는 바른 재물의 사용법입니다. 그렇게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永住)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9절)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나는 성경말씀 중에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는 마음이 편안했는데,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나니 마음이 괴로워지는 분들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세상은 재물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비록 세상은 재물을 내일의 더 큰 부를 쌓기 위해 사용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궁핍한 사람들 ∙ 환란을 당한 사람들 ∙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친구와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영주할 처소”,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가정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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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3. 12. 1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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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은혜”가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너무도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까닥 없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여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아무런 이유나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반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니, 사랑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지금, 제가 드린 이 질문은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우스 땅에 욥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성심성의껏 섬겼던 분이지요. 그런데 욥에 대해 사단은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장 9절) 

사단의 논리는 맹백합니다. 욥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이유는 딱 한가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만일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사단의 표현 그대로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외면하셔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의 복을 빼앗아 가셔도, 하나님께서 내 몸에서 건강의 복을 가져가시더라도 여러분은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시겠습니까?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범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조금만 나에게 주신 복을 가져 가시더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지요. 그러니 욥과 같이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찬양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관점 - 사랑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점이 달랐습니다. 먼저 한 사람은 남성이고 또 한 사람은 여성이었지요. 그들을 성별부터 달랐네요. 그런데 본문에서 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의인과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바리새인이” 그렇습니다. 이 남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남자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 남자의 집에 들어온 여자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묘사합니까?  37절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죄에 대해 옹호하려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구조 때문에 이 여인이 죄를 범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단 한 마디로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백하게 말씀하지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이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이 여자가 많은 죄를 – 적은 죄가 아닙니다 –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cf. 47절). 이렇게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자와 이 여자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하나있지요. 하나님, 혹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섬기는 신적인 존재는 인간을 바라볼 때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가는 의인은 하나님께 호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벌이 임합니다. 이것이 어느 사회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교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의인이냐 죄인이냐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 42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떠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지 찾아보며 본문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누가 더 사랑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의 ‘바리새인’으로 불리던 남자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여인’이라 불렸던 사람보다 훨씬 의롭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은 죄를 지은 여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남성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그리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평가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본문 44절부터 보십시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44a절)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4b절)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당연히 바리새인 남자가 아니라 이 여자입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5절)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의롭게 사는 남자가 아니라, 많은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56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남자와 죄인이라 불리던 여자 가운데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이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변하지 않는 기준입니다. 

우리 중에는 경건의 바른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거나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경건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다양한 봉사를 실천하기도 하고, 언제나 바르고 정직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을 경건하게 가꾸어가려는 노력은 너무도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평가함에 있어 ‘누가 더 의로운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욥을 고소했던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까닭없이 이유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비록 기도 응답이 더딜지라도, 바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의 복과 재물의 복과 자녀의 복을 잠시 가져가실 지라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욥이 그러했고, 신약시대에 본문이 묘사하는 죄 지은 여자가 그러했지요.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한결같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죄용서의 관계 

죄를 지은 여자는 비록 바리새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를 보시며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선포하시네요. 바로 여기에 사랑과 죄 용서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죄용서를 누리는 깊이는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시잖아요. 

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오천 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오백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지요. 그런데 오백만원을 빌려쓴 사람이든 오천만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낼 형편입니다. 그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천만원을 빌린 사람에게 그 오천만원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오백만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그 오백만원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명백합니다. 내가 죄를 적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나의 죄가 용서받았지만 그 은혜가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저 적당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태산보다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신 죄 용서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요? 본문의 여인처럼 뜨겁게 사랑합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47a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b절) 

자,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적당히, 그저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로만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왜 죄인이었던 그 여자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을까요? 이제 우리는 그 대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를 많이 지었던 그 여자는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여인의 마음에는 자신의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였기 때문이지요. 

사단은 여전히 우리를 고소합니다. “너희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건강을 빼앗아가셔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을 복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셔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이 제 아무리 강력할 지라도 우리는 사단의 모든 공격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까닭 없이, 심지어 우리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장 11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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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9. 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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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교회의 지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농사를 짓는 그리스도인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교회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인 논에서도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제는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논에 물길을 내고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논에 나가보니, 누군가 자신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터트려 이 형제의 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논에 물이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분노가 있었지만, 이 형제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수로를 복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형제의 기도제목을 다 들은 어느 교회 지도자 한 분이 크리스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님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신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는 건 아닌지 기도해 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소.” 

