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2023. 8. 2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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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왜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며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지만, 오늘 저는 이렇게 대답해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 곧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입니다. 이 두 가지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셔서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간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기와 물과 햇빛을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큰 재물을 얻게 하시고, 세상적인 명성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반 은총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구별 없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반면, 특별 은총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영혼의 구원이겠지요.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 등은 모두 신자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곧 특별 은총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교회라는 범위를 넘어 온 세상을 통치하시지요. 하나님은 교회의 영역을 뛰어넘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실 수도 있고 어느 개인에게 건강과 풍요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은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베풀기 원하시는 특별한 은총 - 곧 영혼의 구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의 기쁨,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풍성한 행복 – 은 지금도 우리가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이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에베소서는 성경전체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대한 정의가 등장하는 성경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마지막 절이 교회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엡 1:23).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정의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을 찬양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3절)

여기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늘의 축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가 바로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의 축복 One. “하나님의 선택” (4-6절)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4절) 

본문 4절 말씀에서 ‘선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네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지요. 표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내용이 본문 5절에도 반복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5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지요. 영국 복음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선언합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인생을 믿음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여 성도가 되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의지나 결단에 좌우된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믿음의 길에서 탈선하여 하늘의 신령한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의지와 나의 결단은 너무도 쉽게 변하기 때문이지요.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의지력이 강하고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기에 믿음의 시련과 유혹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는 위선자이거나 자신의 참모습을 전혀 알지 못하여 그 마음이 교만해진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폭로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마지막까지 신앙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복음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는 무수히 하나님의 손을 놓쳐버린다 해도, 세상의 유혹에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고 우리의 믿음이 수없이 흔들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손을 붙잡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부터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하늘의 축복 Two. “예수님의 속량” (7-12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첫번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주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이지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두 번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로 성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예수님의 속량’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7절) 

창세 전, 곧 세상을 창조하시기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하늘의 축복이었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예수님은 하늘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며 우리에게 속량, 곧 죄 용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 인간들이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우리가 살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운명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죄인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심판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의지도, 그러한 능력도, 그러한 가능성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선언 그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 3:23). 

바로 이때,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량, 곧 죄 용서의 은혜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속량의 사건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심으로 우리의 잘못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상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온전한 치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속량 곧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하늘의 축복 Three. “성령님의 보증” (13-14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속량, 곧 죄 용서의 위대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오늘도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우리의 마음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유혹도 많고 고통과 슬픔도 넘쳐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보증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13-14a절) 

본문 13절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인’은 도장을 말하지요. 중요한 문서나 계약서에 그 내용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도장을 찍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도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도장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정하여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도장,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모든 죄가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도장입니다. 본문 14절은 이것이 그 무엇으로도 의심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 된다고 말씀하시네요. 

여러분,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이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나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지금 당장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며 살아간다고 세상적인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서운 질병이 찾아올 수 있고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며 이 세상의 온갖 슬픔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인치심, 곧 성령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너는 천국의 시민이라고, 너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분명히 보장해 주시는 성령의 도장이 있잖아요. 지금도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가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장해 주시니, 우리는 어떠한 현실을 마주치든 바로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찬송하리로다”(3절) 바울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설명한 뒤에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6절 말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허락하신 예수님의 속량을 선포한 뒤에도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의 12절,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성령님의 보증을 말씀한 뒤에도 사도 바울의 입술에는 찬양이 터져나옵니다. 본문의 마지막 14절이지요.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아니 이 세상은 알 수도 없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오직 교회를 통해 베푸시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장소 역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힘겹고 고단할수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는 이 교회, 우리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바로 이 교회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근심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찬송가 438장 1절) 

바로 이 교회에서 하늘의 축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며 날마다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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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22. 9. 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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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성도의 삶에 대해 여러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성도에 대한 비유는 전쟁터의 한 복판에 있는 군인입니다. 한마디로, 성도의 삶은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전투와 싸움이라는 이미지에는 상대와 적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요. 그러면 성도들이 대적해야 하는 영적 전투의 상대는 누구일까요? 본문 11절에 분명하게 등장하네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본문 12절은 성도들이 대적해야 할 대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2절) 

