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2022. 9. 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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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성도의 삶에 대해 여러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성도에 대한 비유는 전쟁터의 한 복판에 있는 군인입니다. 한마디로, 성도의 삶은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전투와 싸움이라는 이미지에는 상대와 적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요. 그러면 성도들이 대적해야 하는 영적 전투의 상대는 누구일까요? 본문 11절에 분명하게 등장하네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본문 12절은 성도들이 대적해야 할 대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2절) 

오늘 본문은 성도들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를 혈과 육에 대한 싸움으로 적용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혈과 육을 대상으로 한 싸움 자체가 기독교의 복음으로부터 벗어난 행동이라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여러분을 너무도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나 믿음을 공격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여러분이 대적해야 하는 영적 전투의 대상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적은 악한 영적 존재이지 눈에 보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영적인 존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찌 어색해 보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와 같은 경향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어떤 분들은 사단이나 마귀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부적절한 자세입니다. 사단은 분명히 존재하며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을 넘어트릴 계략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의 세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가까이에 있으니,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한편, 마귀나 사단과 같은 영적 세계에 대한 지나친 관심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적절한 태도입니다. 그들이 성도들을 넘어트리기 위해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관심과 두려움은 성도의 삶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마귀와 사단의 존재를 깊이 파헤치는 본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가르치는 승리의 길은 악한 영적 존재를 깊이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 그러나 전투하는 교회

오늘 본문은 성도들의 삶이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다 균형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묘사하는 성도의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신령한 복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3) 

가장 먼저 “모든 신령한 복”을 선포한 바울은 성도들이 누리는 하늘의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에베소서 전체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니님의 은혜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구속하여 주셨고, 지금도 성도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의 삶에도 불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 이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는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회인지 묘사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에베소서1장 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23)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충만이란 마른 수건을 짜내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지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그리하여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것이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의 말씀을 종합하면, 성도들 개인에게는 하늘의 복이 풍성합니다. 나아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이 가득합니다. 이처럼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규모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지요. 교회의 재정이 풍부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 프로그램을 성도들에게 제공할 수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예배하는 일도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겉모습과 상관없이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이미 성도 개인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복이 가득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이 흘러 넘친다면 왜 우리는 또다시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이라는 분의 명언을 하나 인용해보겠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천국에 기쁨의 종이 울리고, 동시에 지옥에는 비상벨이 울린다.”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 천국에는 기쁨의 종이 울리지만 지옥에는 비상벨이 울립니다. 그러니 악한 영적 존재는 성도들과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맹렬히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은총을 아직 받지 못하여서 나의 삶에 영적 전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의 은총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우리는 전투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고 우리는 더욱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전신갑주를 취하라
 
사도 바울은 하늘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이 흘러 넘치는 교회에게 이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3절) 

이 구절에서 “악한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의 세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지금을 ‘악한 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악한 날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삶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이후의 날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하나님의 누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무장을 해제할 때가 아니라 전신갑주로 무장할 때입니다. 사단이 반드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그 은혜를 빼앗기 위해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십시오. 여러분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영적 전투의 한 복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영적 전투를 위해 무장하는 방법에 대해 본문은 ‘전신갑주’로 대답합니다. 전신갑주로 번역된 헬라어 ‘파노플리아’는 ‘전체’를 뜻하는 ‘판’과 ‘무기들’을 뜻하는 ‘호플라’가 합쳐진 말입니다. 모든 무기를 한 몸에 갖춘 상태, 곧 한 두 개의 무기가 아니라 온 몸에 중무장한 모습을 말합니다. 로마 시대에 여러 종류의 군인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중무장 보병이 전신갑주를 취하였습니다. 만일 어느 군인이 적군을 만났는데 투구는 쓰고 있으면서도 방패는 취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방패는 가지고 있는데 칼이 없다면 어떻게 상대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무기 가운데 한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신갑주를 취한 중무장 보병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신갑주라는 이미지는 우리 성도들이 취해야 하는 영적 무장이 한두 가지가 아닌 다방면의 무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성도님들 중에는 예배 출석은 잘하면서 개인 경건의 시간이 약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사단은 어김없이 그들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지요. 또 어떤 분들은 개인의 경건생활은 잘하는데 인간관계가 어려운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사단은 그러한 분들의 인간관계를 공격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모든 면에 모범이 되는 것 같은데, 자녀 문제만 나오면 약해지는 분들이 계시지요? 사단은 이번에 어디를 공격할까요? 당연히 가장 약한 그 부분을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성숙이요, 성실성입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계속해서 메우고 보충하려는 노력과 자세가 영적 전신갑주입니다. 

전신갑주의 또 다른 특징은 속전속결을 위한 무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신갑주는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상대를 물리치기 위한 무기도 아닙니다. 속전속결이나 상대의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침투를 위해서는 중무장보다는 가벼우면서도 효율적인 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이 묘사하는 전신갑주는 수동적인 방어자세에 가깝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믿음의 방패”가 등장하지요. 로마 군인들이 쓰는 방패 중에는 작고 둥근 방패가 있었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방패는 문짝같이 생긴 큰 방패입니다. 라틴어로 스쿠툼(scutum)이라고 부르는데, 스쿠툼은 여러 겹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것으로, 전투 전에 물을 흠뻑 적셔 두면 불화살이 꽂히더라도 금방 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본문 17절에 등장하는 “성령의 검”은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짧은 칼을 의미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긴 칼이나 창을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긴 칼이나 창은 멀리 있는 상대를 격파하는 강력한 공격용 무기였지요.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짧은 칼은 상대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칼로,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동시에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바울이 이야기하는 전신갑주는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공격용 무기라기보다는 적군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방어용 무기에 가깝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적 싸움도 한번의 거대한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복음의 은혜를 앗아가려는 악한 세력의 지속적인 공격을 신실하게 방어하는 싸움입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요, 세상의 풍파에 잠시 흔들리더라도 나 자신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붙잡는 싸움이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은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재물을 빼앗길 수 있고, 건강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싸우며 지켜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영적 은혜와 축복,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을 동여매십시오.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하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그 특권을 결코 빼앗기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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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