이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로 제가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의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이 주변의 논에 흘러가도록 물길을 터놓았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워치만 니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형제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했다.”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25a절)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그러한 예수님을 좋아하여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주님 곁을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게 되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둘러보시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나요? 곧, 무리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큰 은혜를 받고 그 주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며 은혜의 말씀을 듣고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며 하루하루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곁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나의 시간을 바치고 나의 물질을 드리며 나의 정성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주변에 몰려있는 무리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첫번째 조건이 본문 26절에 등장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6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을 말씀하시는데, 본문 27절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먼저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향한 사랑이나 나 자신을 향한 애정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심지어 올바른 일이 아닌가요?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를 감내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 힘겹고 고단한 길을 비켜 지나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우리 모두에게는 가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수 있는 권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의 길을 돌아가며 회피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이 불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행동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의 말씀을 듣고 병을 치유받고 배가 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는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마땅한 권리, 그 자연스러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중국 교회의 어느 지도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일을 행하였다고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올바른 일을 넘어 더 위대한 일을 요구하십니다. 한마디로, 무리의 자리에서 벗어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자양교회를 세우신 월리스 앤더슨(Wallace J. Anderson)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그의 아내 릴리안 앤더슨(Lillian E. Anderson)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신은 아직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양화진에 묻혀 있지요. 자양교회에서 항존직으로  피택받아 훈련을 받으시는 분들은 다 함께 양화진을 방문하여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님의 묘역을 찾아가곤 합니다. 일반 성도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의 일꾼이 되는 항존직으로 선택을 받으면, 우리는 왜 양화진을 찾고 특별히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님의 묘역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지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머너먼 타지로 선교를 오셨고,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쳤던 분들의 ‘희생정신’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나아가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올해 항존직으로 피택되신 분들과 또다시 양화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날 함께 참여하셨던 어느 분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거나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신앙을 위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질문은 항존직으로 피택되어 교회의 일꾼이 되려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에게 던져진 질문이었고, 나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희생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나의 마땅한 권리와 나의 합당한 권한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올바른 일을 넘어 더 위대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주변에 모여있던 무리는 될 수 있을 지라도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비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치러야 하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동일한 주제를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8절) 

망대를 건축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재력이 공사를 모두 마칠 수 있는 정도인지 여부를 사전에 따져 보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만일 이러한 과정을 생략해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공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완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큰 손길이 그들에게 입혀질까요?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29-30절) 

자, 예수님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또 하나의 비유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전쟁을 결정하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1절) 

전쟁이라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만 의존할 수 없지요. 냉철하게 양국의 군사력을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군대를 우리의 군대가 이길 수 있는지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승산이 있을 때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이죠.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2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비유에는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마지막까지 승리하지 못하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망대를 세우기 위해 기초를 놓았습니다. 약 절반 정도의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자본이 없어 거기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약 절반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다고 그 사람에게 망대를 완공하였을 때와 비교하여 절반 정도의 유익이 돌아가나요? 아닙니다. 아무리 절반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더라도 완공하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들인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뿐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군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승기를 잡았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적군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면 그 임금에게는 전쟁을 수행한 유익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전쟁을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더 큰 피해가 그 나라와 그 왕에게 돌아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모든 소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끝까지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첫자리

오늘 본문은 모두 열 절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참으로 다양한 조건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나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 십자가의 길, 제자가 되기 위한 비용, 중도에 멈추었을 때의 위험성, 제자도를 미리 생각해볼 것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마음의 첫자리”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내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던 중국의 어느 그리스도인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농부의 논에 나누어주자,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못되어 주변의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는가?” 그러자 그 형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네.” 그러자 깜짝 놀란 농부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자네가 소작농이었나?.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자 그리스도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나의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네. 그분은 나에게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명령하셨다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라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가요? 혹, 입술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인 듯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께서 참으로 내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 주님께 내 마음의 첫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내 입술의 고백을 넘어 내 마음의 첫자리를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께 내어 드릴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된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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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8. 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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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레너드 스윗 교수는 인간이 음식을 먹는 행위를 세 개의 영어 단어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가장 낮은 단계, 가장 열등한 단계의 먹는 행위로 레너드 스윗 교수는 그것을 Feeding이라고 명명했습니다. Feeding이라는 단어는 주로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가리키지요. 그래서 굳이 한글로 번역하면 ‘사육’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음식을 먹는 모습 속에서도 이와 같은 Feeding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먹는 것, 단지 배고픔을 잊어버리기 위해 먹는 것, 흔히 하는 말로 단지 살기 위해 먹는 것. 비워진 나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몸에 집어넣는 행위. 그것이 Feeding입니다. 
레너드 스윗이 이야기하는 먹는 행위의 두 번째 단계는 Eating입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영어 단어이지요. 레너드 스윗이 Ea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은 음식의 맛을 추구하거나, 더 좋은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른바 맛집을 찾아다니는 단계,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 조금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Feeding의 단계를 넘어서, 그리고 Eating의 단계를 넘어선 보다 높은 차원의 먹는 행위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Dinning입니다. 일반적으로 Dining은 우리말로 ‘정찬’ 혹은 ‘만찬’으로 번역하지요. 매우 잘 차려진 식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Dining을 그 음식의 메뉴보다는 식사하는 사람의 정신적 차원, 무엇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이해합니다.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풍성한 감사의 시간,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여러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행복의 시간, 그것이 바로 레너드 스윗이 말하는 Dining이라는 높은 차원의 식사입니다. 