오늘 본문은 성도들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를 혈과 육에 대한 싸움으로 적용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혈과 육을 대상으로 한 싸움 자체가 기독교의 복음으로부터 벗어난 행동이라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여러분을 너무도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나 믿음을 공격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여러분이 대적해야 하는 영적 전투의 대상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적은 악한 영적 존재이지 눈에 보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존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찌 어색해 보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와 같은 경향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어떤 분들은 사단이나 마귀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부적절한 자세입니다. 사단은 분명히 존재하며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을 넘어트릴 계략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의 세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가까이에 있으니,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한편, 마귀나 사단과 같은 영적 세계에 대한 지나친 관심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적절한 태도입니다. 그들이 성도들을 넘어트리기 위해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관심과 두려움은 성도의 삶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마귀와 사단의 존재를 깊이 파헤치는 본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가르치는 승리의 길은 악한 영적 존재를 깊이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 그러나 전투하는 교회

오늘 본문은 성도들의 삶이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다 균형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묘사하는 성도의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신령한 복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3) 

가장 먼저 “모든 신령한 복”을 선포한 바울은 성도들이 누리는 하늘의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에베소서 전체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니님의 은혜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구속하여 주셨고, 지금도 성도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의 삶에도 불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 이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는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회인지 묘사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에베소서1장 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23)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충만이란 마른 수건을 짜내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지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그리하여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것이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의 말씀을 종합하면, 성도들 개인에게는 하늘의 복이 풍성합니다. 나아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이 가득합니다. 이처럼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규모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지요. 교회의 재정이 풍부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 프로그램을 성도들에게 제공할 수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예배하는 일도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겉모습과 상관없이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이미 성도 개인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복이 가득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이 흘러 넘친다면 왜 우리는 또다시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이라는 분의 명언을 하나 인용해보겠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천국에 기쁨의 종이 울리고, 동시에 지옥에는 비상벨이 울린다.”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 천국에는 기쁨의 종이 울리지만 지옥에는 비상벨이 울립니다. 그러니 악한 영적 존재는 성도들과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맹렬히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은총을 아직 받지 못하여서 나의 삶에 영적 전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의 은총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우리는 전투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고 우리는 더욱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전신갑주를 취하라
 
사도 바울은 하늘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이 흘러 넘치는 교회에게 이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3절) 

이 구절에서 “악한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의 세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지금을 ‘악한 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악한 날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삶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이후의 날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하나님의 누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무장을 해제할 때가 아니라 전신갑주로 무장할 때입니다. 사단이 반드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그 은혜를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십시오. 여러분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영적 전투의 한 복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영적 전투를 위해 무장하는 방법에 대해 본문은 ‘전신갑주’로 대답합니다. 전신갑주로 번역된 헬라어 ‘파노플리아’는 ‘전체’를 뜻하는 ‘판’과 ‘무기들’을 뜻하는 ‘호플라’가 합쳐진 말입니다. 모든 무기를 한 몸에 갖춘 상태, 곧 한 두 개의 무기가 아니라 온 몸에 중무장한 모습을 말합니다. 로마 시대에 여러 종류의 군인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중무장 보병이 전신갑주를 취하였습니다. 만일 어느 군인이 적군을 만났는데 투구는 쓰고 있으면서도 방패는 취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방패는 가지고 있는데 칼이 없다면 어떻게 상대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무기 가운데 한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신갑주를 취한 중무장 보병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신갑주라는 이미지는 우리 성도들이 취해야 하는 영적 무장이 한두 가지가 아닌 다방면의 무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성도님들 중에는 예배 출석은 잘하면서 개인 경건의 시간이 약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사단은 어김없이 그들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지요. 또 어떤 분들은 개인의 경건생활은 잘하는데 인간관계가 어려운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사단은 그러한 분들의 인간관계를 공격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모든 면에 모범이 되는 것 같은데, 자녀 문제만 나오면 약해지는 분들이 계시지요? 사단은 이번에 어디를 공격할까요? 당연히 가장 약한 그 부분을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성숙이요, 성실성입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계속해서 메우고 보충하려는 노력과 자세가 영적 전신갑주입니다. 

