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놀라운 사건과 역사적 장면이 가득 담겨 있지요. 그리하여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성경의 내용을 영화로 제작하였는데요. 그러면 여러분, 신구약성경 66권 가운데 그 내용이 가장 많이 영화로 제작된 성경의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힌트를 드려볼까요? <십계>, <이집트 왕자> 이러한 영화를 떠올리시면 될 듯합니다. 네, 그렇지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많은 영화로 제작된 책은 출애굽기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의 많은 장면이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출애굽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웅장하고 흥미롭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웅장하고 역동적인 사건들이 가득한 출애굽기이지만, 그 사이의 모든 내용을 지나치고 처음 1장의 내용과 마지막 40장의 내용만 비교하면 참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 출애굽기가 시작하는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로 살면서 매우 강도 높은 강제노동에 동원되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도, 인권도, 내일에 대한 소망도 없었지요.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형편은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가 묘사하는 그 수많은 사건이 다 지난 뒤, 출애굽기 40장의 마지막 단락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출 40:34)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위치한 성막에 충만하게 임재하였지요.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출애굽기의 마지막 구절을 한 목소리로 자막을 통해 읽어보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 40:38)
이제는 밤이든 낮이든 하나님의 영광이 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였고, 그들은 길로 행진하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사건들 하나하나만 따라가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근시안적 관점이었을 뿐이지, 조금만 넓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은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비참한 인생에서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삶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는 어떠한 크고 작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있었습니까? 목사님, 지금까지 제가 살면서 격은 일들은 책으로 쓰면 장편소설이 되고, 영화로 만들면 출애굽기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 매주 매월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우리의 인생을 조금만 넓게 본다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비참한 인생을 살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으로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Move One. 변화의 복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11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지금 당장 나의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들만 쫓아가지 말고, 잠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는 권면이지요.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11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그때의 일 곧 과거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그 때에”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 곧 그때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11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은 무리들에게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본문 12절 말씀도 보십시오. “그때에 너희는” 다시 한번 ‘그때에’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니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참된 소망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그 때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이 묘사하는 ‘그 때에’라는 단어와 대비되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니, 본문 13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제는’ 곧,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이제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자, 이제는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본문 13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해 볼까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3절)
그 때는 우리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는 은혜 밖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 없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떠나 아무런 소망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 19절이 분명히 선언하는데요. 본문 19절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19절) 아멘.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는 복음의 은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이지요.
물론, 내가 오늘 예수님을 믿었다고 내일 당장 완전히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오늘 예수님을 믿었다고 칼로 종이를 자르듯이, 혹은 가위로 실을 끊어내듯이 과거의 삶이 완벽하게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출애굽기라는 성경의 책 안에 영화로 제작할 수많은 소재와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에도 매일 매주 매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손길은 변함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서 조금도 헤어나오지 못했던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언제부턴가 나의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오게 되잖아요.
과거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앞으로 일어난 지 모르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억눌려 살았던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의 힘만 믿고 이 험한 세상을 살다 보니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고단하고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아름답게 바꾸어 가고 계십니다.
Move Two. 화해의 복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때에’그리고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비교해 주었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변화, 곧 복음으로 말미암은 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화해’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14a절)
여기에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등장하네요.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 곧 우리의 화목, 우리의 화해, 우리의 평화가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둔 갈등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곧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 자신들만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존재라고 여겼지요. 그렇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미워했습니다. 반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인들이라고 경멸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당연히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서로 미워하고 싫어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가 있었으니 그것이 어디였을까요?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4절)
여기에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담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멋진 성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멋지고 화려한만큼, 그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들은 절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거든요. 그러니 성전의 건물이 서로 분리시키고 나누고 갈등을 조장하는 장소였어요.
반면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크고 화려한 건물은 없었습니다. 정해진 예배의 처소가 없어 성도들 가정에서 함께 모아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이는 유대교에 비하면 훨씬 초라하지요. 그러나 교회만은 그 안에 유대인들도 예배에 참여하였고 이방인들도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라운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화평이 되어주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헐어 버리셨습니다.
15절 말씀도 보십시오. 이번에는 ‘법조문으로 된 율법의 계명’이 등장하지요. 구약의 율법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율법의 계명도 모두 폐해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15절 뒷부분이지요. “이는 이 둘로 –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하는 거예요 –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화평하게 하시고” 17절 말씀도 보십시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 – 곧 이방인을 말합니다 – 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 유대인을 말합니다 –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인에게도 전하시고 이방인에게도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이 놀라운 화해의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유대교는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도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멋진 두루마리에 쓰인 구약의 율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함과 웅장함이 결국은 사람의 자랑거리가 되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분열의 요소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유대교처럼 화려한 성전도 없고, 당시로서는 기록된 신약성경도 없었고, 교회의 예배형식도 초라했던 에베소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있어서,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갈등과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삶을 분명히 변화시킵니다. 지금 당장은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교회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데, 그 대표적인 변화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 안에서 서로 화해하는 화목이지요.
Move Three. 부흥의 복음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구약 시대 수천 년 동안 결코 해결되지 않았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과 분열의 역사는, 비로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서로 화해하고 화목을 이루는 위대한 역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목의 역사는 교회의 참된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1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이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건물의 모든 자재들이 함께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는 본문 21절의 동사가 두 개로 등장하지요. 첫째로 서로 연결하여, 두 번째로 성전이 되어 가고. 이렇게 두 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을 헬라어성경으로 보면 누락된 하나의 동사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본문 21절에 등장하는 동사가 모두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연결되고, 둘째로 자라서, 셋째로 성전이 되어갑니다. 여기에서 ‘자란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부흥”이 됩니다.
자, 성도 개인이 그 믿음이 자랍니다.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모습과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신앙이 성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개인의 부흥이지요.
나아가, 우리 가정의 믿음도 자랍니다. 성장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의 자녀들이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식구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믿음의 가정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정의 부흥이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갈등과 분열이 사라지고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니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교회의 부흥이지요. 이 멋진 부흥의 모습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 22절이 이렇게 묘사하는데요. 우리 자막을 통해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절) 아멘.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곁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분들을 잠시 둘러보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그분들이 어떠한 분들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그대로, 성령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분들, 성령 안에서 함께 신앙이 성숙해 가는 분들, 성령 안에서 함께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분들이지요. 물론 단점도 보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단점은 있잖아요. 물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잖아요.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니, 우리의 믿음은 성장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교회는 하나 되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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