최근 여러분의 식사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하루 식사를 하시면서, 혹은 지난 한 주간 음식을 드시면서 여러분의 식사는 혹여 시간에 쫓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바쁜 Feeding의 단계에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고, 조금이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음식 자체에만 관심을 쏟으며 그 무엇인가를 먹는 Eating의 단계에 머물렀던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음식과 식탁의 의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식사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람들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한 Dinning의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음식을 대하는 방식이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를 너무도 중요하게 여겼고 여기에는 그들의 신앙이 담겨 있었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식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일몰, 곧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 이르기 전에 온 가족이 식탁에 함께 앉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식탁 위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이지요. 온 가족이 식탁에 자리를 잡으면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내와 자녀를 축복하며 식사가 시작됩니다. 이 자리에서 이른바 ‘하브루타’라 불리는 성경에 대한 대화가 중심이 됩니다.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켜 두었던 촛불은 스스로 꺼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가족들은 그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며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유대교의 한 랍비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 명이 한 식탁에서 먹으며 토라의 말씀을 거론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식탁에서 먹는 것과 같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먹는 행위는 결코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이 아니었고,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참으로 고상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식탁에도 인간의 악한 본성은 표출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식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한계는 ‘배타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탁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보니, 유대교 종파에 따라 엄격한 규칙을 정하여 지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엄격한 율법 해석에 동의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바리새파 친구들과만 식사를 했습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식사의 규례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며 그들도 그들끼리만 식사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배타성이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건전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식탁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그 넓은 포용성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초대받을 때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어느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열린 식사 자리에 참여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먼저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사람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시지요. 먼저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7a절) 

예수님께서 그날 사람들의 행동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하여 그곳에 앉는 모습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식사를 위해 놓아둔 의자가 일반적으로 영어 알파벳 “U”자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알파벳 “U”의 아랫부분에 주로 주인이 앉고 그 양쪽으로 그날 참석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앉곤 했지요. 주인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앉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힘과 특권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이 누가 보아도 높은 자리, 힘과 특권을 상징하는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7b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8-9절) 

내가 자의로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 정도의 권세와 사회적 지위라면 이 정도 자리에는 앉아도 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누가 등장하나요? 그 잔치를 주관하는 주인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와서 자리를 다시 조절하면서 끝자리로 옮기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느냐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반대의 경우도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0절)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모두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처세술을 알려주는 좋은 말씀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내가 스스로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게 될 것이니 더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교만해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그러한 나를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고 더 부끄러운 곳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누구든지 한번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식사자리에서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으면 마지막까지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식사 자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마지막까지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 모임을 주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높임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자랑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권세도 누리고 특권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 7절과 같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높은 자리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임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한없이 낮추어질 뿐이요, 자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냉정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그러한 현실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먼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 역시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지금도 밤낮없이 경쟁하고 있잖아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7절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 번만 읽어도 어떠한 말씀을 하고 계신지 쉽게 이해가 되는 듯 하지만, 사실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을 잘 표현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자, 비유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가 드리는 질문에 마음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주인이 등장하죠. 처음에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끝자리로 옮기고, 처음에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높은 자리로 이동시키는 주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비유라면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이 주인은 실제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늘 그렇듯,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현실이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교만을 멀리하고 겸손의 마음을 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님께서 천국 잔치의 주인이 되어 마침내 우리를 가장 적절한 자리로 옮겨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은 교만한 자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의 무시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올려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할 때

예수님은 먼저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권면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2절) 

