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2016. 3. 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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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적고 있을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사정은 어때요? 평안한가요? 만사 형통인가요?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정이라는 것이 뻔해요.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리면, 그 소식이 교회 성도들의 위로가 될 거라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겠습니까? 바울이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겠어요? 그런 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나,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고 있으나 그 안에서도 에베소교회를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과 얼마나 깊이 만나고 있는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지면, 그것이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위로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평안한 일만 있겠어요. 신앙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삶 가운데 힘이 들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잖아요. 그러한 간증이 우리 교회에 풍성하고, 그 간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기고 –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에베소에 보내죠. 그의 이름이 바로 두기고입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6:21-22)

 

저는 사도 바울에게, 그리고 에베소교회 안에 두기고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죠.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 그렇다면 두기고가 사랑을 받는 형제이며,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삶이나 그분의 사역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두기고가 교회에서 말을 전하면 그 말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고, 얼마나 언어에 절제가 있었는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두기고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에, 저 두기고가 사도 바울 자신의 상황을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면 그것이 나쁜 소문으로 돌아가거나 바울에 대한, 교회에 대한 염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왜 이리도 소문이 빠른지요. 소문이 빠를 뿐만 아니라 소문이 돌면서 없던 사실이 마구 덧붙여지죠. 교회 안에는 언제나 마음에 큰 고민이 있는 사람들, 몸이 아파 고생하는 사람들, 인간 관계로 말미암아 속상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교회 안에서는 나누어지고 서로 기도해주거든요.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은 누군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여과 없이 퍼트려요.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확대되면서 그 당사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두기고와 같은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요, 원래부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상황에 관심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위해 걱정해주고 기도해주는 공동체가 교회잖아요. 그렇다 보니 한 순간 말을 잘못 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소문으로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에베소교회에는 두기고와 같은 ‘사랑을 받고,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상황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 그러한 직분자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울 – 교회를 위한 기도의 사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6:23-24)

 

어떤 분들은 바울의 서신에 언제나 이와 비슷한 축복의 문장이 등장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정해진 형식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마지막 인사말을 대동소이한 축복의 말로 마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의 진심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한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어요.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열심과 열정이 그 정도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에베소교회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진심이 이 마지막 인사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설교를 마치며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로서 ‘교회를 위한 기도’ 시리즈 설교는 마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개인은 우리 교회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 없이 기도하는 기도의 일꾼들이 되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 없이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에베소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원하였던 사도 바울의 바로 그 마음으로,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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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016. 3. 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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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에게 언젠가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일반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죠. “만약 저에게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1]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 M. 바운즈는 자신의 책, 『기도의 능력』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기계나 더 좋은 기계도 아니요, 새로운 조직도 아니요, 기발한 방법도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즉 기도의 사람, 기도에 능한 사람이다. 성령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기계에 임하지 않고 사람에게 임하신다. 성령은 계획에 기름을 붓지 않고, 사람에게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2]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곧 에베소서의 마지막 권면의 말을 적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하라’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권면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까? ‘항상’,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는 점입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 혹은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 기도에 집중하였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기도 생활이 나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사실, 우리의 삶에 집중적으로 기도가 필요한 시기가 있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문제를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실 때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고,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기도의 생활이 슬럼프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영적으로 슬럼프에 빠져계시면 그때 더욱 기도해야 하고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지려 할 때 기도의 줄만큼은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하지 않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어 사단은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 순간 뜨겁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뭐지요? 지속적으로 기도에 힘 쓴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습니까? 아니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어쩌면, 한 순간 내 인생에 큰 어려움이 찾아올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의 삶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나, 나의 삶이 평안할 때나 상관 없이 지속적으로 기도 생활에 힘쓰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개인이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의지력을 가진 사람으로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런데 교회 안에는 지속적인 기도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에 기도의 불이 지펴지면 항상, 그리고 깨어 기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왜 교회 안에 다양한 기도의 모임이 있어요? 왜 교회는 모든 모임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칩니까? 그 이유는 단순해요. 교회에는 언제나 정기적인 기도 모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언제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편안하게 교회를 찾을 수가 있잖아요.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성도 개개인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물론 교회에 속한 성도들 개개인이 기도에 능한 사람들이 된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고, 기도에 능한 교회가 된다는 의미는 우리 교회 안에 다양한 기도의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서 뜨거운 기도의 열기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지, 곧 기도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 지를 설명합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어느 목사님께서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참으로 진솔한 고백을 하신 적이 있어요. 교회에서 새벽기도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남아서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은 새벽기도가 끝나고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에 더 많이 기도하고 싶고, 더 깊이 있게 기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더라는 거에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개인이 오랜 시간을 갖고 깊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진솔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목사님께서 새벽 시간에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기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간구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하나 찾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새벽기도가 끝나면 성경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찬송가를 다시 펴는 것도 아니고, 바로 교회 수첩을 꺼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역별로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거에요. 교회 수첩을 보고 기도하다 보니, 오늘 기도해야 할 목록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더랍니다. 시간만 빨리 지나는 게 아니라 기도의 깊이가 더해지더라는 겁니다. ,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의 능력입니다.