전신갑주의 또 다른 특징은 속전속결을 위한 무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신갑주는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상대를 물리치기 위한 무기도 아닙니다. 속전속결이나 상대의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침투를 위해서는 중무장보다는 가벼우면서도 효율적인 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이 묘사하는 전신갑주는 수동적인 방어자세에 가깝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믿음의 방패”가 등장하지요. 로마 군인들이 쓰는 방패 중에는 작고 둥근 방패가 있었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방패는 문짝같이 생긴 큰 방패입니다. 라틴어로 스쿠툼(scutum)이라고 부르는데, 스쿠툼은 여러 겹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것으로, 전투 전에 물을 흠뻑 적셔 두면 불화살이 꽂히더라도 금방 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본문 17절에 등장하는 “성령의 검”은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짧은 칼을 의미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긴 칼이나 창을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긴 칼이나 창은 멀리 있는 상대를 격파하는 강력한 공격용 무기였지요.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짧은 칼은 상대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칼로,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동시에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바울이 이야기하는 전신갑주는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공격용 무기라기보다는 적군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방어용 무기에 가깝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적 싸움도 한번의 거대한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복음의 은혜를 앗아가려는 악한 세력의 지속적인 공격을 신실하게 방어하는 싸움입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요, 세상의 풍파에 잠시 흔들리더라도 나 자신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붙잡는 싸움이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은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재물을 빼앗길 수 있고, 건강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싸우며 지켜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영적 은혜와 축복,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을 동여매십시오.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하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그 특권을 결코 빼앗기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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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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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적고 있을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사정은 어때요? 평안한가요? 만사 형통인가요?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정이라는 것이 뻔해요.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리면, 그 소식이 교회 성도들의 위로가 될 거라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겠습니까? 바울이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겠어요? 그런 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나,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고 있으나 그 안에서도 에베소교회를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과 얼마나 깊이 만나고 있는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지면, 그것이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위로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평안한 일만 있겠어요. 신앙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삶 가운데 힘이 들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잖아요. 그러한 간증이 우리 교회에 풍성하고, 그 간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기고 –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에베소에 보내죠. 그의 이름이 바로 두기고입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6:21-22)

 

저는 사도 바울에게, 그리고 에베소교회 안에 두기고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죠.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 그렇다면 두기고가 사랑을 받는 형제이며,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삶이나 그분의 사역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두기고가 교회에서 말을 전하면 그 말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고, 얼마나 언어에 절제가 있었는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두기고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에, 저 두기고가 사도 바울 자신의 상황을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면 그것이 나쁜 소문으로 돌아가거나 바울에 대한, 교회에 대한 염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왜 이리도 소문이 빠른지요. 소문이 빠를 뿐만 아니라 소문이 돌면서 없던 사실이 마구 덧붙여지죠. 교회 안에는 언제나 마음에 큰 고민이 있는 사람들, 몸이 아파 고생하는 사람들, 인간 관계로 말미암아 속상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교회 안에서는 나누어지고 서로 기도해주거든요.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은 누군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여과 없이 퍼트려요.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확대되면서 그 당사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두기고와 같은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요, 원래부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상황에 관심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위해 걱정해주고 기도해주는 공동체가 교회잖아요. 그렇다 보니 한 순간 말을 잘못 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소문으로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에베소교회에는 두기고와 같은 ‘사랑을 받고,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상황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 그러한 직분자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울 – 교회를 위한 기도의 사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6:23-24)

 