지금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할 때 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살펴보니 잔치를 주관하여 손님을 초대한 사람이 예수님의 표현대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만을’ 청했습니다. 그 바리새인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만’ 초대한 이유는 12절 뒷부분에 나오지요.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너에게 갚음이’ 되도록, 곧 내가 다른 사람을 초대할 때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오늘날 이른바 자기계발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가 아닌가요? 여전히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자기 계발서를 읽어보면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고 말하지요.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식사자리에 초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 초대해야 할 대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3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니리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절)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 초대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들, 곧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은 아무리 식사 자리에 초대하여 정성으로 음식을 대접해도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그들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무엇인지 이제 말씀하시네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가난한 사람, 몸 불편한 사람, 저는 사람, 맹인들에게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이 세상에서는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때는 언제입니까? “의인들의 부활 시에” 의인들의 부활하는 그때,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러면 여러분, 이 말씀에서 여러분의 선행을 갚아주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네,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잘 대접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니, 그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가난하고 힘없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낮추어도 이 세상에서 높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되돌려줄 수 없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겸손하기 위해 노력하고 힘 없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위한 자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식사자리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초대하셨던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은 전혀 달랐지요. 예수님은 세리들, 죄인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같은 바리새인들만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식사자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베푸신 식사 자리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초대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죄인과 세리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식사는 자신들만의 모임, 자신과 동일한 바리새인들만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그들의 식탁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단호합니다. 만일 바리새인들 사이의 잔치에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위한, 곧 ‘너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식탁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에는 나만을 위한 자리가 아닌 너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자리를 넘어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을 향한 그들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으십니까? 우리가 나를 위한 자리를 넘어 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바로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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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8. 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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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곧,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의 치유로 말미암아 어떠한 마음이 들었습니까?) 
기뻐하니라 (17절)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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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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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날 저녁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자신을 팔아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 가운데 리더로 손꼽힐 수 있는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날 밤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유월절 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의 충만한 기쁨, 하늘의 풍성한 즐거움을 약속해주셨지요. 그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을까요? 삶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의 공동체

오늘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을 키우는 어느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아흔아홉 마리가 있고, 그의 눈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이 무리를 떠나 홀로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는 들에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지요. 마침내 잃어버렸던 그 한 마리를 되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잃어버렸던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들에 놓아두었던 아흔아홉 마리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잃은 양의 비유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다른 두 개의 비유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동일합니다. 본문에 이어 등장하는 비유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의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장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동일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즐거움이 가득 넘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즐거운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였을 때,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불편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더라도 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압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래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기쁨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처럼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으로 점철될 때가 많을까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비유에는 큰 기쁨을 누리는 대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기쁨을 누리고 누가 기쁨을 잃어버렸는지 살펴보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지도 알 수 있겠지요. 자, 이 두 그룹의 차이를 보다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그 배경이 등장합니다. 과연 누가 등장하는지에 주목하면서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제일 먼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곧 예수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고 말씀합니다. 이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사람들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이들이 잃은 양, 곧 목자가 돌보았던 백 마리의 양 가운데 목자의 돌봄으로부터 벗어났던 한 마리의 잃은 양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목자와 양 떼로부터 이탈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양 자신의 잘못과 실수가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양은 무리로부터 이탈하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목자와 양 떼에게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점차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고, 맹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그 양은 생명의 큰 위협을 느꼈겠지요. 그렇게 이제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절망뿐이라고 자포자기할 그때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목자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침내 목자의 어깨에 업혀 양 떼로 돌아오는 이 양의 마음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목자를 만나 양 떼로 돌아온 한 마리의 양, 곧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온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은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2절에는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네요. 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할까요? 그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해당하겠네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들에 풀어놓았을 때 그 들판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에 기쁨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목자가 이끄는 양 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불평과 원망과 시기심만 가득해졌습니다. 