 

 

목회자를 위한 기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으로는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를 말씀하셨죠. 그리고 중보기도의 중요한 대상으로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6:19-20)

 

바울의 이름 앞에는 하나의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그 호칭은 바로 ‘사도’라는 것이죠. 사도는 예수님의 사역과 그 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부족하지 않은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에 능통하였고, 로마의 시민으로서 로마의 통치권이 유효한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그의 편지를 보면 그의 언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도 받았고, 그 개인에게 충분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중요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의 지속적인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저 역시 여러분에게 동일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신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고,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1] 이한진 편역, 『열매 맺는 기도』 (서울: 겨자씨, 2006), p. 13.

[2] E.M.바운즈, 이정윤 역, 『기도의 능력』 (서울: 생명의말씀사),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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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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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016. 3. 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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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주인은 한 가족

 

우리는 흔히 가족을 이야기할 때, 혈연에 의한 관계를 주로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렇지요. 그리고 형제와 자매가 혈연에 의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있어요. 지금 바울은 아름다운 가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속한 크리스천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 관계가 중요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주인과 종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에 종은 재산이지 식구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달랐어요. 성경의 관점은 다릅니다. 자신의 집에 있는 종과 아름다운 가족의 관계를 만들 수 있어야, 비로서 그 가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족이 되는 비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1-4)

 

바울은 먼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정확하게 보시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했기 때문도 아니죠. 그럼 무엇입니까? 크리스천 가정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죠.

 

부모에 대한 말씀도 보십시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들을 무엇으로 가르쳐야 합니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주님의 교훈과 주님의 훈계를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모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그 경외하는 모습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6:5-9)

 

바울은 종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여기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어요. 누구든지 자신이 행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평가하신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종으로서, 그리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상전들에게도 명령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그리고 그 이유가 등장하죠.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주인이든 종이든 상관 없이 예수님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든, 주인이든 누구를 경외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아름다운 종과 주인의 관계가 형성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혈연으로만 맺어진 가정관에서 벗어나, 남한과 북한이 한 형제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집 식구들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 한 가족 된 이들을 가족의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했던 것과 같이, 악을 행하고 손해를 끼쳤을 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한 가족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가정에 대한 개념을 확대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 역시 가정에 대한 바울의 대원칙, 곧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시는 주님을 기억할 때,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여 행동할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가득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을 가족의 사랑으로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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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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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016. 3. 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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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 바울은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르러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결코 에베소서 전체에 흐르는 교회라는 주제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에베소교회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가정이 먼저 건전하게 새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많은 가정 사역자들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의 순서가 아내의 역할을 먼저 언급하고 남편의 역할을 이후에 언급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저는 몇몇 가정사역자들의 이러한 해석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관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21)