어떤 분들은 바울의 서신에 언제나 이와 비슷한 축복의 문장이 등장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정해진 형식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마지막 인사말을 대동소이한 축복의 말로 마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의 진심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한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어요.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열심과 열정이 그 정도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에베소교회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진심이 이 마지막 인사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설교를 마치며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로서 ‘교회를 위한 기도’ 시리즈 설교는 마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개인은 우리 교회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 없이 기도하는 기도의 일꾼들이 되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 없이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에베소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원하였던 사도 바울의 바로 그 마음으로,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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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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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에게 언젠가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일반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죠. “만약 저에게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1]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 M. 바운즈는 자신의 책, 『기도의 능력』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기계나 더 좋은 기계도 아니요, 새로운 조직도 아니요, 기발한 방법도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즉 기도의 사람, 기도에 능한 사람이다. 성령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기계에 임하지 않고 사람에게 임하신다. 성령은 계획에 기름을 붓지 않고, 사람에게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2]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곧 에베소서의 마지막 권면의 말을 적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하라’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권면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까? ‘항상’,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는 점입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 혹은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 기도에 집중하였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기도 생활이 나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사실, 우리의 삶에 집중적으로 기도가 필요한 시기가 있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문제를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실 때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고,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기도의 생활이 슬럼프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영적으로 슬럼프에 빠져계시면 그때 더욱 기도해야 하고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지려 할 때 기도의 줄만큼은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하지 않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어 사단은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 순간 뜨겁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뭐지요? 지속적으로 기도에 힘 쓴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습니까? 아니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어쩌면, 한 순간 내 인생에 큰 어려움이 찾아올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의 삶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나, 나의 삶이 평안할 때나 상관 없이 지속적으로 기도 생활에 힘쓰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개인이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의지력을 가진 사람으로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런데 교회 안에는 지속적인 기도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에 기도의 불이 지펴지면 항상, 그리고 깨어 기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왜 교회 안에 다양한 기도의 모임이 있어요? 왜 교회는 모든 모임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칩니까? 그 이유는 단순해요. 교회에는 언제나 정기적인 기도 모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언제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편안하게 교회를 찾을 수가 있잖아요.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성도 개개인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물론 교회에 속한 성도들 개개인이 기도에 능한 사람들이 된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고, 기도에 능한 교회가 된다는 의미는 우리 교회 안에 다양한 기도의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서 뜨거운 기도의 열기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지, 곧 기도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 지를 설명합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어느 목사님께서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참으로 진솔한 고백을 하신 적이 있어요. 교회에서 새벽기도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남아서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은 새벽기도가 끝나고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에 더 많이 기도하고 싶고, 더 깊이 있게 기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더라는 거에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개인이 오랜 시간을 갖고 깊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진솔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목사님께서 새벽 시간에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기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간구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하나 찾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새벽기도가 끝나면 성경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찬송가를 다시 펴는 것도 아니고, 바로 교회 수첩을 꺼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역별로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거에요. 교회 수첩을 보고 기도하다 보니, 오늘 기도해야 할 목록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더랍니다. 시간만 빨리 지나는 게 아니라 기도의 깊이가 더해지더라는 겁니다. ,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의 능력입니다.

 

 

목회자를 위한 기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으로는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를 말씀하셨죠. 그리고 중보기도의 중요한 대상으로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6:19-20)

 

바울의 이름 앞에는 하나의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그 호칭은 바로 ‘사도’라는 것이죠. 사도는 예수님의 사역과 그 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부족하지 않은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에 능통하였고, 로마의 시민으로서 로마의 통치권이 유효한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그의 편지를 보면 그의 언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도 받았고, 그 개인에게 충분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중요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의 지속적인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저 역시 여러분에게 동일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신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고,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1] 이한진 편역, 『열매 맺는 기도』 (서울: 겨자씨, 2006), p. 13.

[2] E.M.바운즈, 이정윤 역, 『기도의 능력』 (서울: 생명의말씀사),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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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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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주인은 한 가족

 

우리는 흔히 가족을 이야기할 때, 혈연에 의한 관계를 주로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렇지요. 그리고 형제와 자매가 혈연에 의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있어요. 지금 바울은 아름다운 가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속한 크리스천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 관계가 중요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주인과 종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에 종은 재산이지 식구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달랐어요. 성경의 관점은 다릅니다. 자신의 집에 있는 종과 아름다운 가족의 관계를 만들 수 있어야, 비로서 그 가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족이 되는 비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1-4)

 

바울은 먼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정확하게 보시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했기 때문도 아니죠. 그럼 무엇입니까? 크리스천 가정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죠.