과연 무엇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는 큰 기쁨을 선사하였고, 과연 무엇이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들판에 늘 있었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게는 기쁨이 아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곧, 은혜와 의무의 차이입니다. 잃어버렸던 한 마리 양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입니다. 목자의 들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목자의 양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홀로 남아 맹수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자가 찾아왔잖아요. 그러므로 이 한 마리의 양에게는 목자의 울타리, 목자의 들판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당연히 그 마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지요. 반면,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무감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목자가 어디로 이끌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들로 하여금 목자의 들판을 떠나지 않게 붙잡고 있었어요. 이러한 의무감이 그들을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두고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은혜의 체험을 가지고 목자의 들판에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있지만, 동일한 그 자리에 책임감으로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주님의 푸른 들판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서 주님의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우리 가운데 그 누가 나는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꼴을 받아먹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어 주님의 들판에서 쫓겨나야 했고 주님의 양 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참된 소망이 없이 자포자기하고 있을 그때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어깨에 짊어지시고 주님의 들판과 주님의 양 떼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이니 당연히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이 가득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무와 책임감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들판에 앉아 있는 것이 은혜였는데, 어느덧 그 자리는 내가 떠나서는 안되는 의무와 책임이 된 것이죠. 그 자리를 떠나면 벌을 받을 것처럼 느껴지고 그 자리를 떠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그러니 마음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어떠한 마음으로 앉아 계시나요? 주일을 맞이했으니 마땅히 예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습관으로 앉아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만일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시간이 문제지 그분들의 마음에는 신앙생활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기쁨이 곧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자리라고 여기시는 분들은 잠시 잠깐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고 삶의 어려움으로 내 마음에 즐거움을 빼앗기는 순간도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기쁨

신앙생활의 기쁨, 그것은 은혜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임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의무과 책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은혜로 지속될 수 있을까요? 혹 은혜가 사라지고 의무만이 남았을 때, 그리하여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분문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본문 1-2절에 등장하는 세번째 등장인물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등장인물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등장인물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관찰해보면 이 두 그룹의 사람들 외에 본문에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여기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키지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양 백 마리를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면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가는 목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하고 있는 큰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이 목자의 기쁨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누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5-6절)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기뻐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큰 기쁨을 부어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원천이 있다면,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차장오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요 우리를 발견하여 기쁨으로 어깨에 메고 돌아오신 주님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에서 의무와 책임으로 바뀌었다면, 나의 신앙생활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의무와 책임만 남아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발견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그 누구보다 즐거워하셨던 주님의 기쁨이 다시 한번 여러분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삶의 거대한 풍랑이 몰려와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의 예배생활, 
나아가 주님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인생에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언제나 충만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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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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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셨던 핵심 메시지는 ‘회개’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때부터” 여기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 때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그러므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생활을 일삼았던 나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다가 그 삶을 돌이켜 믿음의 길로 돌이킬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해오신 분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자신이 익숙한 삶의 방식과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지 않던가요? 복음은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지요? 복음은 차별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복음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교만하여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복음의 진리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니 그 방향을 돌이켜 복음의 진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신앙생활을 매우 오래하신 분들은 아마도 충분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급격히 부흥하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넓게 보아 1900년대 후반이었지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철야기도도 참 많이 했었는데, 당시의 철야기도는 말 그대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기도하고 그 다음날 새벽기도로 이어지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흔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성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의 많은 내용이 회개 기도였습니다. 저 장로님, 저 권사님은 회개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열심히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지요. 교회학교에서 수련회나 성경학교를 한다면, 그 기간 내도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지요? 수련회나 성경학교에서 쉬지 않고 드렸던 기도는 바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너무 약해진 것은 물론이요, 참된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듯하여 애석한 마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이 현상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복음의 진리에 바르게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니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니, 지금도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져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요 이 땅의 교회는 어느덧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주제는 듣는 이들에게 편안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의 진리를 떠나려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회개가 있을 때만 우리의 내일에는 참된 소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에 회개의 영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진심 어린 회개가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회개의 참된 능력이 나타나 우리의 앞날이, 우리 교회의 내일이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두 개의 큰 비극적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1절)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는 제물로 사용했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외에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최소한 다섯번 등장합니다. 그러니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정치권력자가 저지른 학살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덞 사람이”라고 시작하네요. 실로암이라는 장소에 세워져있던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열여덟 명이 생명을 잃어버렸네요. 본문 1절이 묘사하는 사건이 권력자 한 사람의 횡포로 말미암은 비극이라면, 본문 4절이 묘사하는 장면은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일했습니다.여러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자,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예수님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큰 재앙을 만나 생명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저지르지 않은 큰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말이지요. 그 죄가 사람들에게는 가려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십니까? 본문 5절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다음이지요.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을 말씀하시네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본문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곧 예상치 못했던 재앙으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러한 재앙을 당할만한 죄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예수님께서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재앙을 당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가운데 어느 지점을 반대하며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을 만나 죽음을 당한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도” 그렇습니다. 큰 재앙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희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고 있으니 언제라도 재앙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기독교의 진리, 곧 기독교가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의 복음은 그 시작이 비극적인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먼저 우리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져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리하여 로마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예수님께서 지금 강조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도”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명만이 아니라,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열매를 얻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이전의 상태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심판이나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덧붙이시는 이른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처럼 쉬운 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지기를 고용하여 무화과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나아가 무화과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자, 이제는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겠지라는 마음으로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포도원의 주인은 결단을 내립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7절) 