 

21절 말씀에서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첫째는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피차’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역할이 복종이고, 남편의 역할이 사랑이라는 구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사랑하며 복종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사랑하며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부부의 관계에요.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는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피차 복종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주님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는 피차 복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5:22-23)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죠. 그런데 23절 마지막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남편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남편의 한계를 분명하게 정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크리스천의 구세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며, 한 가정의 가장이 되십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호 복종의 관계가 가능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한 가정의 주인, 한 가정의 구세주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에요. 그러므로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고,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ㅇ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 우리 가정 안에 서로 복종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25-27)

 

바울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부들에게 요구하는 피차 복종과 피차 사랑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서로 복종해야 하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그리하여 자신의 내어 주시듯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남편에게 그리스도와 같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거나, 아내에게 남편을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가정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가정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남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됨의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담겨 있다.

 

부부를 위한 바울의 권면은 서로 복종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적인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바울은 부부 관계의 중요한 비밀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5:28-33)

 

사도 바울은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이 하나됨의 관계가 얼마나 신비한지, 그것이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이 하나됨의 비밀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위대한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하나됨의 비밀을 숨겨놓았습니다. 그 비밀이 얼마나 큰 지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제 아무리 머리로 정확히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제 아무리 논리적인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한다 할지라도 이 비밀의 깊이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욱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의 비밀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숨겨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지금까지 바울은 남편과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는 이 비밀은 매우 크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자신 있게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하나됨의 비밀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비밀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이야 말로 부부 사이의 하나됨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종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의 비밀을 깨닫고, 그 하나됨의 비밀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속한 가정에서도 부부가 하나되고, 식구들이 하나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The Calvin’s Commentary, Ephesians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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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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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016. 3. 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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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b).

 

여러분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가정 가정이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공동체적(교회, 가정) 차원

 

저는 먼저 성령 충만에 대해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성령 충만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령의 충만은 개인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7분의 집사님을 선출하는 과정이 나오지요. 바로 그때 교회는 집사님으로 선출할 사람의 조건을 어떻게 정하였습니까? 가장 첫 번째 조건이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요 초대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성령에 더욱 민감하고, 성령이 더욱 충만한 분들이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있어서,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어떤 분들은 성령이 충만한데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 충만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께서 초대교회에 강력하게 임하시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120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어요. 그 자리에 함께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됩니다. 다시 말씀 드려 성령의 충만함이 교회 차원으로도 임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뒤, 온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인데요.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을 받는 등 교회가 핍박을 받으니 성도들이 진심으로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을 주시는데,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물론 그 자리에 있는 개개인, 각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시죠. 그러나 성령 충만이 단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져서,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루더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충만이 교회 차원에서 임했던 장면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령의 충만함이 가정의 차원에서 임하는 장면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를 초청하지요.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시며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사람을 욥바로 보낸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는 동안 자신의 모든 친척과 주변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 장면을 또한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고넬료는 자신의 가정에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모든 식구들, 모든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함께 초대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개인의 성령 충만함을 소원하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여러분의 가정에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식구들 전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그 놀라운 장면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각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 가정마다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교회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5-17)

 

바울은 지혜가 없는 자와 지혜로운 자를 구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알기에,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지혜로운 선택이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흔히 오해하는 바와 같이, 순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아낀다’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구원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지만, 크리스천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의 시간을 구원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크리스천 된 우리가 성경의 명령과 같이 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고, 교회를 출석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까? 예수님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시간이 흘러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니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던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성령 충만으로부터 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라고도 말씀하죠.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크리스천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찬양의 말이 크리스천의 입술에서 떠나면 안 되요. 그런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드리고’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답하며’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할 때 예배가 살아나고, 찬양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가득하고 그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에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예배 안에서 서로 마음이 나누어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바로 그 모습, 바로 그 모습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서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예배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여,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성도들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그러한 교회, 그러한 성령 충만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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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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