 

부모에 대한 말씀도 보십시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들을 무엇으로 가르쳐야 합니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주님의 교훈과 주님의 훈계를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모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그 경외하는 모습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6:5-9)

 

바울은 종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여기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어요. 누구든지 자신이 행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평가하신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종으로서, 그리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상전들에게도 명령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그리고 그 이유가 등장하죠.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주인이든 종이든 상관 없이 예수님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든, 주인이든 누구를 경외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아름다운 종과 주인의 관계가 형성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혈연으로만 맺어진 가정관에서 벗어나, 남한과 북한이 한 형제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집 식구들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 한 가족 된 이들을 가족의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했던 것과 같이, 악을 행하고 손해를 끼쳤을 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한 가족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가정에 대한 개념을 확대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 역시 가정에 대한 바울의 대원칙, 곧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시는 주님을 기억할 때,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여 행동할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가득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을 가족의 사랑으로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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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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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 바울은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르러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결코 에베소서 전체에 흐르는 교회라는 주제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에베소교회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가정이 먼저 건전하게 새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많은 가정 사역자들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의 순서가 아내의 역할을 먼저 언급하고 남편의 역할을 이후에 언급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저는 몇몇 가정사역자들의 이러한 해석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관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21)

 

21절 말씀에서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첫째는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피차’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역할이 복종이고, 남편의 역할이 사랑이라는 구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사랑하며 복종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사랑하며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부부의 관계에요.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는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피차 복종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주님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는 피차 복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5:22-23)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죠. 그런데 23절 마지막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남편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남편의 한계를 분명하게 정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크리스천의 구세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며, 한 가정의 가장이 되십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호 복종의 관계가 가능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한 가정의 주인, 한 가정의 구세주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에요. 그러므로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고,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ㅇ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 우리 가정 안에 서로 복종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25-27)

 

바울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부들에게 요구하는 피차 복종과 피차 사랑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서로 복종해야 하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그리하여 자신의 내어 주시듯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남편에게 그리스도와 같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거나, 아내에게 남편을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가정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가정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남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됨의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담겨 있다.

 

부부를 위한 바울의 권면은 서로 복종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적인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바울은 부부 관계의 중요한 비밀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5:28-33)

 

사도 바울은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이 하나됨의 관계가 얼마나 신비한지, 그것이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이 하나됨의 비밀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위대한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하나됨의 비밀을 숨겨놓았습니다. 그 비밀이 얼마나 큰 지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제 아무리 머리로 정확히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제 아무리 논리적인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한다 할지라도 이 비밀의 깊이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욱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의 비밀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숨겨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지금까지 바울은 남편과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는 이 비밀은 매우 크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자신 있게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하나됨의 비밀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비밀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이야 말로 부부 사이의 하나됨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종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의 비밀을 깨닫고, 그 하나됨의 비밀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속한 가정에서도 부부가 하나되고, 식구들이 하나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The Calvin’s Commentary, Ephesians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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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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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b).

 

여러분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가정 가정이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공동체적(교회, 가정) 차원

 

저는 먼저 성령 충만에 대해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성령 충만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령의 충만은 개인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7분의 집사님을 선출하는 과정이 나오지요. 바로 그때 교회는 집사님으로 선출할 사람의 조건을 어떻게 정하였습니까? 가장 첫 번째 조건이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요 초대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성령에 더욱 민감하고, 성령이 더욱 충만한 분들이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있어서,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어떤 분들은 성령이 충만한데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 충만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께서 초대교회에 강력하게 임하시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120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어요. 그 자리에 함께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됩니다. 다시 말씀 드려 성령의 충만함이 교회 차원으로도 임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뒤, 온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인데요.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을 받는 등 교회가 핍박을 받으니 성도들이 진심으로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을 주시는데,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물론 그 자리에 있는 개개인, 각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시죠. 그러나 성령 충만이 단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져서,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루더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충만이 교회 차원에서 임했던 장면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령의 충만함이 가정의 차원에서 임하는 장면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를 초청하지요.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시며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사람을 욥바로 보낸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는 동안 자신의 모든 친척과 주변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 장면을 또한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고넬료는 자신의 가정에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모든 식구들, 모든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함께 초대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개인의 성령 충만함을 소원하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여러분의 가정에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식구들 전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그 놀라운 장면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각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 가정마다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교회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5-17)