지금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너무도 위태로운 상황이지요. 지금이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지기가 도끼를 휘두르면 큰 재앙을 만나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처럼 위태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 주인이 제공하는 풍성한 돌봄과 영양분을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원 주인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잘 조성된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오랜 시간 포도원지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처럼,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가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가 지금 당장이라도 도끼에 찍혀 큰 재앙을 만날 운명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 하나죠.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오늘 나의 삶에 적용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에서 절대로 제거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으신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아니라, 너희도”(X2)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회개의 열매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으니 찍혀 버려질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이 정도의 평안을 허락해 주시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로 지금 당장 큰 재앙을 당해도 전혀 이상 할 것 없는 우리들에게 이처럼 평안을 허락해 주실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절이 그 이유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포도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의 앞을 막아서지요. 그리고 간청합니다. 조금 더 유예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약속이지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지금 포도원 주인은 물론이요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일년을 더 기다릴 수도 있고요,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모든 좋은 거름을 다 줄 수도 있어요.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에 대해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에 따라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의 의미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본문의 ‘열매’를 ‘회개의 열매’라고 이해하면, 마지막 두 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가 올해는 회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제가 필요하면 도랑도 파주고, 
필요하면 거름도 줄 터이니 
그가 회개하기만 한다면(X2)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도 지금도 우리에게 기다리며 기대하고 계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변하지 않는 운명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만이 우리와 우리 교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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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1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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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으로도 많이 알려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은 처음부터 승패가 너무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친히 이끌었던 페르시아의 군대는 25만 명에 이르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급하게 징집한 그리스 군대의 숫자는 칠천 명에 불과하였지요. 그러나 그 칠천 명 중에는 조상 때로부터 전쟁의 용사로 살아왔던 300명의 스파르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에는, 한쪽은 높은 절벽이 놓여있고, 또 반대쪽은 깊은 바다가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은 좌우의 폭이 18m에 불과했던 그곳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테르모필레,’ 곧 열문이라는 뜻입니다. 스파르타인 300명은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바로 그곳 테르모필레를 막아섰지요. 테르모필레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는 스파르타인들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다음 날 아하수에로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정예부대를 투입했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25만 명의 잘 훈련된 대군이 고작 스파르타인 300명에게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스파르타인들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오래지 않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인 가운데 배신자가 나타났고, 그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절벽 위를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좌우폭이 18m인 매우 좁은 지역에서 싸운다면 제아무리 거대한 군대라 하더라도 300명의 용맹한 스파르타인들을 소탕할 수 없었지만, 이제 페르시아 군대는 그들을 앞과 뒤에서 포위할 수 있으니, 스파르타인 300명이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더 이상 막아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이 마지막 순간 가족들에게 남겼던 메시지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투스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300명의 용사로 25만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회피하지 않았고, 스파르타인답게 최후의 항전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지요.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걸어가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단 한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 이것이 전사로 한평생을 살았던 스파르타인의 삶이었다면, 우리 주님의 일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여, 나는 성부 하나님이 기대하신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노라” 


거부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 그들이 활동하던 장소,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예수님이 제발 떠나면 좋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다른 이유를 댑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는 이 이야기는 복음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전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 곧 헤롯에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소식이 정확한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들은 것인지 혹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위협하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분명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활영역에서 떠나시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기를 원했던 사람이 헤롯일 수도 있고 그 이야기를 직접 예수님께 전달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분명히 말했던 이야기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구약성경의 내용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많은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그런데 예수님의 이 한탄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적대시하였던 헤롯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일반 시민들도 그 주님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품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그들을 향해 성부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하는 많은 죄악이 있지요. 우리 인간이 범하는 수많은 죄 가운데 너무도 중요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죄를 하나 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중대한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만 꼽는다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유대인들이 범한 죄악이 두 가지로 요약되어 있네요.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 되어주심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악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매주 주일이 돌아오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만 저지르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사람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죄의 목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무감각의 죄”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요청했지요. 그들의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께 직접 전달되었을 때, 예수님은 매우 확고한 대답을 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2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칠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병을 고치시는 것은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겠다는 이 말씀은 아직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멈추거나 중단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이 멈출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시네요.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여기에서 제 삼일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적절한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이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장면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공생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33절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3절) 

예수님은 지금 메시아로서 걸어가야 하시는 공생애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시죠.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런데 그 길의 최종 목표지가 어디입니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성부 하나님께도 외면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나의 길을 가리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걸으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거부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거부할 때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호의를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인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5a절)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5b절)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가 되면 나를 보게 되리라’ 곧,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돌이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이끄는 25만명의 군대에 대항하여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싸움이 결말을 처음부터 예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파르타인으로서 스파르타인답게 행동하며 죽는 길을 선택하였지요.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스파르타인들의 이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다툼을 그치고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힘과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살라미스 전투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훗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테르모필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었다.”

예수님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제자들에게는 배신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의 실패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결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당당히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만일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할은 더 이상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하지 않는 것,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 생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심령마다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발자취가 분명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죄에서 돌이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지금도 따라가시는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따스한 품에 품어 주시는 그 은혜가 언제나 충만히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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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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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혹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적이 한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정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시대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의 시대는 과연 언제였을까요? 그 첫 번째는 모세의 시대입니다. 곧 출애굽의 과정에서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많은 기적을 집중적으로 행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시대 이후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는 또 언제였을까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멜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도 내려주시고, 온갖 신기한 기적을 집중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집중적으로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그 어떠한 시대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했을까요? 하나님의 기적을 그토록 많이 보고 체험했으니,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을까요? 정답은 ‘아니요’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열 가지 기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 생길만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그 땅을 점령해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고,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지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여 주셨고, 심지어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갈멜산에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을 직접 보았다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바알 신이 나 아세라 신과 같은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될 만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은 엘리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같은 인생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가장 먼저 장소의 변화를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1절) 

오늘 본문 이전까지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요단 강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에게 이끌리어 어디로 이동하시죠? 광야로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누가복음 3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첫째로 하늘이 열리고, 둘째로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에 임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한 마디로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장소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요단 강을 떠나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요단 강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광야는 고난의 장소요 시련의 장소요 시험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누리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곳인 요단 강을 떠나, 고난의 땅이요 고통의 땅이요 시험의 장소인 광야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신 시간과 예수님께서 광야에 머무신 시간은 큰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가신 이유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신 시간은 세례를 받고 아오시는 정도의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신 기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거주하신 기간은 모두 40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는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짧은 시간만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인 광야에는 40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거주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경험하신 체험과 광야에서 겪으신 시험,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셨던 짧은 시간과 광야에서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신 기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나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곤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간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한 분도 빠짐 없이 각자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아름다운 손길을 이야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삶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지금도 여전히 요단 강에 머물러 계신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현재 삶을 제가 다 알지 못하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요단 강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고통도 많고 고난도 많고 그래서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광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짧은 요단 강의 체험을 뒤로하고 오랜 시간 광야에 들어가 시험을 받으셨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때는 요단 강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였는데, 한때는 요단 강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체험하기도 하였는지 왜 지금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고 불평하지 마시고도 말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의 삶이 광야 같은 인생일진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험을 이겨내어 우리 주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적의 떡 VS 약속의 말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지요.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첫번째 시험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2절) 

여기 2절의 말씀은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생활하시면서 겪으셨던 고통스러운 과정을 묘사해주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십니다. 광야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먹을 음식, 마실 물, 거주할 집 등을 구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요.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나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이것은 광야에서 생활했던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고,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예수님에 대한 사단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3절) 

지금 사단이 예수님께서 던진 시험, 곧 사단의 첫번째 시험의 주제는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광야에서 음식을 얻지 못하여 굶주리고 계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사단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기적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신다면, 돌로 떡을 만들든 혹은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지게 하시든 필요할 때마다 기적의 떡을 만들어 주셔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모든 사람이 코로나로 건강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적적으로 바이러스를 이겨내야 한다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적적으로 재물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모두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기적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증거라고 사단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보다 구체적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4절) 