 

바울은 지혜가 없는 자와 지혜로운 자를 구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알기에,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지혜로운 선택이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흔히 오해하는 바와 같이, 순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아낀다’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구원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지만, 크리스천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의 시간을 구원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크리스천 된 우리가 성경의 명령과 같이 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고, 교회를 출석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까? 예수님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시간이 흘러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니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던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성령 충만으로부터 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라고도 말씀하죠.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크리스천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찬양의 말이 크리스천의 입술에서 떠나면 안 되요. 그런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드리고’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답하며’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할 때 예배가 살아나고, 찬양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가득하고 그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에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예배 안에서 서로 마음이 나누어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바로 그 모습, 바로 그 모습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서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예배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여,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성도들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그러한 교회, 그러한 성령 충만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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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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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어느 조직이든, 혹은 어느 종교든 그 모임이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롤 모델(role model)이 필수적입니다.

기독교가 매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과 비슷하게, 불교 역시 매년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지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 곧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나의 주인이 탄생하신 날이기에 기념하고 또 기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나 혹은 이슬람과 같은 유일신에 대한 개념이 없지요. 불교에서 석가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듯, 불교도 석가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 있어서 롤 모델입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그들이 지속적으로 본받으려는 어떤 모델이 있어야 그 모델을 중심으로 그 종교가 하나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이르러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다운 삶을 강조하지요. 예전의 이방인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에 이르러 바울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원리 하나를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5:1-2)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본받고 따르라고 제시되는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만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세상을 닮으라고, 세상의 가치관을 본받으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지적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5:3-7)

 

우리에게 본을 받으라고 보여주는 모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분의 은자 하심, 그분의 그 깊은 사랑,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갈 수 있다면, 그분만 닮아갈 수 있다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유혹의 손길이 교회 안에 존재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에베소교회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너희를 유혹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빛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세상이 보여주는 가치관, 세상이 보여주는 삶의 모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관과 삶의 모델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넘어, 이제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천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5:8-13)

 

우리 크리스천은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아름다운 행동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책망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세상의 어두운 세력이 더욱 강력할수록, 여러분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교회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빛이 이 땅에 비췰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 자는 자여 일어나라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저는 두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크리스천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모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어두움을 책망하는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 두 가지를 강조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5:14)

 

여기서 ‘잠자는 자’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먼저는 에베소교회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와 우리 교회를 의미하죠. 그러면 ‘죽은 자들’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바로 세상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과 잠자는 사람은 외관상 비슷합니다.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에 세상 속에서 더러움과 방탕과 탐욕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에 비슷해요. 그러나 여러분, 겉보기가 비슷하다고 모든 것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비록 빛의 자녀와 같이 살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잠 자는 사람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지 못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는 죽은 자들이 아니라 잠자는 자들입니다. 언제라도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잠자고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잠자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잠자고 있는 것이지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을 간직했으며, 그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잠자던 교회가 깨어날 것입니다. 잠자던 교회가 일어나 하나님의 빛을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비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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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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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지난번 본문에 대한 적용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방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거센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방인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곧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적용입니다.

 