예수님의 말씀을 무심코 읽으면 우리 육신의 양식이 되는 떡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다음에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마 4:4).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육신의 양식인 떡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그보다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첫 번째 시험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신명기 8장의 흐름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8장을 찾아보시겠습니다. 신명기 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네요. 그리고 이제 이 명령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 8:1)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신명기 8장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4장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도 광야 40년은 시험의 장소요, 시험의 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에 대해 신명기 8장 1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은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광야 40년의 목적이 무엇인지 곧이어 그 목적이 등장합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여기에 시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면 시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자,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신명기 8장 3절에 등장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여기에 만나가 등장하죠?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라 기적의 떡입니다. 기적의 떡인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떡은 일반적인 양식이 아니라 기적의 떡인 만나를 말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살 길은 기적의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 같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단은 그 대답이 기적의 떡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을 인용하시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의 삶은 광야같고 지금 나의 삶에는 기적의 떡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신명기 8장 1절의 약속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마침내 그곳에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시는 손길을 참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

모세 시대는 구약 성경에서 손에 꼽힐 만큼 많은 기적이 일어난 때였지요.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아시잖아요.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떡을 매일 먹으면서도 그들에게 찾아온 시험에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기적의 떡을 원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그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또다시 수많은 기적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시기가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유대인들에게 기적의 떡을 먹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오병이어라고 부르지요. 그러면 여러분, 기적의 떡을 먹었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변하여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나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떡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신앙인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기적의 떡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사단의 첫 번째 유혹입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물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기적의 떡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기적의 떡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광야 같아서 기적의 떡을 갈망하기 마련이지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의 마음을 기적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도 넘어지고,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실패했으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사단의 시험에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단의 이 시험에 넘어졌을지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넉넉히 이겨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X2)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1) 

비록 지금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손이 지금도 우리를 돌보아 주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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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1. 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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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선언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세계의 주요한 종교를 창시하였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 등 세계의 성인들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이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스스로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든지, 혹은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는 선언에 담겨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빈 들에서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을 때 세상의 통치자들이 누구였는지를 나열하며 시작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장면을 묘사할 때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선지자들의 소명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역사적 신빙성을 부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도 로마 제국의 디베료 황제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렸습니다. 그가 임명한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와 같은 분봉왕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시대에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대부분 로마의 황제를 취재했겠지요. 그들은 총독의 행동이나 분봉왕들의 발언에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 세속 권력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종교 권력을 틀어잡고 있었던 대제사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의 이름이 안나스와 가야바였다고 기록하여 주네요. 그러므로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영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해 제일 먼저 대제사장들이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합니까? 황제와 총독과 분봉왕들이 거주하는 권력의 중심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하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도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의 황제가 살던 황궁에 임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빌라도 총독이나 누가복음 3장에 등장하는 여러 분봉 왕들에게 임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 2절에는 버젓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지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선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국민은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선거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거에 임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대통령 한 명을 잘 뽑는다고 우리 나라가 문화 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우리나라가 행복이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수많은 선거를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은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국민들의 이목도 청와대와 여의도를 향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로마에는 디베료 황제가 있었고, 유대에는 빌라도 총독이 있었으며, 분봉 왕으로는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디에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교회가 참 많이 있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울 시내에는 규모도 크고 건물도 화려하며 내부시설도 잘 갖추어진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제사를 주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한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언론은 대선 주자들의 말과 행동에 온통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마음과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설교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임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빈 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왕궁의 화려함도 없고, 왕궁에 있을 법한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할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그저 황량한 빈 들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빈 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 빈 들로 갔지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 요한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어요.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5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요한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축복이 사람들의 마음을 헛된 기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이죠. 15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의 밖에서 나를 도와주고 나를 이끌어주고 나아가 나를 구원해줄 구원자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면을 보고, 세례 요한을 통해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니 사람들의 마음에 헛된 기대감이 가득해졌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의 뒷부분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대답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인가요? 아니요. 요한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도하고 때로는 그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요. 이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거든요. 세례 요한은 분명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더 나아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커다란 실망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민감하게 눈치 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대답해줍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6절) 

요한의 대답은 먼저 요한 자신과 예수님에 대한 비교로 시작됩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세례 요한은 자신의 능력과 예수님의 능력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를 대조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는 증표로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심령이 온전히 변화시켜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의 삶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 오늘 우리의 삶에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곧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7절)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심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농부가 가을 추수 때에 행하는 일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지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마지막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모든 심판을 보류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목격하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인류의 마지막 그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임하기 전에도 주님께서 친히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자, 세상에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일 수도 있고 총독이나 분봉왕이 될 수도 있지요.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처럼 종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하였지요? 빈 들에 임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집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면이 달라지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우리의 심령이 회복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통치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특징 하나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는 왕궁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 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이 세상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품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성도 여러분, 비록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 하나 없는 빈 들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겨자씨와 같아서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드시 자라날 것이요, 자라난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될 것이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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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