우리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우리 가운데 말씀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나의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의 구체적인 삶(윤리)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4:25-29)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언어의 문제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이죠.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의 언어를 통해 교회에서 은혜가 되고, 덕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장 많이 상처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월급을 적게 주어서인가요? 아닙니다. 교회에서 너무도 많은 일을 시켰기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교회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죠. ‘언어’에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하는 말을 들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죄하는 ‘언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언어가 세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두 번째로 분노의 문제를 다룹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매우 깊이 묵상한 나머지, 분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다만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마땅히 버려야 할 것들을 나열하면서 ‘악독’ 다음에 ‘노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30) 분노는 버려야 할 덕목입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면, 그날 저녁까지 지속적으로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저녁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향한 분한 마음을 품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7)라고 말씀합니다. 마귀가 틈을 타서 교회를 공격하고, 가정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라는 말씀이지요? 바로, ‘분노’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그 누구도 교회에서 화를 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성도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분노가 생기고, 화가 나기 시작하면 마귀는 바로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 교회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도둑질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도록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행위가 과거 이방인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은 단지 도둑질을 멈추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번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을 벗어 새로운 사람으로 옷 입었다면 그 증거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에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을 벗어 새로운 사람으로 옷 입었다면 그 증거는 무엇이 될까요? 자신의 탐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에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의 말이 변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언어에 거짓이 사라지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힘을 주는 언어가 우리의 입술에 있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나의 성품이 변하여 분노를 다스리는 성품이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잘못된 관행이 있었다면 변화되어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에 가득히 나타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윤리의 근거 –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30-32)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빚어질 때 기뻐하시고,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할 때 슬퍼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 근거를 소개하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의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고, 우리의 품성이 달라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것은 우리 개인의 열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믿게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지금도 계속해서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더욱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조금씩 또 조금씩 빚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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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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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귀소본능

 

거의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소위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귀소본능이란 동물이 자신의 서식지나 산란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가도 다시금 자신의 서식지나 산란 장소로 돌아오는 성질을 말하지요. 개는 아무리 먼 길을 떠나도 그 집을 다시 찾아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둘기도 자신의 서식지에서 100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어는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동물들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때 우리는 사람들의 귀소본능을 보게 됩니다. 오랜 시간 외지에서 살던 분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귀소본능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그래서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는데, 지속적으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으라면 전 ‘데마’라는 사람을 꼽겠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데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4:10). 데마는 분명 사도 바울을 따랐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에게서 복음의 깊이를 교육받았을 거예요. 그러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의 곁에 있던 사람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과거의 자신이 빠져 살았던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에도 ‘귀소본능’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귀소’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을 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집중하고 예수님께 붙어 있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은 과거로 회귀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아직은 악이 횡횡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세상의 탐욕과 술수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본성은 지속적으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4:17)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과거에 예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던 이방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잖아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신앙의 귀소본능, 곧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의 휘귀본능이 없나요? 세상은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세상은 물질이 하나님이고, 욕망이 하나님이고, 쾌락이 하나님이지요.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에 근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세상의 유혹이 이처럼 강한데, 귀소본능은 또한 우리의 본성이에요. 우리가 주의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세상의 풍조대로 휩쓸리는 것이 우리의 본래적인 특성이라고요. 우리 교회를 비롯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협하는 강력한 사탄의 무기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신앙의 회귀본능입니다.

 

성도는 신분상 새사람이지만 

실존적으로 옛사람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

 

에베소교회가 신앙의 ‘귀소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세지자, 바울은 이방인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간곡히, 간곡히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모습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의 모습이 얼마나 확연히 다른 것인지를 오늘 본문 전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크리스천

목표

목표상실(허망함, 17)

진리(21)

분별력

총명이 어두워짐(18)

그리스도에게 듣고 배움(21)

행위

방탕, 욕심대로 행함(19)

의와 진리의 거룩함(24)

Basic Source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남(18)

하나님을 따라(24)

 

왜 사도 바울이 이방인과 크리스천의 차이를 이렇게 자세히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우리의 신분에 합당하지 않게, 곧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크리스천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종과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모습과 크리스천의 모습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제발 너희 신분, 곧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에 맞게 행동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았던 때를 기억하라

 

바울이 예수님을 믿어 이방인에서 크리스천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마치 옷을 갈아입는 장면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22, 24)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옷을 벗고 옷을 입는 것은 세례의식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이에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21)

 

여기서 ‘듣고’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는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의 세례 교육은 우리 시대의 교육과 전혀 달랐거든요. 그들은 최소한 40일을 교육받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사순절 기간은 초대교회에서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교육을 받았던 기간입니다. 바울은 지금 세례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신앙의 귀소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의 옛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세례 받았을 때를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된 사건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세례를 한 번만 받아요.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그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인류 역사상 단 한 차례만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하며 묵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면서 우리는 신앙의 귀소본능을 이길 수가 있는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세례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맞게 우리의 삶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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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